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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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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

1. 개요

金斗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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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자신의 직속 상관이자 자신을 하얼빈 지역으로 파견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 인물. 과연 실존 인물인지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이태진 서울대 인문학 교수는 김두성을 고종이라고 주장했고[1] 신운용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 책임 연구원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2]

2. 생애

미조부치 타카오: 그대는 의병이라고 말하는데 그 통할자는 누구인가?

안중근: 팔도의 총독은 김두성이라 부르며 강원도 사람이지만 지금의 거처는 모른다. 그 부하에 허위, 이강년, 민긍호, 홍범도, 이범윤, 이은찬, 신돌석 등이 있지만 그중에는 지금은 없는 사람도 있다.

미조부치 타카오: 그대의 직속 상관은 누구인가?

안중근: 김두성이다.

미조부치 타카오: 그대는 특파원으로 하얼빈에 왔다고 말하나 그것은 김두성으로부터 지휘를 받았다는 것인가?

안중근: 이번에 새삼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이전에 연추 부근에서 나는 김두성으로부터 청국과 노령 부근의 의병 사령관으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중근 자서전 中

안중근이 체포된 후인 1909년 10월 26일 공판 도중 자신의 상관으로 김두성이라는 인물을 거론하며 그가 조선 8도의 독립 운동의 총독을 맡고 있으며 자신은 그의 지시로 하얼빈에 왔다는 발언을 했다. 당연히 일제는 눈이 뒤집혀 이 김두성이라는 인물을 찾아 헤맸지만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에도 김두성이라는 인물이 대체 누구인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안중근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김두성이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당시 항일 운동계에서 최고 수준의 거물이다. 이 정도 거물이면 아무리 본인이 철저하게 은둔했다고 해도 드러나는 행적이 있기 마련인데 행적이 없다. 학계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상관이자 대한의군 총독이라고 주장한 이 인물의 정체를 밝히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항일 운동사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유인석[3], 고종설, 최재형[4], 사이고 다카모리[5], 가상의 인물설 등은 물론 대한 그 자체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사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가명이나 위조 신분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의외로 이미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김두성이라는 가명을 쓴 것일 수도 있다. 가령 김구는 김창수라는 이름을 김구로 바꾼 것도 모자라서 백정선이란 가명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봉창 의사는 죽을 때까지 김구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김익상, 오성륜과 함께 황포탄 의거를 했던 독립운동가 이종암도 양건호라는 가명을 쓴 바 있고 독립운동가 김산도 '김산'이란 이름이 가명이며 본명은 장지락이다. 반정부 운동(일제처럼 내 나라가 아닌 외세 포함)을 하는 사람이 가명을 쓰는 경우는 흔했다. 러시아 혁명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도 가명을 썼고 심지어 가명이 본명처럼 알려진 경우도 흔하다. 가명 문서 참조.

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에도 일본이 '김두성'을 잡지 못했다면 광복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이고 설령 병사했더라도 유족들이 지금까지 숨길 이유는 상식적으로 없다. 그런데 유족들이 이를 밝히기는커녕 가짜 유족들이 '김두성'을 사칭하는 일조차 없었다. 안중근이 눈치가 전혀 없지 않는 한 그런 거물의 존재를 괜히 밝혀[6] 일본이 수색하도록 했을 리는 없다. 안중근이 말한 그대로 본명이 김두성인 사람이 당시 독립군 총대장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능성이 높은 것은 실제로 독립군 총대장격에 해당되는 인물은 있었지만 그의 인적 정보를 숨기기 위해 가명을 댔을 가능성, 혹은 그런 인물 자체가 없고 그냥 일제를 낚기 위한 계략, 즉 가공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다. 일단 김씨가 당시 흔한 성씨였고 이름인 두성부터가 북두칠성의 준말이자 28수 중 북방에 속한 으뜸별이다. 게다가 '북두칠성'이란 이름은 안중근의 활동명이자 아명인 '안응칠'에 그대로 대응되는데 안중근이 태어날 때 배와 등에 7개의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한 아이'라고 여기고 이름을 '응칠'(應七)로 지었기 때문이다.

3. 관련 문서



[1] 고종의 비자금 일부가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에게 갔으니 설득력 없는 주장은 아니다.[2] 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남북문화예술연구》 제11호, 2012.[3] # 이 가설은 이미 1969년에 조동걸 춘천 교육대 교수(현 국민대 명예 교수)가 「안중근 의사 재판 기록상의 인물 김두성고」(《춘천교대 논문집》7, 1969년)에서 주장한 바 있다.[4] 연해주에 있었던 조선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군비 산업으로 막대한 떼돈을 벌었던 인물로 이때 벌어들인 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5] 세이난 전쟁에서 살아남아 일본 정부한테 당하였던 과거사에 대해 앙갚음을 한다는 이야기. 안중근의 출생일로부터 2년 전인 1877년에 사망했으니 신빙성은 없다.[6] 만약 은둔했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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