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5 15:54:53

김극일

<colbgcolor=#000><colcolor=#fff> 김극일
金極一
별명 왜경의 원로
출생 1890년 4월 9일
평안북도 의주군
사망 미상
본관 안산 김씨
직업 관료, 경찰
학력 대성학교 (졸업)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친일 행적2.2. 해방 이후
3. 여담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관료, 경찰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일본 제국 경찰을 지내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체포, 고문, 살해했고 덕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거론한 최악의 흉적으로도 꼽혔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또한 역사학계에서는 노덕술, 하판락, 김덕기, 김태석, 유승운, 이성근, 최석현, 정춘영 등과 함께 친일 경찰의 대명사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2. 생애

1890년 4월 9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1909년 3월 대성학교[1] 졸업하고, 고향 의주군으로 돌아가 취명학교 교원을 지냈다.

2.1. 친일 행적

1910년 8월 경술국치 당시 판임관 대우의 한국통감부 순사보를 지냈다. 1912년 8월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4년 9월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이후부터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1916년 4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신의주경찰서 경부[2]를 지낼 당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살상한 바가 있다.[3] 1919년 5월 독립자금 사건과 관련해 홍원숙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1920년 1월 독립운동가 장지흥이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가려고 할 때 강을 건너도록 도와주겠다면서 안동현 진강산으로 유인해 함정에 빠뜨린 후 직접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압록강 얼음물 속에 던져버렸다. 1920년 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기관원을 총검거하는 '이륙양행 G. L. 쇼 사건'을 일으켰는데, 당시 임시정부연락소에서 독립자금 등을 조달하던 신민회 출신의 홍성익이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가짜 편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기관원 여러 명을 더 유인했고 결국 홍성익, 황대벽, 김기준 등 5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때 홍성익은 신의주경찰서에 끌려간 직후 끝내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고등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우리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우리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추잡한 무리)들이니 선우갑, 김태석, 김극일과 같은 흉적이라
- <[독립신문]]> "칠가살(七可殺)", 1920년 2월 15일 1면

이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 2월 15일 독립신문을 통해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이라는 뜻의 '칠가살(七可殺)'[4]을 공표했을 때 같은 친일 경찰인 선우갑, 김태석과 같이 예시로 지목된 일화가 있다.

1921년 4월 경상남도 경찰부 경시까지 승진한 뒤, 5월에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시 및 보안과장 겸 순사교습소장으로 발령받았다. 같은 해 7월 경상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시 겸 부산경찰서 경시를 맡았으며, 1922년 10월 강원도 경찰부로 부서를 옮겨 보안과 경시 및 보안과장을 지냈다.

1926년 7월 경찰 생활을 마치고 강원도 김화군수로 부임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928년 1월 강원도 양양군수를 거쳐 1930년 5월 인제군수를 재직하다가 1931년 정6위에 서위되고 같은 해 12월에 퇴직했다. 군수로 재직 중이던 시기에 일제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는데 1928년 11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1930년 12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군수직을 퇴직한 후인 1932년 10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감사장을 받았다.

8.15 광복 후에 고원섭이 발간한 《반민자 죄상기》라는 책에서는 그를 3·1 운동 당시 수많은 애국자를 살상한 악의 화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2.2. 해방 이후

광복 후, 1949년 2월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왜경의 원로 김극일', '일제에 극심한 충성을 바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8월 공소시효 기간 만료가 되기 이전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1950년 7월 6.25 전쟁 당시 납북당했으며, 이후 그의 행적은 밝혀져 있지 않다.

3. 여담

2002년 대한민국 국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같은 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되었다.


[1] 놀랍게도 자신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간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세운 학교다.[2] 1919년 8월에는 평안북도 경찰부 경부를 겸했다.[3]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한 이 시기에 신의주 지역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지역이었다.[4] 1번째는 일본인, 2번째는 매국적, 3번째는 고등경찰·형사·밀고자, 4번째는 친일부호, 5번째는 적의 관리, 6번째는 불량배, 7번째는 배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