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7:02:36

넬 그윈

<colbgcolor=#FFC0CB><colcolor=#000000> 넬 그윈
Nell Gwyn
파일:Eleanor Nell Gwyn.jpg
이름 엘리노어 "넬" 그윈[1]
(Eleanor "Nell" Gwyn)
출생 1650년 2월 2일
파일:잉글랜드 연방 국기(1649-1651).svg.png
잉글랜드 연방 런던
사망 1687년 11월 14일 (향년 37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런던 폴 몰
자녀 찰스
아버지 토마스 귀니 (논란)
어머니 엘렌 그윈
1. 개요2. 상세3. 천한 신분4. 재치5. 최후6. 가족관계
6.1. 자녀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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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의 정부. 천민 출신으로 왕의 정부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재기 넘치는 입담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2. 상세

넬 그윈의 태생은 불우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채무자 감옥에서 사망했고[2] 어머니는 포주였으며 그나마도 일찍 죽었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극장 근처에서 오렌지를 팔며 생활했다. 그나마 이모가 배우라 오렌지 장사를 한 지 1년쯤 후에는 배우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는 여성 역할도 남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녀는 미모와 명석한 머리, 뛰어난 대사암기력으로 배우로서 이름을 날렸다. 원래는 정극 연기를 했었는데,[3] 별로 평이 좋지 않아서 코미디로 전향했고 천성에 맞았는지 그때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녀에게 운이 트이게 되는데, 조지 빌리어스 경[4]이 그녀를 눈여겨보고 왕의 정부로 밀기로 한 것이다. 그의 후원 하에 넬은 화이트홀 궁[5]에 초대받고 당시 왕이던 찰스 2세 앞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넬의 저속한 익살과 공연을 보고 대단히 즐거워한 찰스 2세는 그녀와 눈이 맞기에 이른다.[6] 귀족도 아니고 길에서 오렌지 장사를 하던 뒷골목 출신의 여성이 왕의 정부가 된 것이다. 찰스 2세와의 나이차이는 무려 스무 살.

3. 천한 신분

그러나 넬 그윈의 신분은 평생 동안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역사상 귀족이 아닌 신분낮은 왕의 정부는 꽤 있었지만 이런 정부들도 뒤바리 부인처럼 귀족 남성과 결혼해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하지만 넬 그윈은 그런 신분세탁용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죽을 때까지 천민 신분으로 남았다.

귀족이 아니었던 넬은 다른 정부들과 달리 나라에서 나오는 공식적인 연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3년이나 은퇴하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만 했는데 급기야 왕의 아들을 낳은 후에도 무대에 섰다. 왕이 정부를 부양하지 못한다는 건 개망신이었기에 결국 찰스 2세는 넬에게 저택을 하사하고 생활비를 내렸으며 그제야 그녀는 은퇴한다.

게다가 워낙 여자를 밝혔던 찰스 2세는 정부들이 많았다. 넬 입장에서는 라이벌이 많았던 셈. 왕에게 가장 총애받던 정부는 프랑스 출신의 루이즈 드 케루알이었다.[7] 프랑스 귀족 출신이던 케루알은 포츠머스 공작부인 작위도 받고 잘나갔으나 정작 같은 시기 넬은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재정이 궁핍하단 핑계로 보상을 스킵당한다.[8] 찰스 2세의 다른 정부들도 다 귀족 출신이었기에 천민이었던 넬 그윈을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이후로도 다른 정부들은 집을 받거나 직위를 얻고 그 아들들까지 높은 작위를 받고 귀족 신분을 얻는데 넬만 보상을 못 받거나 그녀의 아들들만 작위를 스킵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출신이 문제.

4. 재치

이렇게만 보면 천대만 받고 산 것 같지만 그녀는 패기와 재치를 발휘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낸다.

대표적으로 루이즈 드 케루알을 자주 놀려먹은 일화가 있다. 케루알은 자주 울상을 짓고 징징거리는 성격이었는데 이걸 비꼬아서 그녀를 수양버들[9]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며, 왕 앞에서 케루알의 프랑스식 혀짧은 발음을 따라해 왕을 즐겁게 해준 적도 있다. 한번은 프랑스 왕자가 죽었을 때, 자신이 프랑스 왕족과 인맥이 있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케루알이 상복을 입고 나타나자[10] 다음 날 넬도 상복을 입고 나타나서는 타타르의 왕족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아니 당신이 타타르 왕족과 무슨 관계가 있으신데요?" 하고 묻자, 넬은 "루이즈 양과 프랑스 왕자님의 관계와 똑같은 관계요!"라고 드립을 쳤다. 이렇게 케루알을 많이 놀려먹긴 했어도 넬과 케루알은 사이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했고, 카드놀이를 같이 하는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찰스 2세가 다른 정부 오르탕스 만치니에게 빠져서 케루알이 상심하자 넬이 위로해 주기도 했다. 라이벌 겸 악우였던 듯.[11]

한편, 케루알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반 가톨릭 정서가 팽배했던 당시 잉글랜드 서민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 한번은 폭도들이 궁을 나오는 넬의 마차를 보고 케루알의 마차로 착각하여, 마차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거나 '가톨릭 창녀는 꺼져라!' 하고 욕을 퍼부은 일이 있었다. 이에 넬은 "시민 여러분! 잘못 아셨네요. 저는 개신교 창녀랍니다!"라고 외친다. 이 드립에 사람들이 모두 빵 터져 축복과 함께 길을 비켜줬다고 한다.[12]

어느 날은 넬과 케루알, 케루알과 절친한 프랑스 대사, 그리고 오르탕스 이렇게 넷이서 한자리에 모였다. 케루알은 안 그래도 심적으로 불편한 오르탕스에 맨날 자기를 놀리는 넬까지 있자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그러자 넬은 프랑스 대사에게 프랑스 왕이 방금 나간 수양버들 대신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도록 만들어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영국의 왕은 케루알보다 자신을 더 좋아하며, 매일 잠자리를 하는 것도 나니까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냐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가엾은 프랑스 대사는 당황해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이에 오르탕스는 넬의 속옷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말하며 대화 주제를 바꾸려 시도했다. 그러자 넬은 치마를 올려 속치마와 그 안까지 모두 보여주었다. 참고로 넬은 속바지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프랑스 대사는 파리 외무성에 보내는 보고서에 넬의 속옷과 그 안에 있던 것을 칭찬하며 그보다 훌륭한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또, 전술했듯 찰스 2세의 다른 정부들이 낳은 사생아 아들들은 다들 작위를 받는데 자기 아들 찰스만은 여섯 살이 되도록 작위를 받지 못하자, 울분이 터진 넬은 어느 날 찰스 2세가 듣는 앞에서 아들에게 "이리 오렴, 이 사생아 새끼[13]야, 아버지께 인사해야지. (Come here, you little bastard, and say hello to your father.)"라고 말했다. 이에 찰스 2세가 왜 애를 그 따위로 부르냐며 질색을 하자, 넬은 "이거 말고 따로 부를 이름을 안 주셨잖아요?"[14]라고 응수한다. 당연히 그날 바로 넬의 아들은 버퍼드 백작으로 임명된다.[15]

워낙 거침없는 성격이던 그녀는 고귀한 척하는 다른 정부들이 그래봤자 다 같은 왕의 창녀라고 놀려대기도 했고, 스스로를 국가의 잠자리 동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른 정부 레이디 캐슬마인이 그녀를 공공연하게 무시하며 상대도 하지 않자 그녀의 어깨를 탁 치며 "아 하긴 원래 같은 장사하는 사람들끼린 싫어하는 법이죠!" 라고 대답한다. 레이디 캐슬마인이 이 진상을 돌려보내기 위해 자기 소유의 화려한 육두마차를 타고 그녀를 바래다 줬는데, 이것의 절반도 왕에게서 못 받아보고 산 넬은 레이디 캐슬마인의 집 앞에서 여섯 마리의 소가 이끄는 다 부서진 우마차를 타고 "창녀 팔아요 창녀!"라고 외쳤다.[16]

넬 이전에 찰스 2세의 연예인 출신 정부로 몰 데이비스라는 여성이 있었다. 넬 못지않게 천출인 몰은 넬과 달리 과시하는 걸 좋아해 라이벌들 앞에서 찰스 2세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하곤 했다. 이에 넬은 몰이 찰스 2세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그녀를 식사에 초대하고 설사약을 탄 음식을 먹여 그녀를 골탕먹였다.

한번은 외출 중 마부가 갑자기 멈추길래 봤더니 다른 마부와 싸우고 있어서 이유를 물어보니, 마부가 "아니 글쎄 저 사람이 마님을 창녀라고 욕하잖아요!" 하며 씩씩거렸는데, 이에 '응. 나 창녀 맞아. 싸울 거면 좀 그럴싸한 걸로 싸워.'라는 해탈의 경지에 달한 대답을 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벙찌게 만들기도 했다.

넬은 왕에게도 이 익살맞음과 패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왕 이전에 찰스라는 이름의 연인이 둘 있었던 그녀는 찰스 2세를 내 세 번째 찰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찰스 2세인데 찰스 3세라고 부른 셈.[17] 함께 낚시 갔을 때 찰스 2세가 한 마리도 못 잡고 낙심할까봐, 왕이 한눈파는 사이에 도시락 바구니에 담겨 있던 구운 빙어들을 왕의 낚싯줄에 엮어 물에 던져놓고 그걸 건져보라고 하기도 했다. 왕이 국민들은 너무 바라는 게 많다며 뭘 해야 좋아할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자 "여자 작작 만나고 일이나 좀 하면 국민들이 좋아할 텐데 이렇게 말해도 안 들으실 거잖아요"라고 대답. 이 정도면 찰스 2세의 정부 겸 광대라고 해도 될 듯하다.[18]

이런 거침없는 성격과 말빨, 천민 출신이라는 공감대 때문에 일반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녀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녀의 재치와 유머감각에 굉장히 즐거워했다.

5. 최후

찰스 2세는 죽기 전 동생 제임스 2세에게 넬의 생계를 보살펴 달라고 유언하고 죽었다.[19] 그러나 제임스 2세는 형의 유언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찰스 2세가 죽자마자 채권자들이 넬을 찾아와 볶아대는 걸 계속 무시하다가, 3개월이나 지나서야 돈을 보내줬다고 한다.[20]

찰스 2세가 죽은 후 많은 남성들이 넬을 원했으나, 그녀는 '사슴을 눕힌 자리에 개를 눕힐 수는 없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2년 후, 넬 그윈은 37세의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6. 가족관계

6.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1대 세인트올번스 공작 찰스 뷰클러
(Charles Beauclerk, 1st Duke of St Albans)
1670년 5월 8일 1726년 5월 10일 다이애나 드 베레[21]
슬하 9남 3녀[22]
2남 뷰클러 경 제임스
(James, Lord Beauclerk)
1671년 12월 25일 1680년 9월

7. 여담

  • 상단의 초상화는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전시를 통해 한국에 잠시 들어오기도 했다. 당시 설명 표지판에는 '넬 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 로얄 미스트리스를 묘사한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넬 그윈의 초상화는 특히 선정적인 것이 많다. 상단의 초상화는 유두 노출이 살짝 있지만 그중에서 그나마 옷을 잘 갖춰입은 편.
  • 런던 첼시의 슬론 애비뉴에 넬 그윈 하우스라는 아파트가 있다. 이 아파트의 2층에 넬 그윈의 동상이 놓여져 있다.


[1] 한미한 출신이라 혈통을 알 수는 없지만, 성씨 Gwyn은 웨일즈어로 신성한이라는 의미가 있다. 브리튼 섬의 옛 국가 귀네드의 국호에도 들어있는 말.[2] 공식적으로는 왕당파 대위 출신으로 되어 있으나, 왕실의 체면을 위한 족보 조작이라는 의혹이 있다.[3] 연극 제목은 The Indian Emperour인데, 제목과 다르게 아즈텍 제국의 몬테수마 2세를 배경으로 한 연극이고, 여기서 가상의 인물인 공주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4] 간신으로 유명한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동명이인 아들이다.[5] 버킹엄 궁전 이전의 왕실 공식 거주지.[6] 야사에 의하면 찰스 2세가 넬과 밖에서 저녁식사를 하다 실수로 식사값을 안 가져왔는데, 넬이 이걸 보고 '이렇게 가난한 사람은 또 처음 보네!'라고 드립을 쳤고 이 재치에 넘어갔다고도 한다.[7] 그러나 대놓고 가톨릭 신자인 데다 프랑스 출신이라 일반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프랑스에 간첩질 하는 거 아냐?'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고.[8] 참고로 이 말을 왕에게 들은 넬은 엄청나게 열받아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그럼 앞으론 아무하고도 즐길 수 없겠네요. 저 프랑스 여자는 프랑스로 돌려보내세요. 난 다시 무대에 오르고 폐하의 물건은 아주 잠가버리면 되겠네요!"[9] weeping willow. weep이 영어로 '흐느끼다'라는 의미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툭하면 징징거린다고 징징이라고 불렀다, 정도의 뉘앙스.[10] 사실은 케루알이 처음에 영국 궁정에 들어올 때, 즉 사교계 데뷔 당시 명목상 루이 14세의 서출 처제로 소개받았기 때문이다.[11] 더 웃긴 건 이 둘은 결국 만치니가 개최하는 살롱 죽돌이가 되었다는 것.[12] 이 내용만 보면 단순한 개그물 같아 보이지만 당시 잉글랜드는 "Popish Plot"라고 불리는 위기(교황이 찰스 2세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가짜뉴스가 퍼진 사태)로 신교 구교 양측 간의 고발이 만발하고 귀족들까지도 여러 명 처형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의도치 않은 소요가 발생해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를 알 수 없는, 예측불허의 순간에서 넬 그윈이 본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상황.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냐면 찰스 2세 항목에 나오는 것처럼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마저도 이때에는 스코틀랜드로 도망가 있었다.[13] Bastard는 혼외 관계에서 난 자식을 가리키는 표현 중 모욕의 뉘앙스가 아주 강한 단어다. 단순히 혼외 관계에서 나온 아이를 중립적으로 칭할 때는 love child, 혹은 좀 더 법률 용어 같은 느낌으로 illegitimate child라는 표현을 쓴다. bastard라는 표현을 쓰면 보통 호로 새끼, 아비 어미도 없는 놈 수준의 분위기가 된다.[14] 유럽에선 사생아에게 정식으로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 그 사생아는 그냥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받아 쓰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춘희를 쓴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있다. 아버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이름을 안 주어서,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쓰느라 동명이인이 돼 버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찰스 2세에게도 찰스라는 이름의 사생아 아들이 4명, 샬럿(찰스의 여성형)이라는 사생아 딸이 하나 있었다.[15] 8년 후인 1684년에 세인트 올번스 공작(Duke of St Albans)으로 승작했고, 그의 후손이 현재까지 공작위를 계승해오고 있다. 참고로 현재 세인트 올번스 공작가의 당주는 14대 세인트 올번스 공작 머레이 드 베레 보클러크(Murray de Vere Beauclerk)로, 찰스 2세와 넬 그윈의 8대손이다.[16] 사실 찰스 2세의 정부들 중 진짜 진상으로 유명했던 사람은 이 레이디 캐슬마인이다. 레이디 캐슬마인은 찰스 2세의 정부들 중에서 왕비를 제일 무시하고 다녔고, 후반부에는 함부로 정치에 관여하고 국고를 탕진하거나 다른 남자들과의 염문으로 말이 많았다.[17] 정작 찰스 3세는 즉위 이전에 왕명을 찰스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선대 찰스들이 국민들에게 인기가 워낙 없었기 때문인데, 찰스 2세의 경우 그윈을 비롯한 정부들이 한몫 했다.[18] 본래 유럽 궁정에서 높으신 분들 휘하의 광대는 단순히 웃기는 엔터테이너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신하들이라면 목 내놓고 해야 할 직언과 풍자를 거침없이 해 주인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언론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19] "포츠머스(=포츠머스 여공작)와 잘 지내고, 가여운 넬리가 굶주리지 않게 해 주게. (Be well to Portsmouth, and let not poor Nelly starve.)"[20] 라이벌이자 악우였고 찰스 2세의 임종을 같이 지켜본 루이즈 드 케루알도 역시 제임스 2세에게 푸대접을 당하다가 결국 고국인 프랑스로 귀국. 이후에는 아들을 만나러 종종 잉글랜드에 들른 것 이외에는 주로 프랑스에서 살았다.[21] 20대 옥스퍼드 백작의 딸.[22]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