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9:48:56

파벨 네드베드

네드베드에서 넘어옴
파벨 네드베드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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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이르지 네메츠
(1996~2000)
파벨 네드베드
(2000~2006)
토마시 갈라세크
(2006~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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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네드베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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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체코인 100명을 선정했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카렐 4세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바츨라프 하벨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얀 지슈카
6위7위8위9위10위
얀 베리흐 얀 후스 안토닌 드보르자크 카렐 차펙 보제나 넴초바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에밀 자토펙 카렐 고트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16위17위18위19위20위
오타카르 2세 성 바츨라프 바츨라프 클라우스 야로슬라프 헤이로프스키 아네슈카 체스카
21위22위23위24위25위
토마시 바타 에드바르트 베네시 오토 비흐테흘레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즈데네크 스베라크
26위27위28위29위30위
에미 데스틴 야로미르 야그르 마리아 테레지아 카렐 크릴 밀로스 포먼
31위32위33위34위35위
블라스타 부리안 로만 셰브렐레 이반 흘린카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 다니엘 란다
36위37위38위39위40위
밀라다 호라코바 블라디미르 멘식 야로슬라프 하셰크 알폰스 무하 얀 에반겔리스타 푸르키녜
41위42위43위44위45위
파벨 네드베드 얀 얀스키 프란티셰크 크리지크 얀 젤레즈니 얀 팔라흐
46위47위48위49위50위
베라 차슬라프스카 레오시 야나체크 알로이스 이라세크 야로미르 노하비차 얀 마사리크
51위52위53위54위55위
보후밀 흐라발 얀 네루다 요세프 융만 그레고어 멘델 프란츠 카프카
56위57위58위59위60위
프란티셰크 토마셰크 스바티 보이테흐 요제프 비찬 요세프 카예탄 틸 루시에 빌라
61위62위63위64위65위
카렐 히네크 마하 스바타 루드밀라 볼레슬라프 볼리프카 루돌프 2세 요세프 도브로프스키
66위67위68위69위70위
요세프 라다 루돌프 흐루신스키 바츨라프 2세 마들렌느 올브라이트 아네타 랑게로바
71위72위73위74위75위
오타카르 1세 루드비크 스보보다 도미니크 하셰크 얀 루쳄부르스키 밀란 바로시
76위77위78위79위80위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 스바타 즈디슬라바 야로슬라프 포글라르 라디슬라프 스몰랴크 올가 하브로바
81위82위83위84위85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헬레나 루치지코바 파벨 티그리드 엘리슈카 프르제미슬로브나 밀란 쿤데라
86위87위88위89위90위
블라디미르 레메크 볼레슬라프 1세 마그달레나 도브로밀라 레티고바 미콜라시 알레시 에밀 홀룹
91위92위93위94위95위
프란티셰크 파이틀 클레멘트 고트발트 즈데넥 마테 조지 보스코벡 마르타 쿠비소바
96위97위98위99위100위
이르지나 보흐달로바 밀로슬라프 지메크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모 밀로시 제만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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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축구인
파일:1679903089773_f9a414.jpg
이름 파벨 네드베드[1]
Pavel Nedvěd
출생 1972년 8월 30일 ([age(1972-08-30)]세)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헤프[2]
국적
[[체코|]][[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92kg[3]
주발 오른발 (양발)
직업 축구 선수 (윙어, 미드필더[4][5] / 은퇴)
축구 경영인
등번호 SS 라치오 - 18번
유벤투스 FC - 11번
소속 선수 TJ 스칼나 (1977~1985 / 유스)
RH 헤프 (1985~1986 / 유스)
TJ 슈코다 플젠 (1986~1990 / 유스)
VTJ 타보르 (1990 / 유스)
FK 두클라 프라하 (1990~1991 / 유스)
FK 두클라 프라하 (1991~1992)
AC 스파르타 프라하 (1992~1996)
SS 라치오 (1996~2001)
유벤투스 FC (2001~2009)
FK 스칼나 (2018)[6]
경영 유벤투스 FC (2012~2015 / 기술 이사)
유벤투스 FC (2015~2023 / 부회장)
국가대표 91경기 18골 (체코 / 1994~2006)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논란 및 사건사고7. 여담
7.1. 남자를 울리던 남자
8. 네드베드에 대한 말, 말, 말

[clearfix]

1. 개요

체코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윙어미드필더였으며 애칭은 네디. 엄청난 활동량과 날카로운 크로스, 대포알 슈팅으로 유명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파벨 네드베드/클럽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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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국가대표 경력

네드베드는 유로 1996에서 말 그대로 미친 듯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약팀이라고 평가받던 체코를 유로 결승전 무대까지 끌고 간 것. 독일과의 개막전에서 공격적인 부분의 결함을 드러냈지만, 수비적인 부분에서 맹활약했고, 이탈리아와의 2차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끌었다.

네드베드는 경고누적으로 8강 포르투갈전에 결장했으나, 체코는 4강 진출에 성공했고, 4강전에서 네드베드는 승부차기 때 2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시켰고, 결국 프랑스를 물리치고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에게 골든골을 허용해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유로 2004에서 네드베드는 골은 넣지 못했지만 밀란 바로시, 얀 콜러와 합을 맞추며 맹활약한다.

체코는 라트비아네덜란드를 힘겹게 잡아냈으며 독일과의 최종전에서는 네드베드를 비롯한 9명의 선수가 휴식을 취했음에도 2:1로 승리하며 8강 진출에 성공한다.

체코는 덴마크를 3:0으로 대파했지만, 4강전에서 그리스에게 연장 혈투 끝에 패한다. 전반전에 부상으로 네드베드가 교체된 이후 체코는 미드필더에서부터 힘을 잃어갔으며 결국 그리스의 한방으로 인해 패배한다. 네드베드가 계속 뛰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한데 유로 2004 당시 네드베드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리고 유로 2004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유로 2004 이후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6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 네덜란드에 밀려 2위로 직행을 하지 못한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동안 네드베드가 없는 체코 대표팀은 이전만 못한 공격력으로 부진하자 매번 네드베드의 복귀를 당시 체코 축구협회와 카렐 부뤼크너 감독 팬들까지 복귀를 원했지만 그때마다 네드베드는 고사했지만 최종적으로 노르웨이 와의 플레이오프로 월드컵 진출 티켓이 걸려있자 조국을 위해 한시적으로 복귀를 선언했고 노르웨이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과 2차전 모두 출장하면서 맹활약 끝에 노르웨이를 두번 모두 1:0으로 제압하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슬로바키아와 분리후 처음 출전권을 획득하였고 네드베드의 공로가 굉장히 컸다. 네드베드는 플레이오프 후로 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했으니 다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지만 월드컵 티켓을 획득했기에 이제는 월드컵 출전까지 요구했고 네드베드 또한 월드컵 본선 경험이 없기에 마침내 2006 독일 월드컵 출전을 선언하였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나 이후 가나, 이탈리아에게 모두 0:2로 패하며 1승 2패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7]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으며, 유로 2008이 다가오자 국가대표팀 복귀를 요청받았지만 거절하였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전향하지 않고, 유벤투스에서 보드진으로 활동 중이다.[8] 2015년 10월 23일에 유벤투스 부회장직에 올랐다.

그런데 2017년 9월 22일 그는 자국의 아마추어 팀 FK 스칼나와 현역 계약을 했다! 이 팀에는 자신의 아들이 현역으로 선수 생활을 하고있다.

하지만 네드베드는 유벤투스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구단도 이 부분을 알고 출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계약 후 경기에서 뛴 적은 없다.

2023년 플루스발렌차 관련 재판 시작 후 보드진 전원과 함께 무죄를 주장하며 부회장직에서 자진사퇴 하였으며 1심 무죄, 2심에서 8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항소하여 최종적으로 징계가 취소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축구 선수가 경기장 안에서 가져야 할 근면성실함과 뛰어난 승부욕, 정신력 등을 모두 갖춘 헌신적인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커리어 내내 측면 미드필더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주로 소화했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수비적이면서 공격시 중앙 지향적인 공격을 선호하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오래 뛰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 맞춰진 플레이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가 주로 맡았던 포지션은 요즘은 사장된 포지션인 측면 미드필더라는 역할이었다.[9]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밑에선 4-3-1-2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주로 출전했고[10], 이후 말년으로 갈 수록 4-4-2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고정되었다.

네드베드는 양발을 다 잘 썼고, 킥력이 매우 좋은 선수였다. 패스, 크로스, 슛 기술이 모두 뛰어났다. 활동량이 매우 많고, 정신력도 정말 강한 선수였다. 활동 반경이 매우 넓었는데, 측면 미드필더로 출전 시에는, 4-4-2에서의 측면 미드필더가 공격시 '볼이 없을 때 어떤 동선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와 더불어 '중앙 지향적인 포지셔닝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 에 대해서 교과서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선수였다. 자신의 오프 더 볼 움직임으로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간결하게 경기를 하던 선수였다. 부지런한 활동량과 좋은 움직임, 뛰어난 킥력으로 여러 공격 시퀀스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며 팀의 경기력을 살리는 스타일이었다.

네드베드는 퍼스트 터치가 훌륭했고 볼도 잘 다루는 편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주력이 뛰어나거나 돌파에 집중하던 선수는 아니었으며, 천재성이나 창의적인 면이 번뜩이던 선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굴지의 테크니션이었던 지네딘 지단의 대체자로 당시 그가 선택된 이유는, 그가 지단이 가지지 못한 당대 최고 수준의 활동량과 오프 더 볼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유벤투스란 팀이 그간 가지지 못 했던 역동성과 피지컬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적중하였다.

네드베드가 입단하기 전까지 유벤투스는 4년간 리그 우승이 없는 상태였고, 지네딘 지단이 떠나가는 상황에서 다시 막 부임한 마르첼로 리피유벤투스 체질 개선의 선봉장으로 네드베드를 선택한 건, 그가 지단처럼 홀로 팀을 이끄는 유형이 아니라 팀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고 헌신하는 유형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네드베드와 같은 유형의 선수는 축구 역사에 있어서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동시대의 사이드 플레이메이커였던 로베르 피레스 혹은 지네딘 지단[11]과는 다르게 그들처럼 뛰어난 스탯 생산이나 경기 운영은 보여주지 못 했다. 기본적으로 네드베드는 그들과 같은 플레이메이커가 아닌 유틸리티 선수에 가까웠고 넓은 활동 반경을 자랑하는 프리롤 미드필더였다고 할 수 있다.

왼쪽에 배치되지만, 아군이 볼을 잡으면 대각선을 가로질러 오른쪽 미드필더 근처로 가 한쪽 사이드에 과부하를 걸어 수적 우세를 만드는 것을 선호했으며, 볼을 빼앗기면 다시 자기 자리로 전력 질주하여 두 줄 수비에 참여하였다. 요컨대,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고 변수를 창조하며 기회가 오면 적재적소에 정확한 킥 능력을 바탕으로 슛과 크로스를 하는 매우 우직한 선수였다. 이러한 고강도 플레이를 30대 후반에 은퇴하기 전까지도 계속 유지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움에도 기술과 창의성으로 유려한 플레이를 하기보단, 신체적 활동에 기반을 둔 간결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는 점에서 박지성, 디르크 카윗, 프레디 융베리 등을 연상시키는 선수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박지성과의 유사성은 오랜 화젯거리로 여겨지는데, 실제로 활동 반경과 동선, 강한 체력, 양발 활용[12], 간결한 플레이스타일 등에서 매우 유사했다.

다만 좀 더 세부적으로 둘은 다른 점이 많았는데, 박지성이 조금 더 박스 지향적인 오프 더 볼을 선호했으며, 동시에 수비 능력도 훨씬 뛰어난 올라운더에 가까웠다. 또한 네드베드에 비해 좀 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그에 반해 네드베드는 박지성보다 전반적으로 킥 능력이 월등했으며, 박지성에 비해 전반적인 공격력이 훨씬 뛰어난 선수였다. 네드베드는 스스로가 경기 내에서 주체적으로 플레이메이킹을 전담하진 않지만, 필요시 감독의 전술 지시를 통해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아 홀로 경기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 스킬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선수였다.

눈에 보이는 기술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지만, 뛰어난 성실함과 강한 체력, 기본에 충실한 우직함 등 그야말로 축구 선수가 경기장에서 가져야 할 멘탈리티의 화신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29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명문팀에 입단했고,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를 대체해야 한다는 막대한 부담감 속에서 그는, 1~2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유벤투스에서 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루었다. 또한 라치오 시절 팀을 리그 우승, 컵 대회 우승, 유럽 대회 우승 등으로 이끌었고, 다소 축구 변방에 가까웠던 체코의 유로 대회 약진을 이끌었던 점 등 커리어 내내 보여주던 성실함과 생산성이 유벤투스에서 화룡점정으로 이어져 발롱도르 수상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게 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003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3
  • UEFA 올해의 미드필더: 2002-03
  • UEFA 올해의 팀: 2003, 2004, 2005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13]: 2015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4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2-03
  •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 2002-03
  • FIFA 100: 2004
  • 구에린도로: 2002-03
  • 체코 올해의 축구 선수: 1998, 2000, 2003, 2004
  • 체코 올해의 운동 선수: 2003
  • 즐라티 미치[14]: 1998, 2000, 2001, 2003, 2004, 2009
  • ESM 올해의 팀: 2000-01, 2002-03
  • 레키프 올해의 팀: 2003
  • 골든풋: 2004
  • RSSSF 올해의 선수: 2003
  • FAI 인터내셔널 풋볼 어워즈-인터내셔널 퍼스널리티: 2012
  •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2011
  • 유벤투스 올타임 XI: 2017
  • IFFHS 올타임 체코 드림팀: 2021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팀 K리그 VS 유벤투스 FC 관련 논란

2019년 7월 26일 팀 K리그 VS 유벤투스 FC 친선경기가 열러 선수단에 따라 방한했다. 하지만 사실상 친선경기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초도 출전하지 않으면서 유벤투스가 계약을 위반한 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관중석에 있던 네드베드는 대행사의 대표 로빈 장이 항의하자 "코치도 선수도 그 계약을 알지만 선수가 그냥 뛰기 싫단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는 게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네드베드는 호날두가 사인회도 멋대로 불참했을 때 부폰 등 일부 선수와 함께 내려와 본인이 대신 사인을 해줬고, 항의했을 당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는 등 할 수 있는건 정말 다 했다. 서호정 기자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네드베드가 호텔에서부터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풀기 위해 유일하게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뛰어줬는데 역부족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만약 주최 측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유벤투스의 레전드, 그것도 델피에로 수준으로 언터쳐블인 올타임 레전드이자 한 클럽의 부회장이 이적한지 고작 2년된 선수 한명의 변심도 컨트롤 못하고 휘둘릴 정도로 구단의 기강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이 되므로 국내 유벤투스 팬덤 역시 애초에 이 모든 사단을 만들어서 클럽을 욕먹인 호날두에게 다시 한번 크게 분노하고 있다. 더페스타 측의 언급에 따르면 뒤늦게 연락을 받은 유벤투스 관계자는 이 일에 대해 구단의 수치라며 사과하고 29일에 긴급 회의를 소집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기 시간을 단축하자는 무례한 주장을 한 사람이 바로 본인인 게 밝혀져 다시금 논란에 불을 지폈다. 앞서 유벤투스는 지각에도 모자라 경기시간과 하프타임 시간을 단축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현장에서 경기를 취소할수도 있다고 사실상의 협박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 갑질 논란이 일어났었는데 그 제안을 한 당사자가 바로 네드베드라는 것이다. 연맹은 이에 공식항의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선수 하나가 물을 흐렸다고만 생각했던 국내 팬덤은 이젠 레전드까지 말썽이냐며 한탄하는 중이며 국내 유벤투스 팬사이트인 유베당사에서도 엄청나게 까이고 있다. 이에 실망한 팬들이 네드베드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줬다고 증언한 서호정 기자를 비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15]

그러나 이 사실은 시간이 지나며 로빈장의 당시 발언 등을 토대로 발췌된 기사로 다소 악의적인 날조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로빈장은 사건 당시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잘못을 상황을 외면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왔기에 이번에도 그저 네드베드에 대한 책임전가성 발언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실제로 네드베드 협박설은 근거도 부족하고 서호정 기자가 언급했듯이 사건 당시 네드베드가 팬들을 응대하는 자세나 사태 해결을 위해 보여준 태도와도 상당히 달랐기에 호날두와 달리 사건 초기 만큼의 비난은 받지 않고있다. 아직까지 호날두를 싫어하는 분위기가 매우 짙은 유벤투스 팬들 사이에서도 네드베드는 까이지 않고 있고 네드베드로 인해 탈덕을 선언한 사람도 매우 적다. 유벤투스 팬들 외의 다른 축구팬들도 호날두 노쇼 사태는 로빈장의 뻥카로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네드베드의 협박설도 뻥카로 여기고 있다.

7. 여담

파일:attachment/파벨 네드베드/nedveddal.jpg
  • 부인의 이름이 이바나(Ivana)인데, 아들딸의 이름도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파벨과 이바나이다. 이유는 자신들이 세상을 떠나도 파벨 & 이바나 네드베드가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하고 싶어서라고. 한동안 네드베드의 딸 이바나라고 알려졌던 사진이다. 하지만 실제 네드베드의 딸 이바나는 눈썹이 안 보일 정도로 밝은 금발인데다가 외모도 어릴 때 부터 통통한 편이었다.
파일:external/imgs.idnes.cz/A040120_PET_NEDVED5_V.jpg
실제 네드베드의 딸 이바나와 아들 파벨의 모습이다.
파일:external/nimg.sulekha.com/italy-soccer-serie-a-2009-5-31-12-53-10.jpg
2009년 네드베드의 은퇴식때 찍힌 그녀의 모습

파일:a3oxwlR.jpg
파일:F7MiV0D.jpg
  • 많은 사람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가 결국 2014년 유벤투스가 우승 세리머니를 할 때 찍힌 사진이다.
파일:ivananedved.jpg
현재의 모습. 성인이 되며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선수에서 은퇴한 지금은 유벤투스에서 기술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2년에 걸쳐 페라라에 이어 델 네리 감독이 유벤투스를 제대로 말아먹자 매우 분노한 인터뷰가 알려져 네드베드 본인이 감독으로 오는 것 아니냐 하는 설레발이 제기되었으나 정작 감독은 또다른 유벤투스의 레전드 선수인 안토니오 콘테로 결정. 다행히도 콘테는 유벤투스를 세리에 최강 팀으로 부활시키는데 성공하고 유벤투스를 떠났다.
  • 네드베드 은퇴, 카모라네시 방출 후 유벤투스의 윙어진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이다. 10-11시즌 공수해 온 밀로스 크라시치가 포지션은 오른쪽 윙으로 다르지만 그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주는 듯 했다. 유럽시장에서 꽤나 주목받았고 찰랑이는 금발머리에서부터 얼굴 생긴 것까지 은근히 네드베드를 닮았기에 팬들이 크게 기대하였다. 하지만 윙어의 무덤이라는 이명이 보여주는 세리에 A의 두터운 수비 및 경기내내 다채로운 수비전술에 돌파 및 드리블 패턴이 너무 단조로운 크라시치의 개인능력은 초반 몇경기 반짝후 대처법을 발견한 감독 및 수비수들에게 읽혀서 결국 부상 크리가 뜬 후 주전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11-12 시즌 복귀 후에도 몇 경기 못 뛰고 다음 시즌 페네르바흐체 SK로 이적했다. 그렇기에 전반기뿐이었지만 그래도 10-11 시즌 막장테크의 유벤투스를 먹여살린 몇 안 되는 청년가장 중 한 명이었음에도 페짜델의 77시절을 근성으로 버틴 유베팬들이 지에구를 그리워하면 그리워했지 크라시치는 딱히 그리워하지 않는다.
  • 그 후 11-12 무패 우승 시즌에 오른쪽 윙어로 시모네 페페가 각성하며 '페날두'란 별명을 얻고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12년 8월 왼쪽 허벅지에 부상이 생기더니 수술을 계속 했음에도 부상이 1년 반이 넘도록 재발하며 제대로 복귀하지 못 하고 있으며 은퇴설까지 돌고 있다. 끝내 쓸만한 윙 자원이 없어지자 콘테는 11-12시즌 후반기부터 쓰던 3-5-2를 주 전술로 정착시켰고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 제 2전술로 쓰려는 4-3-3은 뭔가 아쉽다.
  • 유벤투스의 이사회 멤버로 있다가 2015년 10월 현재 클럽 부회장이 되었다.#
  • 유벤투스의 핵심 중 핵심인 사람이라 인테르에 매우 적대적이다. 하비에르 사네티를 제외하고는 인테르의 모든 것이 싫다고 할 정도. 혐오 대상에서도 빠지는 사네티의 위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인테르의 트레블 직전 시즌, 유벤투스는 한창 암흑기를 걷던 와중 무리뉴 감독이 UCL에서 우승시켜준다며 네드베드에게 직접 인테르로 오라고 권유했으나 단칼에 거절하며 "무리뉴를 따라 세계 어느 클럽으로 갈 수 있지만, 인테르는 아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 그러나 처럼 박탈된 스쿠데토까지 세는 짓을 했다. 2013년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유벤투스에는 31개의 스쿠데토가 있다고 주장한 것.#
  • 네드베드가 무려 23세 연하의 연인과 불륜관계로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출처가 찌라시가 많기로 유명한 스페인의 아스인데다가, 딸 이바나와 아들 파벨 주니어의 인스타그램에는[16] 변함없이 다정다감한 부부관계를 자랑하는 사진이 올라오고 있다. 다만 속옷차림 여성들의 몸을 더듬으며 춤을 추는 영상이 유출되어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보인다.#
  • 그가 활약하던 당시만 해도 체코는 징병제[18]였기 때문에 병역의 의무가 있었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군경팀인 두라클 프라하에서 뛰며 병역을 마쳤다.[19]

7.1. 남자를 울리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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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한 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20]

2002-03 챔피언스리그 4강전 vs 레알 마드리드. 지단 vs 네드베드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이 맞대결에서 승리한 팀은 유벤투스였으나 네드베드는 기뻐할 수 없었다. 팀의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까지 박아넣었음에도 한순간의 실수로 경고를 받아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그가 빠진 유벤투스는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승부차기까지 간 접전 끝에 패배하고 만다. 선수 본인도, 팬들도 "그 때 네드베드만 있었다면…"라고 하며 몹시도 아쉬워했고, 위의 사진처럼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던 네드베드의 모습을 본 팬들은…네드베드도 울고, 팬들도 울고, 하늘도 울고, 나도 울었다.[21]

이 일 후에도 비슷한 일이 또다시 일어났는데, 유로 2004에서 체코가 4강까지 전승으로 올라갔음에도 이번에는 준결승 도중 부상으로 교체아웃되었고[22] 그가 빠진 체코는 또다시 연장까지 갔다가 패배하고 만다.[23]

한편, 유로 2004 이후 체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으나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체코가 유럽 예선에서 원체 죽을 쑤자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복귀, 플레이오프 끝에 간신히 체코를 본선까지 이끌었으나 체코미국전에서 3:0으로 승리한 후 가나이탈리아전에서 2연패를 당해 16강 능선을 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필드를 종횡무진하던 네드베드의 모습은 수많은 축구팬들의 눈물을 뿌리게 만들었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이 됐다. 대회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며, 유로 2008이 다가오자 체코 국가대표팀 복귀를 요청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네드베드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흘륭한 멘탈인데, 위에 상술한 대로 칼치오폴리 사건이 터진 직후에도 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오히려 떠나가던 동료들을 붙잡으려까지 하며 팀을 지켰던 모습에 반해버린 축구팬들이 부지기수다. 경기가 끝나가던 말던 방금 시작한 것처럼 미친 듯 뛰어다니던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그런 멘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은퇴한 후에도 유벤투스에서 프런트로 일하고 있다.#

8. 네드베드에 대한 말, 말, 말

나는 매일 지옥과 같은 트레이닝을 요구했다. 베론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파리처럼 쓰러져나갈 때, 오직 그만이 운동장에 서 있었다.
- 스벤예란 에릭손
현대 축구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선수는 다름아닌 네드베드이다.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그는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 마르첼로 리피
그는 내가 만나본 선수 중에 가장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네드베드는 팀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혼자서 사이클을 탔고, 훈련이 끝나면 다시 한 시간 동안 혼자서 조깅을 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소유자로 여간해서는 중간에 나오는 경우가 없었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이제 최고의 미드필더다'라고 말하는 기자들에게) 네드베드가 은퇴했던가요?
- 카카
어렸을 때 나의 우상은 네드베드였습니다.
- 파비오 미레티


[1] /ˈpavɛl ˈnɛdvjɛt/, 실제 발음은 '네드비에트'에 가깝다.[2] Cheb[3] 현역 70~80kg[4] 측면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5] 유벤투스에서 주로 4-4-2 포메이션에서 왼쪽 사이드 미드필더로 뛰면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로,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킥력, 패스, 크로스 등 킥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다만 자신의 최전성기이던 라치오 시절에는 왼쪽 사이드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를 겸하여 뛰었고, 이후 유벤투스 소속으로는 왼쪽 사이드 미드필더로 완전히 정착하여 뛰었다. 커리어면에서나 인지도 면에서는 유벤투스 시절이 라치오보다 낫긴 하지만 본인의 신체적 능력을 비롯한 능력이 가장 뛰어나던 시절은 라치오라고 할 수 있다.[6]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스칼나의 창단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아들 파벨 주니어(Pavel Jr.)와 함께 1경기 한정 계약했다.[7] 가나와의 2차전에서 동점골을 넣었으나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일부 축구팬들은 오프사이드가 아니라고 당시 반박 하기도 했었다. 이후 조별 리그 3차전 이탈리아전에서 고군분투하며 몇차례 슛팅도 했지만 부폰의 선방에 막힌다.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무대였고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하게 되는데 이후 체코 대표팀은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8] 비슷한 케이스로는 에드윈 반 데 사르가 있다.[9] 측면 미드필더는 플랫 4-4-2 형태에서만 볼 수 있는 역할이며, 주로 라이언 긱스데이비드 베컴, 마우로 카모라네시, 로베르 피레스 등이 이 역할을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다. 다소 공격에 치우쳐서 아이솔레이션을 수행하는 반대발 배치 위주의 와이드한 윙 포워드(WF)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공격과 수비를 모두 균등하게 이행해야 하며, 측면에서의 크로스와 동시에 때때로 중앙으로 이동하는 플레이도 해야하기에 체력과 활동량, 수준 높은 기량이 모두 필요한 역할이다. 다만 상대를 제치는 데 집중해야 하는 윙 포워드에 비하면 발이 꼭 빠를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과거엔 때에 따라선, 기동성이 뛰어난 중앙 미드필더들이 간혹 팀의 사정에 따라 이 포지션을 소화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티븐 제라드, 레이 팔러, 대런 플레처 등이 있었다. 현대 축구에선 플랫 4-4-2는 사장되어 가는 전술이기에 이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들 역시 거의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10] 리피 감독은 4-3-1-2와 4-4-2 혹은 스리백 등을 병행하는 감독이었다.[11] 레알 마드리드 입단 후엔 왼쪽 사이드 플레이메이커로 포지션이 주로 고정되었다.[12] 박지성은 드리블, 패스, 슛 등을 양발로 매우 잘 하는 선수였다.[13] 2군[14] Zlatý míč(황금공)[15] 다만 서호정 기자가 이후 해명문을 올려 설명하길, 자신이 호텔에서 목격했던 팬들을 응대하는 네드베드의 모습만큼은 진심이 느껴졌었다고 한다.[16] 네드베드 본인은 SNS를 하지 않는다.[17] 세바스찬 코르다의 아버지는 체코 국적의 테니스 레전드 페트르 코르다 이다.[18] 2004년에 폐지되었다.[19] 김천 상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20] 여담이지만 주심은 2002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의 미국전과 독일전에서 주심을 보았던 위르스 마이어이다. 2002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이기지 못했던 경기들의 주심을 보았다는 이유로 죄 없이 욕을 꽤 먹었었다.[21] ...라고 쓰여있어서 네드베드가 굉장히 억울하게 경고를 받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명백히 경고당할만한 백태클이였다. 네드베드 본인이 카드관리를 못한 것일뿐. 사진만 봐도 어필할 시도도 안하는걸 보면...[22] 교체 후 벤치에서 낙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23] 골든골 제도를 폐기하는 과도기적 조치였던 실버골 제도의 피해자가 되고말았다. 연장 전반 종료 10초 전 골을 내주며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