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23:31:44

도편추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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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절차3. 주요 추방자4. 폐지5. 매체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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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정치 제도.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가 또 다른 참주정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고안한 제도라고 알려져 있다.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 조각에 적어 내게 하는 방식이었기에 도편 추방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뽑힌 인물은 아테네 국외로 10년간 추방되어야 했으며, 변론 혹은 항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테네 시민권과 재산은 빼앗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아테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10년간 금지됐을 뿐으로, 10년이 지난 뒤에는 돌아오거나 심지어 공직에 복귀하는 것도 허용됐고,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경우에는 기한조차 단축됐기 때문에, 고대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굉장히 온건한 정적 배제수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훨씬 후대인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저 죽이는 것보다는 인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적의 코를 자르거나 눈알을 뽑아버리기까지 했음을 생각해보자. 독재를 막기 위한 견제 수단이 오히려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사례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로선 상당히 현명한 제도다.[2]

2. 절차

자세한 절차를 모른다면 그냥 막무가내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적어 추방시키는 파행적 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없진 않았고 마지막엔 결국 그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역인기투표가 되지 않도록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매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정기적으로 열리던 민회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은 당년의 도편추방 투표를 실시할 지 여부를 결정했으며, 만약 결론이 실시로 내려진다면 투표는 2달 안에 실행되어야 했다. 실시 여부의 결정과 투표일이 2달이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냄비근성 방지 + 각종 토론/변론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변론 혹은 항소가 허용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2500년도 더 전에 실시된 제도였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앞서나간 절차.

투표는 아고라에서 한꺼번에 실시됐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독재자로 발전할 위험이 있는 자들의 이름을 도편에 적어냈고 개표는 투표 종료와 동시에 진행됐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당대 그리스의 사료들조차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단 학계에서는 당시 아테네 시민권 보유자의 수를 감안해서 '총 투표 가운데 6000표 이상을 득표한 자가 추방당한다.'는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3][4] 추방되는 것으로 결정된 자는 투표로부터 10일 이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정당한 이유 없이 추방을 거부하거나 혹은 추방기간 중 정당한 절차 및 사유 없이 아테네로 몰래 돌아왔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3. 주요 추방자

  • 기원전 487년 : 히파르코스
  • 기원전 486년 : 메가클레스[5]
  • 기원전 485년 : 칼리크세노스
  • 기원전 484년 : 크산티포스[6]
  • 기원전 482년 : 아리스티데스[7][8]
  • 기원전 471년 : 테미스토클레스
  • 기원전 461년 : 키몬[9]
  • 기원전 460년 : 알키비아데스
  • 기원전 457년 : 메논
  • 기원전 442년 : 투키디데스
  • 기원전 416년(?)[10] : 히페르볼루스

4. 폐지

처음에는 본래의 목적 그대로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 도편추방제가 실시되었지만 페르시아 전쟁 무렵부터 도편추방제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스파르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다가 반대파에게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페리클레스가 주도하는 아테네 제국 정책을 반대하다가 추방당한 투키디데스.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에 중우정치 시기가 되면서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기원전 416년 혹은 417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와중에 히페르볼루스가 추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도편추방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편추방제는 이 때를 전후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히페르볼루스를 추방시켰을 때의 상황은 도편추방제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의 아테네 정계는 전쟁 방향을 놓고 니키아스의 신중파와 알키비아데스의 강경파가 대립하고 있던 상황. 두 세력의 크기가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정책의 실현이 불가능했고, 히페르볼루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둘 중에 하나라도 쫓아내려고 도편추방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연합(…)해서 역으로 히페르볼루스를 내쫓은 것이 사건의 전말. 확고한 적이 있을 때는 도편추방제가 효과만점이었지만, 내쫓아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야합으로 이런 식의 짓이 얼마던지 가능했던 것이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사후 중우정치에 질린 아테네인들이 자발적으로 도편추방제를 없앤 것으로 표현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에 의하여 과두정을 정치체제로 채택했고 과두정의 특성상 개인 독재자가 등장하기는 힘들었다는 점도 도편추방제가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11] 도편투표가 명문출신이거나 웅변에 탁월한 사람, 또는 명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예로 페리클레스의 스승 다몬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해서 이 투표로 추방되었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아리스티데스 편)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시민이나 정적의 시기와 질투로 변질 될 우려가 높은 제도로 보고 있다.

5. 매체

  • 파이널 판타지 11: 작중 등장 대통령 중 한명인 프리엔이 '철편추방'으로 대통령직에서 실각하였다는 공식설정이 있는데, 도편추방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6. 여담

  • 페리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가장 잘 활용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30년 가까운 집권시기 동안 자신의 정적은 싸그리 도편추방으로 배제시켜 버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번도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 현대 영어에서 Ostracism은 도편추방이라는 본래의 의미뿐만 아니라 왕따, 소외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 오늘날 발굴된 그 당시 도편을 보면 실명 옆에 각종 조롱과 별명들도 적혀 있다. 가령 '아리스티데스 멍청이' 이런 식으로(...) 물론 이런 조롱과 별명들의 유무에 상관없이 실명만 명확히 적혀 있으면 유효한 표로 인정됐다.
  • 최근 사회학에선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사이버 도편추방(Cyberostracis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이버 도편추방의 사례는 바로 읽씹이라고(...)


[1] 위의 사진 속에 쓰인 이름들은 굉장히 유명한 인물들로, 맨 위의 페리클레스를 제외하면 실제로 도편추방을 당했던 인물들이다. 윗쪽부터 크산티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이 보인다.[2] 물론 도편추방제도 나중 가서는 이런 용도로 변질되는 바람에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온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고 단체로 참수되는 참상까진 낳지 않았으니...[3] 영문위키에는 '일단 총 투표수가 6000표 이상이 되어야지 투표가 유효하다'는 가설도 서술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최다 득표자가 추방당한다'는 다른 출처의 학설도 있다.[4] 한편으로는 이게 사실일 시 아테네의 시민은 6천 명을 훨씬 넘었으며 이 인구가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었을거라고 볼 수도 있다.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의 쌍벽이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지 고작 80년 만에 시민이 10% 수준으로 급락한 것과는 대조적이다.[5] 히포크라테스의 아들인 걸로 유명하다.[6] 아테네의 황금기를 열어제낀 페리클레스의 아버지다.[7]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도편추방제 선거 당일, 까막눈이었던 어떤 시민이 "내가 글자를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주실 수 있겠소?"라고 지나가던 아리스티데스 본인에게 (물론 상대가 아리스티데스인줄 모른 채) 물었다.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그 자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소?'라고 되물어봤다. 그러자 그 시민은 '아뇨. 그렇지만 주변에서 하도 아리스티데스를 정직하고 선한 자라고 칭찬해대는 소리를 들으니까 진저리가 나서요.'라고 답했고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써주었다. 그리고 추방[8] 하지만 추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해서 아테네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아래에 나오는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의 정적으로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로 아리스티데스를 몰아냈지만 나중에는 역으로 아리스티데스가 도편추방으로 테미스토클레스를 쫓아내버린다.[9] 이때 키몬의 추방을 뒤에서 공작한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 키몬의 추방과 동시에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손에 들어갔고 이 시기의 아테네를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부른다.[10] 정확한 연도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11] 하지만 이는 의문. 사실, 아테네는 과두정을 받아들인지 단 1년 만에 과두정을 뒤엎어버리고 다시 민주정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도편추방제로 인한 중우정치를 막지 못하면 외세에 의해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바뀌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테네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