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01:03:03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등장인물


1. 개요2. 군주/태자3. 관료(to내 인재)
3.1. 기원전 432~403 3.2. 기원전 402~3733.3. 기원전 372~3433.4. 기원전 342~3133.5. 기원전 312~283
4. 기타 인물
4.1. 중원계4.2. 요동/예맥/청구계4.3. 유목/북방계4.4. 강남계
5.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

1. 개요

◆는 현재(202스레)기준으로 사망 ◇는 은퇴

2. 군주/태자

군주의 능력치 중 100에 달하는 항목이 있을 경우 그에 관련한 부분에서 치세 동안 조선 자체가 보정을 받는 시스템이 있다. [1]
  • 조선 부족장 겸 초대 조선후 기부루[2] (AA:브로리)
    기원전 6세기 중반에 고대국가로서의 조선의 기틀을 닦은 인물. 기자의 전승 덕에 요동으로 오는 중원계의 대부분은 조선으로 온다는 점과 예맥계에서 마왕 취급 받던 기자를 조선은 그닥 꺼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마왕 취급 받는게 멋지다는 이유로(…) 이때부터 기씨를 자칭했다.
    추방되어서 조선으로 유입된 송나라 귀양자들을 통해 상나라의 예법과 기자의 존재를 전해들은 뒤 입막음을 위해 모두 처리하고 기자의 후손으로 자칭할 기반을 닦았고, 요동 일통 전쟁을 통해서 요동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의 시기에 본디 기자를 함께 제압한 부족들간의 화합의 상징이었던 청동 옥좌는 지배자의 상징이 된다.
  • 조선세후 기식[箕食](AA:쇼쿠호 미사키, 통/무/지/정/매: 65/63/100/84/94) ◆ 기원전 427년
    스타트 3인조 중 한명. 1대째 조선후. 즉 군주. 높은 지력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많은 혜택을 보았다. 중국으로 진입했을 때 기자의 후손이라는 자칭이 송나라에게 먹히면서 중원 국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 절정. 풍부한 인재풀을 바탕으로 연나라와 조나라를 병탄하고 조선을 요동반도의 일개 국가에서 중원의 강국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한 명군이자 효웅이라고 할 만하지만 자기 밑의 신하들을 막 갈궈대는 악덕상사의 기질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의 면모를 보인다. 게다가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충문군 문예마저 믿지 않는다고 태자에게 대놓고 말할 정도로 속이 배배꼬였다. 오죽하면 측근인 충문군마저 군주 앞에서 대놓고 '너님 폭군'이라고 대차게 깔 정도였고, 메타적으로 장부상에는 얼마가 동원이 가능하니 아무튼 동원을 하라는 막가파적인 짓도 제법 저질렀다. 하지만 스타팅 3인방인 고거와 문예, 그리고 딸인 기이는 말한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아꼈다.[3][4] 말년에 태자에게 군주의 인장을 억지로맡기며 충문군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 시호는 세(世). 어장 초반에 진행 방식이 아직 불안정했고 전개가 매우 빠른 것 때문에 기식 시절에서 기토 시절까지보다 기유부터 기설까지가 사건 밀도는 낮은데 연재 분량은 비슷하다 잊혀지는 경향이 있지만 현재까지 등장한 조선 왕 중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자기 치세에 중원국가 셋[5]을 멸망시키고 운이 따라주긴 했어도 외교나 첩보에서 대활약해 조선의 기반을 다진 정복왕이자 내정군주로서도 상타인 무시무시한 군주다. 이후 참치들의 괴멸적인 외교력으로 인해 기식 사후 외교전에서 골머리를 썩히는 걸 보면 얼마나 위대한 군주였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창업군주로서의 평가가 올라가는 중.
    그러나 동시에 이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그냥 책에 나오는대로 제도를 만들었다던가, 권력이 불안정해서 대사마와 대장군을 측근 한 사람한테 맡기다가 대장군부가 비대해졌다던가, 세후 당시 조선의 관제나 제도의 엉망진창이었던 점이 다시 조명되는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오면서 예전처럼 일방적인 찬양은 못 듣고 있는 중이다. [6]
  • 조선유후 기이[箕珥 or 箕苢](AA:IA, 통/무/지/정/매: 99/69/89/100/90) ◆ 기원전 408년
    2대째 조선후. 젊은 시절에 인질교환 차 위나라 안읍에서 지냈는데 워낙 스텟이 좋아[7] 위나라 상방 전문, 서하태수 오기, 업령 서문표[8]에게 경계를 살 정도였고 위무후는 되려 자기 자식과 비교하다 못해 질투할 정도. 그나마 우호적인 공숙좌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 때 같이 동문수학하던 사람이... 이후 양평으로 돌아와 조나라 정벌을 진두지휘했는데 당시 조나라 수도였던 진양을 수공으로 공략했던 지백의 일을 떠올리며 '무고한 희생이 없게 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거나 살아남은 조나라 공자 조어를 이용하여 반란분자를 색출하려던 어머니 기식에게 반대하는 등 여러모로 철혈군주라 할 수 있는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면모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식 사후 조선후를 계승해서 수도를 맥성으로 천도하는 등 외정보다는 내치에 주력하려고 했고, 170어장까지 쓰이는 삼공체제를 완성하고, 완형주의를 뿌리내렸고[9] 어머니 때 정복한 정복지들을 안정화시키는등 크게 성과를 보였지만[10] 주변정세가 급변하는 흐름및 프센징뇌 스레민들의 농간으로 인해 본의아니게 혈맹이었던 위나라를 배신하고 상당군을 접수하는 바람에 외교적 신용을 깎아먹고[11] 졸지에 위나라와 원수지간이 되면서 여러 모로 마음고생하다 기비가 위앵을 설득하였던 해를 넘기지 못하고 향년 59세로 사망하였으나, 본디 소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당군을 비롯해 딱히 아무런 일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의 선정을 베푼 것이 밝혀진다.[12] 시호는 유(裕).[13]
  • 조선정왕 기토[箕討][14](AA:알트리아 펜드래곤(Fate/Grand Order), 통/무/지/정/매: 99/81/92/77/100)◆ 기원전 383년
    3대의 조선후 그리고 1대 조선왕. 상당군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조선사람이면서 양놈말로 군을 지휘한다(...) 높은 매력을 바탕으로 조선후가 된 이후 주로 인재 등용에 전념하고 있다. 유목 출신 안문호에게 조선의 카칸으로 불리우고 태자가 국가예산에서 비상금을 살짝 차출했다는 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4일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두들기는 등 고생한다. 이후 어그로 관리(...)용으로 대초합종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임호 등의 유목민들을 몰아내고 기미부주를 설치해 북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요서도로 건설과 관제개혁, 도량형 통일 등 내정에 집중했다.
    기원전 328년 전인제가 주나라 왕에게 사과를 거부하고 모욕을 가할 때, 전인제의 편을 들어 전인제에게 뜻하는대로 행동하라고 말했다.[15] 이후 병든 몸으로 낙양에 가는등 무리를 해서 쓰러졌고, 얼마 못 가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기 전, 태자에게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어장 내외를 관통하는 유언을 남겼고, 이는 어쩌다 보니 장왕의 치세 그 자체를 상징하는 명언이 된다.[16] 시호는 정(靖)
  • 조선장왕 기유[箕悠](AA:나루카미 유우, 통/무/지/정/매: 83/71/90→93/93→99/86 )◆ 기원전 364년
    2대 조선왕[17]. 태자 시절에는 당시로써는 다소 무모한 계획인 장거리 항로 개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로부터 시도한다는 조건을 달긴 했어도 추진할 것을 피력하는 등의 호방함을 보인다. [18] 제후 전인제가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이유로 조선령이었던 패구를 내놓으라는 억지요구[19]에 그곳에 살던 백성과 물자를 모두 소개하고 땅만 준다는 계획을 수립한 장본인. 백성과 물자를 빼갔다는 사실을 알고 전인제가 따지자 '그곳에 살던 사람은 용담 출신의 예맥인이니 거기 출신 아님.'이란 이유로 전인제의 입을 다물게 하는 패기를 선보이기도 했다.[20] 물론 전인제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조선과의 상하관계 정리라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었기에 적당히 빠질 생각이기도 했지만 그 전인제를 상대로 뛰어난 임기응변을 선보였다. 이후 공손앙과 함께 화폐개혁을 시행하거나 진과 위를 중재하는 등 내외적으로 다양한 활약을 했었다.
    하지만 기토가 죽고 왕이 되어서 처음 시행한 외교인 칭왕회동에서 전인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송나라가 칭왕에 빠진 것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다가 열국의 국군들 앞에서 전인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치욕을 당하고 낭야의 지분을 몰수 당했다.[21] 그 뒤로 남은 재위 기간을 하간 개발과 위나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데 썼다.
    기원전 313년에 조선, 위, 초, 진의 합종군을 일으켜서 제나라를 공격해 제나라 국토의 절반을 정복하고, 이후 진나라의 왕위 계승에 개입해 조선에 인질로 와 있던 영탕을 왕위에 올렸다. 임종 직전에는 전인제를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해 선망했다는 사실을 기설과 곽외, 옥로의 앞에서 밝히고, 기설에게 옥로와 곽외를 곁에 두라는 말을 남겼다.[22] 그리고 그 후 얼마 안 가 향년 54세로 사망했다. 시호는 장(莊).
  • 조선소양태왕 기설[箕雪](AA::와이스 슈니, 통/무/지/정/매 12/58/90 > 100/89/75) 기원전 325년 ◆
    3번째 조선왕. 158어장 기준으로 현재의 조선왕이다. 기유의 첫째가 너무 병약하여 일찍 세상을 떴기에 후계자가 되었으나, 그녀 또한 조옹이 어디선가 구해온 900년근 산삼이 아니었다면 단명이 예견될 정도로 몸이 약했었다.[23] 때문에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미성년이고 능력을 입증하지 못 한 태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이다. 310년 시점에서는 조선상 조옹과 승상 비의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제나라를 반토막내 노른자땅을 죄다 얻은 여파가 아직도 잔존하던 시절에 즉위하여, 즉위 초에는 구 제나라령 및 제나라 방면의 일에 몸소 나서는 일이 많았다. 특히 조선의 신영토 관리에 최대한 차질을 주려는 제의 유격전 시도를 일단 완전히 일소한 곡부 대전의 성과로, 전후 협상의 결과 자기 부모 뻘이었던 제왕 전벽강의 공식적인 사죄를 받아내는 [24] [25] 바람에 국제적으로 본인 이미지를 단단히 각인시키고 안으로는 아버지 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설욕전의 종지부를 찍으며 화려한 친정 데뷔를 하였다.
    그와는 별도로 일단 아직도 배우는 단계이기에 때로는 가르침을 받고 때로는 국정에서 조금씩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여담으로 술을 처음 마셨는데 유명한 술고래인 조옹을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격침시킨 만주불침의 몸이라는듯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애지중지 키웠고, 10대 초반부터는 최강대국의 유일한 후계자, 10대 중반 이후로는 최강대국의 왕이였기에 상당히 아가씨스러운 면을 보이기도 한다. 성격이 온화한 편이였던 기토나 기이, 즉위 초창기에 전인제에게 크게 데여서 인내심을 기른 기유와는 다른 부분. 덕분에 조선은 (패권국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상당히 도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소진은 기설을 호전적인 군주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합횡군에 맞서는 것도 수세를 펼치기 보다는 공세를 통해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을 주로 선택했고, 즉위부터 30대까지의 치세를 살펴보면 태산 일대를 점령해 사수군을 설치하고, 막남을 기미부주로 합병했으며, 위나라를 반토막 내버리는등 아직 젊음에도 가히 세후에 버금가는 정복군주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종횡대전에서 합횡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열국의 관리자로서 태왕 칭호까지 얻으며 명실상부하게 중원 최고의 권력자로 거듭났고, 은근히 중원 통일의 뜻을 드러내기도 했다 [26]
    2차 중원대전의 종전안을 대신들이 지적하자 원로대신인 비의가 감탄할 정도로 수정하는 등 머리가 잘 돌아가고 정복군주라는 무시무시한 면모와는 반대로 참치들의 메타시선으로 보면 상당히 감정적이고 협스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등 허당스러운 이미지를 보이기 때문에 메타적으로는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웅괴(…) 취급을 받기도 한다. 여러모로 자기 사람들에게는 무른 성격이지만, 명확한 선이 있고, 확실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애착 가진 신하가 선을 넘을 경우에는 가차 없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27]
    기원전 270년, 태산을 오르려다가 무언가의 환청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은 뒤 격려의 요지를 담은 당부를 태자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후일담을 통해서 소양태왕이란 시호를 받았고 기설이 죽은 직후가 조선을 흔들 마지막 기회였다고 평하였다.
  • 조선태왕 기도[箕禱](AA:시마무라 우즈키 , 통/무/지/정/매: 87/91/91/41/34)
    기설의 딸. 능력치적으로 특출나거나 만능이라는 인상은 없고, 실제로도 국정을 배움에 있어 여러 모로 곤혹을 치를 정도로 더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장교의 난에 대한 소식을 접할 당시 그들 또한 천하의 백성이란 이유로 도와야 한다는 의견을 내보이며 조선의 천하관에 대한 새로운 앞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어머니에게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았다.
    태자의 특권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소소하게 비주의 도호 승진에 의문을 가지기도 하면서 어머니에게 태클을 걸었다.
    영통의 난 당시 연종군 총대장이자 조선군의 장으로써 반군을 진압하면서, 조선의 방향성에 대하여 조사와 맥이 통하는 고찰을 해내었다.
    기원전 270년, 태산에 오르는 것에 한때나마 미련을 품었던 어머니와 달리 태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되돌아간다. 후일담에서 제나라가 조선에 맞서 난을 일으키자 염파와 이미를 보내 이를 평정하였다고 한다.
  • 조선황제 기 아무개 1 (AA: 시죠 타카네)[28]
    진행 종료 70여년 이후의 조선제국 황제.[29] 항우의 반란을 제압한 이후 돌궐을 도모하기 위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항우를 토벌하는 공을 세운 묵특이 돌궐을 토벌하고 분열된 흉노의 통일을 요청하자 겉으로는 물렸지만, 몰래 묵특을 불러 돌궐토벌의 뜻을 밝힌다.
  • 조선황제 기 아무개 2 (AA 클레어 하베이)
    진행 종료 170여년 이후의 조선제국 황제. 오왕서의 편찬 과정에서 세후의 치세를 표하는 글자 관련 문제로 국사 두 사람을 추포하여 해명을 듣고는 벌받고 황(荒)이냐 미생(未生)으로 고치느냐의 선택지를 제시하였다. 비록 선택지를 제시하였으나 속으로는 세후라 해도 이 평은 어쩔 수 없다 여기면서 훗날 오왕서의 판본이 둘로 시작하게 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특징으로, 이로써 조선황실은 기도를 빼고 은발 아니면 금발이 되었다.

3. 관료(to내 인재)

현재(50스레)기준 조선의 관직은 조선상(相) - 육경(六卿) - 아경(亞卿) - 대부(大夫) - 박사(博士)로 구분되며, 조선상은 타 중원국가의 상방과 동일한 직책이고 육경은 조선 시대 6조의 수장이었던 판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육경의 수장 및 담당은 다음과 같다[30].

대총재(大冢宰) - 천관(이조) (인사,종합업무)
대사도(大司徒) - 지관(민조=호조) (재정업무)
대종백(大宗伯) - 춘관(예조) (외교업무)
대사마(大司馬)[31] - 하관(병조) (군정업무)
대사구(大司寇) - 추관(형조) (사법업무)
대사공(大司空) - 동관(공조) (공사업무)

원래 스타팅 시점의 조선은 중국식 관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는데, 연나라 정벌 이후 조선상과 대사마대장군등의 직위를 만들어서 중국식 관제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중 대사마대장군 직위는 군사권을 한 관직에 몰아넣은 수준이였는데, 이는 세후가 구귀족들을 숙청하고 억누르기 위해 측근들에게 군권을 집중시켜서 그렇다[32][33]
또한 세후 때 조선상 문예의 제안으로 조선상을 보조하기 위한 비서직인 승상이, 유후 때 기라의 제안으로 감찰부서의 수장이며 군주의 비서직인 어사대부가 신설되었다[34]
승상은 조선상과 육경[35] 사이에 위치한 지위이고, 대사마대장군은 조선상 밑에서 군사업무 전반[36]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어사대부는 아경과 동급의 직책이었다가 육경급으로 승진, 이후 대사마대장군,승상과 동격인 삼공급으로 지위가 올랐다.[37]
이들 승상,대사마대장군,어사대부 세 관직을 삼공이라고 부르며 조선왕(후), 조선상,삼공이 회의에서 국가의 큰 일들을 정한다.
유후 재위기 중반까지는 한 번 임관하면 부서를 어지간하면 멋대로 바꿀 수 없었고, 군사들이 실적이 없으면 말을 안 들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유후 때 공손앙,기라등이 실행한 개혁 이후 그런 제약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장왕 때 소부[38]가 지관에서 독립해 어사대로 들어갔고, 대간을 만들어서 어사대 소속으로 배치하였다. [39]
전체적으로 조선상(상방)-삼공-육경(+소부)-아경-중외대부-상중하대부 순서의 관직 체계이며, 육경에 소부를 더한 칠경과, 아경을 경이라고 부르고, 중외대부와 상중하대부를 대부라고 부른다.
이 중 대부급은 현장직이라서 카이두의 경우처럼 현장에 대신 일할만한 사람이 없으면 실적이 쌓여도 대부 직위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기도한다.
장왕 재위 말기와 기설 때는 조옹과 같이 오랫동안 한 관직에서 머무르며 권신화 되는 현상이 문제로 꼽혔고, 당시 대사마대장군이던 비비오가 은퇴하고 난 뒤로부터는 육경 급은 임기에 제한이 생기었다.[40]
190어장 기준으로 대사마대장군의 권한축소나 6관의 이름을 바꿀 관제개혁의 이론을 정리하고 실행하기 위해 대기중이다.

2부 기준 각 관의 명칭이 상기의 순서 순으로 이민예병형호로 전환이 완료되었다.

이후 하기를 끝으로 조선상이 명예직화 되고 기미부주를 3개 도호부[41]로 개편하며 그 장에 승상을 분할한 우승상을 두었다. 업무량, 해당 지역의 역량과 우선순위 등으로 인하여 기존의 승상 업무를 전부 보전한 좌승상보다는 반 수 정도 지위가 낮으며, 각 도호의 지위는 아경급이 되었다.

작중 이 항목에 추가된 인물과 추가될 인물이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태어난 연도 기준으로 세부 분류한다.

70여년이 지난 후일담 기준, 대사마대장군직의 해체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관 상설직들이 비상설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군부 자체를 제국 바깥과의 외교를 관할하는 번관이 생기는 등 점차 권한이 강화된 우승상부가 관할하게 되어 삼공은 유지되었다. 또한 위위라 불리우는 황실 경호 문관직[42]의 존재가 확인되며 경급 직위의 종류가 늘었음이 확정되었다.[43]

3.1. 기원전 432~403

  • 위호군 악자(AA:스카자하(Fate 시리즈), 통/무/지/정/매: 79/96/45/21/40) 별부사마 →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432년
    영광의 이 항목 최연장자+극초기 TO내 인재들 중 제일 장수한 인물. 중산국을 정벌한 위나라 명장 악양의 딸. 본래 역사에서는 중산국 정벌 도중 고깃국이 된 악양의 자식으로, 여기서는 무사히 살아남아 조선에 임관하였다.[44] 스텟을 보면 알겠지만 무력이 최상급이라 고거의 부장으로 시작해 연나라 정벌에서부터 무쌍을 찍었고 중산 전투에서 조나라와 연전을 치뤘긴 했지만 업령 서문표가 지휘하는 위군을 격파하고 서문표를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심지어 위나라 공자 위완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을 땐 비록 방심했다지만 맨손으로 위완의 호위병을 제압하는 등 인간흉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 명실상부 고거, 기황과 함께 조선 군부를 이끈 전설의 1세대. 다만 군편제를 기병 위주로 하다가 쓸데없이 지출을 내는 바람에 고거랑 같이 문예에게 설교를 듣는 실수를 하기도.[45] 조선에 임관해서 악씨 문중의 본관이라 할 수 있는 영수를 공격했기 때문에 악양의 뒤를 이어 악씨 문중의 가주가 되었음에도 악조를 비롯한 악씨들과 사이가 영 좋지 않았으나 마지막에 악조와 훈훈하게 화해를 하고 은퇴하여 가문을 관리하다 사망하였다. 시호는 위호군.
  • 충문군 문예(AA:사기사와 후미카, 통/무/지/정/매: 37/71/81/98/99) 대부 → 조선상 ◆ 기원전 427년[46]
    스타트 3인조 중 한 명, 문관 대표. 조선의 내정을 관리하고 여러 인재와 함께 변법을 추진하여 구 귀족들을 척결하여 조선의 중앙집권화를 실질적으로 설계하고 완성한 인물.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도 기식과 친분이 두터운지 사석에서 자주 붙어다니는데 속이 배배꼬인 기식의 장난질 때문에 본의 아니게 뒤처리 담당 역할이기도 하다. 그 덕에 기식에게 대놓고 직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원칙주의자 중 하나.[47] 기식 역시 본인 입으로는 예를 포함해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죽을 때가 돼서야 태자를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기식 사후 차기 군주인 기이를 보필하다가 기식이 죽은 다음해에 과로로 사망한다. 시호는 충문. 그리고 별로 주목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 스타트 3인조 중에서 유일하게 실존 인물이다.
  • 공양군 고거(AA:타카라 미유키, 통/무/지/정/매: 73→99/79/67/24/97) 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424년
    스타트 3인조 중 한 명. 무관 대표. 시작때는 춘추시대 국인(國人)의 전쟁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극초반에 제나라를 통해 손자병법을 입수하면서 전국시대의 전쟁관으로 변화하고 이로인해 통솔이 급상승했다. 훗날 영입하는 악자와 함께 연나라 정벌을 시작으로 조선의 무패전설을 이룩한 조선 군부 전설의 1세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아서 semi-손무, 무패장군이라는 후덜덜한 별칭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문관 대표인 충문군 문예에게 항상 한 수 접어준 덕에 본의아니게 조선의 문민통제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48] 시호는 공양. 무성 전투 이듬해를 끝으로 스타트 3인조 중에서 가장 먼저 사망했다.
  • 강양군 기황(AA:셋쇼인 키아라, 통/무/지/정/매: 90→97/74/52/73/86)
    박사 → 정동장군 → 우장군 →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417년
    고거, 악자와 함께 조선의 군부를 이끈 1세대 장수. 고거와 악자가 중원 방면에서 공적을 쌓았다면 이쪽은 만주의 예맥을 토벌하면서 공훈을 쌓았다. 예맥의 근거지인 국내성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하는 등 가혹한 잔학행위를 하는 바람에 반조선 예맥 국가인 부여의 태동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훗날 악자와 함께 부여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예맥 부족의 포섭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음에도 여전히 온전히 포섭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이후 기이가 오자병법을 가르치려 했을 때 그 성취도가 가장 높았다. 그 외에는 무난한 지휘력으로 여러 전장을 전전하며 승리를 거머쥐었고 악자 사후 대장군의 자리를 물려받은 뒤 수명이 다해 사망했다. 시호를 강양군이라 하였다.
  • 스어(곽달호)(AA:샤아 아즈나블, 통/무/지/정/매: 92/90/88/86/92) 박사 → ??상 → 지관대부 → 대사도 ◆ 기원전 415년경
    본래 송화강에 살던 친조선계 예맥 부족장 출신. 조선이 동진할 것을 예측하고 가솔을 이끌고 조선에 출사하였다. 내정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지방의 상으로 있다가 세제개혁 건으로 대사도 기취와의 다툼을 계기로 중앙에서 일하게 되었다.[49] 스텟은 무관에 조금 더 치우쳐진 만능형이지만 당시 내정요원이 부족했던 탓에 오랫동안 내정관으로 건실하게 일했다. AA탓인지 기라를 보고 우리가 다 아는 불후의 명대사(...)를 지르다가 기취에게 얻어터지고 관료들에게 끌려나가기도(...) 여기서도 샤아는 까인다 현 시점에서 자식들을 조정에 희생양으로천거하고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은퇴 사유는 일이 너무 많아서(...)탈모는 덤 고향에 돌아가서는 큰 동네에서 크게 출세하고 오신 어르신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나중에 은퇴한 기취보다 좀 늦게 세상을 떴다. 이후 그의 후손은 그의 조선명을 따서 곽씨 가문을 형성한다.
  • ??군 기취(AA:후키요세 세이리, 통/무/지/정/매: 20/91/80/90/58) 대사도 → 대종백 → 대사공 → 조선상 ◆ 기원전 410년
    특이사항으로 방계 공족이다. 본래 대사도 직으로 기식의 명을 받던 스어[50]를 따라 세제개혁을 완수하라는 명에 반발하여 사표를 던졌다가 기식에게 합격 판정을 받아 눈에 들게 되었다. 그후 내정관으로서 여러 고위직을 거치다 충문군 사후 차기 조선상으로 취임.[51] 기식과 관련된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원리원칙에 굉장히 깐깐한 성격으로 서슴없이 돌직구를 던지는 스타일. 이 탓에 대종백으로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되려 초왕 웅량부의 성깔을 건드린 적도 있다.[52] 이후 제나라와의 황하 공동 개발, 점령지 및 할양지 안정화 등의 여러 일을 처리하다가 은퇴하였다. 기이가 사망한 지 얼마 안되어 병사.
    시호를 받긴 받았지만 기록상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처리된 듯 하다.
  • 악조(AA:사토 카즈마, 통/무/지/정/매: 88/87/69/58/95) 정남장군 → 후장군 → 위장군 ◆ 기원전 410년
    영수 악씨 문중의 일원 중 한 사람. 의외의 실존인물이다. 악양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된 악자의 반대파 중 수장격에 위치한 사람으로 사사건건 악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지만 군공과 계급차가 차이인지라 속으로만 궁시렁거리고 있다. 박사 공수속이 개발한 신형 공성병기를 이끌고 제나라와 월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공성부대를 이끌고 굵직한 활약을 펼쳤다. 악자가 나이가 들자 이만 퇴직하여 가문을 돌보는 것이 어떠냐는 직언을 하자 악자는 이를 받아들여 은퇴. 사심이 아니라 악씨 문중을 위해 악자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나름 뜻깊은 속내를 보여주기도 했다. 태자 기토가 총지휘한 상당군 공격의 일군을 지휘하여 활약한 것을 끝으로 군부의 실질적 수장 역할을 고비에게 물려주고 관직에서 은퇴 후 사망.
  • 방릉군 공손기(AA:레이첼 알카드, 통/무/지/정/매: 2/72/95/88/83) 천관대부 → 대종백 → 조선상 ◆ 기원전 408년
    원 역사에서 한의후에게 간언하여 위나라 내전에 참전해 위나라를 멸망시킬 뻔 한 탁택전투의 기획자인 그 공손기 맞다. 본디 위나라 출신의 공족이었지만 서자출신이라는 이유로 한나라에서 퇴출당하자 이에 실망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충문군 문예의 식객이 되었다. 이후 출사하자마자 한나라와 위(衛)나라와의 동맹을 성사시키면서 단숨에 대종백으로 고속승진하였고 기이의 재위 내내 조선의 외교를 담당하면서 방릉군이란 군호까지 받고 공족과 사돈을 맺은데다가, 승상의 군정권 처리 문제 때문에 1년도 안되어 은퇴하긴 했지만 기라 대신에 조선상의 자리까지 오르는 등 조선에서 제대로 출세했다. 은퇴하면서 기이와 기토에게 다른 나라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외교를 추구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후 별탈없이 사망하며 퇴장.
  • 안월(AA:츠키무라 스즈카, 통/무/지/정/매: 82/43/18/74/95) 천관대부 → 동관아경 → 대총재 ◆ 기원전 406년
    안시성 출신[53]으로, 기황과 함께 출사한 조선의 관료. 매력만큼은 11살때부터 저 능력치였을 만큼 용모가 빼어났다. 그리고 스레민 공인 인간승리와 근성의 대명사. 출사 내내 만주를 비롯한 변방 개척에만 돌려지는 바람에 입사동기인 황이 대장군을 찍는 동안 혼자서 30년 넘게 대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까마득한 후배인 공손앙이 개성의 개척민들을 상대로 무리한 법치를 진행하려던 것을 막은 공훈으로 아경에 제수되면서 관운이 피더니, 조선상 기취가 공을 물려준 덕에 모든 스레민들의 축하를 받으며 육경의 일각인 대총재에 올랐다. 그녀의 사후 조선후 기이는 조회를 3일간 파했으며, 비록 공이 부족하여 시호가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장례에 추모 행렬이 끊이지를 않았다.
  • 마위(AA:아처(5차), 통/무/지/정/매: 16/46/75/100/85) 하관대부 → 춘관아경 →대사공 ◆ 기원전 406년
    동호 출신의 목동. 조선의 군마 개량을 위해 영입된 인재로 원래 영입될 의향은 없었으나 정치력 100이란 경이적인 스텟을 보고 스레민들의 만장일치로 등용. 예맥도 아니고 이민족인 동호 출신이다보니 악조를 비롯한 다른 관리들에게 백안시당하고 있었으나 기라에게 내정관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춘관아경으로서 공손기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초기에 상태가 처참했던 조선의 군마를 유목민의 것과 비교해도 일부 부문에서는 오히려 앞서는 경지까지 도달시킨 공이 있다.[54] 유목민 하위층 출신이라는 절대적인 벽과 이로 인한 멸시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내비쳤지만, 그 실력을 눈여겨본 기라에 의해 육경의 일원으로 올라섰을 때에는 역시 그 설움은 기억하기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요서회랑 도로공사를 맡아 진행하던 중 사망하였는데, 젊어서는 출신 성분 때문에, 여건이 나아졌을 때는 너무 나이가 많아 60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와 다시 한 번 스레민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후일 까마득한 후배인 조옹 등을 위시한 조씨 문중에 의해 공적을 인정받아 공덕비가 세워졌다.
  • 백두(AA:샤를로트 뒤누아, 통/무/지/정/매: 56/28/98/94/82) 대사공 겸 정주상 ◆ 기원전 403년
    본래 정주상으로 양평에 상경한 지방귀족. 이 때문에 사투리가 외국어 수준으로 심했다. 대량살상병기(...)를 만들어낸 공수속의 악명(...)을 듣고 이를 따지려고 찾아왔다가 이를 보고 재미있겠다고 끼어든 조선후에 눈에 띄어 등용된 인재.[55] 동호에게 농사와 관련된 인재를 보내준 답례로 동호 기병 1만을 제공받는 등의 공적으로 세우고 하간의 치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다가 병으로 급사하면서 조선측 네임드 중 첫 번째 단명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5번째 1000번 효과로 조선에 합류한 인물. 지력은 90-100[56], 나머지는 1-100으로 돌렸는데 정치 94에 매력 82가 나왔다.

3.2. 기원전 402~373

  • 고비(AA:레비(블랙 라군), 통/무/지/정/매: 90/80/85/81/92) 별부사마 → 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397년
    공양군 고거의 차녀. 군부의 명문가면서 동시에 양평 뒷골목의 큰누님[57](...)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타이틀을 거머쥔 인물. 위장군 악조가 은퇴한 직후 대사마대장군을 겸직한 승상 기라 대신 실질적인 군부의 대표라 쓰고 중간관리직가 되었다. 이후 기라가 승진할 때 무관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을 겸해 대사마대장군이 되었다. 기토 때에 동호에 외교를 위해 보내졌는데, 오랜 세월의 중간관리직 경험(...) 덕분에 원만한 진행과 함께 여러 정보를 얻는 등의 행운이 있었다.
    하지만 343년에 요서도로 공사를 감찰하러 갔다가 사고사로 사망했다.(...)
  • 문성군 기라(AA:마슈 키리에라이트, 통/무/지/정/매: 87/82/93/100/82) 지관대부 → 춘관대부 → 동관아경 → 승상 → 승상 겸 대사마대장군 → 조선상 ◆ 기원전 396년
    충문군 문예와 기취가 눈여겨 보고 키워낸 젊은 천재, 그리고 방계 공족이다. 15살에 나이에 총명하단 소문을 듣고 충문군 문예가 만나보려고 했다가 "조선상께선 나라의 인사를 맡고 있으니 사사로이 만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문예 역시 조선의 관료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고 칭송했다.[58]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문예, 기취, 고구 등과 조선의 변법을 진행하고 조선상의 비서로 신설된 승상으로 내정받는 등. 조선 2세대 인재풀의 대표격 인사로서 활약. 또한 조선으로 임관을 청하러 온 공손앙과의 설전에서 공수속과 유이하게 승점을 따내는 등 천재라는 위명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 특출한 능력으로 인하여 대사마대장군과 승상을 겸직하는 과정에서 군정권이 대사마대장군에서 승상 쪽으로 붙는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기취의 은퇴 이후 승진을 미루면서 해당 문제를 1년도 안되어 처리하는 등, 조선을 위해 철저히 헌신해 170어장까지도 쓰이는 삼공 체재를 완성해냈다. 이후에도 조선을 위해 헌신하다 340년에 사망.[59] 시호를 문성군이라하였다.
  • 고구(AA:코코노에 머큐리, 통/무/지/정/매: 60/24/93/93/55) 천관아경 ◆ 기원전 393년
    공양군 고거의 삼녀. 조선의 독설가. 모두까기 인형. 자기 성미에 맞지 않으면 일단 까고 보는 핵이빨의 소유자.[60] 이렇듯 내정관으로서의 능력은 좋은데 성깔이 하도 뭐같아서 오죽하면 승진이 누락될 때가 있었는데, 성깔은 세간에 익히 알려져 원인으로써는1%의 비율도 차지하지 못할 정도. 다만 이 계열의 끝판왕인 공손앙과의 설전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논파당하기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탓에 과로+지병이 겹쳐서 사망. 조선 네임드 중 두 번째 단명
  • 고위군 공손앙(AA:나가토 유키, 통/무/지/정/매: 91/81/100/100/70) 추관대부 → 추관아경 → 대사구 -> 어사대부 ->. 승상 ◆ 기원전 390년
    중국 3대 개혁가이자 법가의 시조인 그 상앙 맞다. 원 역사대로 위나라의 상방 공숙좌 밑에서 오랜 기간 있다가 공숙좌가 죽기 직전에 위앵에게 추천되는데, 정작 공손앙은 조국인 위(衛)나라를 침탈한 위나라를 싫어했기에[61] 일부러 위후를 도발하여 그의 분노를 샀다. 이후 공숙좌가 죽자 조선후 기이와의 인연으로 조선에 출사, 당시 공손앙의 소문을 들은 조선의 주요 관리와 학자들과 설전을 벌였는데 그 중 기라와 공수속과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보완할 점을 깨닫고 조선에 머물 것을 결심, 다짜고짜 전권을 달라고 했던 위후 때와는 달리 자신에 맞는 관직을 요청하면서 원 역사보다 조금 유해진 모습을 보였다. 다만 청구(지금의 한반도) 개척민을 상대로 실적을 내지 못한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62]하면서 여전히 과격한 법가의 시조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임관한지 10년 째 되던 해에 법을 지역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자신의 사상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배척되지 않는 등으로 인해 다른 사상과 과격한 학술적 교류를 받아들이는 정도까지 유해졌다.(?) 이후 화폐개혁등으로 여러모로 활약하다 어사대부로 승진했지만 전공 문제로 승상이던 기비와 자리를 바꾸었다. 333년 기이와 공숙좌의 환상을 보면서 편안하게 사망. 시호를 고위군이라고 하였다.[63]
  • 이세(AA:윌리엄 매사추세츠, 통/무/지/정/매: 93/99/96/100/95) 춘관대부 → 춘관중외대부 겸 정서장군 → 어사대부 -> 조선상 ◆ 기원전 388년
    연나라 출신의 신흥 사(士) 계층 출신. 기이 대에 대대적으로 시행한 구현령으로 등용된 인재로 능력 없이 고위직을 차지하는 귀족들을 혐오하는 성향이 있다.[64] 임관 직후에는 승상 기라 밑에 있었다가 상당군 침공 이후 벌어진 중도 방어전에서 5천으로 4만의 위군을 막아내는 공훈을 세워 중외대부 겸 정서장군으로 승진해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적성상의 이유로 문인을 승상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완성된 삼공 체제의 일원으로써 어사대부에 제수된다. 이후 조선상이 되어서 은퇴할 작정이였음에도 군주교체 시기를 지켜주고 은퇴 후에도 조선상 고정의 치사를 권하는 등 활약하나 죽을 때 별로 눈에 띄는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추존되지는 못했다.
  • 악월(AA:유즈키 유카리 통/무/지/정/매: 90/71/99/77/94) 진남장군 → 하관 중외대부 겸 진남장군 -> 위장군 ◆ 기원전 385년
    전 위장군 악조의 딸. 조선의 남쪽 군무를 담당하는 진남장군 직에 제수되었다. 천부적인 재능은 기책을 비롯한 지력이었지만, 집안 분위기 상 병법을 공부한 덕분에 무난하게 무관이 될 정도의 통솔을 갖추게 되었다고. 군대는 실력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저찌 넘어가지만 자신의 가슴에 대해 말을 함부로 한 경우는 용납하지 않는다(...) 제나라의 주도하에 대 초나라 합종군에 조선측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타국의 지휘관보다 지위가 낮다는 이유[65]로 병력을 차출당하는 등의 부당대우를 받았다. 후에 제후 전인제가 악월을 불러 직접 위로하였는데 여기서 타국의 복잡한 속사정을 눈치채고 전인제에게 고생이 많다고 말한다. 이후 고비의 빈자리를 태자였던 기유가 채우자 위장군으로 승진해 실무를 돌보게 되었고, 이후에도 활약하였지만, 331년에 곽구, 아무로 등과 도매금으로 묶여서 사망했다.(...)
  • 충장군 고정(AA:타카마치 나노하, 통/무/지/정/매: 100/97/100/97/55) 열현령 → 진양현령 → 하관대부 → 하관대부 겸 별부사마 → 하관 중외대부 겸 별부사마 -> 하관상경 -> 승상 -> 조선상◆ 기원전 384년
    원래 세의 중도 방어전에서 등장한 이름없는 모브 현령이었으나 훈련도가 낮은 7천의 지원군으로 4만의 위군 배후를 기습하여 혼란상태에 빠지게 만들고 결국 퇴각하는 위군을 급습하여 승리를 따내는 등 화려한 전적을 과시하며 등장했다. 조나라 평민 출신으로 현령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전후 공적으로 진양현령으로 승진했고 대총재 월과 인맥을 쌓는 데 성공. 현재 하관대부로 중앙에 진출, 경력과 공적을 인정받아 군령, 군정 양쪽 모두를 담당하고 있다. 악월과 함께 대 초나라 합종군에 참전후 중외대부로 승진. 이후 임호 토벌전 등에서 활약하고, 신인재 카이두와 대담을 통해서 황제국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카이두를 탐내거나(...), 요하도로를 세우는 데 관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그런데 80세가 넘도록 살아남는 바람에[66] 최초로 어장주가 공개적으로 수명다이스를 굴렸고, 거기서 또 크리가 터지면서 생존, 85세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기식의 치세에 태어나서 기이,기토,기유 세 군주를 섬기고 기설이 친정에 나서는 것도 목격하는 전후무후한 위업을 세웠다. 다만 본인은 친구인 안타가 죽고 유망주라고 생각했던 카이두가 먼저 가는 걸 보면서 기나긴 수명 때문에 슬퍼하는 중. 게다가 손녀가 뜻이 꺾이고 자기 자식들이 죽는 것도 봐야했다. 여러모로 장수가 독이 된 케이스.
    그리고 기원전 300년 하남대전의 대패로 조선상 비의의 긴축정책이 시작되면서 왕실재정까지 투입되는 일에 원로대표로 나서서 상소를 올리고 기설이 이를 가납하자 마지막 소임을 다했다듯이 맥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 아무로(AA: 아무로 레이 통/무/지/정/매: 95/85/79/74/54) 진동장군 ◆ 기원전 383년
    본디 흉노의 좌대당호로, 흉노가 동호 및 그 외 유목 세력에게 세가 꺾이자 이에 실망한 전사들을 6천명이나 모아서 조선으로의 귀부를 계획하였다. 흉노의 고위직으로써 35살의 나이까지 온 덕분인지, 그의 말과 행동에는 유목민의 색채가 짙다.[67] 이때 이를 사전에 조선에 알리는 과정에서 흉노의 밀사라는 위장으로 접근하였고, 중간 경로에 해당하는 동호에게 자신이 아는 흉노의 군사적 정보를 모두 넘기고 길을 빌리면서 동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같이 데려온 전사들을 그대로 지휘하는 식으로 진동장군에 임명된다. 이후 기토의 예맥 순행에 참여하는 등 진동장군으로써 일하다가 331년에 사망. 이후 사병의 색채가 강하던 진동군은 딸인 크라우가 계승한다.
  • 평양군 안타(양타) (AA: 페이트 테스타로사 통/무/지/정/매: 100/95/91/91/61) 하관 중외대부 -> 춘관대부 -> 춘관 중외대부 -> 대종백 -> 어사대부 -> 조선상 ◆ 기원전 381년
    안월의 딸이다. 고정하고는 애초에 파장이 맞는 사이로, 등장이 좀 늦었지만 어쨌든 동갑처럼 지냈다. 항해 관련 감독관으로 기유에게 임명된다. 하지만 자기가 담당하던 요서도로 공사에서 대사마대장군이 사고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대부로 강등, 이후 춘관에서 다시 캐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장의의 부추김을 받은 고질의 반대로 6경에 오르지 못 할 뻔하지만, 당시 고위직 대부분이 반대해서 대종백으로 승진에 성공한다. 이후 청구의 문제를 무난하게 해결하는 등 활약해서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원래라면 조옹이 조선상이 되어야하나 서류업무가 싫다는 이유로 조옹이 거부하자 대신해서 조선상이 되었다.
    60세에 은퇴한 이후 어머니 때부터 인연이 있던 청구의 평양으로 이주해서 씨를 양씨로 바꾸었다. 312년에 사망. 그 시호를 평양군이라고 하였다.
  • 곽구(AA:라크스 클라인, 통/무/지/정/매: 99/73/94/70/70) 학사→ 별부사마 -> 전장군 ◆ 기원전 381년
    곽달호(스어)의 둘째딸, 진양현령 고정하고 술친구. 별부사마로 제수되면서 공병대를 맡게 된다. 제후 전인제의 패구 할양요구에 대응하여 태자 기유가 계획한 패구 주민들의 통계조작(?)을 실행하였다. 이후 안문관을 쌓는데 기여하는 등 활약하나 331년에 사망한다.
  • 기화(AA:타치바나 아리스, 통/무/지/정/매: 87/74/92/99/40) 지관대부 ->지관아경 -> 대총재 ◆ 기원전 380년
    전 대사마대장군 기황의 딸. 기황의 다소 문란한 성생활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황의 상속녀로써 등장하였다. 지관에 임관되면서 대사도 스어의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경계하는 모습도 보여주였지만, 스어가 은퇴하면서 다행히도 기라와 같은 일을 경험하지는 않게 되었다. 여러모로 조선을 위해서 헌신하였지만, 하필이면 327년에 군주교체, 칭왕문제 등으로 한창 바쁠 때 죽어서 제대로 애도도 못 받고 일 늘었다는 반응만 받으며 사망(...)
  • 온간군 문인(AA:아이리스필 폰 아인츠베른 통/무/지/정/매: 60/20/99/96/53) 춘관대부 → 어사대부 → 승상 ◆ 기원전 379년
    충문군 문예의 손녀. 작중 조선 최초의 어사대부이다. 위나라의 재침을 대비 겸 경고로 춘관대부 세를 정서장군으로 올릴 것을 대총재 월에게 건의하였다. 관운이 기묘하게 좋은데, 제나라 첩보 때 추기와의 연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새로이 분리된 감찰기관의 장으로써 올려졌고, 관제 개혁으로 해당 기관 및 그 장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지위가 상승하여 실질적으로 승진하였다. 여기에 기라의 안배로 인하여 어사부에서 승상으로 전직한(?) 것은 덤. 승상에 취임한지 얼마 안 돼서 걱정하던대로 과로로 사망. 논란이 있었지만 가문빨(...)로 시호를 따냈다. 시호를 온간군이라 하였다.
    참고로, 직접적인 사인이 향년 36세에 노환이었다. 즉 제명대로 살긴 했지만 어쨌든 세번째 단명(...)
  • 기비(AA:실비아(괴물왕녀). 통/무/지/정/매: 88/74/99/76/67) 춘관대부 -> 승상 -> 어사대부 ◆ 기원전 379년
    강의 뒤를 이은 조선 유가 대표. 성을 보면 알겠지만 공족 출신이다. 에이이이잇, 조선의 공족들은 모두 괴물인가!? 조선 유가의 명사 자격으로 위앵을 설득하여 냉각된 관계를 완화시킨 공이 있다. 마위가 사망한 이후 춘관 상대부로 임관했는데 공족 신분과 조선 유가의 대표라는 지위도 있고 공적도 공적이라 지위는 상대부지만 대종백 외엔 춘관 내에서 그녀를 건드릴 이가 없을 정도로 위상이 높다. 결국 대종백도 거치지 않고 바로 삼공에 오르지만, 적성이 맞지 않는 승상부를 고집하다가 어사대부였던 공손앙과 위치를 바꾸기도 했다. 326년 사망.[68]
  • 무양군 고질 (AA:야가미 하야테 통/무/지/정/매:99/93/63/51/50 ) 하관 중외대부 ->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373년
    사고사로 죽은(...) 고비의 딸. 어린 나이에 임관해서 실력으로 중외대부까지 간 전적이 있었지만, 안타의 승진을 방해한 건으로 찍히고,[69] 뭣보다도 대사마대장군인 조옹이 몇 십년을 대사마대장군 직위에서 뻐기는 덕분에 위장군에서 대사마대장군 자리 차지하는데 굉장히 오래걸렸다.(...) 이후 그 조옹이 너무 막나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탓에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후일 논공행상에서 유서깊은 명문의 짬 내지는 빅 데이터로 적절한 이미지메이킹을 구사해 이런 쪽에 아직 서툰 조씨 문중 내지는 조옹을 상대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to가 부족해진 참치들이 치사를 권유했을 때 거부해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산동대전에서 비비오를 보내 제수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고, 참치들은 중원최고명장이라고 칭송하며 손바닥을 돌렸다(...). 진나라 왕위계승전쟁 때는 진직도의 이용에 반대했지만 조옹이 기어이 성공시키는 것을 보고 은퇴. 얼마 안가서 낙마로 사망했다.[70] 시호는 무양.

3.3. 기원전 372~343

  • 지로 (AA:로이 머스탱 통/무/지/정/매: 96/98/85/97/73) 천관대부->동관대부->천관아경◆ 기원전 369년
    극초반부에 등장한 를르슈의 후손이며 지양자의 후손. 준수한 능력치를 가졌으나 기유가 빽으로 있는 후배 비의에게 추월당한 것도 모자라서 비의가 승상직에 올라 상관이 되기도 하는 등 관운이 별로 좋지 못하였다. 말년에 조선 전역에서 불러모은 대연회를 기유가 주최하자 자기 커리어의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이 과정에서 양평의 왕족들을 건드렸고, 결국 어사대부로 취임한 기지에게 처음으로 탄핵당하였다. 게다가 이 뒤로 자식들은 to에 선발되지도 못하고 자신은 기지에게 돈을 뜯기는 등 고생했다. 심지어 몰년은 확정되지도 않은 채 명을 다한다.
    를르슈가 지백의 서자임이 밝혀지면서 지로도 지백의 혈통인 것이 밝혀졌다. 죽은지 상당히 지난 이후라 별 의미는 없었지만(…)
  • 무열군 비비오(투제[71]) (AA: 타카마치 비비오 통/무/지/정/매: 97/96/99/80/80 ) 운중태수 -> 진북장군 -> 우장군 -> 좌장군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366년
    흉노가 조선령 운중을 공격해올 때 크리로 나온 구원군. 조옹의 측근이였다던 인망과 지휘력을 이용해 흉노의 지휘관을 죽이는 업적을 세우면서 운중태수로 임명됐다. 이후 상사이던 조옹의 추천으로 진북장군에 임명됐다.[72]
    밸런스 잡힌 능력치[73]와 적절한 위치가 결합되어서 중앙에 온 뒤로는 위나라 구원전이나 산동대전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활약을 펼치고 중원계나 요동계가 아닌 최초의 삼공이 되었으나, 후일 벌어진 동초원대전에서의 자신의 전후협정에서 단기적으로 평화를 갈구한 나머지 차질을 빚은 것을 계기로 자신이 싸움에 질렸다는 것을 깨닫고, 은퇴를 결심하였다. 은퇴를 결심한 사정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도 돌격으로 성과를 낸 일이 많은 맹장이였지만, 의외로 평화주의자다.
    북방에서 불교를 접하면서 채식을 하는 등 평온히 살다가 294년에 사망. 이 죽음을 조옹이 서역에서 온 승려에게 왜 사람이 먹고싶은대로 못 먹게 해서 죽게 만드냐고 따지면서 조옹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무령군 조옹(AA:호시가미 제나, 통/무/지/정/매: 99->100(진)/99/77/68/61) 하관 중외대부 겸 진북장군 -> 대사마대장군 -> 조선상 ◆ 기원전 364년
    대군 조어의 장녀. 원 역사대로라면 기원전 340년에 출생이지만 이미 역사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는 다이스갓의 농간(?)으로 기원전 364년 출생이 되었다.[74] 아버지인 대군 조어와 조선 공실과의 인연 덕에 동갑내기인 태자 기유와는 거의 사촌남매와 가까울 정도로 친밀한 사이.
    조선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임호 토벌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승장구해 조선상 자리까지 올랐으며 제나라를 반토막내 밀어붙이고 영사의 사망 후 초원의 우회로로 진나라에 들어가 영직과 영직을 지원하던 초군과 친초 세력을 박살내고 영탕을 진왕으로 옹립하는 등 군사 부분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싸움 잘하는 뇌근 전투형 개그캐 성격이 강해서 묻히지만 조어가 죽기 전 기유를 기식으로 착각하고 가문원들을 살려달라고 빌면서 죽은 것을 본 것, 조씨 가문이 고씨나 문씨에 비하면 신흥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은근 열등감과 트라우마가 있다. 주로 고질과의 충돌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난다. 기설이 대에 들어서서는 가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해 딜레마를 일으키기도 하고, 왕이 되고부터 정치가로써 성장하는 기설을 보고 미묘한 감정을 보여주는 중.[75] 이후 조하의 6경 취임을 담보로 은퇴, 대군에서 머물고 있지만, 조선이 합횡군에게 패배한 후 인심을 사는 모습을 보여 참치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외전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은근히 대군의 인구발전을 막고있던 제후군에 걸린 결혼 제약 등을 풀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기설은 전혀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말년에 더 거칠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76] 하지만 마지막에는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면 추구하지도 않았을거라고 말하면서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제법 마음의 정리가 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역사적 사인은 타살이었기에 제 명을 그대로 가지고 간 덕으로 기원전 287년에 명을 다하였다.
  • 명역군 카이두 (AA: 카이즈카 이나호 통/무/지/정/매: 100/89/95/91/68) 동관대부 -> 추관 중외대부 -> 대사구◆ 기원전 359년
    공손앙의 제자. 이름에서 보이듯이 인재의 보고 임호 기미부주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법가 사이에서 길러졌다는 듯하다.[77] 기유의 눈에 들기도 했고, 황제국이란 명칭을 처음으로 제시해 고정이 눈독을 들이기도 하는등 많은 기대를 받았다. 조선에서 지방공무원들은 여태껏 한자가 안 통하고 장계를 올리는 방법도 잘 모르는 지역이 많았는데[78] 이를 해결하는데 많은 신경을 기울여 성공시켰다. 하지만 관학을 세우는데 재정문제로 실패하고 제나라의 풍토가 조선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대에는 도저히 기본조차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결국 관제개혁이나 관학의 성과를 보기도 전에 죽어서 참치들의 슬픔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시호는 명역.
    여담으로, 장왕의 최측근인 장왕사우[79] 중에 기유와 사적으로 친한 모습을 적게 보여주었지만, 장왕이 궁극적으로 이룰 것을 정하는 것에 참견할 수 있었던 것은 카이두 정도였다고 한다.
  • 기지 (AA:로라 스튜어트 통/무/지/정/매:52/87/92/62/57) 어사대부◆ 기원전 359년
    원역사에서 연나라를 통째로 먹을 뻔한 그 자지(子之)다. 원래는 이름없는 양평 왕족[80]으로 등장했지만, 지로를 탄핵하면서 네임드화했다.[81] 어사대부에 왕족이라 기유의 측근 중 하나로써 합종군을 성사시키는 등 활약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나오던 뒤가 구린 행보들답게 사실은 참치들이 외교안 잘못 만들어서지만산동대전 승전안에 뇌물을 받고 임치를 넘겨주려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 크라우 (AA:벨벳 크라우 통/무/지/정/매:94/90/88/98/61 ) 진동장군 ◆ 기원전 357년
    아무로의 딸. 곽전과는 안다(의형제) 관계이다. 중원의 예법에 대하여 무지했던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탓[82]과 아무로의 서녀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에 의한 인간불신[83]이 합쳐져 안다인 곽전과는 초반에 여러모로 마찰이 있었던 듯 하지만 어떻게든 봉합했다. 이후에는 진동군을 이끌면서 개마고원을 개척하는데 시간을 보냈고, 개척이 끝나자 고맙게도 직위를 가현에게 물려주고 315년에 은퇴해서 집에서 놀고있는 중.
    후일, 자신의 수하 중 탐관오리 짓을 하는 녀석을 제거함에 있어 양수의 손을 빌린 인연이 있다.[84]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곽전의 죽음의 진상을 듣고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다시금 상기하며 분개하였다. 이후 중앙에서 어머니가 들은 비방에 출사에 다소간의 환멸을 느끼고 있는 친구의 딸 곽원의 출사를 설득하며 지내는 중이다.
    기원전 289년 졸하였고, 유언으로 장례에서 마음도 없는 곡을 하지 말라 하여 그것은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 문충군 비의 (AA: 무사시(경계선상의 호라이즌) 통/무/지/정/매: 4/42/96/98/60) 한단대부 -> 동관대부 -> 동관 중외대부 -> 승상 -> 조선상 ◆ 기원전 356년
    원역사에서는 호복기사를 지지하고 오랫동안 조나라의 내정을 돌본 전적이 있는 그 비의이다.[85] 위나라와 진나라의 화의를 이루기 위해 태자 시절의 기유가 이세의 추천으로 알게 되면서 급격히 관운이 펴졌다. 실적과 빽으로 31세에 승상 지위에 오르고, 위세가 대단히 높던 조옹에게 일침을 놓아서 조옹의 눈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마대장군은 군대를 이끄는 관직이고 조선상 조옹은 내정은 영 젬병인데다가 좋게도 나쁘게도 상식을 파괴하는 사람인지라 실질적으로 내정의 총책임자로써 고생 중(...)[86] 신도의 제자이기도 하다. 결국 조선상으로 취임했지만, 합횡군에게 패전해 재정이 정상화될려는 찰나에 다시 적자로 돌아설 예정이기에 고생길이 열렸다.(...)
    295년 2차 중원대전이 성공리에 끝나자 하기에게 뒤를 맡기고 또 재정 안정화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을 예감하고은퇴. 292년에 인상여를 만나서 항상 아침에 스스로 청소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가지 못해 사망했다.
    시호는 문충군이 되었는데, 이는 최고급으로 치던 시호를 두개나 붙여준 충문군과 한자가 동일한 것을 사용할 정도로 그 공을 위아래로 인정받은 결과이었다.
  • 양민군 곽전 (AA: 아사다 시노 통/무/지/정/매: 90/93/87/85/88 ) 정동장군-> 정서장군 ->전장군 -> 하관상경-> 위장군-> 대사마대장군->위장군 ◆기원전 356년
    곽구의 딸. 크라우와는 안다(의형제) 사이다. 선비의 상황이 수상함을 이유로 이례적으로 진동장군이 있는데도 정동장군으로 시작했다. 서하대전에서 활약하는 등 활약이 있었지만 대사마대장군과 위장군 자리를 몇십년동안 지키던 조옹과 고질 덕에 승진이 정체되어서 승진이 늦어졌다(...) 그래도 대사마대장군인 비비오가 결국 은퇴하여 조선 최초의 예맥계 삼공이 되었다...만 조선군 최초로 패장이 되어 그 책임을 지고 강등. 다시 위장군이 되었다.
    이후 패장 취급하는 여러 신하들의 비방을 견디지 못하고 분사. 기설의 배려로 악시와 선시를 한 개씩 사용해서 안타깝다는 뉘앙스로 시호를 내려주었다.
  • 지헌군 악구(字는 지) (AA: 메구밍 통/무/지/정/매: 90/63/98/100/73) 지관 중외대부 -> 춘관아경 -> 대종백 ◆ 기원전 354년
    의외로 실존인물로, 악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가의 명문가인 악씨답지 않게 문관인게 특징적. 여러모로 안정적인 능력치와 지위덕에 외교관으로 활약중[87]
    그런데 분명히 능력치는 무척이나 준수하고[88] 능력 있는 편이지만 뭔가 허당끼가 넘쳐서 첩보 빼고는 참치들에게는 못 미덥단 취급이다.(...) 기원전 303년에 졸하였는데, 자신의 자만을 이제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음을 아쉬워했지만, 자신이 걸어왔던 길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편히 눈을 감았다. 시호는 지헌군으로 되었다.

* 충익군 하기 (기기) (AA: 히이라기 시노아 통/무/지/정/매: 98->100/94/93/100/42) 동관대부 -> 동관 중외대부 -> 하관 중외대부 겸 별부사마-> 하관상경-> 어사대부-> 대사마대장군->조선상 ◆ 기원전 352년
기화의 딸. 원래 이름은 기기인데 기유가 이름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하씨를 내려줘서 하기라고 불리게 되었다(...)[89] 원래는 동관에서 일을 했지만, 묵가와 일하면서 군사에 재능이 있단 사실이 밝혀져서 하관으로 자리를 옮겨 승진했다. 이후 산동대전에서 세운 공과 선임 어사대부가 처형된 덕분에 어사대부로 발탁됐다.[90]
이후 하남대전의 대패로 이를 지휘하던 대사마대장군 곽전이 징계로 위장군으로 강등당하면서, 차상위자인 대사마 조하가 어리고 경험도 없었기에 대신 대사마대장군에 올랐다.
295년 2차 중원대전에서 그림같이 완벽한 기동전으로 망묘군이 하수를 넘기도 전에 하동을 완전 점거하는 공을 세워 조선상으로 내정되었고, 비의가 그해에 은퇴해 조선상에 취임했다.
양소룡의 죽음을 계기로 기설의 행보에 대해 마지막까지 확인을 거친 끝에 더 이상 곁에 자신이 필요없다는 명목으로 사직하였다.
후일 차후의 조선상은 누구인가의 문제로 조선왕에게 언질을 넣음을 계기로 사실상 최후의 조선상[91]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가끔 대에 가서 조옹과 놀았고, 조옹까지 죽은 287년 시점부터는 이승에 남은 장왕사우가 되었다.
기원전 281년, 깐깐하게 조정의 기강을 돌아보고 당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삶을 마쳤다.
  • 경문군 문소 (AA: 하네사키 아야노 통/무/지/정/매: 90/89/95/91/60 ) 천관대부 ->천관 중외대부 -> 천관아경 -> 대총재 -> 승상 ◆ 기원전 349년
    오랜만에 나온 문씨의 후계자. 출사하지 않았던 문부의 딸이다. 문씨가 최고명문가임을 고려하면 승진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지만 이는 의도한 것으로 너무 눈에 띄는 것을 피하면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92] 실제로 옥로를 적성에도 안 맞는데 올려줘서 금방 강등됐지만 상대부직에 꽂아넣는 걸로 그 힘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감무를 상대로 곡부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총재로 승진했다.
    이후 조옹이 은퇴하고 비의가 조선상이 된것에 최고참이던 악구가 죽어버려서 판정없이 공석이 된 승상직에 취임했다.
    294년에 일한다고 정리를 안했다가 간독을 밟고 미끄러져서 부상을 입었는데 마침 문소가 가문을 위해서 계속 과로하다 몸이 약해졌었기에 사망. 고나와 참치들이 이를 듣고 가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이태 (AA: 나나리 람페르지 통/무/지/정/매: 36/91/87/99/66 ) 어사부 어사 ->간의대부 -> 대종백 기원전 349년 ◇
    사구정변에서 조무령왕을 죽인 그 이태다. 처음은 무력이 99가 나와서 사구정변은 사실 이태가 조무령왕을 때려죽인거냐는 개드립도 나왔지만(...)문관인데 이건 좀 아니라 판단한 어장주가 다이스를 굴려서 정치와 무력을 바꾸었다. 조옹이 기유에게 추천되어 어사부에 등용되었다.[93] 빽 덕분에 어사대부 기지가 편의를 봐주어 간의대부가 되었지만, 기지가 처형당하자 기지가 뒤를 봐준 것을 빌미로 협박되어서(...) 조옹의 삼보 취임을 반대해 조옹에게 찍혔다. 하지만 덕분에 문씨나 고씨의 눈에 들기도 했다.[94]
    이후 동군태수로 공을 세우고 아경으로 승진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영 출연이 없다가, 하필 뒤를 봐주던 고질과 문소가 세상을 뜨면서 조옹과 그 아들인 조하의 영향으로 출세길에 먹구름이 낀 상태가 되었지만, 문소와 고질과의 생전 인연을 바탕으로 아예 요동계 귀족 파벌 대우를 받으며 여러 모로 가늘고 길게 가고 있다가, 도호부와 우승상부 관련 문제의 초안을 제시한 공로로 대종백에 올라 경을 달았다.
    기원전 284년에 은퇴하였는데, 이는 제나라발의 밀수와 산적질로 인한 조선왕의 역정을 받아내느라 시달렸고, 동시에 조만간 외교사안적으로 복잡한 일들이 예측되기에 체력이 감당이 안 되어 퇴청을 청한 것이다.

3.4. 기원전 342~313

  • 옥로 (AA:루비 로즈 통/무/지/정/매: 75/98/63/91/79 ) 춘관대부 -> 동관 대부 -> 천관아경->승상->대총재 기원전 340년 ◇
    청구 출신이지만, 청구의 귀족인 모친이 문소와 술 먹고(...) 의기투합해서 자기 딸을 맥성에서 교육시키기로 해서 맥성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때 액면가는 한 10살은 연상이지만 1살 연하인 악의와 친해지기도 했다. 유외관[95]으로 취직 후 악의에게 부탁해 산동대전에 참여하려 시도하는 등 출세를 위해서 이리저리 노력해보지만 끝내 실패하기도 한다. 이후 문소가 힘을 써서 춘관 상대부로 취직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어사대부인 하기에게 일 못한다고 찍혀서 강등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임치군 태수로 발령난 문소와 같이 임치에 가서 활약 좀 해보나 싶었는데 양수가 해결하는 바람에 묻히기도 했다(...)[96] 하지만 이후 매사매골로 유명한 곽외와 같이 유언을 남기려던 기유와 기설 부녀에게 난입해서 횡설수설하면서 천하를 손에 넣으란 말을 해 기설의 측근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관운이 펴서 맥성운하를 만드는 데 활약하고, 강등 전적 때문에 옥로를 나쁘게 보던 하기와 화해했다. 하지만 임치에 부임하고 제장성 공사가 진척이 잘 안되고, 후임인 극신과 싸우는 등 영 일이 안 풀리며 임치와 뭔가 맞지 않음을 증명했다(...). 이후 극신과의 다툼과 나름 안정된 임치군의 상황을 고려해 다시 중앙에 복귀했다.
    이후 천관아경이 되고 가현과 함께 맥성운하를 파다가 승상 문소가 죽자 왕의 총애 빨로 승상에 취임. 292년에는 조선의 행동을 전부 사용해서 맥성운하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일로 뻗어버리고 능력 부족을 통감. 2번째 탄핵만은 피하기 위해 1년간 요양 간다는 명목으로 잠깐 치사하고 대총재로 복귀했다.
    이태의 승진 건에서 조씨 문중을 의식해 연로함을 사유로 "유일하게" 승진안에 미온적이었지만, 기설의 측근인데다 스스로를 강등시킨 전적, 그리고 납득할 만한 반려사유로 딱 한 마디 듣는 정도로 끝났다.
    나이 70이 되어 더 이상 업무를 제대로 보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기설에게 치사를 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 악의 (AA: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 통/무/지/정/매: 100(진)/100/96/91/83) 사수군수-> 하관대부 겸 별부사마-> 어사중승 ->대사마 -> 어사대부 기원전 339년
    원역사의 대제합종군을 이끈 그 악의다. 악가의 차세대 인재로 등장. 서하대전에서 임비와 맞붙는 모습을 보이거나 주변정리에 동원되는 등 활약했고, 임비와의 일기토를 전투보고로 접한 조옹의 눈에 들었다. 산동대전에서는 조옹의 부관으로써 활약했고, 별부사마 직을 받았다. 170어장 시점으로는 사수군 태수로써 반란을 조기 진압하는 등 훌륭하게 일하는 중.
    aa보정에 원역사 보정으로 인해 통제가 불가능한 to외 인재임에도 무척이나 안정적이고 유능해서 역으로 to에 못 들어가고 있었으나, 악구의 죽음과 때맞추어 터진 태산 장성 동부 부근의 위기[97] 로 인해 참가자들의 만장일치급 간택을 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버스라고 욕 먹는것에 대한 대응으로 조하가 시도한 인재 콜렉팅으로 어사대에 임명되고, 2차 중원대전에서 천문을 제압하는 등 활약했지만 조사가 자기 공까지 깎아서 공을 산정하는 방법에 태클을 건 여파로 승진하지 못했다.
    이후 하관으로 옮기면서 아경을 건너뛰고 바로 대사마에 취임. 합횡군의 이로침공전에서 연종군의 관중 수비 사령관이 되었다. 한군이 패배한 뒤 전선에서 이탈하려하자 한군을 이끌고 온 수장인 신차가 초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주살한 뒤 한군을 후방으로 배제시켰다. 이후 경취와 소수의 관중침공군과 격돌하였고, 관중침공군의 일원인 촉의 배신으로 대승을 거두어 관중침공군을 남정까지 퇴각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진개의 승진에서 그의 전적을 고려하지 않고 병관 계통으로 승진을 시켜버리는 바람에 양수에게 호되게 깨져 또다시 승진은 커녕 공으로 만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 이후 특유의 정석적 행보로 그 이외의 사고를 방지하여 전 상관인 양수에게 용서받았다.
    이후 조하가 스스로를 대사공으로 강등하면서 어사부 경력 등을 명분으로 올라갔다.
  • 고나[98] (AA:마이 나츠메 통/무/지/정/매: 100/97/99/94/70) 하관 하대부 -> 하관 중외대부-> 재야(...) -> 송의 객경(사마)[99]-> 우승상 기원전 337년 ◇
    무양군 고질의 양녀. 본디 고질의 친딸은 아니고 조카뻘이지만, 그 재능 때문에 고씨 문중 내부에서 차기 당주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고질의 공이 후계자(내지는 자식)의 등용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자, 만일 자식이 아니라서 불가하다면 양녀로 들여서라도 천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장왕이 이를 가납한 것.[100] 그녀의 대에 이르러서야 고씨 문중은 조선 내의 외국인 첩자를 솏아내는 것을 겸해서 받는 모든 뇌물을 먹고는 입을 싹 닫아버리는(...) 전통이 있음이 밝혀졌다. 제나라가 태산장성 동부를 장악할 당시 이에 대응한 14만 규모[101]의 무력 시위 과정에서 곽전과 함께 군대를 나눠서 맡았다.
    이후 늘상 하던대로 뇌물 받고 째버렸다가(…) 탄핵당했다. 짤린 뒤 집안에서 찬밥 취급 받으며 가문이라는 압박감에 괴로워하며 그렇다고 한나라가 제안한 경 지위를 받지 않는 등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다.[102]
    291년 기준 나이가 50이 다 되가지만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데다 군사 업무에서는 상위호환에 가까운 조사,염파,악의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포진해 있기에 미래가 불투명하던 중 송이 조선의 밑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써 왕명과 제안을 받아 송나라에 객경으로 보내지는데, 다시금 조선군을 이끌 수 있을 지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원래 정치에는 무관심한 가문의 전통 및 내정간섭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로 일단 송나라에서 조용히 지내는 중. 송나라에서 장교의 난을 접하자 이를 곧바로 조정에 직통으로 보고하였다.
    이후 북방 기미부주 지역들을 도호부들로 개편하며 그들의 총괄자로 승상을 분할하여 우승상직을 신설할 때 그간의 경력과 정세 변화를 들어 해당 직위로 임명되었다.[103]이에 요동계 필두 문중 차원에서 이태의 승진을 여론을 그러모으면서까지 간하여 이루게 하였다.
    우승상으로 재직하는 도중, 스스로의 기치를 더 이상 스스로가 믿을 수 없음을 느끼고 퇴청할 마음을 굳혔다.
  • 고명군 가현(블레이크) (AA: 블레이크 벨라도나 통/무/지/정/매:46/32/89/98/82 ) 진동장군 -> 춘관 중외대부 -> 천관 중외대부->천관아경->위장군(임시)->승상 -> 대사도 -> 우승상 기원전 333년 ◆
    크라우의 딸. 이 때 진동군 세습이 사실상 끝났다. 가문빨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중외대부라는 높은 지위를 얻고 제북태수 일을 잘 해내는 등 여러모로 승승장구 중. 출생지도 그렇고 아무래도 어머니랑 가까운 곽전과의 인연이 꽤 깊다.
    292년 상구대전 때 보급을 담당하며 위장군으로 취임해 원정 7차전까지 보급을 해주는 무시무시한 저력을 보이면서[104] 상구대전의 승리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이 공으로 옥로가 뻗어서 치사한 승상 자리를 유목계로써는 최초로 얻었으나, 하필 이후 조선상을 완전히 명예직화 하려는 기설에게 보수적인 이의를 제기하다가 이전에 받았던 불신이 겹쳐 다시 경으로 강등당하였다(...)[105]
    기원전 276년 격무에 시달려 병을 얻은 끝에 태보라는 명예직에 임명되고 사실상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간 뒤 기원전 273년 사망. 그 시호는 고명군이 되었다.
  • 양수(안수) (AA: 테레사 테스타롯사 통/무/지/정/매: 97/100(일기당천)/지력 100(대지약우)/90/100(침어낙안)[106] 춘관대부 -> 지관대부 ->어사중승 ->소부->위장군->대사마대장군-> 승상 -> 좌승상 기원전 333년
    안타의 손녀딸. 크리 삼연타로 트레잇이 붙은 100 능력치가 셋이나 나온 유망주이다. 능력과 빼어난 외모 덕에 젊은 나이에 to에 들어와서 임치의 문제를 관정분리를 도입해 해결하는 등 활약해 지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임치군의 태수가 되었다. 이후 임치군수로써 제장성 공사에서도 대활약을 하면서 어사대에 들어와서 30대가 되기도 전에 아경 급인 어사중승이 되었다. 능력치가 무척이나 높은데다가 무력이 높아서 장수가 예정되있기에 참치들의 기대를 한 몸에 사고 있다. 특이하게도 조선에서는 비주류인 도가를 배운모양.다만 관직에 들기 전에는 의기 등으로 인해서 크라우의 사람 중 일부 부패한 자를 단신과 노궁 하나로 무쌍을 찍으며 처단 내지 참교육(...) 끝에 성불구자로 만들었다.
    [107] 염파랑 의기투합해 친하다는 듯하다.
    빠르게 드용되고 매력과 지력을 살려 춘관에 임명되었다가 임치군 문제를 해결하며 지관으로 옮겼고, 다시 하기의 눈에 들어서 어사부로 이직해 어사중승에 올랐는데, 거기서 다시 승진을 거듭해 30대 초중반에 6경급인 소부가 된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한다. 2차 중원대전 때 하남군을 맡으며 위장군으로 전직, 여기서 위송연합군을 무찌르며 대량을 무릎 꿇리는데 치명타를 가했다.
    이 공으로 하기가 승진하며 빈 대사마대장군 자리를 차지했고, 가현과 더불어 차기 조선상 자리를 받을 인재로 기대받았다.
    조선상이 명예직화하고 가현이 강등당하며 공석이 된 승상에 오른 직후 기미부주 개편으로 도호부들이 신설되면서 승상이 분할되는데 이에 본래의 승상 업무는 좌승상이 담당하게 되며 직책명이 변경되었다.
  • 염파 (AA:도몬 캇슈[108], 마스터 아시아[109] , 통/무/지/정/매: 100(진)/98/54/81/86) 정남장군-> 잡호장군-> 임치군수 -> 위장군 -> 청구군수 기원전 329년
    원 역사적으로 조사와 엮인 일화가 많은 그 염파가 맞다. 구 제나라령을 안정화시키는 과정에서 비의가 양수의 비서 격으로 붙여주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비비오가 은퇴하면서 약간 못 미더운 부분이 있는 극신을 제치고 TO에 들어간다. 상당히 성격이 거친 것으로 묘사되는데 기설이 이런 모습을 보고 팬이 되었다는 묘사가 있다. 아내만 없었으면 후궁(...)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첫 전장인 조가에서 활약했지만, 복양의 배신으로 합횡군에 대패했기에 강등. 잡호장군이 되었다. 안타에 이어서 곽전과 함께 두번째로 강등된격.
    이후 순우전투에서 공을세워 임치군수가된 진개가 정치력 부족으로 임치군을 잘다스리지 못하자 대신 임치군수로 임명된다.[110]
    2차 중원대전 때 아슬아슬하게 극현이 함락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군사를 전부 위로 돌린 상황이라 참작해주고 진남장군으로 임명한 진개와 임치를 지키기로 했다. 291년 합횡군의 이로 침공에서 임치 방면의 수비를 진개와 함께 맡았다. 그러나 앞선 전투들에서 수적인 열세로 밀린 끝에 염파가 성을, 진개가 야전을 맡아 합횡군과 전투를 벌인다. 수성군이 임치의 소요로 인해서 패배하며 죽음을 각오하였으나[111] 맹상군이 어이없게도 선봉에 최전열에 서서 먼저 임치에 들어오려다가 최후의 발악으로 한 저격에 맹상군이 실신, 성에 진입한 제군이 물러나서 중상을 입어가면서도 끝내 임치성을 지켜냈다. 이후 괴물같은 회복력으로 야전 수비에 성공한 진개의 진남군과 합세하여 치수를 넘어 합횡군을 공략하는데 성공해 안평까지 되찾아낸다.
    이후 공과 총애에 힘입어 위장군이 되어 관운이 피었다. 훗날 제나라가 마지막 저항을 할 때 전단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 사실상의 멸망에 일익을 담당했다.
  • 방훤 (AA: 아리안로드 통무지정매: 97/74/97/85/77) 이관 중외대부 -> 분수군수 -> 예관아경 기원전 328년
    킹덤에서 방난으로 유명한 사람.[112] 극신과 얘기하는 것으로 첫등장.이 때 극신에게 군사는 영 별로라는 평을 들었다.(...)[113]할머니에게 돈 빌리는 게 창피해서 대신 자신의 돈을 빌리고 있는 고애와 딱히 아무런 이유 없이 계속해서 어울리고 있었던 한참 어린 친구기도 하다.(...) 사실 이미 고애를 주시해야 할 인물로 찍고 있던 어사부의 방첩망 중 하나였기 때문에 고애는 자신의 뜻인 합횡을 굽히지 않음이 확실해지자 바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비의가 조선상에서 물러날 때 TO 내로 들어와서 이관 중외대부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어사부 블랙 요원으로써 한때 하기의 직속이었고 동시에 고애와는 달리 연종론의 대표주자였으며, 이로 인한 하기와 양수와의 인맥이 있었던 덕이다.
  • 진진 (AA:키쿠치 마코토 통/무/지/정/매: 64/62/97/93/75 ) 지관상대부-> 형관아경-> 대사구 기원전 326년
    법가 쪽에서 조정에 최소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목적을 겸하여, 법가의 본래 목적에 맞는 자질을 가진 이를 소개하여 등장. 희성진씨로 진문공의 먼 후손이다. 맥성의 운하 및 확장 등을 담당하는 중이다.
    이후 본인이 더욱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더 윗자리로 오르지 못하는지에 대한 태자 기도의 질문을 받은 조하에 의해 호출되어 그 이유를 설명해주면서 눈에 들었다.
  • 극신 (AA: 앤드류 포크> 디오 브란도, 통/무/지/정/매: 85/83/95/89/54) 동군군수-> 태원군수 -> 춘관 상대부 -> 상당군수 -> 민관아경 기원전 326년
    카이두의 제자 중 일원으로써 첫 등장. 카이두가 제국 및 관학의 진척에서 실책을 저지를 당시 이를 지적하면서 카이두의 심정을 듣게 되었다. 능력치 자체는 염파보다 낮지만, 염파 특유의 성향[114] 때문에 곽전의 눈에는 더 들었다. 본인의 재주가 나쁜건 아니지만, aa나 원역사에서 자기를 패사시킨 방훤을 보고 군사에 재주 없다고 하는등 뭔가 취급이 나쁘다(...) 순우로 쳐들어온 맹상군을 진개와 함께 패퇴시켰으나 그 과정에서의 독단으로 인해 속전+춘관 상대부로 부서이동했다. 이게 다 포크의 aa가 나빠서라는 공감대를 이룬 덕에 스레민들의 열렬한 지지(...)속에 aa를 교체했다.
  • 조사 (AA: 빅토리아 다르그륜, 통/무/지/정/매: 100(진)/91/99/75/81) 음진현령 -> 한단군수 -> 위장군 -> 대사도 -> 대장군 기원전 326년
    장평대전으로 유명한 그 조괄의 아버지인 조사가 맞다. 조선 최초의 월경지인 음진을 조씨 문중의 추천에 힘입어 위의 관중 경락 시도 직전에 담당하였다. 젊은데다가 이 때문에 낙하산 취급을 받기 딱 좋게 되었지만 실력만은 진짜여서, 공손연은 당사자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부에서 음진을 뒤흔들려 했으나 역으로 사로잡아 심문하였고,[115] 이후 지휘계통이 완전히 혼란해진 음진방면군을 백기와 함께 실질적으로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하남대전에서 양수의 부관으로 활약하고, 상구전투에서합횡군 본대가 오기전 송군을 와해시키고 지휘관은 당양을 사살, 이후 7차전까지 혈투를 벌이면서 경취를 상대로 승리하며 대활약하며 명실상부하게 조선군의 에이스로 등극한다. 이후 합종대전 직후의 논공행상과 인사고과에 의해 무관에서 문관인 6경 중 하나가 되는데, 이는 조사가 무관에 남으면 주요 무관이 너무 많아지는 당시 상황과 진개가 군정에서조차도 결격이 있는 인재였던 탓에 그나마 현령 경력을 무난하게 수행한 조사를 차출한 것에 있었다.[116]
    후일 가현이 강등당하고 양수가 승상으로 이동하면서 그 공석에 아직 징계상태인 악의를 제치고 임명되는데, 특유의 고지식함 덕으로 기설에게 속으로나마 해당 위치에 필요함을 인정받았다. [117]
    직후 기미부주 개편 논의의 결과 분할된 우승상의 자리에 정세의 변화, 실적 등을 사유로 고나를 불러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여 고나의 복귀의 은인이 된다.
    대장군부 폐지와 관련하여 태자 기도의 전폭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 조하 (AA:아라라기 코요미 통/무/지/정/매: 27/82/86/95/91 ) 하관상경->어사대부 -> 대사공 기원전 325년
    무령군 조옹의 둘째. 원역사에서의 조혜문왕.
    조옹의 은퇴조건 협상에 의해 낙하산인사로 하관상경에 취임했다.
    원래는 대사마대장군을 분리시키고 거기 조하를 앉힐 생각이였지만, 패전 후 조씨의 영향력을 사용해서 북방을 안정화시켜야하고 곽전의 강등으로 공석이 된 대사마대장군 직을 하기가 수행해야했기에, 어사대부로 취임했다. [118] 덕분에 26세에 삼공이 되어서 최연소 삼공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119] 하지만 낙하산이라는 평판에 부하가 양수라는 먼치킨이라 제대로 인정을 못받고 있고 삼공 이상이 모이는 회의에서도 영 발언권이 없다(…). 그래도 어차피 들어먹을 악평이라면 이를 도리어 이용하는 모습도 보이는 등 환경에 적응하는 중... 이지만, 어머니 조옹의 죽음으로 발생한 기미부주와 운중 일대의 개편안에서 가문의 이익, 또는 누나 조장을 챙기며 의견을 내다 기설에게 경고를 받기도 한다.
    여담으로 기설과는 동갑이다.[120]
    이태를 승진시키는 건에서 태왕의 뜻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중론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것으로 이태의 승진길이 오로지 조옹의 의지로만 막혀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후일, 기설의 의중과 현 상황을 감안할 때 조씨에 화를 입히지 않을 방법이 본인이 자청하여 강등되는 것임을 꿰뚫어보고 기설의 제안에 한 술 더 떠 민관 대신 위상이 약간 더 낮은 공관의 상경을 자청하였다.
    기원전 270년에 기설의 마지막 활동을 곁에서 거들었다.
  • 경현군 조승 (AA: 류몬부치 토오카 통/무/지/정/매: 65/67/91/85/85) 기원전 322년 대사공 > 대종백 > 대량조(...)[121]
    원 역사적으로 평원군이 되는 그 조승이다. 조사를 관중경락전 이전에 음진의 군수로 천거하여 위의 경락군을 고전시켰으며, 어머니 조옹의 치사를 권하는 과정에서 가문의 안위를 위해 최대한 조옹을 설득하였다가 일시적으로 유폐되기도 하였다. 이후 해당 문제가 해결되고 합종대전 당시에는 경현을 봉지로 받아 군호를 가지고 있는 상태였고, 해당 지역 일대의 유력자로써 연종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촉의 사신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자체 세력 확보를 통해 진나라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영통을 후원하는 일에 있었다가 이후 경현군의 일을 끝마치고 중앙으로 불러올려지는 과정에서 대사공을 청했으나, 조사가 표면적으로 대사공의 업무를 자원하여 강등되었고 대신 대종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엔딩 시점에서는 진왕 영영의 바람에 따라 진나라의 대량조가 되어있었다. 이는 대량조의 특성까지 배려하여 원래부터 친척관계나 다름 없는 조씨이자 현지 전문가를 보낸 것이다.
  • 비주 (AA: 카즈노(경계선상의 호라이즌) 통무지정매: 75/75/74/93/95) 공관 중대부 -> 공관 상대부 기원전 315년
    역사에 없는 비의의 손녀로, 할머니가 치사한 다음 해에 문소가 세상을 뜨고 문관이 급해진 참치들에 의해 TO 내로 들어와 공관 중대부로 시작하였다. 비주의 등장으로 비씨는 고향인 한단에 일족이 어느 정도 모여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기설이 뭔가 괴전파를 받아 선택했으나(...) 삼공과 태자의 이의제기로 반려됨과 동시에 문충군의 손녀라는 것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엔딩 시점에서는 극신을 탄원하여 공을 독식해 도호가 되었다.

3.5. 기원전 312~283

  • 문자: (AA: 야쿠모 유카리 통/무/지/정/매: 86/97/93/99(지자요수[122])/98) 병관 상대부 -> 거란도호 -> 운중도호 -> 우승상 -> 운중도호 기원전 310년
    문소의 딸. 치수의 재능이 있지만 일단 병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사방장군 비상설화 과정에서 문씨와의 거래로 승진시 2단 승진이 예약되어 있다. 명문 문가의 유망한 자제를 빨리 중용하고자 하는 조선 조정의 의중도 있고 하여 이 거래는 딱히 큰 마찰은 없었고 이것으로 신설된 거란도호부의 장이 된다.
    이후 도호부에 관학의 현지 맞춤 변형에서 창안된 도호학의 보급을 우승상부 차원 아래 주도하게 되었다.
    운중도호부로 전환배치 된 후 우승상으로 승진했는데, 이것은 상평제의 성공을 강행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긴장했지만 어떻게든 여론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 지만 일종의 평가기간 처리로 이후 도호로 돌아왔다. 엔딩 시점에서는 육경의 일원이 되어 본래 재능인 치수에 전념할 예정이다.

4. 기타 인물


작중 해당 위치에 존재하는 인물이 다수가 됨에 따라 계통 위주로 세부 분류한다.

4.1. 중원계

  • 무생(AA:키리사메 마리사) ◆
    공문십철 중 한 사람인 자하가 세운 자하학파의 유생. 제태공 전화가 조선에 보낸 유생이며 조선 유가의 기틀을 세운 인물. 근데 정작 본인은 찬탈자인 전화를 싫어하여 제나라를 뛰쳐나왔다. 자하학파 내에서도 이단아에 속하는 인물로 중화의 전통적인 화이관을 부정하고 패도를 추구하였으며 무능한 주 왕실을 대신할 새로운 천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훗날 조선 유가의 대표이론인 인의패도론을 최초로 주창한 장본인.[123] 조선을 가리켜 싹수가 있다고 평가하고 기식을 비롯한 조선의 지도층들에게 유학을 전파하였다. 그 중에서 대사공 백두를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백두가 급사하자 이를 매우 슬퍼하였다. 이후 제자인 하관박사 강에게 학맥을 잇게 하고 출연 끝.
  • 공수속(AA:시노노노 타바네) 박사, 공성부 수장, 묵가 조선지부 초대 지부장 ◆
    송나라 묵가 지부에서 파견된 묵가인이자 중원의 천재 공학자 공수반의 후예. 수성을 중요시하던 묵가와는 달리 공성이 전공분야인 묵가의 이단아로 '천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 조선에 출사하였다. 조선의 기술력을 책임지는 천재 공순이로 노나라 정벌때 신형 공성병기를 선보여 제나라를 비롯한 중원을 놀라게 하였고, 하간군 요새화를 1달만에 후딱 처리하면서 제나라를 또 놀라게 했다.[124] 단순한 공순이가 아니라 끊임없이 천하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철학가로서의 면도 진해서 공손앙과의 설전 와중에 천하란 과연 뭐냐고 물어서 그 공손앙을 데꿀멍하게 만들었다. 말년에는 공수추에게 조선 묵가를 맡기고 천하를 확인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다.[125] 그녀의 마지막은 세상을 계속해서 알려다 바고아스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녀의 죽음은 알렉산더 대왕[126]에게 알려져, 진상조사가 이루어졌다.
  • 공수추(AA:시노노노 호키) 묵가 조선지부 2대 지부장
    공수속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지만 사실은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전공분야는 함선 건조. 다만 모친만큼의 괴짜는 아니라, 당시 시대 수준의 세계관을 확고히 지니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요서회랑의 그 뻘밭에도 상당히 수월하게 도로를 낼 수 있는 묵가의 비급이 존재한다(...)
  • 대군(代君) 조어(AA:하스타 군) ◆
    원 역사의 조숙후.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조무령왕되시겠다. 조선의 조나라 정벌로 인해 살아남은 유일한 조나라 공족으로 기이가 보호해줘서 목숨을 건졌다. 기식이 조어를 진양군에 봉해 진양에 남아있는 조나라 귀족들과 함께 제거될 뻔 했으나 조어가 스스로 나서서 조나라 귀족들을 해산시킨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당시 변방인 대 땅을 봉지로 받아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는데 원래 기이는 맥성과 가까운 무종이나 고죽에 머물게 하려고 했지만 충문군이 이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조나라가 망하면서 조후 지위는 박탈되어 대군으로서의 지위만 남아있고 조씨 문중도 세 파벌로 갈라져 있기는 하나 유후 기이대 부터 이어진 조선공실과의 인연 덕에 조선 내에서 제법 대접받으며 지내고 있다.[127] 본인 스스로도 조국인 조나라를 멸망시킨 조선에 대해 완전히 앙심을 접지는 못해도 하다못해 자식들은 조선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랄 정도로 조선에 많이 동화된 듯.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는 편히 갈 마음을 먹었건만, 하필 환각이 일어나 본 것이 자신과 일족을 한때라도 싸잡아 쓸어버리려 했던 세후 기식이었던지라 유언마저 그 때처럼 용서를 구하고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되는 씁쓸한 결말과 함께 명을 다하였다.
  • 대부 조설 (AA: 브리지트)
    조나라가 망하여 그 공실이었던 조어가 조선에 의해 변방으로 보내지고 시간이 좀 무르익은 뒤, 조씨 문중 중 조범 세력과 함께 별도의 소수파였다. 다만 조어가 잘나가는 이유와 대세를 먼저 보고 빠르게 조선의 사람으로 녹아들 생각을 했기에 사실상 이후 조씨 문중은 힘과 대세를 보고 뒤늦게 무릎을 꿇은 조범 파벌까지 더해 재융합의 수순을 거쳤다. [128]
  • 악시(AA:시로에->회수됨, 통/무/지/정/매: 51/80/56/90/41) ◆
    스레주의 언급에 따르면 악씨 문중의 당주일 가능성이 높은 편인 악씨의 일족.[129] 오랜 기간 동안 등용이 되고 있지는 않지만 악씨 문중의 관리도 관리거니와 본인 스스로가 권력에 욕심이 없어서 대장군 자리에 눈이 멀어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도마 사촌을 보고 얌전히 살기로 한 듯.
  • 신도 (AA: 토오사카 린)
    법가의 3대 인물 중 세치를 맡는 자. 제자로는 비의가 있다. 조선이 연나라와 조나라, 그리고 위나라와 제나라를 베어문(...) 영역을 자랑하면서 출생지가 조선 영역이 되었고, 직하에서 배움을 찾다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최초의 연종 회맹 당시 보좌역으로 조선왕과 동행하였고, 태자 기도의 스승이 되었다.
  • 고애 AA: 아이노 하트 기원전 341년
    고정의 손녀. 지력이 높은 전형적인 종횡가이다. 균형을 통한 평화라는 대의를 가지고 있었으나 최강대국인 조선 입장에서 이는 조선에 불리한 학설이라 숨기고 산 모양.[130] 30대 중반이 되도록 중용해주지 않는 조선을 떠나서 자신의 이상을 이룰 수 있고 두혁이란 커넥션이 있던 초나라로 갔지만, 위나라는 진나라 내전에서 딱히 조선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도 돌아오는 건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헛소리라는 퇴짜뿐이었다. 그래서 조선에 소진과 위나라가 배신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지만 이것도 비의를 제외하면 무시당하고 참치들 사이에서는 진실만 말하는데 아무도 안 믿어준다는 뜻으로 카산드라란 별명을 얻었다. 조선에 돌아온 이후는 쪽팔린단 이유로 집에 안 돌아가고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삥 뜯으면서 소진의 거짓말을 밝힐 방법을 연구 중. 304년에 위가 통수를 때리면서 중용될[131] 가능성이 높아질까 싶었건만,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인식하자마자 다시금 자신의 이상인 합횡을 이루고자 한 것이 결국 평소 돈을 빌리는 사이었던 방훤 선에까지 감시망에 닿아있는 어사부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며 강제로 뜻을 꺾이고 조선의 관리로 살아가는 운명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한 점은 목숨 건지고 관직에 등용되는 결말이라 최소한 겉보기에는 이것보다 나은 결말은 없었다는 것.[132]
  • 도도(AA:블랙 록 슈터,통/무/지/정/매:83/98/27/12/39) 호편성주 -> 제양현령 -> 맹상군 식객 -> 고나 식객 -> 객장◆
    첫 등장은 위사의 반란 시점. 위나라 호편성주로 비숙련병 32백으로 전영이 이끄는 숙련도 99의 병력 4만을 막아내었다. 이후 이를 눈여겨본 전벽강에 의해 제나라로 넘어와 제양현령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대제 합종군 당시 수춘 공략을 위해 성을 비울 때 제대로 된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어 맹상군의 식객이 되었다. 곡부 공방전에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병력 3천2백을 이끌고 출전했지만 4만 7천의 조선군을 마주쳐 홀로 탈출한다. 그 후 더나은 직장을 찾아서 조선으로 넘어와 고나와 해후하여 고씨의 식객이 되었다. 어장주 공인으로 중원에서도 백병전은 손꼽힌다던가, 처음 겪는 초원의 기동전에서도 어찌저찌 낙오하지 않는 등 몸은 확실히 강한 듯하다.
    대진운이 안 좋기로 유명한데, 한번도 자기가 유리한 상황에서 싸운 적이 없고, 자기 특기인 수성전을 살려서 싸운건 등장할 때 한 번 뿐인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에 참전한 동초원 대전에서 유시를 맞아 전사하고 만다.(...)[133]
  • 려대부 장등(AA: 우미인(페그오))
  • 대공 조장 (AA: 아스카 랑그레이) 운중도호 기원전 330년
    무령군 조옹의 맏딸로, 추은령(분할상속)의 원칙에 의해 조옹이 자식들에게 자기 걸 나눠서 줘야 할 때 대공[134]을 승계하였다.
    초원이 너무 좋았던 것인지, 중앙정계와 연을 갖지 못할 정도로 동생들에 비해 맥성에 머문 시간이 드물었고, 주변이 보기에도 조씨 가문보다는 못해도 북방인이었다.
    이후 운중 일대가 운중도호부로 개편되며 현지 사정과 적응기간 등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해 초대 운중도호로 임명되고 그 임기도 기존의 2배를 요구해 관철하는 것을 볼 때 분명 어머니의 위광이 아득할 뿐 능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만, 당장 조하는 어사대부로 낙하산이었다지만 나름 육경과 삼공으로 중앙직 경험을 쌓았고, 조승은 조선왕의 친우에 경현군으로 봉해져 세가 갈리고도 본가인 대의 조씨 문중 내에 조승 지지자가 많을 정도로 기린아인지라 여전히 가족의 위광에 시달릴 예정이었다.[135]
    그러나 기설과의 담판 끝에 얻어낸 운중도호로써 조옹 시절부터 있었던 운중 입장에서의 불편한 점을 철저히 수정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에 가까울 정도의 북방의 생리에 대한 경험을 발휘하며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환의 난 이후 도호부의 운영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원하는 것과 상충하기 시작하자, 이에 관한 불만을 입에 올린 것이 새어나간 것이 빌미가 되어 대 공의 자리를 잃고 목숨만 건지는 신세가 된다.
  • 기총(AA: 오키타 소지(Fate 시리즈) -> 회수됨, 통/무/지/정/매:46/9/85/78/89)) ◆
    장왕 기유의 딸로 기설의 언니. 원래 태자였으나 너무 병약하여 무엇 하나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명을 다 하였다.
  • 오이(吳伊):(AA:하시리 니오,통/무/지/정/매: 98(다다익선)/96/87/87/98(설부화용)) 기원전 328년
    양소룡 이후 인의패도론 계통의 유가 소수파 필두. 사실 이렇게 갈라진 것은 상기한 진안이 그 혜택을 본 화외인 쿼터제도(...) 문제도 있다. 다만 다른 학파에서는 다 나름의 이유로 이렇게 분할까지는 가지 못했다는 점도 밝혀졌다. 참고로 옛 오나라 출신 의 후손도, 오기의 후손도 아니다.

  • 곽외 (AA: 아사히나 미쿠루 , 통/무/지/정/매: / / / /) 상대부
    매사매골로 유명한 그 곽외. 기유가 기설이에게 유훈을 남기려고 할 때 끼어들어 주목받고, 기설의 선생님 역할을 했다.
  • 왕흘 (AA: 레밀리아 스칼렛, 통무지정매: 88/93/89/60/69) 복파장군 기원전 319년
    전(前) 진나라 장군. 상구대전 이후의 상황에 진나라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백기가 친초파의 제압을 명받았을 때 그 성향을 우려한 영탕과 장약에 의해 감시차 부장으로 따라붙으면서 등장. 허나 일단 본인도 친초파에게 데인 게 많아 딱히 희생을 최소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 후 크고작은 전쟁을 겪으며 백기의 부장격으로 활동했으나 여례의 난이 초기 진압에 실패한 영탕이 모든 책임을 백기에게 뒤집어 씌우고 팽하자 실망하였고, 거기에 지속적으로 내부에 환란이 이어지자 진나라에 희망이 없다 여겼다.
    결국 왕흘은 진지하게 이적을 생각하고 이전 종횡대전 전승연에서 조선 대사마 악의와의 연[136]을 들어 조선으로 향하였다. 악의는 이적을 희망하는 왕흘에게 마침 청구의 수군 지휘관 자리가 비어있으니 여기에 지원하면 바로 등용시켜주겠다 제안하였고 왕흘은 이를 받아들여 조선 수군 누선장군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된다.[137]
    기원전 282년 4월 의주에 해적들이 있음을 알고 신생 조선수군의 능력을 시험해 볼겸 대사마 악의가 토벌령을 내리니, 왕흘은 의주 인근의 모든 해적들을 토벌하고 그 공으로 복파장군의 칭호와 중대부에서 상대부로 승진하게 되었다. 다만 아무래도 시대적인 한계 상 주요한 전장이 육상이 될 수밖에 없다보니 기회가 닿는다면 그 쪽으로 향하고 싶어한다.
    지나치게 공적을 세워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 제나라 상인들에게 있지도 않은 밀수혐의를 뒤집어씌워 공적으로 제출하였지만 이내 중앙에서 조사가 들어와 거짓임을 들켜 징계를 받는다.[138]
  • 추연 (AA: 닥터 웨스트(데몬베인 시리즈))
    옥로가 천하에 대하여 탐구하던중 만나게된 음양가. 이후 고향인 임치에서 연구중 조선조정의 초청을 받지만 거절하였고 마지막 세번째에서 응해 현재 맥경에 거주중이다.[139]
  • 공손룡 (AA:죠르노 죠바나)
    조선출신 학자로 묵가 한단지부에 신세를 지면서 본인 왈 사물의 성질과 그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중요한 학문[140]을 연구중이라고 한다.[141] 학문을 연구하면서 틈틈히 한단지부의 일도 맡아서 해주는듯 하다.[142]
    이때 사람 관찰한다는 핑계로 눌러앉은 인상여와 여비가 떨어져 신세지려는 우경과 만나 친분을 쌓게된다.
  • 순자:
  • 이미 (AA: 양 웬리)
    원역사의 이목.[144] 태자가 북방순행 중 유능함을 보여 출현하였다.[145] 후일담에서 제나라 정벌시 남군을 맡아 지휘해 교수를 장악하여[146]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 유계 (AA: 미사카 미코토)
    원역의 한고조 유방. 원래 항우 휘하에 있었지만 배반하고 조선측으로 전향해서 무관이 되었다. 항우가 조선군에게 죽은 이후 사로잡은 장량을 설득하려 했지만, 장량이 거절한다. 마지막에 장량이 왜 배신했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왕후장상같은 거창한것에 관심없고 승산없는 반란에 더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답변하였다.
  • 소하 (AA: 없음)
    유계와 동향으로 가산을 털어 맥성으로 유학까지가 박사를 하였고 자식들도 관학을 통해 대부가되었다고 언급된다.


  • 조타 (AA: 사쿠라다 준)
    직위는 위위로 궁 경비를 도맡고 있다. 잡담 벌이고 있는 중간관리직 삼인방에게 가벼운 경고를 해주며 등장.
  • 위만: 원래라면 위만조선을 세우는 그 위만이나, 여기서는 청구군수로 등장했다.
    십제의 이상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인사선발에 이것이 적합한 인선인지 의문을 품지만 결국 파견을 승인한다.
  • 사마무택: 사마천의 증조할아버지. 이곳에서는 알음알음 남청구까지 다니면서 십제 말을 배운 인사다.
  • 신배:
  • 난포:
  • 사마천: 사마무택의 후손. 아래의 투나와 함께 오왕서를 편찬한다.
    세후의 치세를 평가할 때 미냐 생이냐로 싸우다가 결국 거칠 황 자로 합의하는 바람에 같이 황제에게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된다.(...)

4.2. 요동/예맥/청구계

  • 지방귀족 호세(AA:호세(유희왕)) ◆
    압록강 근처에 살던 소영주로 고거가 찾아가 사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 묵가인 양오 (AA:티오 플라토 (영웅전설 시리즈)) 기원전 360년 ◆
    좋게도 나쁘게도 정통 묵가적 성향을 띄었던 묵가인이다.
  • 강(AA:아마에 코로모, 통/무/지/정/매: 83/65/90/79/32) 하관박사 기원전 403년◆
    무생의 뒤를 이은 조선의 유가 대표. 조선 법가의 대표였던 공손앙과 대립각을 세웠다. 최신 스레 기준으로 수명이 다해서 조선후 기이에게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 미등용 인재 중 첫 번째 사망자.
  • 고기 (AA: 킬러 비 통무지정매: 90/84/69/69/95) 기원전 378년 ◆
    고질의 오빠, 고비의 아들. 동생이 더 뛰어났기에 출사하자, 어머니의 죽음을 기점으로 딱히 타국에 출사는 하지 않은 채 남은 생 동안 고씨 문중의 안뜰을 지켰다.[148]
  • 문부 AA:아베 나나 기원전 368년 ◆
    문인 이후 문씨의 후계자.[149] 능력치가 그닥 높지 않아서 to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aa답게 자신을 17세 소녀라고 부르거나 하면서도 장수하였다. 비록 중앙의 관직에 들지는 못하였으나, 정왕 기토의 인덕에 감화된 탓인지[150] 굳이 다른 나라에 출사하진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 정사군 양소룡(AA: 양 샤오롱 , 통/무/지/정/매: 95/85/85/96/98) 기원전 351년 ◆
    기비 다음의 조선 유가 계승자. 학자 치고는 굉장히 균형있게 높은 능력치가 특징적으로, 웬만해서는 제 몸 건사할 정도의 무력을 갖춘 이유는 대회의 최후 수단인 물리적 대화(...)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등장 당시 장왕 기유는 성년이었고, 그 첫째딸은 너무 일찍 죽어 이후 주로 기설에게 유가를 강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합종대전 당시 제가 임치를 공성하면서 발생한 소요로 호위가 부족해지며 중과부적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사망.
    기설의 스승이자 천하를 논하던 친우였기에, 이 소식에 기설은 잠시나마 제를 멸할 충동을 느낄 정도로 진노하였다.
    그 시호는 비의와 동시에 결정되어 정사군이 되었다.
  • 곽원: (AA: 토오야마 사쿠,통/무/지/정/매: 92/74/97/86/53/ ) 기원전 326년 ◆
    곽전의 딸이다. 어머니가 하남대전의 대패로 인한 비방을 견디지 못하여 분사한 것으로 인해 출사에 대한 약간의 환멸이 있어 사실상의 이모와 같은 관계인 크라우와 함께 니트생활을 하다 크라우의 죽음을 끝으로 그 행적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 진안(眞安):(AA:프린세스(프린세스 프린서플)통/무/지/정/매: 99/90/94/98/81) 기원전 324년
    양소룡 이후 유가 정통파 계승자. 십제 출신에 더불어 십제의 8대 가문 중 하나의 일원이다.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조선에는 학계 전반에 일종의 이민족 계통의 자리 보장 제도가 자리잡았음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 옥패(玉貝) : (AA: 셀베리아 블레스통/무/지/정/매: 91/92/78/43/73) 기원전 293년
    옥로의 직계손녀다.

4.3. 유목/북방계

  • 도림현령 후타요 (AA: 혼다 후타요 통/무/지/정/매: 93/93/28/60/92) 기원전360년
    비비오의 뒤를 이은 임호의 전설 2번째로 기원전 324년 월지연합이 구원군을 공격하였을때 이를 요격하여 섬멸하였다. 뛰어난 무력과 통솔력을 지닌 맹장이지만 머리가 딸려 전과보고를 할때 대충 1명당 100명씩 목을 쳤다라고 기록하여 나중에 직속상관인 비비오에게 크게 깨졌다.[151] 산동대전때 비비오의 부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비비오가 은퇴했을때도 곁에 있는것을 보니 같이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AA는 운중군->운중도호부의 유력자 대리aa로 사용중이다.
  • 호엔하임 (AA: 반 호엔하임 통/무/지/정/매: 98/88/19/54/33)
  • 묵가인 투찬 (AA: 세토 산) 기원전 341년
    비비오의 조카라는 특이사항이 있다. 비비오의 직계 자손이 모두 인재 후보에서 반려되었기에 유일한 투씨 2세대 네임드이다. 엔딩 시점에서는 지부장 자리를 밑의 설영정에게 넘겼다.
  • 법가인 올가(가칭) (AA: 올가 이츠카) 기원전 340년
    카이두 이후의 법가 수장. 종합하는데는 능력이 있지만, 관료로써 능력이 부족해 진진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래도 일단 유망하기는 한지라 관제개혁등에서 제자백가들이 사상 논쟁을 할 때 법가 대표로 자주 나오는 중
    법가 명사라는 위치로 초나라에 파견되어 한나라에 상채를 돌려주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 묵특 (AA: 맨하탄 카페)
    원역사 묵특선우. 반란을 일으킨 항우의 최종 사살 작전에 참여하여 직접 항우를 활로 쏘아 죽였다. 이후 자신의 시대에는 흉노가 돌궐과 조선을 극점으로 분단되어있어 이를 통합하기를 조선황제에게 청하였는데, 이를 공식 석상에서는 반려당했지만 몰래 불려들어가 사실 그 때가 되었음을 듣고 전율한다. 이듬해에 그 계획이 성공하게 되었다.
  • 투나 : 후일담 시점의 투씨의 후손으로 위의 사마천과 함께 사관직을 지내고 있다가 오왕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불교는 투씨 가문 내에서만 퍼졌고, 그에 기반한 관점으로써 사마천과 차이가 있는 의견을 편찬중에 전개한다.

4.4. 강남계

  • 항해 자문역 상학(AA:쇼카쿠)
    월나라에서 파견된 뱃사람.
  • 조선수군 자문역 장문(AA:나가토)
    노나라 정벌 이후 월나라에서 파견된 군사고문.
  • 항해 및 함선 자문역 작 선장(AA:잭 스패로우)
    월왕 제구가 조선과의 무역 재개를 요청하는 조건으로 파견된 뱃사람.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선장으로 반우(지금의 광저우)까지는 문제없이 항해한 경력이 있다. 중원 기준으로도 떨어지는 항해술과 그와 달리 호전적이고 중원 최고의 전투기술을 지닌 조선 수군의 전투력[152]을 보고 매우 황당해했다. 월나라 멸망 이후 월국부흥군에 참전하여 초 수군 상대로 승리 후 사망.
  • 항해&수군 자문역 향 선장(2대) AA:히비키(함대 컬렉션) ◆
    작 선장의 양녀. 어렸을 때는 무척 험하게 자랐다는 듯. 초나라에 가서 감상에 잠기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산동대전 때 제나라의 첩자들[153]을 운반한 죄로 반역죄에 엮여서 사형. 참치들을 슬프게 했다. 후일 앵커의 판정 결과로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던 유품까지 왕실에 몰수되어 보물창고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도 기유가 향 선장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에 그 유품을 자주 보면서 처벌이 과했다고 회고한 덕분에 기설 대에 선왕도 용서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며 월인들이 사면되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 묵가인 설영정 : (AA: 키즈나 아카리)
    투찬 까지 그닥 변동이 없는 기존 조선 묵가의 정통묵가적 기조에서 벗어나려는 전함부 출신의 신진파들의 수장. 부모대에 조선계 귀족의 피가 섞여서 장왕 때 숙청을 피해간 월인계 3세 출신이다.
    그래도 묵가인은 묵가인이라 특유의 조폭 수준(?)의 과격한 음모 및 행동력으로 결국 월인들의 반역죄를 사하는 요구를 관철시키게 된다.[154]

5.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

  • 대중산 사절+어느 지역의 성주(AA:를르슈 람페르지)
    공숙좌의 요청이라 쓰고 협박으로 조선이 조나라와 동맹하고 중산과의 동맹을 파기하였음을 중산 환공에게 전달한 사자. 이에 환공이 조선과 중산이 적대한다고 반드시 전쟁이란 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되려 웃으면서 그거 참 재미있는 일 아닌가! 하고 답하는 패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인재 등용까지 고려한 스탯 다이스를 굴렸는데, 통솔 66, 무력 37, 지력 73, 정치 64, 매력 9가 나와버려서 단역 확정 처분. 이정도면 앞에서 말한 패기는 그냥 평소하던 어그로다 그리고 거기서 출연 끝. AA는 를르슈인데 단역인 이유는, 저 AA가 동맹 파기를 알리는 사신으로 가는 시점에서 죽을 확률도 있었기 때문에 죽지 말고 살아돌아오라는 이유로 스레민이 최애캐를 들이밀은 것이 당첨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단 AA를 먼저 정하고, 활동이 정해지고, 마지막으로 스탯을 굴려서 결과값이 나온 것. 그래도 중반부 TO 멤버인 지로의 아버지로 판정이 난 점은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이후에는 지양자의 서자의 후손으로 판정이 나면서 망국의 후예가 되었다.
  • 고죽대부(연)→무원성주(조선)→무원상(조선)(AA:멜트릴리스/BB(Fate/EXTRA CCC)[155])
    조선의 연나라 정벌에 기여한 진정한 1등공신이자 생존의 달인. 조선과의 국경지대인 고죽의 방위를 맡고 있었는데 조선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깟 오랑캐 정도야.'하면서 요충지인 요서회랑[156]을 비워두는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조선군의 연나라 진군을 수월하게 도와줘버렸다. 이후 어찌어찌 정체를 숨기고 무원성주가 되어 조선에 귀의하였고 무원을 잘 다스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등장 끝. 무원 지방 영주의 대리 AA로는 가끔 등장 중.
  • 이주한 유가 외왕파(AA:아오자키 토우코)
    일시적으로 제나라의 평판이 하락[157]하자 제나라의 직하학궁을 나와 조선으로 왔으나 조선의 사상이 중원의 것과 크게 이질적이었지만 그들 중 반은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라는 반응을 보이며 그대로 눌러앉았다.
  • 조선 구귀족 세력(AA:히메가미 아이사)
    예전부터 조선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들. 기식 대에 변법을 통한 지속적인 탄압 정책으로 세가 꺾이고 충문군이 죽으면서 남긴 추은령[158]을 통해 완전히 뿌리가 뽑힐 예정이다. 이미 AA를 통해 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1)
  • 신흥 사(士)계층(AA:인덱스(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본래 구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후가 끌어들인 신흥 세력이었으나 되려 구귀족 세력과 붙어먹는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군주의 신임을 잃고 끈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위에 나온 추은령 크리로 구귀족과 나란히 쓸릴 예정. 이미 AA를 통해 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2) [159] 이후에는 조선의 모브 AA로 사용 되는 중.
  • 신 사족층(AA: 아카자 아카리)
    어장 초기의 인덱스와는 별도로 최근 성립한 관학 제도를 통하여 육성되고 있는 사족층. 언제부터인가 별의별 작업에서 점점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엔딩 시점에서는 조선의 엑스트라 역할을 꿰차고야 말았다.

[1] 그 결과 1대에는 외교나 첩보 및 기책, 2대에는 점유지 안정화 및 본령화 및 조선 내를 개혁하거나 민간 대규모 시설 등을 축조하는 행동, 3대째에는 인재 등용, 인재 관리, 그 외 잡다한 행동 등에서 인재를 발탁하거나 확인하게 될 확률의 증가 등에서 이점이 있었고 그 이득을 보았다. 통솔과 무력은 아직 사례가 없어 유추는 해도 정확한 효과를 알 수 없다.[2] 원래 이름을 몰랐지만 1000 신청으로 기부루라는 이름이 생겼다.[3] 공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비판 가능한 건 고거, 문예, 기이 세 명 뿐이였다는 듯. 다만 고거랑 기이는 과로로 성격 배린 문예와 달리 성격상 기식에게 딱히 사적으로 비판을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4] 후에 굴린 다이스에 따르면 이 3명을 제외하고도 기이의 아버지 겸 자신의 남편은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세후가 자신의 일가를 숙청해버린 탓에 자살을 한 남편을 보고도 어차피 저승 가서 다시 만날테고, 남편이 자신을 미워해도 자신은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심히 얀데레스러운 사랑인 것이 문제였지만(…)[5] 연나라와 조나라를 병탄하고 노나라에서도 공성부대를 투입하여 가장 핵심적인 전력을 담당했다[6] 다만 있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당시의 사정이나 시행착오 등의 요인이 있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며, 이것과 본인의 성정이 겹쳐 예견될 문제들을 태자를 비롯해 직접 길러내고 등용한 인재들이 끝끝내 원래의 스승 보다도 재빠른 속도로 정교하게 다듬고 운용하면서 해결해냈기에 빛이 바랄 일은 없다. 오히려 창업 군주로써 최대의 위업은 그녀의 사후에 이루어진 셈.[7] 원래는 92/51/83/45/80이었는데, 1000번대 효과로 정치력 상승 리다이스가 나와서 88로 상승했다. 이후 성장효과가 더해진 것이 위의 수치.[8] 관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전부 당대 위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실세 중의 실세들이다. 그런데 오기는 노년에 노망이 나서 기이랑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바람에 자신의 병법을 전수했다. 그리고 서문표는 바로 그 해에 제나라 자객에게 암살당했다.[9] 이건 이후 맹자에 의해서 조선의 복이었다며 찬양받기도 했고, 메타적으로는 진나라의 엄벌주의와 다른 길을 걷게 해서 진나라같은 엔딩을 피하는 첫 걸음이 되었다.[10] 이렇게 제도를 정비해둔 덕에 손자인 기유대까지는 기이가 정립해둔 체제를 큰 변형 없이 사용했고, 제나라도 놀랄 정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11] 그나마 제나라가 동맹을 제의해준 덕분에 최악은 면했다.[12] 고대에 이런 일이 가능할려면 군주의 몸을 갈아서 일을 해야 가능하다. 그만큼 기이가 신경을 많이 쓴것.[13] 본인이 생전에 원했던 시호는 옳은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의미의 악시인 정(丁)이었다.[14] 태자교환의 인연으로 기이와 친했던 위무후가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주려 했으나, 기이가 옳은 싸움만 하라는 뜻으로 좀 수정해 적용한 것이다.[15] 사실 이것은 전인제에게 패자 체제를 끝낼 것을 종용한 것이다. 비록 전인제의 이상에 의해 이 체제 하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던 조선이었고 제나라와 조선이 힘을 합치면 대충 없던 일로 덮고 무마할 수 있었지만, 만일 체제의 유지를 억지로라도 거들어 결국 계속 이어진다면 외교권을 사실상 빼앗기고 시작한 데다 여전히 외교권에 제약이 있었던 조선에게 있어서는 체제를 완벽하게 굳히는 꼴이었다. 때문에 대세가 거의 기울어졌을 때를 놓치지 않고 이 체제의 유지에 동의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그러나 전인제에게는 직설적으로 전달한 것이다.[16] 틀리는 것을 무서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색, 이제 이 나라는 너의 것이니 죽이고 살리고까지 마음대로라는 말은 않겠지만 전적으로 너의 행동으로만 움직인다는... 착각은 하지 마라. 오히려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순간 너의 색이 지워질 염려를 하는 쪽이 건설적일 것이다.[17] 다만 기토가 죽고 기유가 국군이 된 이후의 칭왕 회동에서 제, 조선, 위, 한, 진의 국군들이 왕으로 칭호를 올릴 것을 결의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첫 번째 왕이다.[18] 단지 여기에 더해서 부족하다면 자신의 비상금을 동원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게 자신의 10년치 품위유지비 수준의 규모를 조선의 예산에서 꿍쳐둔 것이라서 어머니 기토에게 호되게 두들겨맞았다.[19] 정확히는 제나라와 대등한 세력인 조선을 무릎꿇리고 중앙군 원수 전기를 비롯한 주전파들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패구에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거짓말.[20] 실제로 용담 출신의 개척민들이 대다수이긴 했으나 2세대나 중원 출신 역시 다수 섞여있었다.[21]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유독 기유에게만 나오는 저다이스 행진과 겹쳐 "역대 조선후/조선왕 중 가장 병신같은 녀석이다." 같은 말을 듣게 만드는 우행 그 자체였으나, 동시에 여론의 절반 정도가 자신들의 왕이 무릎을 꿇는 모욕을 받은 것을 열받아한 것을 포함하여 후일 제나라의 천하를 완전히 끝장내는 포석이 된다.[22] 이 때 기유는 그 옛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다시금 떠올리고서, 본래 자신의 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남길 평정심을 얻었다.[23] 이 때 조옹은 감사를 표하는 장왕 기유에게 정 그렇게 고맙다면... 알지? 같은 투로 맥성 내 왕실 술창고의 술 절반을 하사받았다(...)[24] 이 때 어장주(진행자)가 사용한 묘사는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딱 봐도 자기보다 위라서 싸움을 걸지도 않고 꿇는 그 묘사를 그대로 사용 ........조선 형님, 제나라 아우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할 정도였다.[25] 이 결과 전벽강은 치욕을 당한것에 더해서 동생 전영이 정치생명을 희생해 비난을 무마해줘서 멘탈이 나가버렸다.[26] 태왕의 태는 태산과 같은 한자로, 천황 지황 태황의 삼황 중 태황에서 따왔지만 태산에 올라서 봉선한다는 의미도 은근히 담겨있다[27] 역으로 이런 선이 확실한 성격 덕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숙청을 자주하던 기식이나, 선이 지나치게 넓어서 오히려 당혹스럽게 만드는 유후보다는 신하들이 모시기에는 나은 편이라는 듯하다.[28] 특징으로 면면이 진행자의 최애캐다.[29] 시기상 기도의 딸 또는 손녀로 추정[30] 이는 주례에 실려 있는 주나라의 관직구성 시스템과 비슷한데,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상 혹은 상방은 문서에도 있지만 정식 관직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이 없다. 그리고 천관의 수장은 대총재가 아니라 '대재'이고 이 사람이 실질적 수상이다. 주례의 편목상으로 천관총재, 지관사도, 춘관종백 등으로 이어지고 다른 직책은 그 편목명에 대를 붙여서 장관을 의미하는데, 천자 직속인 천관만 그 구성이 다르다. 동관은 고공기가 남아있으니까 내용이 다른 것이고 이호예병형공에 일대일 대응 되는 것도 아니지만, 저 내용도 그렇고 대총재도 그렇고 한참 후대의 조선시대 느낌이 난다.[31] ...지만 현재는 대장군과 통합되어 대사마대장군으로 이름이 넘어가고 실재로 하관업무를 보는 것은 하관상경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이것은 오류다. 해당 스레 내에서의 대사마대장군은 하관(병관)의 수장인 대사마와 군부의 수장인 대장군의 권한 모두를 행사할 수 있는 상위의 직책이며, 애초에 대사마 직함 자체가 하관상경을 뜻하는 직함이다. 다만 스레 내에서 대사마가 아니라 하관상경이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대사마대장군이라는 직함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스레주가 의도적으로 돌려서 표기했던 것이며 실제로는 하관상경 = 대사마가 맞다.[32] 대사마대장군이란 직함 자체가 군사행정을 맡는 문관직의 수장인 대사마와 실제 병사들을 이끄는 무관직의 수장인 대장군을 통합한 직함인데 쉽게 말해 군사행정과 병권을 포함한 일국의 모든 군권을 개인이 합법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다. 사실 고대에 군권 자체가 군사행정과 군사지휘가 세분화되지 않았기에 대사마 직함으로 병사를 지휘하거나 대장군이 군사행정에 개입하는 일은 흔했고, 이 때문에 훗날 한나라에서는 대사마와 대장군 중 한쪽이나 양쪽 모두 비상설직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대사마대장군 직함이 특별한 이유는 편법이 아니라 아예 합법적으로 일국의 모든 군권을 장악 할 수 있는 직함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러한 막대한 권한으로 권세를 누렸던 인물은 전한 시기의 곽광이 있다.[33] 비슷한 이유인지는 안 나왔으나 악자도 군주 직속의 별부사마로 오랫동안 많은 병사들을 통솔했다.[34] 중국역사에서 어사대라는 조직과 어사대부라는 관직은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이후 전한시대에 정착. 다만 이후 지위가 많이 떨어져서 단순 감찰역으로 변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고려시대의 어사대가 변한 것이 조선시대의 사헌부이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으로, 정2품인 판서보다 낮다. 즉, 어사대부가 아경급이었던 것은 조선시대 대사헌의 위치와 비슷했던 것.[35] 군사 업무를 보는 하관 제외.원래는 하관의 업무중 군정계의 일도 보았지만, 업무가 너무 광범위해져 권한이 너무 강해지는지라 분리되었다.[36] 군사행정과 군사운용 이중 군사행정을 군정이라고 부른다.[37] 승상이나 대사마대장군과는 달리 어사대부는 조선상을 거치지 않고 군주 직속이다.[38]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 특이사항으로 아직 인물과 관직제도의 분화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은지라 소부의 상경은 소부상경이 아니라 소부라고 불린다. 농지에서 나오는 수익 이외의 수익을 관리한다는 모양[39] 대간의 수장은 간의대부인데 중외대부의 지위이다.[40] 삼공이나 조선상은 해당사항이 없으나 압박으로써는 작용한다는 모양[41] 현재 운중, 오환, 거란[42] 무관에서 위장군의 역할을 가져온 것이다.[43] 원역사에서는 9경 중 하나였다.[44]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악양 항목 참고.[45] 참고로 조선 내에서 기병 만능론을 주창하여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건 태자교환으로 조선에 와 있던 위앵.[46] 세후 기식과 동갑이다. 이러니 수틀리면 자기 주군에게 이빨을 까지[47] 나머지 둘은 기취와 기라. 모두 원칙주의자들이다(...)[48] 대표적인 예시라고 들기에는 뭣하지만, 문예가 점점 기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이유로 차기 조선상을 정할 당시에는 능력주의 기조가 조선에 그리 강하지 않아 연공서열에 의해 조선상이 될 처지에 놓이자, 정확히 3주 이내(20일...)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국가를 멸망시킬 국정을 혼란시킬 자신이 있다는 냉정한 자기 평가로 고사하였다. 세후가 이를 가납하여 두 번째 조선상은 기취가 된다.[49] 이때 기식이 말하는 게 흠좀무한게 중앙에서 일 안하면 조만간 출정할 조선군의 말발굽에 예맥 부족 몇이 밟혀도 난 모른다? 라고 하자 스어는 그저 데꿀멍...[50] 당시 스어는 지방의 관리인 상으로 실권은 몰라도 계급상으로는 엄연히 기취보다 낮았다.[51] 작중 기준으로 승상의 유래가 되는 일화가 이 때 생성된다. 기취가 조선상에 취임하는 조건으로써 자신의 비서로 들일 인물을 기라로 선정하는데, 그 관직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는가에 대해서 이미 기라 등이 생각해 둔 것이 그대로 적용되게 된 것이다.[52] 그래도 초나라의 기풍과 어머니의 원수 문제 때문에 결국 초왕의 고민을 이끌어냈고, 이는 월나라의 결례를 쐐기로 하여 제나라와의 거의 성사된 동맹을 재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53] 안 씨를 사성받을 때 확정된 것이다.[54] 본디 조선의 말은 유목민의 것과 동등했으나 시작 시점에서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온순하고 왜소하도록 개량하였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원상복구시킨 것[55] 백두는 기식을 몰라보고 너 이름 대라 니 조선후한테 다 말할끼다! 이랬다가 옆에 있던 문예가 정체를 밝히자... 그리고 악마같은 조선후는 '너 대사공할래? 고자될래? 아니면 사형 받을래?라는 무자비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 이후론 이하생략.[56] 요구가 위대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보정을 받았다.[57] 별부사마는 휘하 병력의 구성에 재량권이 있는데, 당시 거느린 병력은 속된 말로 자기 밑에 애들 중에서도 그나마 쓸만한 놈들(...)이었다.[58] 역덕후라면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 한데,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 율곡 이이의 만남을 거절한 일화와 판박이. 그래서 스레주 공인 '충무공급 원리원칙주의자'란 별명이 붙었다.[59] 정왕 기토의 시대에 들어서는 조정의 원로이자 왕의 친척이었던 탓인지, 재위 직후부터 정왕은 문성군에게 심적으로 기대는 부분이 좀 있었다는 게 사후 밝혀졌다.[60] 심지어 자기 어머니인 공양군의 마지막 출정이었던 무성 공략전을 무익한 희생만 낸 전쟁이라고 대차게 깠다.[61] 공손앙은 본디 위(衛)나라의 공족이다.[62] 그나마 월이 뜯어말린 덕에 전후사정은 들어주고 처형했다(...).[63] 원래의 역사에서 맞이한 최후를 생각해보면 원역사에서보다도 나라와 주군을 2대씩이나 한참 잘 만난 덕을 본 것이다. 어장주(진행자)의 공언에 따르면 만약 당시의 조선의 군주가 기식이나 기설이었다면 쓰기는 커녕 본질을 간파한 뒤 통제가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숙청했을 것이라고.[64] 이러한 이유로 재능은 있지만 출신이 이민족의 하층민인 탓에 텃세와 멸시 등에 시달리는 마위의 상황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다.[65] 제나라는 2인자인 추기, 위나라는 공자 위신과 부마 기람, 송나라는 공자 대언이 지휘를 맡았고 한나라의 경우 아예 한후가 직접 참전했다.[66] 하도 오래 살아서 누구 장례식에 고정이 나오면 어? 아직 살아 있었어요?!라고 놀라는 게 정형화된 패턴이 되기도 했다(...)[67] 일단 이름을 조선이나 중원식으로 변형하지 않고 아무로라고 그대로 사용하며, 조선후가 아닌 조선의 카칸을 찾아뵙고자 한다고 말하고, 기토가 술자리를 마련하였을 때 '카칸이 베푸는 술자리! 오오 감사'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후 기토가 조선의 요동 지역을 순방할 때에는 왕(...)으로 부르는 정도까지 적응하였다.[68] 죽기 직전 살 날이 얼마 안 남음을 느끼고 퇴청을 신청했고, 이를 윤허받은 시점 이후 시스템 적으로 신하의 은퇴를 권할 수 있게 되었다.[69]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라고 점찍고 넘겼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지라 사감이 완전이 지워지지는 않았는데, 당시 고씨의 식객이었던 장의가 혀를 함부로 놀려 다시금 불이 붙은 탓도 있었다.[70] 이 때 고질보다 10살 정도 연상이던 고정은 맨날 말 타면서도 멀쩡하단 사실이 나왔다(...)[71] 투제라는 이름은 일종의 별명이자 중원식 이름인데 삼황오제할때 그 제를 쓴 덕분에 중원식 이은 한자로는 쓰지 말란 소리를 들었다(...)[72] 훗날 비비오가 은퇴할 때에 보인 반응을 볼 때, 조옹은 측근이 아니라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73] 무력과 통솔 외에는 별 보정이 없다는 선택지가 걸렸는데, 정작 지력이 99가 나와서 어장주가 경악하기도 했다(...)[74] 단, 그때문에 가상인물로 판정되기 때문에 실존인물 보정은 가지지 못한 채로 시작했으나 손빈병법의 힘으로 이를 회복하였다.[75] 동시에 참치들도 조옹을 계속 활용하는 것이 국가에 더이상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고 판단해서 자를려고 하면서도 워낙 세운 공이 많아서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76] 일이 처리된 이후, 기도의 금령들은 본래 제후의 국과 대부의 가에서 행해지는 자치권과 독립권을 인정하는 것의 연장선상이니 철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말에 “제국이라는 이름의 일국(一國)에는, 종실이라는 이름의 일가(一家)외에 다른 가(家)는 필요가 없다고.”라고 답했다. 즉 제후령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려죽여버릴 작정이었고, 대군에 건 제약을 풀어줄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77] 이로 인해 진나라 파견 법가가 학살당할 때 격분해서 끌려나가기도 했다.[78] 왕한테 올리는 문서에 나,너 라는 단어를 쓰거나 아무튼 목을 많이 뱄다! 수준의 문서도 올라왔다(...)[79] 조옹,비의,하기,카이두[80] 조선 왕족이 자성 기씨라는 것이 복선이었다.[81] 그 덕분에 이 어장에서 자주 당하게 되는 괴상한 이름이 지어지는 것을 도리어 피한 실존인물이 되었다(...)[82] 위계서열 보다도 안다 관계를 그것도 공석에서 중시하여 말을 한 탓에 곽전이 뜯어말렸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이 행동을 안다로써의 관계를 버린 것으로 오해했기에 서러워했다[83] 아버지의 부하들은 단지 초원의 법도에 충실했기에 이후 실력을 보이자 크라우를 따랐지만, 어찌되었든 크라우에게는 그 동안의 경험이 매우 뼈에 사무치게 되었다.[84] 다만 물증이 충분치 않은 것도 있었지만 당사자가 고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85] 삼국지의 그 비의와는 동명이인이다.[86] 특히 산동대전 이후로는 돈 없는데 돈을 무더기로 써대는 무관들에게 열 받은 모앙(...)[87] 무려 파촉 제외한 모든 중원국가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전적이 있다.[88] 상관인 비의보다 모든 능력치가 상위호환이다. 그런데 오히려 비의한테 공부 좀 하라고 혼나는 장면이 나와서 능력치가 절대는 아니라고 보여 주는 예시가 되기도 한다.[89] 덕분에 정작 기유는 별 생각 없었는데 태자의 측근으로 낙인찍혔다는 듯(...)[90] 어사대부 자리가 군주의 최측근임을 고려하면 하기가 기유의 최측근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91] 하기 이후 태자인 기도가 잠시 맡았지만 조선의 업무를 가르침 받는 위치였으므로 본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92] 다만 대총재 직은 예전에 6경의 수장이였기에 6경 중에서도 특별한 면이 있어서 아무리 문씨라도 조금 더뎌질 수밖에 없어서인 면도 있다.[93] 조선상이 인재 추천하는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좀 노골적인 부분이 있었다[94] 본인도 후견인 격이던 조옹에게 태클을 건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궁여지책이었던지라, 고씨와 문씨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서는 자신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고 속으로 여러 번 쾌재를 불렀다(...)[95] 지금으로 따지면 관아의 비정규직이다.[96] 양수가 평양으로 이주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로는 참치들에게 출생지 메리트(?)까지 양수 하위호환이라고 놀림받기도 했다.[97] 제나라 군이 산적으로 위장해 기회를 보는 식으로 건설 중이던 장성의 동부를 점거하였다.[98] 본인이 딱히 색을 밝히는 건 아니지만 aa에 노출도가 넢은 종류가 많고 이름이 발가벗는다는(나체 할 때의 그 한자다.)뜻이 있어서 참치들 사이에서는 치녀 취급(...)을 받고 있다. AA적 문제도 더하여 나이를 먹고도 노출도가 높은 복장을 선호할 예정인 것은 덤.[99] 송 쪽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조선왕 기설이 송의 연종 참여에 붙인 조건으로 임명되었다. 사실상 조선에서의 국외파견직인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금 불려올 수도 있다는 언질 또한 있었고, 존재 자체가 송의 태도를 강요하는 역할을 하며, 본인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언젠가는 다시금 조선군을 이끌고 싶다는 점을 계속하여 강조하는 만큼 송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무리가 좀 있다(...)[100] 가문의 보전과 이미지메이킹을 염두에 둔 결과인 것은 이미 장왕의 눈에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101] 조선의 성향과 그 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당대의 한계로 인하여 이는 대외적으로 20만 규모로 부풀려진다(...)[102] 이 때 한나라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면서 사용한 표현은 원 역사 염파의 말년에 다시금 조국의 병사를 지휘해보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을 담은 그 문구였다.[103] 기원전 296년 탄핵 당한 이래 10년만의 대역전극 같은 복귀로, 자신의 비원을 이룸과 조선왕이 약속을 지켰음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하였다. 일말의 의심을 지니던 본인을 나무라기도 하면서.[104]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보통 4차전을 장기전,5차전을 초장기전으로 보고 5차전부터는 공자가 보급을 못받아 물러나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다.[105] 기설 딴에는 그래도 기회는 준다고 차후의 일이 바빠지는 자리로 보냈지만 어쨌건 그 근본 심상에는 의심으로 인한 경고가 존재하였다[106] 이는 현 역대 능력치가 확인된 모든 인물을 통틀어 최상위에 달하는 것이다. 참고로 차상위자는 능력치 100 2개에 그 중 통솔에 진 트레잇이 붙고 실존인물 보정을 받는 악의.[107] 이 때의 일은 원칙 상 중형 내지는 거금의 속전을 벌로 치루어야했고, 군주의 측근들도 포함해서 수많은 곳에서 모금을 받았기에 해결되었다. 후일 이 사실은 승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오래 갔는데, 이 문제로 아직도 살아있던 전 조선상 고정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당시에는 완전히 무마하지는 못했다.[108] 청년기[109] 장노년기, 291년의 임치 공방전 이후 고생을 하면서 폭삭 늙었는지 291년부터 사용중[110] 징계로 강등당한 상태였는데 왕인 기설이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강권하였다.[111]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직감한 진개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임치를 내어주고 물러날 것을 권하였지만, 자신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기회까지 준 조선왕의 믿음을 차마 바래게 할 수 없어 정중히 거절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믿음에 그 몇 갑절로 보답하게 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고.[112] 다만 킹덤과는 달리 사서를 따라서 지장겸 문관으로 묘사된다.[113] 원역사에서 극신은 방훤에게 패해서 죽었다(...)[114] 협 계통의 행보를 지향하는 편이며, 이 때문에 양수와도 죽이 좀 잘 맞았다.[115] 이 때문에 실질적(당시 위나라의 공격은 철저하게 기습이었기에 백기가 움직인 시점은 모든 게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로 감을 따른 감이 있었다.)원군으로써 출진했던 백기는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조우하여 자초지종을 알아보려는 중, 상식적으로 적장이 이리도 허무히 붙잡힐 일이 없기에 음진현 단독으로 위군의 2파까지 격퇴한 것으로 오인하는 일이 있었다.(...)[116] 이를 통보한 승상 가현은 이때 조선상의 자리를 태자가 받으면서 그 업무교육을 떠맡게 된 탓에 일이 앞으로 많아질 이유로 언짢아있었다. 때문에 조선왕에게 하라는 명을 들은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다.(...)[117] 이로써 TO에 들지도 않은 상태로 삼공까지 오른 전무후무한 위업을 세우게 된다(...)[118] 당시 6경급은 조하와 양수정도였는데 양수는 반쯤 편법으로 소부가 되는 것으로 상경급으로 올라온지라 맡기기 어려웠다.[119] 이전 최연소 삼공은 조하의 어머니 조옹.[120] 다만 생일이 빨라 오라버니 취급중(...)[121] 진나라에서 상방에 해당하는 직위인데, 이 위치는 임명된다는 전제 하에 어디까지나 진왕족이 맡았다.[122] 치수에 정평한 정도의 뜻이 있는 사자성어이다.[123] 스레주에 의하면 패도를 지향하는 것을 제하면 후대의 맹자가 주창할 역성혁명론과 근접하다고 평했다.[124] 제환공 전오는 이제 질세라 돈을 뿌려가며 이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저희는 묵가인이 아닙니다(...)'[125] 스레주의 말에 따르면 장수할 경우 석가모니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만날 수도 있다고(...)[126] 스승이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펜팔인 공수속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127] 현 조선후인 기토에겐 오라버니라 불릴 정도로 각별하며, 태자 기유 역시 조어를 숙부로 깍듯이 모시고 있다.[128] 이러한 조씨 문중의 사정 때문인지, 일단 한자상 성씨가 같(아진)다면 동족으로 볼 정도로 그 범위가 넓어, 후일 원 역사적으로는 더 말해 무엇할 정도의 남남이었던 조사가 조씨 문중의 일원으로 취급되어 후원을 받아 현령으로 천거되었다.[129] 악자의 손주이다. 즉 악양의 외증손주. 이 시점 와서는 할머니가 은퇴 후 당주로써 문중 관리에 힘썼던지라 영수 악가의 가문 내 파란도 사라져 딱히 어떤 위해도 없었다.[130] 다만 합횡과 연종등의 논의는 조선에서 활발히 일어나서 눈에 띄지는 않은 듯하다.[131] 본인은 모르지만 초나라에서 한 주장들이 영직에게 도박수를 던지게 만들어서 304년에 합횡이 결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의미로는 자기 일자리를 만든 격(...)[132] 조선 고관들이 쓸모 있다고 여겼고, 조선상이었던 고정의 손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기어이 고문을 동원해서 뜻을 꺾어버려서까지 살려두고 관직을 줄 이유조차 없었다. 비슷하게 종횡가였던 장의가 진나라에서 죽었다는 점을 생각하면...[133] 부고 소식은 제나라에 있었던 가족에게 전달되었다. 이 덕분에 제나라에서도 동초원 대전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었다.[134] 오해방지차 언급하자면, "대 공" 이 좀 더 정확하다.[135] 조옹이 동초원대전에서 조장에게 일을 맡기도록 추천했지만 제대로 처리 못한 이유도 있다.[136] 악의는 인사치례로 또 보자고 한거였다.[137] 뒤늦게 자신을 힘든 수군에 짬처리 시킨것을 알고 악의를 원망하였다.[138] 평상시라면 최악의 사형내지 중벌을 내렸겠지만 하필 제나라가 엮어있어 함부로 징계를 내려 사과하는 형국을 피하고 싶어했기에 징계선에서 마무리되었다.[139] 세번째 초청에서 찾아온 관리가 만일 거절시 강제로라도 끌고 가려고 벼르다가 추연이 시원스럽게 응하자 아쉽다는 반응을 보인다.[140] 원 역사를 생각하면 아마도 명가[141] 한단 지부장은 그다지 탐탁치 않았지만 묵가내에서 공손룡이 다루는 연구에 지지를 하는이가 많은것으로 보인다.[142] 조선 조정에서 묵가의 중재로 임치에 있던 추연을 초대하고자 할때 서신을 맡아서 임치까지 갔다왔다.[143] 위의 조표와 다른 후대의 인물로, 조옹의 막내자식이다[144] 이목이 아닌 이미라고 한 이유는 어장주가 이목이 이름이 아니라 이미의 오기라는 가설을 채택해 이렇게 된것이다.[145] 그러나 곧 엔딩이기에 활약을 볼수는 없을것 같다.[146] 북군은 염파가 지휘하여 순우에서 전단에게 가로막혀지만 남쪽은 진개가 이미 죽고 없어 이미에 대항할 인재가 없었다고 한다.[147] 전한의 어사대부를 지낸 주가 또는 그의 종제 주창으로 추정[148] 아래의 문부처럼 기토의 최후 보정을 받았다.[149] 직계자손은 아니고 친척이다.[150] 메타적으로는 정왕이 죽은 이후 그녀의 매력치 100에 해당하는 인재 관리 보정의 최후의 불꽃이다. 이는 똑같이 능력치 100인 항목이 있던 세후 기식과 유후 기이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기설도 보유했으나, 예상 적용 시점이 진행 종료 이후이므로 후일담에 영향을 줄 지언정 시스템 형식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151] 적의 병사 수는 매우 정확하게 보고했는데 벤 머리 숫자를 그보다 터무니없이 많게 적어넣은 셈이니 부족분이 어디서 온 것인지부터 추궁당할 수밖에.[152] 조선 수군 전투력의 진실은 다름아닌 배를 너무 못만드는 바람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전투원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 이걸 알게된 작 선장은 억지로 배를 못만들어서 전투원을 향상시킨다는 놀라운 발상이라고 감탄했다.[153] 월인들로 오랜만에 고향 사람과 만난 향 선장은 반가워서 큰 의심을 못 했다는 듯[154] 이는 장왕 기유가 필요했기에 처벌을 행했으나 그 정도가 과했음을 생전부터 기설에게 강조한 것이 한몫하였다. 보물로써는 별 가치도 없었던 작 선장의 유품을 간수했던 것이 복선이라고...[155] 모녀관계로, BB가 퇴각해서 모친에게 의탁한 이후에는 행적이 분리되지 않고 직책을 승계하였다.[156] 요동과 중원을 잇는 통로. 그 유명한 산해관이 이 근방에 있다.[157] 이는 본의아니게 조선과 연관이 있는데 조선후 기식이 승하하고 기이가 계승하자 모든 나라에서 조문객을 보내는 와중에 월나라만 조문객을 안보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니 '제나라랑 적대관계니까 안보내도 되겠지?' 덕분에 중원 모든 국가들이 월나라는 물론 월나라 뒷배를 봐주고 있던 제나라를 의심하자 제환공 전오가 쇼미더머니를 퍼부어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이후 기이가 양평에서 맥성으로 천도하자 모든 나라가 축하사절을 보내는 와중에 또 월나라 혼자 안보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외교적인 결례를 저지르자 월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제나라는 아예 양아치 국가로 찍혀버렸다.[158] 쉽게 말해 은혜를 넓힌 다는 뜻으로 본래 장자에게만 상속되는 가독을 자녀들 전원에게 상속시킨다. 대략 오초칠국의 난 직전에 가의조조(전한)가 제안한 제후왕 견제책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159] 그래도 이후 조선의 권역과 활동에서 엑스트라들이 필요하면 이들이 등장하는 식으로 구귀족 세력과는 달리 죽어서 얼굴은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