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8:39:34

마크 휴즈

마크 휴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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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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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13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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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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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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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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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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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휴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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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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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 · 19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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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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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86 · 1988-89 · 1990-91 · 19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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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의 축구 감독
파일:마크휴즈_브래드포드.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colbgcolor=#fff,#191919> 마크 휴즈
Mark Hughes
본명 레슬리 마크 휴즈
Leslie Mark Hughes
출생 1963년 11월 1일 ([age(1963-11-01)]세)
영국 웨일스 렉섬주 루아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웨일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78~1980 /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0~1986)
FC 바르셀로나 (1986~1988)
FC 바이에른 뮌헨 (1987~1988 / 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8~1995)
첼시 FC (1995~1998)
사우스햄튼 FC (1998~2000)
에버튼 FC (2000)
블랙번 로버스 FC (2000~2002)
감독 웨일스 대표팀 (1999~2004)
블랙번 로버스 FC (2004~2008)
맨체스터 시티 FC (2008~2009)
풀럼 FC (2010~2011)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012)
스토크 시티 FC (2013~2018)
사우스햄튼 FC (2018)
브래드포드 시티 AFC (2022~2023)
국가대표 72경기 16골[1] (웨일스 / 1984~1999)

1. 개요2. 선수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5. 여담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6.1.3. 출전 기록
6.2. 감독
6.2.1. 개인 수상
6.3. 서훈

[clearfix]

1. 개요

영국(웨일스)축구선수 출신 감독.

그는 선수 시절 맨유의 유스 출신으로서 팀의 주요 공격수로 활약했고 맨유가 오랜 침묵을 깨고 PL의 절대강자로 등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영국인으로선 드물게도 해외 클럽에도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그는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시작으로 블랙번, 맨시티, QPR, 그리고 스토크 시티, 사우스햄튼 감독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여러 팀에서 지휘한 PL 444경기는 감독 지휘 역대 6위의 기록이다.

2. 선수 경력

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기

휴즈는 1978년 15살의 나이에 맨유 유스팀에 소속되어 2년간 육성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1980년에 정식으로 맨유에 입단했다. 하지만 그는 1983-84 시즌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컵 경기에 출전할 때까지 3년간 데뷔전을 치르지 못했다. 그가 맨유에 데뷔할 무렵, 팀의 공격진은 27세의 아일랜드 선수인 프랭크 스태프턴과 18살의 북아일랜드 선수인 노먼 화이트사이드가 주축이었다. 이 두 선수는 서로 탁월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고 휴즈는 이 두 사람 때문에 벤치에 박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3-84 시즌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 맨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래미 모세스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시즌을 조기 마감한 것이다. 이에 당시 맨유 감독이었던 론 앳킨슨은 중앙 미드필더에서 활동하고 있던 레이 윌킨스를 모세스 자리에 배치하고 노먼 화이트사이드를 윌킨스 자리에 배치했다. 이로 인해 공격진의 한 자리가 비게 되자, 엣킨슨은 휴즈를 그 자리에 배치하여 프랭크 스태프턴과 호흡을 맞추게 했다.

휴즈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스태프턴과 긴밀한 호흡을 맞췄고 11경기 4골을 기록하며 맨유의 주전 공격수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했다. 시즌이 끝난 뒤 레이 윌킨스가 AC 밀란으로 이적하자, 엣킨슨 감독은 화이트사이드에게 중미 자리를 정식으로 맡기고 휴즈를 세컨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 엣킨슨의 선택은 탁월했다. 휴즈는 1984-85 시즌에 리그 38경기 16골을 기록했고 FA 컵 7경기에서 3골, 리그 컵 2경기에서 3골, 유럽 대회 8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총 55경기 출장 24골을 기록하는 대 활약을 선보였다. 맨유는 그의 활약을 앞세워 FA 컵 결승전에서 에버튼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리그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휴즈는 1985-86 시즌에서도 팀내 주축 공격수로 활동했다. 그는 리그 40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다. 맨유는 그의 활약을 앞세워 시즌 초반 10경기를 모두 이기는 활약을 선보이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휴즈는 상대의 집중 마크로 인해 골행진을 중단했고 맨유는 추락하여 간신히 4위를 유지하는 데 그쳐야 했다. 다만 이 시즌에 그가 기록한 17골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한 시즌 골기록이었다.

2.2. FC 바르셀로나 시절

1986년 여름, 휴즈는 2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테리 베너블스는 같은 시기에 에버튼으로부터 게리 리네커를 영입했다. 그는 두 영국인을 공격진의 핵심으로 두고 라 리가를 평정하려 했다. 그러나 휴즈는 라 리가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그는 리그 28경기에서 고작 4골을 넣었고 경기력 또한 지난 시즌에 비해 매우 좋지 않았다. 이에 바르셀로나는 한 시즌 만에 그를 바이에른 뮌헨으로 임대보냈다. 휴즈는 뮌헨에서 리그 18경기 6골을 넣었고 유러피언 컵에서도 2경기를 출전했지만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진 못했다. 임대에서 돌아온 휴즈는 바르셀로나로부터 방출 통보를 전달받고 맨유로 복귀했다.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기

1988년 5월 18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맨유로 복귀한 휴즈는 이후 7년간 맨유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맨유로 복귀했던 1988-89 시즌, 맨유는 실망스런 경기력을 내내 보였고 결국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다만 휴즈는 리그 38경기 14골, FA컵 7경기 2골을 넣는 등 51경기 16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그는 다음 시즌엔 브라이언 맥클레어와 함께 맨유의 투톱으로서 활약했고 1989-90 시즌에 37경기 13골, FA 컵 8경기 2골을 넣으며 총합 48경기 15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맨유는 수비력이 매우 좋지 않아 두 공격수가 넣는 골보다 더 많은 실점을 기록하기 일쑤였고 결국 맨유는 13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에 퍼거슨에 대한 경질론이 거세졌지만 보드진은 퍼거슨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고 퍼거슨은 보드진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팀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후 휴즈는 다음 시즌부터 맨유의 부흥기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0-91 시즌, 휴즈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골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휴즈는 이 시즌에 3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활약을 선보이며 리그 37경기 10골, FA 컵 8경기 2골, 리그 컵 9경기 6골,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8경기 3골을 기록, 총합 52경기 21골을 넣으며 맨유의 호성적을 이끌어냈다. 그가 기록한 21골은 당시 맨유의 주축 공격수인 브라이언 맥클레어와 그 시즌 센터백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득점을 했던 스티브 브루스의 그것을 뛰어넘는 팀내 최다골 기록이었다.

1991-92 시즌, 맨유는 리즈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리그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휴즈는 리그 39경기 11골, FA컵 3경기 1골, 유럽 대회 4경기 2골을 기록하며 총합 53경기 14골을 기록했다. 그 후 PL이 출범한 1992-93 시즌에서, 휴즈는 리그에서만 15골을 기록하며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맨유는 마침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휴즈는 1993-94 시즌에 더 많은 우승 컵을 쓸어담았다. 그는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모두 달성했고 리그컵 결승에서도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골을 기록했지만 팀이 3:1로 패하는 바람에 3관왕은 실패했다. 그는 이 시즌에 리그 41경기 15골, 리그컵 3경기 1골 등 총합 48경기 16골을 기록했다. 이 시기 휴즈는 맨유의 또다른 레전드인 에릭 칸토나와 탁월한 파트너십을 맞추며 맨유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휴즈는 1994-95 시즌에 다시 한 번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번엔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웨스트햄에게 패하고 그 바람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블랙번 로버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또한 FA 컵 결승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에버튼의 FA컵 우승을 저지하지 못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는 1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첼시로 이적했다.

그는 1995년 1월에 맨유를 떠날 수도 있었다. 맨유는 나이가 들어 기량 저하가 뚜렷하게 보이는 휴즈를 대체하기 위해 뉴캐슬으로부터 앤디 콜을 1월에 영입했다. 이에 당시 에버튼 감독이었던 조 로일은 250만 파운드에 휴즈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휴즈는 얼마 후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해 몇 주간 출장하지 못했다. 결국 에버튼은 그의 영입을 포기하고 다른 공격수를 데려왔다. 게다가 에릭 칸토나가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 도중 자신의 가족을 모욕한 관중을 향해 플라잉 니킥을 작렬하는 바람에 8개월 출장정지를 당하자, 맨유는 그를 겨울에 내보낼 생각을 접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휴즈를 기용했다.

하지만 휴즈는 자신을 내보내려 했던 퍼거슨에게 적잖이 실망했고 벤치 멤버로 남느니 다른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게 낫다고 여기고 첼시행을 선택했다. 그는 1988년 맨유 입단 이래 7시즌 동안 352경기에 출장하여 116골을 기록하며 맨유의 부흥기를 이끌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어쨌든 맨유는 1995년 여름 휴즈와 핵심 미드필더 폴 인스, 붙박이 우측 윙어 안드레이 칸첼스키스를 모두 내보냈고, 이 자리에 일명 '퍼기의 아이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맨유의 최전성기를 함께할 신세대 라인업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2.4. 첼시 FC 시절

£1m의 이적료로 첼시에 입단한 휴즈는 아이러니하게도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4-1 대승을 견인했고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레포드로의 원정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FA컵에서는 맨유에게 2:1로 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휴즈는 1990년대 말 첼시의 탑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지안프랑코 졸라와 훌륭한 파트너십을 선보이며 첼시의 호성적을 이끌었다. 그는 1996-97 시즌에 FA컵에서 리버풀과 윔블던을 연달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팀의 FA 컵 우승을 이끌었고 1997-98 시즌엔 리그컵과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첼시에서 3년간 뛰면서 리그에서만 95경기 25골을 기록했다.

2.5. 사우스햄튼 FC 시절

1998년 6월, 휴즈는 65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사우스햄튼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이 시기 휴즈의 기량은 매우 떨어졌고 그는 곧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전환하여 팀의 공격을 지원사격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사우스햄튼에서의 두 시즌 동안 2골만 기록했던 휴즈였지만, 1999년 8월 15일 뉴캐슬과의 홈경기에선 역사상 최고의 발리킥이라 불릴 정도로 인상적인 발리킥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14개의 옐로카드를 수집하며 카드캡처로서 악명을 털치기도 했다.

1999년 8월 4일 사우스햄튼의 선수로 활동하던 도중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된다. 시즌 기간에는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A매치 기간에는 대표팀의 감독으로 활약한 것. 단, 클럽에서는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대표 팀에서는 감독으로 임명되는 즉시 대표팀 은퇴를 하여 대표팀 감독직에만 집중했다.

2.6. 말년

2000년 1월 사우스햄튼 감독으로 부임한 글렌 호들은 휴즈가 자신의 전술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에버튼으로 보냈다. 휴즈는 에버튼에서 두 시즌 동안 16경기를 출전했지만 왓포드에게 한 골을 기록한 것 외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0년 여름, 휴즈는 블랙번 로버스로 자유 이적했다. 휴즈의 포지션은 더 내려와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해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에서 뛰게 되었다. 그는 블랙번에서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고 블랙번이 2001년에 디비전 1(현재의 풋볼 리그 챔피언십)을 우승하며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2002년 2월엔 블랙번이 리그 컵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선수 인생에서의 마지막 골은 2002년 4월 9일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였다. 그는 스튜어트 피어스에 이어 가장 많은 나이에 골을 기록한 선수로 기록되었다.(이때 휴즈의 나이는 39세였다.) 이후 2006년 12월에 테디 셰링엄(당시 웨스트햄)이 40세의 나이에 골을 기록하면서, 휴즈는 3번째 순위로 밀려났다. 2001-02 시즌이 끝난 뒤, 그는 영광스러웠던 선수 생활을 마침내 마감했다.

3. 국가대표 경력

휴즈는 1984년 5월 2일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데뷔하여 17분만에 골을 기록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그는 A매치 72경기에 출장하여 16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웨일스는 월드컵 진출은 꿈도 못꾸는 약소 팀이었고 휴즈는 커리어 내내 월드컵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지역예선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터뜨린 바이시클 킥은 동시대 마르코 반 바스텐의 킥과 비교될 정도의 아주 멋진 골이었다.

4. 지도자 경력

4.1.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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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는 선수 생활 와중인 1999년에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웨일스에서 5년간 활약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2002년 선수 은퇴 이후부터 감독 생활에 전념하여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유로 2004 예선에서, 그는 놀랍게도 이탈리아를 2:1로 격파하며 조 예선 2위를 기록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웨일스는 러시아에게 패하고 유로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4.2. 블랙번 로버스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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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는 유로 대회에서 탈락한 뒤 2004년 9월에 웨일스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 직후 그레이엄 수네스의 사퇴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블랙번 로버스가 그를 감독으로 모셔왔다. 당시 블랙번은 부진에 휩싸여 강등 위기에 직면해 있었는데, 휴즈는 구제불능으로 보였던 블랙번을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고 FA컵에서도 준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의 FA컵 준결승 진출은 블랙번 역사상 40년 만의 일이었다. 4강에서는 아스날 FC를 만나 로빈 반 페르시에게 두 골을 허용하며 0:3으로 패해 결승 진출은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시즌인 2005-06 시즌에서, 휴즈는 팀을 6위로 이끌어내 UEFA컵 출전권을 거머쥐었다. 이때 그는 우승권에 있었던 첼시, 맨유(홈과 원정 모두 이겼다!), 그리고 아스날을 상대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떠오르는 잉글랜드 출신 명감독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휴즈는 이러한 활약에 감명받은 보드진의 요청을 수락하고 감독 계약을 3년 연장해 팀에 잔류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알렉스 퍼거슨의 뒤를 이을 맨유 후임 감독으로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2006-07 시즌에는 앞선 2시즌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수많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격수 베니 맥카시를 20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미드필더 데이비드 벤틀리를 50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수비수 라이언 넬슨을 자유계약으로 영입하고 좌측 풀백 스티븐 워녹을 15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또한 파라과이의 공격수 로케 산타 크루즈를 35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프랑스의 수비수 겸 공격수인 크리스토퍼 삼바를 4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블랙번은 이 시즌에 10위를 기록했고 유로파에서는 32강에 진출했다. 또한 FA컵에서는 다시 한번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첼시에게 1:2로 패배했다. 대대적인 투자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아쉬운 성적. 이후 휴즈는 2007-08 시즌에 팀을 다시 7위로 이끌었다.

07/08 시즌이 마무리된 후 태국의 총리였던 탁신 친나왓이 새롭게 구단주로 취임한 맨체스터 시티로부터 거액의 급료 계약을 제안받자 블랙번을 떠나 곧바로 맨시티로 향했다.

4.3. 맨체스터 시티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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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스벤예란 에릭손을 경질한 맨시티는 휴즈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휴즈가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 유명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 빈센트 콤파니, 숀 라이트 필립스, 그리고 파블로 사발레타가 그들이었다. 휴즈의 맨시티 첫 경기는 좋지 않았다. 그는 빌라 파크에서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4:2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이후 웨스트햄과 선더랜드와의 2경기에서 모두 3:0 승리를 거두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이후 맨시티는 2008년 여름 이적시장이 끝나기 직전에 첼시로 이적이 거의 확실시 되던 호비뉴를 가로채서 325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영입했다. 이 이적료는 영국 이적 시장 역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휴즈는 2009년 1월 이적 시장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첼시로부터 미드필더 웨인 브릿지를 영입했고 웨스트햄으로부터 공격수 크레이그 벨라미를 영입했으며 뉴캐슬로부터 기븐신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던 골키퍼 셰이 기븐을 데려왔고 함부르크 SV로부터 나이젤 데 용을 영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영입 실적에도 불구하고 팀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휴즈는 첫 시즌에서 10위를 기록하며 보드진을 실망시켰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기간인 18라운드에는 잠시 강등권에 위치하기도 했다. 당시 맨시티는 홈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원정에서는 단 2승에 그치며 매우 좋지 않았다.

이러한 홈-원정 간 기복을 줄이기 위해, 휴즈는 또다시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했다. 그는 아스톤 빌라로부터 가레스 배리를 영입했고 블랙번으로부터 로케 산타 크루즈를 영입했으며 아스날로부터 엠마누엘 아데바요르콜로 투레를 영입했다. 또한 맨유로부터 카를로스 테베스를 데려왔으며 에버튼으로부터 수비수 졸리온 레스콧을 영입했고 바르셀로나로부터 시우비뉴를 자유계약으로 데려왔다.

이러한 영입정책은 2009-10 시즌 첫 경기인 블랙번과의 원정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고 이후 울버햄튼, 크리스탈 펠리스, 포츠머스를 상대로 모조리 이겨 초반 4경기를 모두 승리하고 아스날을 4:2로 격파하고, 패하긴 했으나 최대 라이벌이자 리그의 지배자였던 맨유를 상대로 3:4 분패를 거두며 저력을 보여줬을때까지만 해도 대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맨시티는 얼마 안가 무승부를 남발해 추락하기 시작하여 결국 7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맨시티가 추락한 데에는 휴즈의 소극적인 전술 탓이 컸다. 그는 팀이 앞설 때면 언제나 수비 라인을 내리고 승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주로 공격 쪽에 치중된 맨시티의 영입 정책 때문에 팀 스쿼드는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런 팀을 가지고 언제나 소극적인 운영을 취하자, 맨시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중간한 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0으로 이기고 있을 때 걸어 잠그기 전술을 일찍 취했다가 막판에 실점하여 비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팬들은 이길 경기를 자꾸만 무승부로 마감하는 그를 비판했고 그의 무재배를 비꼬는 의미로 '마크 휴무'라는 별명을 지었다.

게다가 그는 믿는 선수들만 계속 기용하고 후보들에게 제대로 기회를 주지 않는 바람에 주전 선수들은 혹사에 시달려 폼이 떨어지고 후보들은 기회를 받지 못해 역시 폼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직면했다. 또한 그는 맨시티의 적극적인 영입정책으로 팀에 합류한 스타 플레이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시즌 내내 그들에게 휘둘렸다. 결국 휴즈는 2009-10 시즌이 한창 진행되던 2009년 12월 19일에 경질되고 말았다.[2]

4.4. 풀럼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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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9일, 휴즈는 풀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휴즈는 첫 경기인 볼튼 원더러스와의 경기를 0:0으로 비겼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2차전에서는 2:2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후 5경기에서 올버햄튼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둔 것을 제외하면 4경기 모두 무승부를 거두며 과연 무재배 장인 다운 면모를 선보였다.

이후 휴즈는 대다수의 경기를 비기거나 2:1 승 또는 2:1 패배를 거두는 신기한 행보를 보이며 팀 순위를 8위로 올렸고 페어 플레이 팀으로 선정되는 덕분에 유로파 대회 진출권을 획득했다. 2011년 6월 2일, 휴즈는 감독직을 돌연 사임했다. 그가 사임한 데에는 풀럼 구단주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와의 갈등이 컸다. 이 구단주는 휴즈를 "이상한 남자" 또는 "벌렁 드러누운 자"라고 부르며 맨시티에서 경질되었던 그를 조롱했다. 그는 그런 구단주에게 시달리다가 홧김에 사임해버린 것이다.

4.5.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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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0일, 휴즈는 QPR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년 반 계약을 체결했다. 휴즈는 2012년 1월에 바비 자모라, 드미트리 시세 등 두 명의 공격수와 수비수 네덴 오누하라와 타예 타이우를 영입하여 전력을 보강했다. 이후 그는 강등권에 처져 있던 팀을 이끌고 리버풀, 아스날, 스완지, 토트넘, 스토크 시티를 상대로 홈경기 마지막 5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팀의 성적을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QPR는 볼튼을 제치고 승점 1점 차이 17위로 간신히 강등을 모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QPR는 EPL 역사에 길이남을 드라마틱한 우승경쟁에 조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맨시티는 맨유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하고 있었다. 리그 최종전에서 맨유가 선더랜드를 잡고 맨시티가 QPR를 상대로 이기지 못할 시, 맨유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QPR은 리그 최종전에서 맨시티를 상대로 선전했고 2:1로 앞서갔다. 한편 맨유는 선더랜드를 상대로 2:0으로 앞서갔고 그렇게 2011-12 시즌 우승은 맨유의 것이 되는 듯 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기 몇분 전, 에딘 제코가 기어이 동점 골을 넣었다. 그리고 추가 시간이 거의 지나갈 무렵, 세르히오 아게로가 역전 결승골을 넣으며 맨시티의 승리를 안기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맨시티는 반세기 만에 EPL 우승이라는 드라마틱한 성공을 이뤄냈다.

2012년 여름, QPR은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거 영입했다. 키에런 다이어, 라이언 넬슨, 앤드류 존슨, 로버트 그린, 박지성, 파비우 다 실바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QPR은 리그 첫 경기에서 스완지 시티에게 홈에서 5:0으로 패한 뒤 승리를 거두질 못하는 비참한 행보를 전전해야 했다. 휴즈는 선수들의 플레이가 너무 당혹스럽다며 그들을 비난했다. 이후 휴즈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보싱와, 줄리우 세자르, 에스테반 그라네로를 추가로 영입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QPR은 12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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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경기 도중 팬에게 이런 수모까지 당하기도 했다.

팀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QPR에 이적한 스타 선수들이 자기가 팀의 핵심이니 팀이 자신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며 서로 알력 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뛰어났지만 한 팀으로서 융화되지 못했고 팀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이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서로 싸우기 일쑤였다. 휴즈는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했고 결국 오합지졸이 된 QPR은 프리미어 리그에 소속된 팀이라곤 볼 수 없는 참담한 경기력을 보였다. 결국 휴즈는 2012년 11월 23일 해고되었고 해리 레드냅이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QPR은 끝내 강등당했다.

4.6. 스토크 시티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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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0일, 휴즈는 스토크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자신이 QPR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음을 인정하고 스토크에서 이를 만회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스토크에서 토니 풀리스식 피지컬 축구에 익숙하던 스쿼드를 갈아치우고 자신이 추구하는 패싱 축구를 스토크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그는 2013년 9월에 마르코 아르나우토비치스티븐 아일랜드를 영입하여 롱 볼 패스 위주였던 선수진에 짧은 패스를 유기적으로 전달하는 스타일의 선수들을 데려와 변화를 주려 했다.

스토크는 시즌 초반에는 순탄하게 흘려갔지만 9월과 10월에는 리그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겨우 승점 2점만 획득하며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11월과 12월에는 단 1패만 거두며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2월의 마지막 경기에서, 스토크는 뉴캐슬에게 5:1로 패하고 말았다. 이 충격의 여파로, 스토크는 2014년 1월에는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며 겨우 1점만 획득하고 말았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켄와인 존스를 카디프로 보내고 대신 피터 오뎀윙기를 데려와 스쿼드에 변화를 줬다.

오뎀윙기의 합류는 휴즈의 전술이 빛을 발휘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스토크는 맨유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이후 스토크는 경기력이 한층 상등되었고 아스날, 웨스트햄, 아스톤 빌라 헐 시티를 상대로 모조리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이리하여 스토크는 최종 순위를 9위로 마감했는데, 이는 1974-75 시즌 이래 스토크가 EPL에서 거둔 가장 높은 순위였다.

2014-15 시즌에서, 휴즈는 필 바슬리, 스티브 시드웰, 마메 비람 디우프, 보얀 크르키치 등 여러 선수들을 영입하며 스쿼드를 물갈이 하는 데 성공했다. 스토크는 3라운드에서 맨시티를 1:0으로 제압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뒤 연승은 없지만 연패도 없는 무난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다가 리그 15라운드에서, 스토크는 아스날을 상대로 경기 시작 20초만에 피터 크라우치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전반에만 3골을 넣는 파란을 일으켰다. 후반전에 아스날이 2골을 만회하긴 했지만 결국 스토크가 승리를 거둠으로서 지난 시즌보다 한층 좋아진 팀의 실력을 과시했다.

2015년 1월, 스토크 보드진은 휴즈와 협의한 끝에 그의 계약 기간을 2019년까지 연장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스토크는 1월에 보얀과 쇼크로스 등 많은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실려가는 악재에 직면했다. 결국 스토크는 2월에 FA 컵에서 탈락하고 답답한 경기력을 보이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3월부터는 경기력이 좋아졌고 스토크는 최종 순위 9위를 기록했다. 이때 스토크는 마지막 경기에서 제라드가 프리미어 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리버풀을 상대로 6:1 대승을 거둬 제대로 찬물을 부었다.

4.6.1. 2015-16 시즌

2015-16 시즌, 주전 골키퍼 아스미르 베고비치, 주전 센터백 로베르트 후트, 그리고 주전 중미 스티븐 은존지가 한꺼번에 팀을 이탈했다. 이에 휴즈는 주전 골키퍼 자리를 잭 버틀랜드에게 맡겼고 하노버에서 활약하고 있던 스페인 공격수 호셀루를 영입했으며 스위스 출신의 윙어 세르단 샤키리를 영입했다. 또한 이브라힘 아펠라이, 셰이 기븐, 글렌 존슨, 마르코 판힝컬 등을 추가로 데려와 스쿼드 보강을 이뤄냈다.

스토크는 시즌 초반에 승보다 패가 더 많은 부진에 빠졌지만 이내 영입 선수들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잭 버틀란드가 EPL 최고 골키퍼로 선정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스토크의 경기력은 갈수록 좋아졌다. 2016년 1월 11일, 현재 스토크는 20경기 8승 5무 7패를 기록하며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웨스트 햄전을 승리하며 9위로 마무리했다.

4.6.2. 2016-17 시즌

2016-17 시즌 초반에는 최악의 부진을 겪으면서 귀돌린, 모예스와 함께 최우선 경질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10월에 조 앨런을 앞세워 3승 1무를 거두며 부활했다, 그러나 레스터 시티 FC와의 경기에서 제이미 바디가 퇴장당하고 2-0의 압도적인 상황에 경기 후반 골을 허용하고 또 경기 종료 3분전 골을 먹혀 2-2의 통한의 무승부를 거뒀다.

점차 상승세를 타나 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현재 교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데 교체 목록 7명 중 수비자원이 하나도 없다. 이번 박싱데이에 맞이하는 팀이 리버풀과 첼시인데, 리버풀전은 월터스의 선제골로 상승세를 타나 했으나 크라우치가 놓치지 말아야 할 찬스를 놓치고 수비 실책까지 겹쳐 결국엔 1-4를 기록했고 요즘 첼시의 기세를 생각하면 박싱데이 주간 두 경기를 모두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스토크에겐 아주 뼈아픈 연말이 될 듯하다. 그렇게 2017년 시작 후 암울한 시간을 보냈고 9위 과학을 깨면서 13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리뷰 참고. #

4.6.3. 2017-18 시즌

프리 시즌, 루카쿠즐라탄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며 높게 평가했다.

9월 16일 기준 1승 2무 1패로 작년과 다르게 좋은 스타트를 끊고 있다, 개막전을 지긴 했으나 아스날과의 경기에서는 무려 승점 3점을 챙겼고 천적 웨스트 브롬과의 경기도 비겼다[3], 추포모팅의 멀티 골로 비겼던 맨유와의 경기, 종료 후 감독간 악수에서 무리뉴와의 신경전이 있었는데 언론에서 먼저 시비를 건 쪽이 휴즈라며 휴즈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 그러나 휴즈는 무리뉴가 언론을 이용했다며 비판했다. #

그러나 이후 DTD를 시전하며 강등권인 18위 까지 순위가 떨어졌다. 박싱 데이 기간에 이틀 후의 뉴캐슬전을 잡기 위해 첼시 원정경기를 로테이션을 돌려 5-0 대패를 당했는데, 새해 첫 경기인 뉴캐슬 홈경기까지 0-1로 패배하며 경질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뉴캐슬전 후 포스트 매치 인터뷰에서 자리가 위험하진 않은 것 같냐는 질문에 "현재 팀의 상황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이 팀을 감독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라는 답변으로 스토크 팬들의 부아가 치미게 만들었다.

그러다 결국 FA컵 3 라운드에서 4부 리그인 EFL 리그 2 소속 코번트리 시티 FC에 패배하며 바로 그 날로 감독 자리에서 경질당했다. 이 시즌의 스토크는 결국 10년간의 프리미어 리그 생활을 마감하고 챔피언십으로 향하게 되었다.

4.7. 사우스햄튼 FC 시절

삽질을 반복하다 경질된 마우리시오 페예그리노의 뒤를 이어 사우스햄튼 FC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일단 임기는 이번 시즌 까지이며 시즌 결과에 따라 재계약 여부가 결정된다고 한다.

그가 감독 맡았을 때 사우스햄튼과 휴즈의 이전 팀인 스토크 시티는 현재 18위, 19위로 나란히 강등권이다. 마크 휴즈가 떠난 뒤 스토크 시티는 여전히 1승 5무 5패 극심한 부진에 빠져있고 사우스햄튼도 2017년 11월에 에버튼을 이긴 뒤로 리그에서 6무 6패로 나락에 빠졌다가 2018년 2월 3일에서야 20위 강등이 거의 확정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 난타전 끝에 3-2로 겨우 이겼다. 그리고 리그에서 또다시 2무 5패로 두들겨 맞는 상황이라 휴즈의 재계약 여부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막판에 스완지와의 단두대 매치 원정경기에서 0-1로 승리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리그 17위로 간신히 잔류에 성공했다.

이 성과를 인정받아 재계약을 맺으며 2018-19 시즌을 맞이했지만 14라운드까지 홈에서 1승도 못거두고 승점 9점으로 강등권에 머물며 부진한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2-0으로 앞섰던 경기를 2-2로 비기고 2018년 12월 3일 경질되고 말았다.

4.8. 브래드포드 시티 AFC 시절

2022년 2월 24일, 4부 리그인 EFL 리그 투의 팀 브래드포드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사우스햄튼 이후 3년간의 공백기 이후 복귀이다. 계약 기간은 2024년 여름까지라고 한다. 2023년 10월 4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5. 여담

미국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와 외모가 비슷하다.

알렉스 퍼거슨의 유명한 별명 헤어드라이어를 만든 사람이기도 한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1.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3/8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5] 11 4 0 0 2 1 4 0
1984/8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 38 16 7 3 2 3 8 2
1985/8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 40 17 3 1 2 0 0 0
1986/87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8 4 2 0 - - 7 1
1987/8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8 6 3 1 - - 2 0
1988/8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 38 14 7 2 3 0 - -
1989/9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 37 13 8 2 3 0 - -
1990/9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 31 10 3 2 9 6 8 3
1991/9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비전 1 39 11 3 1 6 0 4 2
1992/9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프리미어 리그[6] 41 15 2 0 3 1 2 0
1993/9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프리미어 리그 36 12 7 4 8 5 2 0
1994/9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프리미어 리그 34 8 6 2 0 0 5 2
1995/96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1 8 6 4 2 0 - -
1996/97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5 8 7 5 2 1 - -
1997/98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29 9 1 0 6 2 3 1
1998/99 사우스햄튼 FC 프리미어 리그 32 1 2 0 2 0 - -
1999/00 사우스햄튼 FC 프리미어 리그 20 1 2 0 3 0 - -
1999/00 에버튼 FC 프리미어 리그 9 1 0 0 0 0 - -
2000/01 에버튼 FC 프리미어 리그 9 0 0 0 1 0 - -
2000/01 블랙번 로버스 FC 디비전 1[7] 29 5 5 0 0 0 - -
2001/02 블랙번 로버스 FC 프리미어 리그 21 1 3 0 6 0 - -

6.2. 감독

6.2.1. 개인 수상

6.3. 서훈



[1]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8위.[2] 경질 전 마지막 경기는 홈에서 선덜랜드에 4:3으로 이겼다.[3] 경기 전 메이웨더 - 맥그리거의 경기 시청을 금지했다.[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자체 선정[5] 1983년 당시 1부 리그 명칭[6] 1부 리그 명칭이 92-93 시즌 부터 디비전 1에서 프리미어 리그로 변경[7] 2부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