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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1887)

제10대
정교원
제11대
이성근
제12대
이기방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성근
李聖根
파일:이성근.png
창씨명 가나가와 고키
金川聖
출생 1887년 11월 30일
황해북도 금천군
사망 불명
직업 경찰, 관료, 언론인
학력 군립육영학교 (중퇴)
경력 황해도 관찰도 순검
충청북도 경부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전라남도 산업과장
함경북도 산업부장과 참여관
충청남도지사
매일신보 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대화동맹 이사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고문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친일 행적2.2. 해방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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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경찰이자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덕기, 유승운 등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이었다.

2. 생애

1887년 11월 30일 황해북도 금천군에서 태어났다. 1901년 4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중봉사숙에서 수학하다가 사숙이 폐지되자 1906년 4월 군립육영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마저도 12월에 폐교되자 중퇴했다.

2.1. 친일 행적

1907년 5월 황해도 관찰도 순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황해도 관찰도 순검교습소에 입소한 후 7월 수료를 했다. 이후 7월에 황해도 관찰도 해주경무서 순검으로 근무하면서 해주수비대와 함께 해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의병을 진압하는데 참여했으며, 이 공로로 10월에는 위로금을, 12월에는 특별상여금을 받았다. 1908년 1월 지방관제 개편 이후 황해도 관찰도 해주경무서 순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황해도 관찰도 경찰부 순사로서 해주경찰서 순사를 겸직했다. 1909년 1월 경부채용시험에 합격한 후, 경부로 승진하여 황해도 관찰도 경찰부 경부를 지냈고, 3월부터는 송화경찰서 경부로 근무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0월 황해도 황주경찰서 경부에 임명되었으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에는 신계경찰서 경부로 일했으며, 같은 해 10월 충청북도 음성경찰서 경부로써 사법주임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1915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7월 청주경찰서 경부로 옮겨 근무하면서 사법주임을 지냈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진압에 참여했고, 당시 청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던 독립운동가 오면수, 인종익 등을 체포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로 옮겨간 이후 검열 업무를 담당하다가, 1920년 3월 고등관 8등의 경시까지 승진해 평안북도 경시 겸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장에 임명되는 등 계속해서 승진가도를 달린다.[1] 그 당시 만주 안둥현 육도구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간부 12명을 체포하여 국내 압송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평안북도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박치의를, 11월에는 의주와 선천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보합단원 백운기와 오동진 휘하의 정의부 소속 독립군들을 체포하는 등 일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경력들을 통해 1921년 9월에 고등관 7등으로 승급했으며, 1922년부터는 보안과장을 겸임했고, 같은 해 8월 관둥청 경시를 지냈다. 계속해서 1923년 12월 고등관 6등으로, 1926년 8월 고등관 5등으로 다시 승급했다.

1927년 5월 고등관 5등의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전라남도 내무부 산업과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1929년 7월 고등관 4등으로 승급하였고, 1930년 4월 지방관제 개편 이후 전라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 2월 고등관 4등의 참여관으로써 함경북도 참여관을 부임하고, 같은 해 11월 함경북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2월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고, 1933년 3월 고등관 3등까지 승급하는 등 악질 친일파로써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1935년 4월부터는 함경북도 내무부 내무부장, 함경북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함경북도지부 감리관, 함경북도농회 회장을 겸임했다.[2] 6월에는 함경북도 임시국세조사부 부장을 지냈으며, 10월에는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기도 했고, 1937년 2월부터 1938년 7월까지 함경북도어업조합연합회 이사장을 맡았었다. 1937년 4월 함경북도 약유비제조업수산조합 조합장을, 1938년 3월 함경북도 방공위원회 위원을 지냈다가, 같은 해 6월 고등관 2등까지 올라간 그는 함경북도 참여관 자격으로 함경북도 내무부 내무부장을 겸임하게 되는데 그 당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응소자 동원 소집, 군용물자 지원, 여론 환기, 전사자 조위 등 전시 업무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8월에 함경북도 방공본부 서무부장을 지내던 중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9년 5월 고등관 2등의 지사로 또 다시 승진한 그는 충청남도지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달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여로 선임되었으며, 국민정신총동원 충청남도연맹 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도지사를 재직하던 시기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재단법인 충청남도장학회 이사와 부여고적보존회 이사를 지냈고, 또한 같은 달에 조선총독부 시가지 계획위원회 임시위원을, 그리고 1941년 6월까지 대전자강회 이사를 맡았으며, 1939년 6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부여사적현창회 이사로 활동했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충청남도광업협회 명예회장을, 11월에는 조선유도연합회 참여를, 12월에는 충청유도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0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중소상공업을 신장, 농촌은 적극 구제, 식량의 배급을 원활화」라는 신년사를 발표하고, 내선일체를 옹호하며 국가총동원의 사명을 완수하자고 주장했다. 같은 달 기원2600년과 시정30주년을 맞이하여 경성일보가 개최하기로 한 조선박람회의 고문에 선임 되었으며, 11월에는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를 받고 참석해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3월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끝에 그는 고등관 1등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며, 5월 훈3등 서보장을 받기도 했다. 충청남도지사 재직 시기에도 중일전쟁에 관한 지원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1941년 5월 충청남도지사직을 사임한 후, 같은 해 6월 <매일신보>의 취제역 겸 사장에 취임했고 해방 때까지 활동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대동아공영권의 완성과 고도국방국가체제의 수립을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6월 특지로 종4위에 승서되었으며,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는 와중에도 각종 친일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 겸 상임위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달 주최된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해 황국신민화운동 구체화 등 임전체제의 확립에 대한 내용을 논의했으며, 26일에는 정학회 결성에도 참여한 걸로 알려진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도한 채권봉공대에 참여하여 광화문에서 박상준, 민영기 등의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채권 판매 활동을 전개하였고, 같은 달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가 통합된 대규모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겸 조선임전보국단준비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단체 결성식을 앞둔 10월 11일 평안북도 신의주에 조선임전보국단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 파견되어 유세활동을 전개했으며, 이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에, 10월 31일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1941년 11월 5일 경성지원병제도취지보급실행위원회에서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6일에는 격려연설파견위원으로 파견되어 경성부 광희국민학교에서 지원병 제도를 독려했으며, 8일에는 경성부 보성중학교에서 졸업예정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열어서 학병 지원을 권유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 제국미국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부민관에서 개최한 결전대강연회에서 연사로 참여하면서 '신동아 건설과 조선'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한 친일 연설의 내용이 참 가관인데 "성전 승리를 위해 한반도가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사명을 다하고 일제에 더욱 충성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같은 달 조선유도연합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1942년 5월 친일단체 조선춘추회의 후신 조선신문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개편 이후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겸 평의원, 사무국 총무부 이사 겸 선전부 이사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또 같은 달 일제가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매일신보>가 주최한 징병제실시감사축하회라는 강연회에 참석하여 「광명한 세대 도래 — 청년지도책임 일층 중대」라는 제목의 환영사를 발표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만주국 신징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전에 이규완, 한상룡, 김경진 등의 친일파들과 함께 참석했고, 11월 경성부육군지원자후원회에서 활동했다. 또한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東洋之光)』 1942년 1월호에 「선전의 날에 듣는다」, 3월호에 「싱가폴 함락에 부쳐」, 12월호에 「대전 1주년의 소감」 등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의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동(同) 연맹 사무국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 겸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에는 경성부 부회의원 후보자추천회 위원으로, 6월에는 국민총력경성부연맹 참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8월 1일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진호, 신석린, 이해승 등의 다른 A급 친일파들과 함께 징병령실시감사회를 조직한 다음, 징병제실시기념헌금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8월 6일 경성중앙방송국 라디오 방송에서 '개병(皆兵)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조선인의 징병을 독려하고 천황에 충성할 것을 강조하는 모습도 보였다.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조직한 징병제실시기념사업실행위원회의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9월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대동아연락가담회에도 참석했으며, 11월 8일 매일신보가 주최한 '필승의 결전장으로'라는 제목의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같은 달 14일 도쿄까지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개최된 재경반도학생특병지원병지원궐기대회에 참석하여 조선인 유학생들이 특별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연설하면서 선동을 일삼았다.

1944년 4월 농업보국농본회 고문에 선임되었고, 5월 17일부터 6월 26일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주최로 학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격려대의 일원으로써 간토반에 편성되어 도쿄, 군마현, 야마나시현, 사이타마현 등지를 돌아다니며 친일 깡패 박춘금 등과 함께 격려, 위문 활동을 수행했다. 6월에는 재단법인 경성부사회사업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9월에는 친일 종교인들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 조선전시종교보국회의 참여로 활동했고, 동시에 전 조선 18개의 신문사와 통신사들이 주도한 반도무훈현창회 조직에 참여하고 활동했다. 1945년 1월 부민관에서 열린 처우감사총궐기대회에 참석하고, 이 대회에서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감사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같은 달 윤치호, 김명준 등과 함께 일본에 방문했으며, 각 신궁에 참배한 후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같은 해 2월 6일 도쿄에서 '처우개선과 조선'이라는 제목을 달고 최후의 승리 획득에 헌신적 노력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친일 연설을 한 적도 있으며, 이후 전쟁협력단체 대화동맹의 이사가 되었다.

1945년 3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황해도 지역으로 파견되어 원호운동 상황을 시찰했다. 같은 해 6월 최린을 중심으로 한 친일단체 조선언론보국회의 고문으로 선임되었으며, 박춘금을 중심으로 한 친일단체 대의당의 발기인 및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직전인 7월 4일 조선언론보국회와 매일신보가 공동 주최한 본토부결전부민대회에서 좌장으로 추천받아 활동했고, 5일에는 매일신보 국민의용대 대장이 되었으며, 7일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참여로 선임되었다. 18일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의 고문이 되었으며, 23일 신태악, 이종린 등과 함께 국민동지회 조직한 다음 고문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이 일어나던 7월 24일 대의당이 부민관에서 주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에 참석하여 개회사를 주도했다가, 강윤국 의사와 조문기 의사가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대회가 무산되는 수모를 겪었다.

2.2. 해방 이후

해방 후, 1945년 10월 매일신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답게 1949년 1월 18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며[3], 2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다. 3월 특별검찰부에 의해 기소되어 공판이 진행되었으나, 8월 3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8월 6일 서울특별시 자택에서 납북당했고, 이후 그의 행적은 밝혀져 있지 않다.

3. 여담

그의 악행은 훗날 2002년 대한민국 국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 같은 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되었다.


[1] 그 유명한 고문의 황제 김덕기의 상관이 바로 이성근이었으며, 그들로 인해 1000여명이나 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당하고, 이들 중 대부분이 살해당하게 되었다.[2]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명일 정도면 그가 얼마나 적극적인 친일파였는지 알 수 있다.[3] 박흥식, 이종형, 최린, 이승우, 이풍한에 이은 검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