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21:27:20

나와즈 샤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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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직위: 파키스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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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제12·14·20대 총리
미안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
میاں محمد شہباز شریف | Mian Muhammad Nawaz Sharif
파일:549133d52fcf2.jpg
<colbgcolor=#01411C><colcolor=#fff> 출생 1949년 12월 25일 ([age(1949-12-25)]세)
파키스탄 자치령 라호르
(現 파키스탄 펀자브주 라호르)
국적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12·14·20대 총리
1990년 11월 6일 ~ 1993년 7월 18일
1997년 2월 17일 ~ 1999년 10월 12일
2013년 6월 5일 ~ 2017년 7월 28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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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411C><colcolor=#fff> 배우자 쿨숨 나와즈 (1971년 결혼~2018년 사별)
자녀 4명
학력 펀자브 대학교
종교 이슬람교
신체 173cm
소속 정당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

1. 개요2. 생애 및 정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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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키스탄의 정치인, 기업가. 12대, 14대, 20대 총리를 맡았다. 파키스탄 역사상 최장기 재임 총리이며, 셰바즈 샤리프 전 총리의 형이다.

2. 생애 및 정치활동

1949년 12월 25일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3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무함마드 샤리프[1]가 성공한 철강 사업가라 부유하게 자랐으며[2] 라호르에 있는 펀자브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70년대 파키스탄 총리였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3]의 국유화 정책으로 인해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철강 사업체를 정부에 뺏기면서 큰 손실을 봤다고 한다. 샤리프는 26살이던 1976년 처음 정계에 입문했는데 처음에는 빼앗긴 가족들의 사업체를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같은 해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정당에 가입했으며, 이 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펀자브 주 재무장관, 국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무함마드 지아울하크[4]를 설득해 사업채를 되찾는 것도 성공한다. 주 재무장관 시절 펀자브 주를 파키스탄에서 가장 부유한 주로 만들었으나 그와 동시에 빈부격차도 심해졌다.
1985년 펀자브 주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군부와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인기에 힘입어 '펀자브의 사자'라는 별명도 생겼다.

1988년 8월 지아울하크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샤리프는 국회의원 대신 펀자브 주 총리에 다시 도전했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후 1990년 10월 총선에서는 베나지르 부토 총리를 꺾고 40살의 나이에 파키스탄 총리가 된다.
총리가 된 그는 각종 민영화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사회는 보수화하고 이슬람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샤리프는 군부, 보수파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외교적으로는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고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에 파키스탄군을 파병하기도 하였으며, 사우디에 군을 파견해 사우디 주요 인사들을 경호하기도 했다.[5]
경제적으로는 민영화와 자유화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는데 1993년까지 파키스탄 국제항공을 포함해 115개 회사가 민영화되었으며 수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택시 6000대 도입 등 각종 대규모 사업을 밀어붙었다.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도 계속 진행했고 그 때문에 1990년 12월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중국의 도움을 받아 원전 건설을 완료했다.
하지만 1993년 샤리프가 지아울하크 대통령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굴람 이샤크 칸(Ghulam Ishaq Khan)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지자 칸 대통령은 58-2b라 불리는 권한을 이용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샤리프를 총리에서 끌어내렸다. 샤리프는 즉시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샤리프의 편을 들어줬지만 군부가 샤리프에게 사임을 압박했고 결국 샤리프는 1993년 7월 18일 총리에서 물러나며 자신의 첫 번째 임기를 마감한다. 이 후 총선에서 야당인 인민당이 승리하며 베나지르 부토가 다시 총리가 된다.

작성중
[1] 1919년 11월 18일 ~ 2004년 10월 19일[2] 실제로 샤리프 가문은 성공한 사업가 가문으로 매우 유명하다[3] 이슬람 사회주의자였다. 이 사람 딸인 베나지르 부토 역시 훗날 파키스탄 총리를 지냈는데 2007년에 암살당했다.[4] 군인 출신으로 1977년 쿠데타를 일으켜 부토 총리를 쫓아내고 총리가 아닌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부토 전 총리는 1979년에 사형시켜버렸다. 198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5] 사담 후세인은 친미성향이었던 사우디를 매우 싫어해 걸프전 당시에도 사우디에 스커드 미사일을 날리기도 했다. 이라크와 파키스탄 관계는 2003년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전쟁으로 몰락하면서 개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