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06:58:04

로베르 피레스

로베르 피레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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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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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 PL 도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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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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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 · 2002-03 · 2003-04

2001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지네딘 지단 마이클 오언 로베르 피레스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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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EA SPORTS 앰버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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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4b44> 이름 로베르 피레스
Robert Pirès
본명 로베르 에마뉘엘 피레스[1]
Robert Emmanuel Pirès
출생 1973년 10월 29일 ([age(1973-10-29)]세)
프랑스 랭스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87cm / 체중 80kg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소속 <colbgcolor=#fff,#191919><colcolor=#ff4b44> 유스 스타드 드 랭스 (1989~1992)
FC 메츠 (1992~1993)
선수 FC 메츠 (1993~1998)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8~2000)
아스날 FC (2000~2006)
비야레알 CF (2006~2010)
아스톤 빌라 FC (2010~2011)
FC 고아 (2014~2015)
국가대표 79경기 14골 (프랑스 / 1996~2004)

1. 개요2. 클럽 경력
2.1. 프랑스 시절2.2. 아스날 시절2.3. 비야레알 시절2.4. 그 후
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수훈
6. 피레스에 대한 언사7. 이름8. 여담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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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주 포지션은 윙어로, 아스날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PL 무패 우승을 이끌며 전성기를 보내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이다.

2. 클럽 경력

2.1. 프랑스 시절

피레스는 1992/93 시즌에 메츠에서 데뷔한 뒤 1995-96 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하여 팀의 공격을 이끌며 팀의 쿠프 드 라 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1997-98 시즌에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많은 클럽들에 관심을 받았다.[2]

그리고 1998년 피레스는 명문클럽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하게 된다. 마르세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걸출한 드리블 돌파와 직선적이고 스피디한 연계 플레이로 프랑스 전역의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되었는데, 반대로 기복이 있는 모습과 약간 부족한 피지컬이 문제점으로 지적받았고 후반 조커로 주로 출전한 1998 월드컵에 이어 전성기 나이에 접어들었던 유로 2000 당시에도 프랑스 국가대표팀 내에서 교체 자원으로 분류되는 시련을 겪는다.

그런데...

2.2. 아스날 시절

유로 2000 결승전 후반 막판 교체로 투입된 후, 이어진 연장전에서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에 이은 날카로운 크로스로 다비드 트레제게의 골든골을 어시스트하며 유럽 탑 클럽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에 평소부터 피레스의 플레이를 눈여겨 본 아르센 벵거 감독이 바르셀로나로 떠난 마크 오베르마스의 대체자로 피레스를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피레스는 고국 프랑스를 떠나 아스날로 합류한다.[3]

입단 초반에 프리미어리그의 매우 피지컬한 경기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며 저조한 폼을 보였지만 그 후 아르센 벵거 감독의 조언에 따라 상체 단련에 힘써 피지컬을 키우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2000-01 시즌 후반기부터 팀에 제대로 녹아들면서 프레디 융베리와 함께 아스날의 양날개를 책임지는 선수가 되어 뛰어난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시즌 막판, FA컵 4강에서 라이벌 토트넘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고 결승전에서 맞붙은 리버풀을 상대로 선제골을 득점하는데 성공하는 등 대회 MVP급 활약을 펼쳤다. 다만 결승전에서 마이클 오언의 멀티골로 리버풀에게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결론적으로 피레스가 입단한 첫 시즌은 아스날로서는 무관에 그친 실망스러운 시즌이였고 피레스는 FA컵 결승전이 끝나고 조용히 칼을 갈기 시작한다. 그리고 데뷔 2년차에 접어들게 된 후 맞게 된 01-02시즌은 그의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시즌으로 기억되게 된다. 피레스는 티에리 앙리와 함께 아스날의 핵심 선수가 되어 매경기마다 뛰어난 활약으로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시즌 리그우승과 FA컵 우승 더블을 달성하고 어시스트왕을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팀 동료이자 득점왕을 차지한 '킹' 티에리 앙리를 제치고 FWA 올해의 선수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4] 이 뛰어난 활약은 다가오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피레스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언론들 역시 대부분 피레스가 월드컵을 빛낼 스타 중 하나가 될거라고 꼽고 있었다.

그러나 뉴캐슬과의 리그 경기에서 무려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여 8개월간 필드를 이탈하게 되었고 그의 월드컵은 무산되고 만다.[5]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는 다르게 아스날은 앙리윌토르가 공백을 잘 메워주었고 큰 전력누수 없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 복귀 후 부상으로 인한 우려가 있었으나 피레스는 기량하락 따위는 없다는 듯 맹활약을 펼쳤고 FA컵 결승전에서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팀에게 우승컵을 안겨준다.[6] 그리고 2003-04 시즌 피레스는 팀의 핵심으로써 리그 36경기 출전, 14골 11도움으로 앙리 다음가는 득점자원으로 맹활약을 했고 팀의 전설로 남은 무패 우승을 달성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당시 티에리 앙리 & 피레스는 모든 대회에서 57골을 만들어내는 괴물과 같은 콤비네이션을 보여주었다. 당시 무패 우승을 한 이후에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피레스를 향한 선수들의 경배가 그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2004-05 시즌은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첼시가 주제 무리뉴 감독을 데려오면서 리그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결국 리그 우승을 첼시에게 내주고 만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팀에서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팀의 FA컵 우승을 다시 한 번 이끈다. 그리고 2005-06 시즌 팀의 주장인 비에라가 이탈하고 서서히 주전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피레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스크 파브레가스, 마티유 플라미니 등 어린 선수들과 솔 캠벨, 데니스 베르캄프의 베테랑들과 함께 피레스는 강팀인 레알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를 꺾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결승에서 바르셀로나와 만난다. 0:0으로 팽팽한 상황에서 옌스 레만이 무리한 반칙으로 퇴장당하면서 그는 알무니아와 교체되고 만다. 이후 오히려 솔 캠벨이 선제골을 넣으며 아스날이 앞서나갔지만 결국 결과는 바르셀로나의 역전우승으로 끝났고 피레스는 자신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중요 경기에서 교체하기로 결정했던 점에 대해 벵거에게 실망하고 새로운 도전을 바라보게 된다.[7]

2.3. 비야레알 시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교체된 것에 대한 실망감과 아스날이 그에게 재계약을 제시할 때 조건이 1년 정도 인 것에 불만을 품었던[8] 피레스는 4강전에서 만났던 비야레알로 이적한다. 그러나 첫 시즌 피레스는 부상으로 인해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하였고 언론에서도 '피레스가 내리막을 걷는다'는 등 피레스를 흔들기 시작하였으나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의 신임 아래 리켈메의 역할을 완벽히 대체하고 맹활약을 펼치며 팀의 준우승에 핵심역할을 한다.[9]

2008-09 시즌 피레스는 산티 카솔라[10], 마르코스 세나와 팀을 이끌며 팀의 리그 2위 경쟁을 할 정도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시즌 말까지 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5위로 마감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2.4. 그 후

2010년을 마지막으로 비야레알과 계약기간이 끝난 피레스는 아스날 훈련장에서 아스날 선수들과 훈련을 함께하며 몸을 만들수 있도록 벵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아스톤 빌라와 계약을 맺게된다. 하지만 피레스는 노쇠한 탓에 기량이 예전만 못하였고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3년 뒤 피레스는 인도의 고아라는 팀에 입단하여 1시즌을 뛰었고, FA 신분으로 있던 중 2016년 2월 25일 다시 은퇴를 선언한다.

3. 국가대표 경력

지네딘 지단이라는 희대의 천재이자 역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와 포지션이 겹치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슈퍼조커로서 프랑스 국가대표에 나름 족적을 남기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포지션은 윙어가 맞다.

3.1. 1998 FIFA 월드컵

피레스는 월드컵 내내 교체멤버로 활동하였으나 16강전 파라과이를 상대로 티에리 앙리의 교체멤버로 투입되어 연장전까지 이어지는 혈투속에서 다비드 트레제게에게 정확한 크로스를 올려 볼을 전달하였고 이 볼이 로랑 블랑에게 전달되어 골로 연결되면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골든골을 만들어내는데 공헌하여 팀을 8강으로 이끌었고 팀은 결승에서 브라질을 꺾고 프랑스 축구 역사 최초로 월드컵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3.2. UEFA 유로 2000

간간히 조커로 나와 그냥저냥한 활약을 펼쳤지만 팀이 결승까지 가는 것을 대부분 벤치에서 보았다. 그러나 유로 결승전 이탈리아에게 1골을 실점한 후 이탈리아의 단단한 수비진을 뚫지 못하고 고전하던 중 후반 86분 비셴테 리사라수와 교체 투입되어 왼쪽 측면을 홀로 도맡으며 공수로 좋은 활약을 하게 된다. 후반 종료 직전 실뱅 윌토르의 동점골이 터지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한 번의 실수가 경기의 승패를 가를수도 았는 상황에서 피레스는 왼쪽 측면에서 알베르티니칸나바로를 제치고 네스타를 상대로 크로스를 올렸고 이는 정확히 다비드 트레제게에게 어시스트되어 골로 연결되었고 경기는 프랑스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된다.[11]
86분에 로저 르메르가 저를 불렀습니다. 아니 사실 그는 우리쪽 방향으로 소리 질렀고, 저는 "니코, 너 부른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러자 그들이 "아니야, 니코 말고 로베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면서 "대체 86분에 왜 나를 투입하는 거지"라고 의아했어요. 그는 저에게 "너는 왼쪽 측면 전체를 따라서 플레이해야 한다"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는 "왼쪽 측면 전체요? 누가 나오는건가요?"라고 물었고 그건 바로 리사라수였죠! 저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죠 "이건 잘못된 교체야!" 그것은 제가 코치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에요!

3.3.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지네딘 지단티에리 앙리같은 주전이 상당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달성하게된다. 이 대회에서 피레스의 활약이 매우 뛰어났는데 브라질과 4강전에서 멋진 골을 터트리며 브라질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는데 큰 공헌을 하게된다. 대회가 끝나고 피레스는 컨페더레이션스컵 득점왕과 골든볼을 차지하였고 '지단이 없어도 가능한 프랑스'를 실현시키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년 뒤 있을 2002 한일 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 받게된다.

사실상 피레스의 국가대표 마지막 전성기였다.

3.4. 그 후

그러나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피레스는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에 불참하게 되었고[12] 프랑스 대표팀 역시 지네딘 지단이 부상으로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하는 와중에 세네갈 쇼크를 당하면서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 때 프랑스의 언론들은 "피레스만 있었어도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후 피레스는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출장하여 팀의 우승을 이끄는데 공헌하게 된다.

실제로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프랑스 대표팀의 탈락 원인 분석이 계속 이루어졌고 전문가들과 축구팬 대부분이 피레스의 공백이 엄청 컸다고 평가했다. 당시 조르카예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단을 대체할수있는 유일한 플레이메이커는 피레스밖에 없었다. 세네갈전과 우루과이전에서 플레이메이커가 사실상 없었고 비에이라가 그나마 뭔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악재가 되고말았으며 우루과이전은 앙리의 퇴장까지 겹치는 악재가 발생했으니... 이럴때 선발이든 조커든 필요 했던 선수가 바로 피레스였다.

유로 2004때도 피레스는 팀에 일원으로 활약하지만 아쉽게도 프랑스는 8강에서 그리스에게 탈락하고 만다. 이후에도 피레스는 클럽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에 승선하기에 무리없는 활약을 펼치지만 레몽 도메네크가 피레스의 별자리인 전갈자리가 팀에 불화를 끼칠거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국가대표로 뽑지 않고 이후 피레스는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하게 된다.[13]

그리고 도메네크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하여 계속 프랑스를 이끌다가 유로 20082010 남아공 월드컵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잘렸다.

4.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에는 그야말로 육각형 윙어로서 정상급의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으며 매우 지능적이고 번뜩이는 연계 플레이로 상대 측면을 뒤흔들었던 프리미어리그의 원조 미들라이커[14]이자 당대 최고의 인사이드 드리블러 중 한 명이었다.

흔히 말하는 측면 플레이메이커의 교과서와 같은 선수이다. 따로 공미를 두지 않는 플렛형 4-4-2 포메이션에서는 좌우 윙어의 경기 조율 능력이 중요한데, 피레스는 이부분에 있어서 탑클래스의 선수. 훗날 알렉산드르 흘렙이나 사미르 나스리, 토마시 로시츠키 등이 피레스의 후계자라 불리며 그를 잇게 되었지만 아무도 피레스의 레벨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전성기를 보낸 아스날에서는 주로 왼쪽 측면에서 뛰었으나, 사이드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필드 좌우 그리고 중앙으로 활발하게 스위칭하며 플레이메이킹을 하였다. 윙어로서 직선적인 드리블도 상당히 뛰어나서,[15] 상대 선수를 간단한 페인팅 및 발재간으로 가볍게 제친 후 동료 선수에게 기습적으로 밀어넣는 양질의 스루패스는 일품 중의 일품. 무엇보다 피레스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왼쪽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면서 오른발 인사이드킥으로 상대방 골망 오른쪽을 뒤흔드는 감아차기 슈팅이다. 이 슈팅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재미를 많이 봤으며 찰떡궁합이었던 티에리 앙리와의 콤비네이션으로 필드 전체를 지배한 피레스의 플레이는 '인사이드 드리블러'이자 '미들라이커'라는 별칭을 수여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십자인대 부상 전에는 육각형 윙어로서 좌우 가리지 않고 뛰었으나 부상 이후 주로 왼쪽에서 뛰었다. 애슐리 콜과의 호흡도 좋았다. 레예스 영입 직후에는 그의 적응을 위해 벵거가 레예스를 왼쪽 측면에 배치하여 뛰게 하는 바람에 피레스가 잠시 오른쪽으로 갔는데 우측풀백인 로렌과의 호흡도 나쁘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왼쪽에서의 모습보다는 별로였다.

페널티킥 성공률이 높은 선수다. 아스날에서는 티에리 앙리로렌에 이어 3순위 키커였다.

메츠 시절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으로 주로 뛰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라인 브레이킹, 적재적소에 상대팀 박스(Box)로 쇄도하는 침투능력 및 골 찬스를 놓치지않는 위치 선정도 상당히 빼어났다. 티에리 앙리데니스 베르캄프같은 동료들을 통한 연계 플레이로 본인이 침투하여 직접 득점하거나, 그들의 슈팅이 수비벽이나 골키퍼의 손에 막혀 튕겨져 나오면 세컨볼을 놓치지 않고 왼발 오른발 머리 가릴 것 없이 우겨 넣으며 쏠쏠하게 득점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 피레스의 아스날 시절 골영상 모음을 보다보면 이른바 '주워먹기' 골장면이 상당 지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탁월한 위치선정과 침투 능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종종 메수트 외질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전체적인 커리어는 외질이 피레스를 앞설지 몰라도 아스날 시절의 공헌도를 한정해서는 비교가 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피레스 역시 기복이 없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외질과는 달리 큰 경기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이는 선수였다. 아스날에서 대표적으로 강팀을 상대로 다수의 골을 기록한 선수가 바로 피레스이다. 특히, 토트넘을 상대로 피레스는 역대 아스날 선수 가운데 최다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게다가, 같은 플레이메이커로서 아스날 시절 경기 관여 능력 면에서도 외질보다 나은 선수가 피레스였고 그에 더해 걸출한 득점력으로 미들라이커라는 수식어를 받기도 했던 선수였다. 그러면서도, 경기력은 대단했던 선수가 전성기 시절의 피레스라고 할 수 있다. 공미나 다른 포지션에서 클래스 차가 보이는 외질과 달리, 어느 포지션이건 탑 클래스의 폼을 보여준 피레스인지라 올드 구너들은 외질에 대한 평이 박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선수 개개인끼리의 비교보다는 팀 전체의 상황을 고려해봐야겠지만[16], 그만큼 아스날에서의 활약은 피레스가 정말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6. 피레스에 대한 언사

파트리크 비에라와 로베르 피레스는 대표팀의 새로운 기둥이다. 특히 피레스는 최근 들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유로 2000에서의 환상적인 플레이 이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의 새로운 에이스로 꼽을만하다.
- 로저 르메르
피레스는 그라운드에서뿐만이 아니라 락커룸에서도 최고의 선수다. 젊은 선수들은 그의 플레이와 함께 팀에 헌신하는 태도, 그리고 인성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어떠한 감독이라도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 아르센 벵거
내가 올림피크 마르세유에서 아스널로 팀을 옮긴 것과 마찬가지로 로베르 피레스 또한 마르세유에서 아스널로 팀을 옮겨 위대한 활약을 펼쳤었다. 사람들이 나를 피레스의 계승자라고 하는 것에는 조금 부담이 따르기는 하지만 클럽과 국가대표팀 모두에서 나 또한 그에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 싶다.
- 사미르 나스리[17]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다. 기술적으로도 최고였고 이타적이었으며 그가 최고의 폼을 유지했을때 아무도 그의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 티에리 앙리
프랑스보다 우리가 더 나은 팀이었다. 단지 차이는 피레스의 존재뿐이었다. 그의 능력이 경기를 바꿨다. 그뿐이다.
- 파비오 칸나바로[18]
난 가끔 피레스와 함께 하던 시절이 그립다. 그와 왼쪽 측면에서 함께 원투 패스를 주고 받았을 때, 난 진심으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피레스야말로 최고의 윙어였다.
- 애슐리 콜
저는 항상 피레스를 존경해왔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의 플레이를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그의 등번호 7번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 토마시 로시츠키
피레스는 유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기술을 가진 선수입니다. 게다가 빠르고 민첩하기까지 하죠. 그가 유벤투스가 아닌 아스날로 합류한다니, 우리로선 다행이군요.
- 파올로 말디니

7. 이름

피레스는 포르투갈 국적의 아버지스페인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국가인 프랑스와 아버지의 조국 포르투갈, 그리고 어머니의 조국 스페인을 두고 고민하였으나 피레스는 프랑스를 선택하였다. 사족이지만 '피레스'라는 이름도 순전히 불어식으로만 읽는다면 -s 발음을 생략한 '피레'라고 읽는게 맞지만 엄연히 스페인계에서 온 이름인지라 속지주의를 적용하고 있는 프랑스이기 때문에 '피레스'라고 불리는 뒷배경이 있다. 본인도 이름 발음에 대해 여러차례 인터뷰 함으로써 천명하기도 했고.
저는 제 가족을 사랑하고 포르투갈을 사랑해요. 스페인도 사랑하고요.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에서 자랐으며, 프랑스 문화가 제 안에 깊이 배었기 때문에 저는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프로 선수로 되는 것을 도운 것 역시 프랑스 기관이었습니다. 제가 기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렝스와 메츠의 스포츠 연구소와 유스 훈련 센터를 뜻합니다. 프랑스가 저에게 준 것을 절대 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사랑해요. 저는 절대 제 뿌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서 사람은 선택을 해야만 하죠.

8. 여담

무패 우승 멤버 중에서도 유독 저평가를 자주 당하는 편이다. 2015년에 에덴 아자르가 벌써 피레스를 넘었다고 하는 등, 뭔가 만만하게 보이는 듯한 레전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허나, 피레스는 2001-02 시즌에 FWA에서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로 뽑힐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당시에 티에리 앙리나 데뷔 시즌에만 리그에서 23골이나 넣은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받은 상이어서 의미가 크다.[19] 다만, 이후 아자르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기 전까지 몇 시즌 동안 PL 킹의 활약을 보인데다 벨기에를 월드컵 3위로 이끌고 실버볼을 수상하며[20]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으로 인정받으며 PL에서의 활약은 정리가 되었다.

챔스 결승에서 벵거에게 교체당했지만, 대표적인 벵거빠중의 한 명이 바로 피레스다. 키언이나 앙리도 2016-17 시즌 아스날의 경기력에 대해서 벵거를 커버 치기 힘들어 했는데, 그럼에도 벵거를 커버친 사람이 바로 피레스다. 게다가, 그 어떤 레전드들보다 선수단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선수다.[21]

에르빈 롬멜의 명언[22]을 좋아하며, 실제로 공식석상에서 이걸 자주 인용했다, 때문에 축구선수 명언 모음집에 자주 들어가고 있어 이 말을 한 사람이 롬멜이 아니라 피레스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은근히 존재하는 편.

9. 같이 보기

1 라마 · 2 캉델라 · 3 리사라수 · 4 비에라 · 5 L. 블랑 · 6 조르카에프 · 7 데샹 · 8 드사이 · 9 기바르쉬
10 지단 · 11 피레스 · 12 앙리 · 13 디오메드 · 14 보고시앙 · 15 튀랑 · 16 바르테즈 · 17 프티
18 르뵈프 · 19 카랑뵈 · 20 트레제게 · 21 뒤가리 · 22 샤르보니에
파일:프랑스 국기.svg 에메 자케

1 라마 · 2 캉델라 · 3 리사라수 · 4 비에라 · 5 블랑 · 6 조르카에프 · 7 데샹 · 8 드사이 · 9 아넬카
10 지단 · 11 피레스 · 12 앙리 · 13 윌토르 · 14 미쿠 · 15 튀랑 · 16 바르테즈 · 17 프티
18 르뵈프 · 19 카랑뵈 · 20 트레제게 · 21 뒤가리 · 22 라메
파일:프랑스 국기.svg 로저 르메르

1 랑드로 · 2 붐송 · 3 리사라수 · 4 비에라 · 5 갈라스 · 6 마켈렐레 · 7 피레스 · 8 드사이 · 9 사하
10 지단 · 11 윌토르 · 12 앙리 · 13 실베스트르 · 14 로탕 · 15 튀랑 · 16 바르테즈 · 17 다쿠르
18 페드레티 · 19 사뇰 · 20 트레제게 · 21 말레 · 22 고부 · 23 쿠페
파일:프랑스 국기.svg 자크 상티니


[1] 프랑스어에서 어말에 오는 자음은 대부분 묵음이다. 그러나 프랑스 고유어가 아닌 외래어 또는 차용어로 여겨지는 이름의 경우, 어말의 자음은 묵음이 아니다. 이 이름은 본래 포르투갈계 혈통으로 표기법에 맞는 이름은 본래 피르스이나, 프랑스어 발음에 맞게 피레스로 발음 및 표기한다.[2] 이 당시 랑스와 메츠의 최종 승점은 동일했으나, 득실차에서 밀려 메츠는 준우승에 그쳤다. 여담으로 이 때 랑스의 우승은 구단 최초의 우승이다. 그리고 메츠도 구단 최초 준우승이다.[3]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이때 아스날은 무려 레알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를 상대로 경쟁해 피레스 영입에 성공했다. 그만큼 이 시기 유럽 내에서 아스날 FC의 위상이 어마어마했다는 방증.[4] 참고로, 이게 얼마나 뛰어난 업적이냐면 당시에 프리미어 리그에는 반 니스텔루이&마이클 오언( 직전 시즌 오언은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베컴&스콜스, 긱스와 같은 역대 레전드 선수들이 전성기에 이르렀던 시점이었다. 그런 이들을 제치고, 피레스가 수상을 하였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레벨의 선수인지 알 수 있다.[5] 이 때 당시 아르센 벵거는 "나 자신을 저주한다"라며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는 격정적인 인터뷰를 남겼는데, 비극적이게도 피레스는 이 부상 직전까지 절정의 활약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피레스는 소속팀 아스날과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서 거듭된 선발출전으로 인한 혹사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벵거로서는 충분히 예방 가능한 부상이었다고 자책한 듯하다.[6] 부상 여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상 전 피레스는 좌우, 중앙 가리지 않고 다 뛸 수 있었던 전천후 크랙이었는데, 부상 이후에는 조금 둔해진 기동력 때문인지 왼쪽 사이드 자리에서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에 치중하는 스타일로 전념했다.[7] 후에 인터뷰에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누군가 교체되겠지 생각했었지만 자신일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정확히 몇분에 교체 당했는지까지 기억을 하고 있을정도다.[8] 대부분의 클럽들은 재계약 협상에서 30을 넘긴 노장 선수들에게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다년 계약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스날은 이를 철저하게 지키던 클럽이다.[9] 리켈메 중심의 4-3-1-2 전술을 쓰던 시절의 비야레알은 리켈메를 따라 느려지는 팀 템포와 리켈메의 컨디션이 경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복이 있는 팀이었다. 그러나 4-4-2 변환이후 카솔라, 피레스 중심의 비야레알은 리켈메 중심의 비야레알보다 공격루트도 다양해지고 양날개 중심의 역동적인 팀이 되면서 경기력의 기복도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당시 리켈메와 수준 클래스를 가진 선수를 기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이나 비판은 있을지언정 팀 경기력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정도로 성공적인 체질개선과 리빌딩으로 평가받았었다.[10] 피레스와 카솔라가 비야레알에서 맺은 인연으로 아스날은 카솔라를 영입할 수 있었다.[11] 당시는 골든골 제도가 존재했으므로 바로 경기가 종료 되었다.[12] 피레스는 자신을 부상입힌 선수를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13] 도메네크는 리옹에서 전갈자리 선수들을 여러차례 숙청하고 배제한 사례가 있었다.[14] 통산 284경기에서 85골을 기록하였다. 총 6시즌을 뛰었으니 1시즌당 10골 이상씩은 확실히 득점해준 셈이다.[15] 신기하게도 187cm의 큰 키를 가지고도 민첩성이 대단히 뛰어난 선수였다.[16] 객관적으로 따져도 앞에는 앙리, 옆에는 베르캄프, 뒤에는 비에라가 있던 피레스 시절의 아스날과 앞에는 지루, 옆에는 산체스, 뒤에는 코클랭이 있던 외질 시절의 아스날을 그대로 대입해서 비교하긴 어렵다. 즉 팀 전체의 질이 떨어져있는데 아스날 최전성기에 뛰던 선수와 4위 수성에 목적을 둬야하는 시절의 선수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17] 아스날에 입단하여 활약할 때 남아공 월드컵 예선을 치른 뒤 프랑스 로이터 통신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18] 유로 2000 결승전 패배 후 인터뷰 내용.[19] 더불어 아스날 선수들이 뽑은 구단 올해의 선수도 피레스였다. 참고로 이 시즌 득점왕은 앙리였다. 다만, 피레스도 어시왕을 차지했다.[20] 피레스가 1998 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 우승을 하기는 했지만 두 대회 모두 주전이 아닌 교체멤버로 활약했다.[21] 외질의 아스날 이적 당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아직까지도 콜니에 드나들며 무보수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다.[22] 세상이 널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