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klas Luhmann, 1927 ~ 1998
1. 개요
독일의 사회학자로 여러 사회학 이론들을 제창해냈으며 사회 체계 이론과 소통 그리고 위험과 신뢰 등등 거의 전 방위에 영향을 끼쳤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현대 중요 사회 이론가 중 하나이다.루만의 주요 이론은 이해 하는 것이 꽤나 어려운데 루만 본인은 사회의 법에서 '사회은 복잡하고,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고 사실 다른 이들이 우려먹는 사회 이론들은 루만이 보기에 영 아니기 때문에 연루된 모든 것들과 모든 이들을 다 까야 하기 때문에 이론에 살이 붙어서 복잡한 거다. 그래서 루만에 대한 입문서도 많다. 일단 루만 자신은 자기 이론을 거대이론로 보고 있으며, 루만을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도 루만이 내린 '거대 이론'이란 정의에 따라간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엔 사회의 사회, 사회의 법, 사회적 체계들[1], 사회의 교육체계, 법 사회학, 열정으로서의 사랑, 체계이론 입문, 예술체계이론, 생태적 커뮤니케이션, 사회이론 입문, 대중매체의 현실, 복지국가의 정치 이론등이 번역되어 나왔고 독일어에서 번역한 루만이론 입문서들도 나왔으니 입문서를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여튼 루만 이론을 읽으려면 생각들을 다 뜯어 고친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중 사회이론 입문, 체계이론 입문은 루만이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한 강의 녹음을 정리한 것이다. 두 책 다 받아 쓴 이는 같은데 번역자가 달라서 사회이론 입문은 구어체로 썼고 체계이론 입문은 일반 책처럼 써놨다.
니클라스 루만을 지도교수로 사사(師事)한 경북대학교 노진철[2] 명예교수가 지도교수님을 떠올리면서 한 말로는 루만이 대학생 수업을 안 여니까 빌레펠트 대학생들이 루만 보고 교수님하가 수업 안하니까 우리 수업 좀 해라라고 시위를 벌여서 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이 강의는 루만은 낮에 연구하는 지라 밤중에 이뤄졌고, 다른 과 교수들도 좀 앉아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제자에겐 매 주마다 루만이 메모상자로 작성한 새로운 글이 던져졌고 그에 대해서 코멘트를 달아야 했다고 한다. 여튼, 루만은 학회 만들기를 싫어했고, 제자에게 '난 한국에 대해서 몰라서 그거에 대해서는 지도해줄수 없고, 이론은 창시자 이름 붙인 건 자기 스승대로 끝났으니까 네가 이 이론의 연구자중 한사람이 된다면 지도해줄께' 라는 조건을 달아 제자로 받아줬다고... 덤으로 제자분도 '한국XX(창시자)학회' 라고 붙은것에 대해 저런 과거가 있다보니 매우 디스한다. 노진철 교수가 정년 퇴임일이 다가오니 후배들이 은퇴하시기 전에 우리 학회 만들면 어떨까요? 했다가 결국 이름을 '한국사회체계이론학회'로 정하게 된다.
물론, 한국의 거진 모든 루만 관련 서적의 감사의 글에는 '이 제자분이 도와주셨습니다.' 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2. 생애
1927년 독일 뤼네부르크의 양조장집 아들로 태어나 1943년 16살에 김나지움을 졸업하자마자 방공부대 보조로 징집되어 들어갔으며, 덤으로 반 강제적인 분위상 히틀러 유겐트 가입도 했고[3]1944년부터 45년까지 미군에게 전쟁 포로로 붙잡혔는데, 포로 수용소에서 구타도 당하고, 자기 나이보다 더 위인 사람들이 광산에 강제 노역을 하러 가는 걸 보고 '제네바 협약좀 지켜라![4]'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 법을 배워야 겠다고 생각, 194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 특히 로마법 쪽을 배웠으며 49년도에 졸업하여 지역 사무소에서 일하다 53년부터 고향인 뤼넨부르크의 지역 관청에서 근무[5]하면서 나치 전범들을 잡는 동안 다른 방면으로 유명해진 메모상자[6]를 구상했다. 그후 사무실에서 지나가던 문서를 보다가 장학금에 응시를 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1960~1961년 탤컷 파슨스 밑에서 구조기능주의를 배웠다. 1962년부터는 슈파이어 행정대학에서 행정 책임자로 일하면서 메모상자에서 꺼낸 글을 사회학자에게 보냈더니 '니 빌레펠트 대학교 1호 교수임' 이란 편지를 받고, 39살에 이제껏 파던 법학에서 사회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그렇게 늦깎이 사회학도는 6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1968년 빌레펠트 대학교에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여기서 작업중인 연구계획을 말할 때, 연구 대상: 사회 이론, 연구기간 30년, 비용: 없음 으로 대답했다. 덤으로, 교수 생활에 은퇴기를 더해서 말 그대로 딱 30년을 사회 이론을 연구하는데 써서 [7] 자신의 이론을 마무리했으며 메모상자로 인해 엄청나게 다작했다.
위르겐 하버마스와도 같이 저술 활동을 하였고 학문적으로는 하버마스가 처음 알아보고 루만을 끼워넣어서 서로 논쟁이 붙었으며 이로 인해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였으며, 하버마스는 루만의 이론을 자기 식으로 변형하는 드립을 하기도 했다. 여튼 학문을 떠나서 사이는 좋았던 모양인지, 하버마스가 빌레펠트 대학교에 특강 하러 왔다가 매우 당돌한 대학교 1학년에게 팩트폭력을 당하고 진땀을 흘리며 당황하기도 했다고 한다.
루만 동네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던 루만은 자주 셰퍼드를 데리고 산책다니던 교수님이었고, 학생들이 본 루만은 '사채꾼' 스러웠다고 한다. 물론, 집 명패엔 Prof. Dr. Niklas Luhmann 이 떠억 붙어져 있었다. 그리고 루만의 비서는 루만의 생각을 묻기 위한 책들의 홍수로 인해 이것들 중에서 루만에게 줄 책을 골라내는 것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루만은 당연하게 아버지의 유산인 양조장에 딸려온 술집을 뤼네부르크에 갖고 있었다. 히틀러 유겐트를 억지로 한 탓인지 68 혁명때 어느 편에도 끼지 않았다. 이건 공직자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술도 별로 안 좋아하고 거기다가 무정당이었던 덕택에 경력 쌓기도 힘들었다.
3. 자기생산적 사회체계 이론
칠레의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자기 생산적 이론[8]에다가 자신의 체계(System) 이론을 접목시킨 30년 동안 이 사람이 연구한 이론으로 자기 생산적 사회 체계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기존 사회 이론들의 밑 바탕이 되었던 칸트, 헤겔, 뒤르켐까지 이어지는 계보들을 다 까내리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9] 자기 생산적 사회체계 이론이 보는 사회는 전체보다 더 큰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사회는 이런 부분들로 이뤄진 체계들로 이뤄져 있으며 이런 체계들은 오직 소통[10]을 통하여서만 다른 체계들과 접근 가능하다. 즉, 전통적인 사회이론처럼 사회를 인간 중심이 아니라[11] 체계와 체계가 주고받는 소통이 중심인 이론으로 예를 들면 법, 정치, 예술 등도 서로 다른 기능체계의 일종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 가능한 것으로 다룬다.그리고 이렇게 소통과 소통으로 인한 사건[12]들로 인해 체계들은 차츰차츰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게 된다. 간단하게 사회 진화이다.
사실 이거보다 더 나가면 조지 스펜서-브라운의 재진입, 소통의 요소, 체계의 프로그램, 사이버네틱스적 요소, 2차적 사이버네틱스 요소 등의 더럽게 어려운 용어가 많아서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생략한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참조 문서를 봐도 괜찮을 것이나 이 글만 해도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찌나 어려운지, 한국에서 사회체계이론이 번역되어 나오고 번역자[13]가 극딜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사회적 체계들'이라는 이름으로 개정되어 출판되었다. 한국의 루만 이론에 대한 체계는 매우 깐깐하며, 교수급에서도 극딜 당하는 게 현실이다.[14]
여하튼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학에 자기 생산적 이론 개념을 끌고 온 것에 대해 호평을 남겼다.
3.1. 복잡성
환경은 너무나 복잡성이 크기에[15] 이런 복잡성을 줄여서 인간의 인지 능력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을 체계라고 보고, 체계는 복잡성을 줄이면서 덩달아 환경에 대한 정보도 인지능력의 부재로 인해 날려먹으면서 소통 매체를 만들어 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금 이렇게 나무위키에서 글을 보고 있는 건 일반 환경에서 나무위키라는 사회 체계 프로그램[16]을 거친 환경 복잡성을 축소한 정보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과적으로 보자면 엔트로피에 대항하는 네겐트로피가 체계가 하는 행동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루만은 신뢰를 복잡성 축소 기제중 하나로 보기도 하였다. 덤으로 사회학에서 신뢰 연구가 본격화 된것은 루만이 지은 'Vertrauen: Ein Mechanismus der Reduktion sozialer Komplexität' 란 책이 영어로 번역돼서 나왔을 때부터이다.4. 메모상자
루만은 공무원 재직 시절부터 메모 상자를 만들었는데, 그는 자신보다 이 메모 상자가 더 머리가 좋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 이 메모상자로 인해 엄청나게 지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덤으로, 루만 사후에 이 메모상자의 소유권을 갖고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만의 업적이 모두 이 메모상자로 인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현재는 컴퓨터의 발전으로 삽질의 대부분이 줄어들었다. Visual Studio Code를 이용한 Foam 이라던가, 옵시디언[17], Roam Research 등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Zettelkasten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원래 사회체계이론으로 2권짜리로 번역되었는데, 검수를 받고도 발번역 했다고 말이 많아서 한권으로 다시 나왔다.[2] 루만이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써낸 '사회이론 입문'에서는 '한 한국인 제자'라는 운을 떼면서 한국인 제자를 인용한다. 동양권에서 루만의 직속 제자는 이 사람 단 한 명 뿐이다. 나머지는 루만이 강의를 했던 대학을 나오거나 루만 제자의 대학원생으로 들어간 경우이다. 그 분 왈은 처음 독일에 갔을땐 이과였지만 그 당시 금단의 지식이었던 마르크스 쪽에 관심이 있었는데, 마르크스 주의 수업듣다가 현타 받고, 루만 세미나를 듣게 되고 인연이 되었다.[3] 루만은 그런 환경을 매우 싫어했다. 인터뷰에서 루만은 히틀러 유겐트에 억지로 가입해야 했고, 반갑잖은 행진, 인사법 그리고 정권의 끔찍한 자기홍보들을 들먹이면서 나치 정권하의 일을 깠다. 거기다가 루만은 어머니가 스위스 쪽이라 스위스도 자주 갔다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있었고, 뤼네부르크에서 양조장과 펍을 운영했던 루만의 아버지도 이에 대해서 "나치 놈들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 라며 반발하기도 했었다.[4] 루만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루만이 '제발 좀 제네바 협약 지켜라' 란 말을 했다고...[5] 1954년부터 55년도에는 뤼네부르크 고등 행정법원장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6] Zettelkasten. 상이한 텍스트들의 주제별 그물망을 이루는 색인 카드들에 의한 참고 체계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7] 사실 그의 이론의 집대성인 사회의 사회는 자신이 혈액암이라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빨리 쓴 것이지만 여하튼[8] 마투라나의 탐구 대상과 자신의 탐구 대상 중 가장 큰 차이로는 자신의 탐구 대상인 '사회'는 외부로부터의 관찰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회는 그 부분 체계인 대중매체나 학문체계를 통해서 자기관찰만 관찰 가능하다고 본다.[9] 사회란 이렇게 돌아가는데, 왜 너희들은 저따구로 보고 있나? 라는 일갈이라고 볼 수 있다.[10] Kommunikation의 번역. 정보, 통지, 이해 3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어야 소통으로 본다. 예를 들자면 경제 체계의 경우 간단하게 돈이 되냐?를 소통매체로 사용하는데, 돈이 된다 / 돈이 안 된다 or 돈이 있다 / 돈이 없다란 것이 정보가 되고, 그리고 그 정보가 알려지고(통지), 다른 체계나 같은 체계에 받아들여짐(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무시하고 왜곡되어도 이해의 한 종류로 받아들인다. Kommunikation을 의사소통으로 번역하면 오역에 해당한다. 루만의 소통은 씹거나 아님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하더라도 그걸 소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말만이 소통이 아니다.[11] 예를 들면 개인 대 개인 or 개인 대 사회법칙[12] 불확실성은 당연히 포함[13] 번역자도 그냥 듣보가 아니라 국립대 대학 교수이고 번역한 책에 당연하게시리 저 한국인 제자분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감사의 글을 남겼다.[14] 다만, 이 번역자가 번역한 다른 책(괴델, 에셔, 바흐)의 초판 역시 번역과 관련한 비판이 무척 많았기에, 극딜의 원인이 꼭 학계의 깐깐함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15] 체계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복잡성으로 친다.[16] 체계의 환경에 대한 정보가 체계로 흘러들어가는 통로로, 체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17] 개인 사용만 무료, 회사원이 프로젝트를 할 경우 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