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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고성 서문 일대의 설경
1. 개요
邓州영어 Dengzhou
허난성 난양시의 현급시. 인구는 약 125만명으로, 성할직급시이다. 장강으로 흘러드는 바이허의 지류인 퇀하 강변에 위치하며, 중세 시기 난양 분지의 중심 도시였다. 옛 지명으로 등주 외에도 양현이 있다. 구도심에는 옛 성벽과 사찰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난양, 샹양, 상뤄 등을 이어주는 사통팔달의 도시이다.
난양-샹양으로 이어지는 쟈오류 철도가 지나는 덩저우역, 비슷한 방향인 정저우-충칭 고속철이 지나는 덩저우둥역, 싼먼샤-징먼으로 이어지는 하오지 철도가 지나는 덩저우시역이 있다. 서쪽 방면에는 단장커우 저수호 (丹江口), 동남쪽 방면에는 신예현 (신야)이 있다.
화타 다음가는 중국의 의신 장중경의 고향이고, 여전히 의술 유명하다. 또한 최근들어 재생에너지, 부품 제조업, 바이오의약업 등의 산업이 발달하여 점차 허난성의 주요 경제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콩, 담배, 목화 등의 상품작물이 두드러지는 농업과 축산업 역시 발달하였다.
2. 역사
기원전 4000년 무렵의 양샤오 문화 유적이 발견되어 유구한 역사가 있음이 밝혀졌다. 하나라 시기 일대에 등나라가 세워져 상나라와 주나라 시기에 제후국으로 있었고, 이로써 등주 지명이 유래되었다. 현 샹양시 북부에 있던 소국 우 (鄾)를 속국으로 두는 등 춘추시대 초엽까지 중소국으로 있던 등나라는 기원전 678년 초문왕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초나라 지배기에 양읍 (穰邑)이라 불리다가, 기원전 312년 한나라가 정복했으나 기원전 296년 진나라령이 되었다.2.1. 고대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 남양군(南陽郡) 양현 (穰縣)에 속했고, 남쪽 샹양 방향에는 등현 (鄧縣)이 있었다. 후한 말엽 남양은 장수의 근거지였다. 197년, 조조가 남하하자 장수는 귀순했다가 반기를 들어 그를 격퇴한 후 근거지를 남서쪽의 양현으로 옮겼다. 이후로도 유포의 도움으로 조조와 맞서던 장수는 관도대전 직전에 결국 귀순했다.208년 적벽대전 당시 조조는 원활한 보급을 위해 양현에서 장강까지 이어지는 운하를 팠고, 조조군의 곡물 선박이 지나던 운하는 현재도 소조하 (小漕河)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북위 효문제 시기 등주가 설치되었고, 양현이 치소가 되었다. 다만 남양 일대는 남조와의 최전선이었기에 형주자사부는 북쪽 산맥 너머의 노산 (현 핑딩산시 루산현)에 있었다.[1] 이때부터 남양 분지의 중심지는 완성에서 양성으로 이전되었다.
2.2. 중세
범중엄이 세운 화주서원
북위 말엽인 533년, 권신 고환이 황제파 군벌들을 제압하고 낙양으로 진군해오자 겁에 질린 효무제는 형주자사 하발승과 접촉하여 등주 양현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산기시랑 류경의 설득으로 우문태가 있는 장안으로 행하였다. 이후 고환은 낙양과 등주를 점령하고 동위를 세우게 된다. 당나라 초엽인 624년, 돌궐 제국이 연이어 관중 지방을 침공하자 일부 대신들이 양양 혹은 등주 일대로의 천도를 건의하였고, 당고조 역시 동의했으나 진왕 이세민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이세민은 직접 돌궐의 힐리가한과 맞서 관중을 안정시켰다.
당나라 말엽인 896년, 좌간의대부 겸 동평장사 주박이 상소를 올려 나라가 혼란하니 중원에 속하면서도 민심이 선하고 외침에서 안전한 양양 / 등주 일대로 천도할 것을 청하였다. 당소종 역시 그에 동의했으나, 권신 주온 (주전충)이 내켜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후량 시기인 909년, 등주에는 선화군절도 (宣化軍节度)가 설치되었고 현 난양 및 쑤이저우 일대를 통솔했다. 후당 시기인 923년, 선화군절도는 위승군절도 (威勝軍节度)로 개칭되었다가 후주 시기인 953년 무승군절도 (武勝軍节度)로 바뀌었다.
북송 시기인 1045년, 대학자 범중엄이 등주에 부임하였다. 그는 4년여간 등주자사를 지냈고, 1046년에 그 유명한 선우후락의 명언을 남겼다. 북송 대에 양현은 7개 현급 중 상 (上) 혹은 망 (望) 등급이었다.[2] 그리고 1126년, 금나라 군이 남하하자 재상백시중 이방산 등은 황명을 받들어 양양 및 등주로 피신하려 했으나 장군 이강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이후 남도도총관 장숙야가 송흠종에게 양양 및 등주를 거쳐 장안으로의 파천을 권했으나,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금군이 재침하여 정강의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후 1127년, 응천부 (상추시)에 있던 송고종은 금군이 다가오자 피란지를 물색했다. 이에 상서우복시 겸 중서랑 이강 등은 피란지가 관중, 양양 & 등주, 건강 순으로 적합하다 상주하였다. 사대부 대부분 역시 수비에 용이하면서 중원과 가까운 남양으로의 파천에 동의했고, 이강은 등주성 보수까지 명령했으나 금군이 근접해오자 고종은 황잠선 등의 의견에 따라 건강으로 피신했다.[3]
정강의 변 이후로도 등주는 송나라 영토로 남았으나, 1141년 소흥화의 시에 양현의 남쪽과 서쪽 40리에 국경이 설정되며 금나라에 할양되었다. 금나라는 국경도시인 등주에 송과의 교역을 위한 시장인 각장 (榷場)을 두었다. 1161년, 채석기 전투 후 우윤문의 남송 군대가 등주를 점령했지만 융흥북벌의 실패로 1164년 재차 금나라 령이 되었다. 금나라 시기에 양현은 남경로 (南京路) 산하 등주의 치소였고, 무승군절도 역시 유지되었다. 등주 산하에는 양현, 남양현, 내향의 3개 현이 있었고 양현 산하 4개 진 중에는 신야 (현 신예현)도 있었다.
몽골-금 전쟁의 막바지인 1232년, 몽골군이 개봉을 포위하자 원수 저얼은 귀덕부 (상추시) 파천을 주장했고 승상 새불 및 우사낭중 백화 등은 등주 파천을 제안했다. 양자를 택한 금애종은 귀덕부를 거쳐 채주에 당도, 뒤이어 등주로 향하려 했으나 몽골-송 연합군이 남북으로 압박해오자 결국 채주에서 항전하다 멸망을 맞았다. 원나라 시기인 1269년에 등주에는 외성이 축소되었고, 1273년에 등주는 양양부 (襄陽府)에 소속되었다. 1279년에는 하남강북행중서성 (河南江北行中书省) 남양부 (南陽府)로 개편되었고, 이로써 천년 가까이 양현으로 유지되던 남양 분지의 중심지는 남양현 (완성)으로 옮겨졌다.
2.3. 중근세
명대에 세워진 등주성 서문 일대
1351년 등주 출신의 왕권 (포왕삼)이 북쇄홍군을 일으켜 등주성 및 남양성을 점령, 초기 홍건군 두령 중 하나가 되었다. 원 조정에서 파견한 진압군 사령관 실랄파도[4]는 등주성을 탈환한 후, 반군이 재차 활용할까 우려하여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에 방화하였다. 이로써 등주는 크게 쇠퇴했고, 한동안 폐허로 남았다. 그러던 1369년, 등주가 2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홍무제는 금오우위진무 공현을 파견해 지주로 삼았다. 공현은 현지 원로들의 안내로 옛 도시에 당도, 1371년에 내성 일대를 중심으로 복구한 후 1373년까지 벽돌 성벽을 쌓았다.[내성문] 성벽용 벽돌은 대형으로 제작되었고, 성문 홍예 쪽에는 녹인 철을 부어 강화하였으며 강물을 끌어와 해자도 두었다.[6]
1499년, 지주 오대유가 기존 2.1km 둘레의 내성 주변에 7.5km 둘레의 토성을 축조하여 재차 외성을 세웠다.[외성문] 명나라 시기 일대는 하남포정사 (河南布政使司) 남양부에 속했고, 1369년 폐지되었던 양현은 1380년 복구되었다. 1381년에는 양현이 등주로 개편되었고, 신야 / 내향 / 석천 3개 현을 통솔했다. 청나라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옹정제 대에 등주는 사실상 해체되어 남양부에 직속 편입되었다.
2.4. 근현대
신해혁명 후인 1913년, 등주는 등현이 되어 예남도 (豫南道)에 속했다. 예남도는 이듬해 여양도 (汝阳道)로 개칭되었고, 1927년에는 하남성 직할에 놓였다. 1933년에는 하남성 제6 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다. 중일전쟁기인 1939년 봄, 현정부는 일본군의 군사적 활용을 방지하기 위해 외성과 내성을 허물었다. 국공내전기인 1947년, 주민들은 성벽을 재건하고 물을 끌어와 해자를 채웠다. 다만 70년대 들어 문화대혁명과 도시화 과정에서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내성의 서쪽 성벽만이 잔존한다.인민해방군이 점령한 1948년부터는 기존의 덩현 인근에 덩시현 (邓西县), 덩베이현 (邓北县)이 설치되었다가 1949년 덩현으로 통합되었다. 허난성 난양전구에 속하던 덩현은 1988년 현급시인 덩저우시로 승격되었다. 2011년, 덩저우는 하남성 성직관시가 되며 난양시의 관할에서 벗어났다. 2013-14년, 일부 인사들이 무단으로 제2 덩저우시 인민정부를 구성했다가 적발되어 중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3. 여담
- 시진핑의 조부 시쭝더가 이곳의 습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다만 장성한 후 산시성 웨이난시로 이주했고, 시중쉰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시중쉰 역시 베이징으로 이주하여 시진핑을 낳는다. 따라서 시진핑은 딱히 고향으로 한 곳을 특정하기 어렵다.
[1] 494년에는 모병 위해 임시로 낙양에 있기도 함[2] 북송 시절 현들은 赤, 畿, 望, 紧, 上, 中, 下의 7개 등급으로 분류했다[3]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양이라면 모를까 남양(완성, 등주 모두)은 파천지로서는 최악이다. 남양 분지의 개활지에 있어서 삼국시대에도 양양이 뚫리면 중원까지 고속도로 하이패스라는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다. 조조가 업으로 천도하려고 한 게 마냥 오버는 아니었던 것. 형양 일대에 수도를 정한 적이 없는 이유가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아예 장강을 끼고 강릉에 자리잡는다면 모를까) 관중(서안)은 송고조의 식견대로 낙양, 개봉보다는 공방일체에 유리하지만, 문제는 지속적 관개와 관리가 없이는 지속 가능한 부양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수당시대부터 양경 체제를 채택할 정도로 장안에서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강남인데, 고토 수복보다는 그런 명분만 내걸고 황권을 세우려던 송고종으로서는 남경(건강)보다는 임안(항주)이 안전한 파천지였던 것. 남송의 행재(임시수도)가 임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4] 失剌巴都[내성문] 동문 (잉욱문, 迎旭门) / 남문 (공양문, 拱阳门) / 서문 (평이문, 平夷门) / 이름 없이 늘 닫혀 있는 북문.[6] 세 성문 밖에는 옹성과 해자를 건너는 교량 설치되었다. 그외에 4개의 각루, 33개의 포대, 1391개의 여장 등의 방어 시설이 있었다.[외성문] 남문 (남공형양문, 南控荆襄门) / 동문 (동련오월문, 东连吴越门) / 대서문 (서통파촉문, 西通巴蜀门) / 소동문 (육수환청문, 六水环清门) / 소서문 (금산부취문, 金山浮翠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