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22:31:48

노먼 화이트사이드

북아일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footiebuzz.com/norman-whiteside.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노먼 화이트사이드
Norman Whiteside
출생 1965년 5월 7일 ([age(1965-05-07)]세)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북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8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78~1982 /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2~1989)
에버튼 FC (1989~1991)
국가대표 38경기 9골(북아일랜드 / 1982~1989)

1. 소개2. 초기 생애3. 클럽 경력4. 국가대표 경력5. 은퇴 후의 삶6. 여담7. 수상
7.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7.2.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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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북아일랜드 출신의 前 축구선수. 그는 21세에 축구 신동으로 거듭났으나 잦은 부상과 자기 관리 실패로 무너진 비운의 축구 선수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월드컵에 출전해 대표팀을 16강에 진출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맨유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많은 경기에 출전한 여파로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그 자신도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것에 자만해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재능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축구 인생을 일찍 접고 말았다. 그의 이와 같은 사례는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낸 축구 선수들에게 반면교사로 삼을만 하다.

2. 초기 생애

화이트사이드는 1965년 5월 7일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샨킬 로드에서 자랐고 나중에 10 다뉴브 스트리트로 이사갔다. 당시 그의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그는 두 형제와 함께 침대를 공유해야 했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고 덕분에 화이트사이드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원만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화이트사이드는 7살 때 유소년 축구팀에 입단했고 얼마 안가 자신의 타고난 축구 재능을 선보여 그보다 2살 더 많은 소년들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10골을 넣는 대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그는 불과 11살에 샨킬 지역에서 축구 신동으로 유명세를 탔다.

입스위치 타운의 스카우터 짐 로저스는 이런 그를 처음으로 주목했다. 그는 당시 입스위치 감독이었던 바비 롭슨에게 이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롭슨은 화이트사이드가 나이가 차면 영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입스위치가 뜸을 들이는 사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스카우터 밥 비숍[1]이 화이트사이드에게 접근해 맨유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마침 화이트사이드의 가족은 맨유 서포터였긴 했지만 화이트사이드 본인은 딱히 맨유를 응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맨유 같은 유명 구단이 접근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맨체스터로 가서 입단 테스트를 받아 거뜬히 합격, 유스팀에 입단했다.

3. 클럽 경력

3.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4세에 맨유 유스팀에 입단한 화이트사이드는 맨유의 레전드이자 그와 고향이 똑같은 조지 베스트와 지속적으로 비교되었다. 이에 대해 화이트사이트는 한 저널리스트에게 시크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조지 베스트와 같은 점은 단 하나 뿐이다. 같은 장소에서 태어났고, 같은 클럽에 입단했고, 똑같은 사람에게 발견된 것이다."세 개인데?

그런데 1980년 초,화이트사이드는 사타구니 부상을 입었다. 훗날 그는 피지컬코치 보비 맥그리거가 실시한 과도한 신체적 마사지 때문에 골반에 손상을 입었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페이스가 강탈당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체력 훈련에 불신을 품고 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선수 생활 내내 페이스 조절에 애를 먹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81년 7월 프레스턴 노스 엔드 A팀과의 친선경기에서 부상을 입고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런 식으로 부상에 시달린 탓에, 그는 1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1982년 초 팀에 복귀한 화이트사이드는 유스팀 코치 에릭 헤리슨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이수하면서 기량을 갈고 닦았고 손상된 무릎과 골반을 고려해 플레이스타일을 조정했다.

화이트사이드는 17세 생일이 2주 남은 시점인 1982년 4월 24일에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과의 경기에 데뷔했다. 이는 맨유 역사상 1953년 던컨 에드워즈가 데뷔한 이래 최연소 데뷔 기록이었다. 이날 맨유는 1:0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그는 FA 유스컵에서 활약해 팀을 결승전에 진출시켰지만 아쉽게도 결승전에서 왓포드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그는 17세 생일날에 프로 계약을 체결했고 본격적으로 맨유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1982-83 시즌, 론 앳킨슨 감독은 화이트사이드와 프랭크 스태플튼을 맨유의 핵심 투톱으로 삼았다. 두 선수 모두 골 에어라인 안으로 빈번하게 뛰어들어가 골을 노리는 스타일이었고 브라이언 롭슨이 그런 그들에게 공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화이트사이드는 시즌 시작후 첫 다섯 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이후 리그 38경기 8골, FA컵 7경기 3골, 리그컵 9경기 3골을 기록하는 등 총 57경기에 출전해 14골을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맨유가 리그럽과 FA컵 결승에 진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2]

그리고 리그 컵 결승전에서, 팀은 비록 리버풀에게 졌지만 그는 골을 기록해 리그컵 역사상 최연소 득점 선수로 기록되었다. 이후 그는 커리어 내내 리버풀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여 맨유 팬들로부터 "Scousers(리버풀 시민들을 가리키는 속어)의 재앙"이라는 별칭을 부여받았다. 또한 브라이튼과의 FA컵 결승전에서, 그는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다. 우선 브라이튼 원정 1차전에서 그는 팀동료 스태플턴에게 절묘한 킬패스를 찔러넣어 골을 기록하게 해 2:2 무승부에 기여했고 홈 2차전에선 결승골을 기록해 팀의 4:0 완승을 이끌어 맨유의 FA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82-83 시즌 종료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AC 밀란으로부터 1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화이트사이드를 넘겨주는 거래에 동의했다. 하지만 화이트사이드는 맨체스터에서의 생활에 만족했고 낯선 밀라노로 가서 적응할 자신이 없어 이적을 거부했다. 이후 그는 맨유에서 변함없이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마크 휴즈와 투톱을 형성할 때도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그러던 1985년 2월 맨유 중앙 미드필더 레미 모세스가 큰 부상을 입고 시즌을 조기 마감하고 말았다. 이에 엣킨슨 감독은 화이트사이드가 지능적인 플레이와 포지셔닝 기술을 선보이는 것에 주목해 그에게 중앙 미드필더 역할을 맡겼다. 이후 화이트사이드는 브라이언 롭슨과 함께 탄탄한 파트너쉽을 맺고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고 1985년 3월 9일 FA컵 8강전에서 웨스트햄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해 팀의 4:2 승리에 일조했다. 맨유는 그의 활약을 앞세워 1985년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언론사 가디언은 그가 "멋진 축구 지능과 탁월한 슈팅 감각"을 지니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85-86 시즌, 맨유는 시즌 첫 15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해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리그 중반에 이르렀을 때부터 성적이 하락하더니 후반기 18경기에서 고작 6번만 이기고 4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언론들은 맨유 클럽의 음주 문화와 론 앳킨슨의 허술한 선수 관리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화이트사이드는 훗날 자서전에서 음주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과장되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엣킨슨이 물러난 뒤 새 감독으로 부임한 알렉스 퍼거슨은 맨유 라커룸의 음주 문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화이트사이드는 이 음주문화에 도취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화이트사이드는 퍼거슨 체제에서 중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21살의 젊은 나이에 무릎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경기에 재대로 뛰지 못했다. 그나마 1986-87 시즌에 37경기에 출전해 10골을 넣기는 했지만, 맨유는 그 시즌에 11위에 그쳤다.

하지만 퍼거슨 본인은 화이트사이드의 천재성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나는 최고 수준의 클래스를 지닌 선수를 목격한 감격에 흥분했다. 그는 21세의 나이에 특별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개인기는 매우 우수해 공을 쉽게 컨트롤할 수 있었고 경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실로 훌륭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평정심을 항상 유지했다. 그는 패스의 각도와 강도를 적절하게 유지했으며 그의 눈은 강철처럼 차가웠다. 선수로서, 그는 천재에 가까웠다."
알렉스 퍼거슨

1988-89 시즌, 화이트사이드는 잦은 부상으로 고작 6경기만 출전하였다. 이후 그는 맨유에 미래가 없음을 느꼈고 이적을 요청했다. 이에 맨유는 1989년 7월 에버튼으로부터 60만 파운드의 기본 이적료에 화이트사이드가 50경기에 출전할 시 15만 파운드를 별도로 지급하는 거래를 받아들이고 화이트사이드를 이적시켰다. 맨유 팬들은 그의 이적에 큰 충격을 받았다. 화이트사이드는 맨유에서 274경기에 출전해 67골을 기록하였고 FA컵을 두번 석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게다가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24살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잠재력이 충만할 것으로 여겨진 그를 다른 팀에 보낸다니 팬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퍼거슨은 팬들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정을 고수했고 이후 닐 웹, 마이크 펠런, 폴 인스, 게리 팔리스터, 대니 윌러스 등을 기용해 맨유의 전성기를 이끌어내는 주역으로 삼았다.

3.2. 에버튼 FC

파일:Whiteside_Everton.jpg

1989년 여름, 화이트사이드는 에버튼에 입단했다. 이때 퍼거슨은 화이트사이드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는지 그가 맨체스터에서 8년동안 받은 급료보다 더 많은 돈을 에버튼에서 벌 수 있도록 도와줬다. 화이트사이드는 퍼거슨의 이같은 배려에 감명받았고 퍼거슨을 비난하는 인터뷰를 해준다면 5만 파운드를 주겠다는 타블로이드 신문사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이후 화이트사이드는 1989-90 시즌 35경기에 출전해 13골을 기록했고 에버튼은 리그 6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무릎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연달아 받아야 했고 결국 의사로부터 더 이상 축구 선수로 뛸 수 없다는 진단을 받기에 이르자 1991년 6월 26세의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4. 국가대표 경력

파일:Whiteside_National.jpg

화이트사이드는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맨유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 그를 주목한 북아일랜드 축구 대표팀 감독 빌리 빙햄은 1982 스페인 월드컵 때 그를 전격 발탁했다. 이로서 그는 17세 41일의 나이로 월드컵 경기에 출전해 기존에 펠레가 가지고 있던 "월드컵 최연소 출전"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와의 첫번째 경기에 출전했으나 골을 기록하지 못했고 5일 후 온두라스와의 2차전에서도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 팀의 무승부를 막지 못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북아일랜드가 어린 선수를 무리하게 주전 선수로 기용하는 바람에 조별 예선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계다가 3차전 상대는 월드컵 개최국인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북아일랜드는 주전 공격수 게리 암스트롱이 스페인 골키퍼 루이스 아르코나다의 실수를 이용해 골을 기록한 후 이를 끝까지 지켜내며 역사적인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북아일랜드는 2라운드에 진출했으나 프랑스에게 4:1로 완패하고 월드컵을 마감했다. 이후 화이트사이드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도 발탁되어 경기에 출전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89년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북아일랜드 대표팀에서 38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했다.

5. 은퇴 후의 삶

화이트사이드는 은퇴 후 선수 인생 내내 무릎 문제에 시달린 경험을 토대로 족병 전문가가 되기 위해 살포드 대에서 공부해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1991년 10월 아마추어 축구팀인 노스위치 빅토리아의 수석 코치 및 물리치료사가 되어 1992년 3월까지 일했다. 하지만 그는 축구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해야 하는 삶을 지긋지긋하게 여겨 결국 코치 생활을 그만뒀다. 이후 화이트사이드는 맨체스터에서 족병 전문의로서 사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족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6. 여담

1985-86시즌에 맨유 구단 역사상 역대 가장 어린 21세 4개월의 나이로 맨유 1군 200경기를 돌파했다. 조지 베스트(21세 7개월), 라이언 긱스(21세 9개월), 마커스 래시포드(22세 2개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2세 8개월), 웨인 루니(22세 11개월) 등보다 빠르다. 이뿐만 아니라 맨유의 각종 최연소 기록 순위엔 화이트사이드의 이름이 빠지는 일이 없다.[3]

7. 수상

7.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A컵 우승 : 1983년, 1985년

7.2.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브리티쉬 홈 챔피언쉽 우승 : 1984년


[1] 조지 베스트와 새미 매킬로이를 발탁한 전설적인 스카우터다.[2] 특히 FA컵 준결승전에선 아스날 FC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기도 했다.[3] 조지 베스트, 라이언 긱스, 던컨 에드워즈 등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맨유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