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니 모레티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역대 칸 영화제 | ||||
황금종려상 | |||||
<rowcolor=#000000> 제53회 (2000년) | → | 제54회 (2001년) | → | 제55회 (2002년) | |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 | → | 난니 모레티 (아들의 방) | → |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 |
감독상 | |||||
<rowcolor=#000000> 제46회 (1993년) | → | 제47회 (1994년) | → | 제48회 (1995년) | |
마이크 리 (네이키드) | → | 난니 모레티 (나의 즐거운 일기) | → | 마티유 카소비츠 (증오) |
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 ||||
심사위원대상 | ||||
<rowcolor=#000000> 제37회 (1980년) | → | 제38회 (1981년) | → | 제39회 (1982년) |
테오 앙겔로풀로스 (구세주 알렉산더) | → | 난니 모레티 (좋은 꿈) | → | 크쥐시토프 자누쉬 (임페러티브) |
역대 베를린 국제 영화제 | ||||
은곰상 : 심사위원대상 | ||||
<rowcolor=#000000> 제35회 (1985년) | → | 제36회 (1986년) | → | 제37회 (1987년) |
라슬로 루고시 (환상의 꽃) | → | 난니 모레티 (미사는 끝났다) | → | 쿠마이 케이 (바다와 독약)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난니 모레티 Nanni Moretti | |
본명 | 조반니 모레티 Giovanni Moretti |
출생 | 1953년 8월 19일 ([age(1953-08-19)]세) |
볼차노 도 브루니코 시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제작자 |
링크 |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각본가, 영화 제작자.로베르토 베니니, 잔니 아멜리오와 함께 이탈리아의 1990년대 트로이카 감독으로 꼽혔으며, 3인 중에서도 가장 전복적이고 진보적ㆍ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채 작품 속에서 자신이 사회에 대해 가진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다뤄왔다.
혼자서 감독, 제작, 시나리오, 배우, 배급, 심지어 극장주까지 겸하는 1인 제작 시스템으로도 유명하다.
2. 스타일
" 나는 감독이 아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사람일 뿐이다. "
영화작업 초기부터 전통적 서사를 벗어난 반자연주의적 화법에 몰두했고, 이탈리아 내 남성성과 권위의 위기, 정치적 좌파의 위기, 국민과 국가의 관계 변화 등의 주제를 냉소적 시각과 지적 시각을 결합하여 풍자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특히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극렬 안티로 유명해 <4월과 악어>라는 베를루스코니 비판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20세기 말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풍자 영화를 만들어왔으나,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 교황의 공허함,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딸 등 '상실'을 주제를 다루는 영화도 만들기 시작했다.
3. 생애
3.1. 1980년대 작품활동
1953년 이탈리아 볼차노현 브루니코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성장했다.혁명적 열기가 유럽대륙을 휩쓸었던 1960년대에 10대를 보내면서 좌파적 성향을 갖게 된 모레티는 고등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단편영화 작업에 들어갔고, 8mm 카메라로 68운동세대의 분노를 그린 <나는 자급자족한다>(1976)를 통해 장편 데뷔한다.
이후 1970년 말 당대를 배경으로 이탈리아 좌파 청년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기법을 채용하여 묘사한 <에체 봄보>(1978)[1]는 당시 20억 리라의 수익을 올리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이후 영화 신동이 탄생했다"는 찬사를 얻었다.
1978년에는 타비아니 형제가 감독한 <파드레 파드로네>에서 주인공의 군인 시절 친구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는데, 이때 타비아니 형제로부터 카메라가 등장인물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고정된 카메라 앞에 배우들이 들락날락하게 찍는 등 카메라에 현실을 담는 법을 사사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희망없는 감독의 영화 만들기 과정을 그린 메타 시네마 <좋은 꿈>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서서히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한 고등학교의 수학교사가 살인자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담은 1983년작 스릴러 <비안카>에서는 이전작들에 비해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하고 평면적이던 화면도 훨씬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1985년작 <미사는 끝났다>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는 등 비평적 성공을 안겨줌과 동시에 상업적 성공도 거두었고,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9위로 선정되었다. 이때의 성공을 발판삼아 1986년 친구 안젤로 바르바갈와 함께 사케르필름(Sacher Film)이라는 제작사를 차리게 되는데, 이를 통해 제작부터 배급까지를 자신이 총괄하는 1인 제작 시스템을 꾸린 후 젊은 감독들의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사케르영화제’를 운영하고 1991년부터 로마 트레스테레베[2]에 360석 규모의 예술영화관 시네마 누오보 자케르를 개관하는 등[3] 주류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1989년 <빨간 비둘기>가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그해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1위로 선정되었다.
카예 뒤 시네마/연도별 베스트 1989년 올해의 영화
<rowcolor=#ffffff> 순위 | 제목 | 감독 |
1 | 똑바로 살아라 | 스파이크 리 |
빨간 비둘기 | 난니 모레티 | |
3 | 4인조 | 자크 리베트 |
데드 링거 |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 |
5 | 카니발 |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
야바 |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 |
7 | 검은 비 | 이마무라 쇼헤이 |
무정한 사람 | 파트리샤 마주이 | |
리틀 베라 | 바실리 피출 | |
10 | 우연한 여행자 | 로렌스 캐스던 |
집에 가고 싶어 | 알랭 레네 | |
집시의 시간 | 에밀 쿠스트리차 |
3.2. 1990년대 ~ 현재 작품 활동
1994년 <나의 즐거운 일기>는 한국 영화팬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난니 모레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감독 본인이 직접 실명으로 출연해 스쿠터를 타고,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을 하는 옴니버스 영화로 카예 뒤 시네마 올해의 선정 1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선정되었다.카예 뒤 시네마/연도별 베스트 1994년 올해의 영화
<rowcolor=#ffffff> 순위 | 제목 | 감독 |
1 | 나의 즐거운 일기 | 난니 모레티 |
2 | 잠이 오지 않아 | 클레르 드니 |
3 | 칼리토 | 브라이언 드 팔마 |
4 | 야생 갈대 | 앙드레 테시네 |
5 |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 헨리 셀릭 |
6 | 트라볼타 앤 미 | 파트리샤 마주이 |
7 | 지옥 | 클로드 샤브롤 |
8 | 잔 다르크 | 자크 리베트 |
9 | US 고 홈 | 클레르 드니 |
10 | 죽음과의 작은 협상 | 파스칼 페랑 |
M. 버터플라이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
1994년 칸 영화제에서 당시, <나의 즐거운 일기>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레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더불어 유력한 황금종려상 수상 후보작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논란의 펄프픽션이 수상하면서, 3등상에 해당하는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다. 카예 뒤 시네마, <로드쇼>등의 유력 영화지에서도 특집기사로 이러한 점을 시사했는데, 감독도 인터뷰에서는 감독상 수상과 영화제의 불만을 감독 성격 그대로 드러냈다. 난니 모레티는, 1997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었는데, 이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를 지지하였다.그리고, <체리향기>는 제50회 칸 영화제/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한다.
1998년작 건강 악화를 털어내고, <4월>로 다시 한번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한발 더 정치적이지만 유쾌한 영화로, 이탈리아 정치사와 모레티 자신의 가족사를 교차시키며 이탈리아 좌파의 흉한 몰골을 보여주는 작품을 찍었다. 부산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되어, 마니아들이 호응을 얻었다.
2001년 아들을 잃은 남자의 상실감을 매끄럽게 풀어낸 아들의 방은 1978년 이후 이탈리아 영화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국제 비평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고, 이 작품을 기점으로 조금씩 작품 스타일이 변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정치에 뛰어들어 시위대열의 맨 앞에서 메가폰을 잡다가 2006년작 <악어>를 연출하고, 다시 2년 동안 이탈리아의 토리노 국제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 행정가로 활동한다.2011년 5년 만에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로, 다시 영화감독으로 귀환하였고,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9위로선정되었다.
2015년 나의 어머니가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그해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1위로 선정되었다.
카예 뒤 시네마/연도별 베스트 2015년 올해의 영화
<rowcolor=#ffffff> 순위 | 제목 | 감독 |
1 | 나의 어머니 | 난니 모레티 |
2 | 찬란함의 무덤 |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
3 |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 필립 가렐 |
4 | 네이키드 청춘 | 래리 클라크 |
5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 조지 밀러 |
6 | 도원경 | 리산드로 알론소 |
7 | 인히어런트 바이스 | 폴 토머스 앤더슨 |
8 | 아라비안 나이트 | 미겔 고미쉬 |
9 | 상가일레의 여름 | 알란테 카바이테 |
10 | 해안가로의 여행 | 구로사와 기요시 |
2020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던 신작 <일층 이층 삼층>이 코로나19 판데믹 사태로 인해 1년 뒤인 2021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처음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를 연출한 것으로, 이스라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는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2023년 공개된 <찬란한 내일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21세기 모레티 감독의 영화가 주로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강했던 것에 비해 본 영화는 20세기에 보여줬던 코미디적 터치와 더불어 메타 영화를 표방했다.
4. 필모그래피
4.1. 극 영화
<rowcolor=#ffffff> 연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출연 | 비고 |
1973 | 패배 La sconfitta | O | 단편 | ||
1973 | Paté de bourgeois | O | 단편 | ||
1974 | Come parli, frate? | O | 중편 | ||
1976 | 나는 자급자족한다 Io sono un autarchico | O | 장편 데뷔작 | ||
1977 | Un autarchico a 'palazzo' | O | TV용 단편 | ||
1978 | 에체 봄보 Ecce Bombo | O | O | ||
1981 | 좋은 꿈 Sogni d'oro | O | O | ||
1983 | 비안카 Bianca | O | O | ||
1985 | 미사는 끝났다 La messa è finita | O | O | ||
1989 | 빨간 비둘기 Palombella rossa | O | O | ||
1993 | 나의 즐거운 일기 Une nouvelle vie | O | O | ||
1994 | L'unico paese al mondo | O | 단편 | ||
1996 | Il giorno della prima di Close Up | O | 단편 | ||
1998 | 4월 Aprile | O | O | ||
2001 | 아들의 방 Les Destinees Sentimentales | O | O | ||
2003 | Il grido d'angoscia dell'uccello predatore (20 tagli d'Aprile) | O | O | 단편 | |
2006 | 악어 Il caimano | O | O | ||
2007 | 그들 각자의 영화관 中 Diaro di uno Spettatore | O | O | 옴니버스 영화 참여작 | |
2011 |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Habemus Papam | O | O | O | |
2015 | 나의 어머니 Mia madre | O | O | O | |
2021 | 일층 이층 삼층 Tre piani | O | O | O | |
2023 | 찬란한 내일로 Il sol dell'avvenire | O | O | O |
4.2. 다큐멘터리
<rowcolor=#ffffff> 연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출연 | 비고 |
1990 | La cosa | O | O | ||
2003 | The Last Customer | O | O | 단편 | |
2006 | Il diario del caimano | O | O | 단편 | |
2007 | L'ultimo campionato | O | O | 단편 | |
2017 | Piazza Mazzini | O | O | 단편 | |
2017 | Ischi allegri e clavicole sorridenti | O | O | 단편 | |
2018 | Santiago, Italia | O | O |
5. 기타
- 초창기 영화에서는 미켈레 아피첼라(Michele Apicella)라는 얼터 에고를 내세워서 영화를 만들었다. 일종의 자기 투영적 스타 시스템 캐릭터[4]인데 <빨간 비둘기> 이후로는 쓰지 않는다. 아들의 방부터는 본인 캐릭터에 조반니라는 이름을 쓴다.
- 마르크스주의자로, 젊은 시절 공산당을 지지했다. 68혁명에 참여했으며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창한 자율주의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공산당 해체 이후로도 좌파 성향은 여전해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마테오 살비니 같은 우파 정치인들을 까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 코미디 영화를 주로 만들고 본인이 자신 영화에 주연으로 종종 출연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이탈리아의 우디 앨런이라는 별명도 있다. 실제로 감상하기 어렵지 않고, 유머리스한 장면이 많다. 다만 우디 앨런이 음악과 촬영에 치중하고 좀 더 일상적인 유머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쪽은 정치 풍자적인 코미디를 찍는 등 스타일은 많이 다르다.
- 자기 의견이 확고한 성격으로도 유명한데, 언론과 인터뷰를 하던 중 질문이 길어지거나 비꼬기라도 하면 아예 인터뷰 중간에 나가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하고, 1997년 제 50회 칸 영화제때도 당시 같이 심사위원이었던 마이크 리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를, 난니 모레티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를 지지해서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그해 황금종려상은 두 작품의 공동 수상이 되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칸 심사위원장을 할 당시엔 민주적인 토론 방법을 채택했다고.
- 카예 뒤 시네마가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로, 연도별 베스트 10에 6번이나 오를 정도로[5] 카예 뒤 시네마 평단에게서 지지를 받는다. [6]
- 한국에서는 전성기에 비해 늦게 소개된 감독에 속한다. 갓 이름을 알리던 시기가 독재 정권 말기랑 겹쳐 있었고, 2001년 나의 즐거운 일기와 아들의 방이 정식 개봉되고 EBS에서 4월이 소개되면서 알려진 편. 이후로도 내수성이 강한 <악어>는 개봉하지 않았다.
- 2024년 5월 29일 씨네큐브에서 있었던 찬란한 내일로 GV에 온라인 화상회의로 참석해 송경원과 함께 대담을 나눴다. 직접 내한은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한국 관객들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
[1] 자기만족에 빠진 대도시 좌파 중산층을 비꼬는 작품이자, 당대 최고 배우 가운데 하나였던 좌파 알베르토 소르디를 풍자했다.[2]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합정동이나 연남동 같은 힙스터 동네로 유명하다.[3] 촬영이 없을 때는 이 영화관에 출몰한다고 한다.[4] 대체로 실제 모레티를 반영한 좌파 지식인 청년으로 등장하나, 각 작품마다 연계성은 없다. 일례로 <좋은 꿈>에서 미켈레는 영화감독으로 등장하지만, <비앙카>에서는 수학교사로 등장한다.[5] 미사는 끝났다, 빨간 비둘기, 나의 즐거운 일기, 아들의 방,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나의 어머니[6] 2010년대 결산에서는 나의 어머니를 전체 7위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