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1:54

라디오헤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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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 전, On a Friday 시절(1985 ~ 1992)2. 1집 Pablo Honey 발매와 Creep의 대성공(1992 ~ 1993)3. 소포모어 징크스를 이겨낸 2집 The Bends(1994~1995)4. 3집 OK Computer(1996 ~ 1998)5. 4집 Kid A와 5집 Amnesiac(1999 ~ 2001)6. 6집 Hail to the Thief(2002 ~ 2004)7. 7집 In Rainbows 및 솔로 활동(2005 ~ 2010)8. 8집 The King of Limbs(2011) 9. 공백기 및 솔로 활동(2013 ~ 2015)10. 9집 A Moon Shaped Pool (2015 ~ 2018)11. 공백기 및 더 스마일 (2020~)


1. 데뷔 전, On a Friday 시절(1985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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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전 모습[1] 데뷔 초의 모습
라디오헤드의 멤버들은 1985년 옥스퍼드셔에 있는 기숙사제 사립 남학교인 애빙던 스쿨에서 만났다. 그들은 학교의 음악실에서 그들이 평상시에 리허설을 하는 날을 가리키는 이름인 "On a Friday"를 결성했다.[2] 조니는 하모니카와 키보드로 마지막에 합류했지만,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고 한다.[3] 콜린에 따르면, 밴드 멤버들은 악기에 대한 특별한 관심보다는 그저 함께 연주하고 싶어서 악기를 골랐다고 한다.

라디오헤드는 학교의 엄격한 분위기를 싫어했고, 학교 음악부에서 위안을 찾았다. 학교의 음악 선생님은 재즈, 영화 음악, 전후 아방가르드 음악, 그리고 20세기 클래식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멤버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초기의 데모에 힘입어 On a Friday는 유니버설 뮤직 그룹 산하의 아일랜드 레코드로부터 음반 계약을 제안받았지만, 밴드는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고 먼저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다. 비록 조니를 제외한 모두가 1987년까지 대학에 가기 위해 애빙던을 떠났지만, On a Friday는 주말과 휴일에 리허설을 계속했다. 엑시터 대학교에서 톰은 다른 밴드와 함께 연주하며 연습을 꾸준히 했고 미래에 라디오헤드의 앨범 아트를 맡게 될 예술가 스탠리 돈우드를 만났다.

그리고 1991년, On a Friday는 결국 다시 뭉치게 되었고 밴드가 옥스포드에서 공연을 계속하자 음반사와 프로듀서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슬로다이브의 프로듀서 크리스 허포드는 콘서트에 참석하고 감명을 받아 밴드의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고 밴드의 매니저가 된다. 그리고 콜린 그린우드가 일했던 음반 가게에서 콜린이 A&R 키스 워젠크로프트와 우연히 만나 EMI와 6장의 음반 계약을 맺게 되면서 메이저 데뷔를 확정 짓게 된다. EMI는 촌스러운 밴드명 변경을 요청하고 멤버들은 토킹 헤즈의 노래 "Radio Head"에서 이름을 따와 지금의 Radiohead라는 이름을 확정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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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음악 잡지 'Curfew'에 실린 On a Friday의 밴드명 교체에 대한 광고

2. 1집 Pablo Honey 발매와 Creep의 대성공(1992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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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Honey 발매 당시 모습
라디오헤드는 데뷔 EP인 "Drill"을 3000장 한정 발매했지만 성적이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실패를 이겨내고 1992년 데뷔 앨범 발매를 위해 픽시즈다이노소어 주니어와 함께 일했던 폴 콜데리와 션 슬레이드를 제작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1992년 말 데뷔 싱글 "Creep"이 발매되면서 라디오헤드는 영국 음악 매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발매 당시에는 비판적인 여론이 꽤나 존재했다. NME 역시 이 싱글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졌고 심지어 BBC 라디오 1에 의해 너무 우울하다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라디오헤드는 1993년 2월 데뷔 앨범 "Pablo Honey"를 발매했다. UK 차트에서 22위에 오르는 등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지만 "Creep"과 후속 싱글 "Anyone Can Play Guitar", "Stop Whispering"이 성공하지 못했고 앨범 미수록 싱글 "Pop Is Dead"도 최악의 평가를 받으며 저조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결론적으로 평론가들에게나 대중들에게나 딱히 기록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라디오헤드는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이루게 된다. 1993년 초에 "Creep"은 이스라엘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DJ Yoav Kutner에 의해 이스라엘 라디오에서 자주 방송되었고, 3월에 "Creep"이 대히트를 친 후 라디오헤드는 그들의 첫 해외 공연을 텔아비브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Creep"은 미국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방영되기 시작했고 빌보드 모던 록 차트에서 2위로 대성공을 거둔다. "Creep" 하나로 1993년 7월 첫 북미 투어를 갔을 정도로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UK 차트에서도 뒤늦게 7위를 거두면서 영국에서도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다.

3. 소포모어 징크스를 이겨낸 2집 The Bends(1994~1995)

Creep으로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신인이 되었지만 마냥 좋지는 않았다. 라디오헤드 = Creep이라는 공식이 생겼고 실제로 콘서트에서 대중들이 Creep을 제외한 다른 곡들에는 관심이 아예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데뷔하자마자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에 2집 음반 제작과 활동에 대해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라디오헤드는 1994년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베테랑 프로듀서 존 레키와 함께 두 번째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멤버들의 부담감 때문인지 녹음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변화를 모색하던 멤버들은 극동, 오스트랄라시아, 멕시코 등 여러 지역들을 돌며 새로운 음악을 라이브로 선보이며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My Iron Lung이라는 EP를 발매한다. 이 EP는 라디오헤드 2집의 컨셉을 미리 보여줬고 원 히트 원더로 끝날 줄 알았던 밴드의 잠재된 가능성을 보여 준 EP였다는 꽤나 좋은 평을 받았다. 판매량 또한 기대 이상으로 훨씬 많이 팔리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투어동안 더 많은 신곡을 소개한 라디오헤드는 1994년 말까지 녹음을 마치고 1995년 "The Bends"를 발매했다. 그런지의 영향을 받은 1집과 스타일이 많이 다른 앨범으로 세 명의 기타리스트들의 리프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타 중심의 록 음반이다. 라디오헤드는 당시 영국 음악을 지배했던 브릿팝계의 아웃사이더로 여겨졌지만, 밝고 경쾌한 브릿팝 사운드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우울한 사운드의 음악으로 "Fake Plastic Trees", "High and Dry", "Just", "Street Spirit (Fade Out)"과 같은 노래들이 UK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음악적으로도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이겨낸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95년 라디오헤드는 북미유럽에서 다시 순회공연을 했고, 이 때 R.E.M.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거물이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R.E.M.의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와 같은 유명 팬들이 만들어낸 화제성과 더불어서 "Just"와 "Street Spirit"의 독특한 뮤직비디오가 라디오헤드의 영국 외 지역에서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4. 3집 OK Computer(1996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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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말, 라디오헤드는 이미 다음 음반에 수록될 곡들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1995년 말, 투어 도중 "Lucky"라는 곡을 보스니아 내전 추도 모금 마련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에 넣고 로미오와 줄리엣 OST로 "Talk Show Host", "Exit Music (For a Film)"을 만든 뒤 본격적으로 3집 녹음을 시작한다. 라디오헤드는 나이젤 고드리치와 함께 다음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초에 작업을 시작했다.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일부러 허름한 창고, 무도회장 등을 빌려서 녹음을 하였고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The Wall"의 영향을 받아 그 당시 핑크 플로이드가 쓰던 장비들을 통째로 사서 녹음에 썼다고 한다. 그러다 1996년 8월 라디오헤드는 앨라니스 모리셋의 오프닝 공연으로 순회공연을 했고 멤버들은 스튜디오가 아닌 제인 시모어라는 배우가 소유한 St Catherine's Court이라는 저택에서 녹음을 재개했다. 이 저택에서 녹음 세션은 느긋해졌고 멤버들은 하루 종일 다른 방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비틀즈, DJ Shadow, 엔니오 모리코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들으며 작업했다.

그리고 1997년 6월 16일, 라디오헤드는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OK Computer를 발매했다. 라디오헤드는 새로운 노래 구조를 실험하고 앰비언트, 아방가르드 음악, 전자 음악과 같은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통합했다. The Bends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노래들과는 대조적으로 세기말의 우울한 감성을 담아냈다. 라디오헤드는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핑크 플로이드의 히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비교했고 새로운 핑크 플로이드가 나타났다며 환영했다. 음악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라디오헤드의 최대 히트작이 되었다. 처음으로 영국 차트 1위를 이뤄냈고 전세계적으로 높은 판매량을 거두었다. 그래미 어워드의 얼터너티브 부문 수상을 이뤄내고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오르며 미국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고 덕분에 후기작 Kid A가 홍보를 아예 하지 않고 빌보드 차트 1위를 거머쥐게 된다. 싱글로는 "Paranoid Android", "Karma Police", "No Surprises"가 발매되었다. 발매 이후 1997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헤드라이너로서 공연을 진행했고 1년 동안 월드 투어가 이어졌다. 여담으로 같은 해에 라디오헤드는 공식 웹사이트를 개설한 세계 최초의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1998년, OK Computer의 B 사이드 곡들을 모은 Airbag EP가 발매되었는데 이 미니 앨범이 그래미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의 후보에 오르고 빌보드 200에서 56등을 찍는 등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5. 4집 Kid A와 5집 Amnesiac(1999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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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Computer의 역대급 성공은 그들에게 엄청난 명예를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가버렸다. 전 세계로 투어를 돌며 피로를 호소하던 멤버들[4]은 급기야 기타로 작곡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당시에 1998년 영화 <맨 오브 워>의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 들어갔으나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고 결국 노래는 공개되지 않았다. 톰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밴드는 해체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톰은 이 시기를 "진짜 저점"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오아시스처럼 마약에 손을 대거나 음악을 그만두는 대신, 이를 기회로 삼아 전혀 하지 않았던 음악에 손을 대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1999년 초, 라디오헤드는 그들의 다음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비록 OK Computer의 성공은 음반사로부터 더 이상 압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멤버들 사이에서 긴장감은 높았다. 에드는 온라인 일기를 쓰며 그들의 진행 상황을 팬들에게 보고했다. 거의 18개월 후, 녹음 세션은 2000년 4월에 완료되었다.

그렇게 2000년, 뉴 밀레니엄과 함께 발표된 문제작 Kid A는 전 세계의 청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CAN크라우트록, 에이펙스 트윈앰비언트IDM, 마일즈 데이비스모달 재즈 등 기존과는 판이하게 다른 음악 조류를 수용해 보다 실험적인 음악이 되었으며, 라디오헤드 역시 이런 음악을 만들고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기타 리프와 드럼 대신 샘플러와 신디사이저, 드럼머신 등 완전히 새로운 악기에 적응하느라 거의 1년 가까이 팀을 두 유닛으로 나눠서 연습과 작곡을 번갈아 하였으며, 그렇게 30개의 트랙을 만들었음에도 앨범에 들어갈 트랙 배치를 놓고 심각한 팀 내분이 일어나 해체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발매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기존 팬덤 및 정통 록 음악 평론한테 '지나치게 난해하다'며 엄청난 비난을 들었지만, 이내 피치포크에서 만점을 주며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 해 그래미 올해의 얼터너티브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현재 NME, 피치포크 같은 대부분의 유명잡지에서는 OK Computer급의 걸작으로 평하고 심지어 롤링 스톤은 2020년에 리뉴얼된 500대 명반에서 OK Computer보다도 Kid A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와 싱글을 아예 내놓지 않았고 장르가 장르인지라 상업적으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전작 OK Computer빨을 받아 빌보드 200UK 차트에서 동시 1위를 이루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영국인으로서 1996년 스파이스 걸스 이후 4년만에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거두었다고 한다.

라디오헤드의 다섯 번째 앨범 Amnesiac은 Kid A가 발매한지 1년도 안된 2001년 5월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험프리 리틀턴 밴드가 피처링한 <Life in a Glasshouse>를 제외한 모든 곡이 Kid A와 같은 세션에서 녹음되었다. 쉽게 말해 Kid A의 비 사이드 곡들을 모아 앨범으로 만든 것이 Amnesiac인 것이다. 당시 라디오헤드는 Kid A를 CD 1, Amnesiac을 CD 2로 한 더블 앨범 형태나, Amnesiac을 하나의 정규 앨범이 아닌 Kid A의 미니 앨범의 지위로서 발매하는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전자는 멤버들의 반대로 폐기[5]되었고, 그래서 후자로 기울어진다 싶었으나 리더인 톰이 결국 Kid A와 Amnesiac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을 내놓음으로써, 이전 앨범 발매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정규 앨범 5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6]

전작 Kid A보다 더 난해한 느낌이 강해졌지만 빌보드 200에서 2위, UK 차트에서 1위를 거두는 등 상업적으로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음악적으로도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2001년 11월 발매된 라이브 앨범 'I Might Be Wrong: Live Recordings'에는 Kid A와 Amnesiac 7곡의 퍼포먼스와 미공개 트랙 'True Love Waits'의 퍼포먼스가 담겼다.

6. 6집 Hail to the Thief(2002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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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6집 Hail to the Thief를 발표한다. Kid A나 Amnesiac과는 달리 다시 기타 록으로의 회귀를 보여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라디오헤드가 본격적으로 "락과 일렉트로니카의 조화를 추구한 앨범"으로, 성향적으로는 라디오헤드의 디스코그래피 중 유일하게 사회 비판이 주류를 이루는 앨범이기도 하다. 그 당시에는 4, 5집 팬덤과 1~3집 팬덤 간에서 퇴보다 아니다 말이 많았다. EMI와의 마지막 계약 작이기도 해서 이 앨범을 끝으로 EMI를 나온다. 발매 이후 영국 순위에서 1위, 빌보드 순위에서 3위를 기록해 영국에서 플래티넘, 미국에서 골드를 기록한다. 라디오헤드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2003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참가도 이때 있던 일이다.

앨범 표지에 수많은 단어가 쓰여 있는데, 이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 뉴스에 나온 충격적인 단어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앨범의 이름은 미국에서 대통령이 공적행사에 참석했을 때 연주하는 Hail to the chief라는 곡의 패러디이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반대 표어로 알려져있다. 부제인 The Gloaming은 앨범에 수록된 그린우드 형제가 작곡한 곡 중 하나의 제목으로 형제가 이 곡의 이름을 따서 앨범의 표제를 붙이려고 했으나 다른 멤버들이 반대해서 지금의 표제가 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에 부제가 붙어있다.

해당 앨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ail to the Thief을 참고.

7. 7집 In Rainbows 및 솔로 활동(2005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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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부터 투어를 돌며 간간히 일곱 번째 정규 앨범의 작업을 시작하며, 간간이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이어진다. 조니 그린우드는 영화음악 작업을 했으며[7], 2006년엔 톰 요크의 솔로 앨범 The Eraser와 EP인 Spitting Feathers가 나왔다. 2008년에는 이를 리믹스한 The Eraser Rmxs도 출시. 이 앨범은 비트와 전자음이 더 강조된 사운드에 가사는 더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기후 변화 등 환경문제와 이라크전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재미있게 작업하다 보니 금방 끝났죠. 예상대로 비트와 전자음을
더 많이 사용했지만 노래가 빠질 수 없죠.
(톰 요크, The Eraser에 대한 설명)

그리고 2007년, 그들은 마침내 7집 In Rainbows를 독립 레이블에서 발매하게 되는데, 이들이 음악을 배포하면서 진행한 실험은 음악계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바로 앨범을 사실상 무료나 마찬가지로 인터넷에 풀어버린 것. '원하는 만큼 내세요'라고 불린 이 시스템은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앨범에 일정 금액을 매기고 mp3 음원을 다운받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구매가격을 0이라고 써도 다운로드 받을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이트가 닫힐 때까지 이 앨범이 거둔 수익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고, 6집보다 이윤이 더 많이 나오는 등 놀랄 만한 성과를 냈다.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나인 인치 네일스, 머큐리 레브, 데이비드 번, 장기하와 얼굴들 등 전 세계의 밴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 신보를 인터넷으로 푸는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앨범의 가격을 0이라고 적고 다운받아가긴 했지만,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홍보까지 되었으니 일석이조인 셈. CD 패키지는 XL Recordings라는 영국 인디 레이블에서 나왔으며 국내에서는 수입 처리되어 팔렸다. 2008년부터 2009년에 걸쳐 In Rainbows 투어를 하고, 2009년 레딩&리즈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앨범은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메타크리틱 점수도 88점으로 2000년대 이후 라디오헤드 앨범 중 가장 높으며, 기존 1,2,3집의 락 음악과 대격변 이후 4,5,6집의 음악을 조화롭게 혼합한 이 앨범은 2007년 연말에 잡지들이 발표한 올해의 앨범 순위에서 1위 및 상위권을 차지하였으며, 현재는 OK computer, Kid A와 함께 라디오헤드 최고의 명반으로 일컬어진다.

2010년 2월, LA에서 새 앨범을 녹음 중이라고 알려졌다. 프로듀서는 이번에도 OK Computer부터 쭉 같이 작업해 온 나이젤 고드리치.

톰 요크는 프로젝트 밴드 Atoms for Peace[8]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베이시스트는 다름 아닌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다[9]. 2013년엔 1집도 냈다.# 그리고 드러머 필 셀웨이가 솔로 앨범 Familial을 발표. 자기 앨범인데도 자기가 드럼을 맡은 곡은 두 곡인가밖에 없다고 했지만 이 앨범은 필 셀웨이가 보컬을 맡은 앨범이므로 드럼에 대해서 연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해당 앨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In Rainbows을 참고.

8. 8집 The King of Limbs(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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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 공개일은 2월 19일이었지만, 하루 이른 2월 18일부터 다운로드가 개시되었다. In Rainbows 때와 같은 판매 방식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번에는 정가를 받고 판매한다.저번에 돈 못 벌었나 보다[10]

디지털 버전은 MP3 9달러, WAV 14달러. In Rainbows 때와 같이 한정판도 존재한다. 한정판엔 LP도 포함되어 있으며 가격은 44달러.(MP3 버젼, WAV버전은 5달러 더 붙어 49달러) 한정판은 5월 9일부터 발송하였다.

http://www.thekingoflimbs.com/에서 판매 하며. 한국어 페이지도 있다.(단 결제는 영어 페이지에서 해야 한다.) 한정판, 디지털 양쪽에서 한 명씩 뽑아서 친필 싸인과 2개의 track(아마 신곡인 듯) 들어간 12인치 LP를 증정했다.

일반 판과 12인치 Vinyl판(=LP)은 3월 28일 발매. 발매 레이블은 유럽 지역에서는 XL, 미국+캐나다 지역에서는 TBD, 일본과 아시아 지역에서는 Hostess.

지금껏 라디오헤드가 발표한 정규앨범 중 가장 짧은 앨범이다. 전체 8곡에 재생 시간 37분이라서 Amnesiac처럼 곧 King Of Limbs 2CD가 나온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라디오헤드 측에서 공식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느꼈다.

4월 15일, Independence Record Store Day를 기념하여 새 2트랙이 나왔다. 이 2트랙이 들어간 앨범은 일본, 유럽 한정으로 판매한다.이런 제길 일본 유럽 편애에 한국팬들 살겠나

6월 24일, 글라스톤베리 록 페스티벌에 스페셜 게스트[11]로 등장, 8집의 많은 곡과 신곡인 Staircase, The Daily Mail을 발표했다.[12]

해당 앨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The King of Limbs을 참고.

9. 공백기 및 솔로 활동(2013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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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부터 정규 9집 제작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기존에 이미 라이브에서 여러 차례 불러왔던 'Identikit'[13], 'Cut A Hole', 'Ful Stop'은 이미 녹음을 마쳐둔 상태였다.

2014년 2월 톰 요크의 새 앨범 홍보의 일환으로 Polyfauna라는 인터랙티브 앱을 발표했다. iOS와 안드로이드 모두 무료로 지원한다. 2014년 8월 기준, 앱이 완전히 리뉴얼 되었다. 이전의 비교적 단조로웠던 것에 비해 훨씬 몽환적이고 예술적이다.

2014년 9월 26일 Thom Yorke의 신보가 갑자기 발표되었다. 앨범명은 Tomorrow's Modern Boxes. 특이하게도 비트토렌트를 통해 배포되는 형식으로 판매된다. 6달러를 결제하면 토렌트 파일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고 해당 토렌트로 앨범을 다운로드받는 방식. 물론 lp를 포함한 30파운드짜리 한정반을 사면 웹상으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

2014년 10월 6일 Phil Selway의 2집 Weatherhouse가 발매되었다. 톰의 2집보다 10일 늦게 발매되었다.[14]

2014년 12월 26일에는 Youwouldn'tlikemewhenI'mangry 라는 싱글이 나왔다.#

2014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새 앨범 제작에 들어갔지만 모든 시간을 써 완성하고 있는 건 아닌 듯 하며 간간이 작업하는 듯. 그와 함께 간간이 사진이 올라온다.

2015년 개봉한 007 스펙터의 주제가를 부른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샘 스미스로 확정되면서 이 루머는 불발되었다. 그러나 2015년 크리스마스 날 [15]라디오헤드가 영화를 위해 썼던 곡을 사운드클라우드에 무료로 공개하면서 루머가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16]

10. 9집 A Moon Shaped Pool (2015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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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가 1명 더 늘었으며 톰 요크는 급격하게 삭아버렸다

2015년 11월에 일단 녹음 자체는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왔으며, 프리마베라 헤드라이너 등의 투어를 한다는 사실이 2016년 1월 20일쯤 발표되었다.

4월 30일을 전후로 영국 각지의 팬들은 "Burn the witch"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지[17]를 받기 시작했다. 'Sing the song of sixpence that goes burn the witch' 라는 문장은 라디오헤드의 미발표 곡의 가사이며 (Dead Air Space 사이트에 톰이 가사를 올린적 있다.) 전단지에는 라디오헤드의 마스코트인 곰(Modified Bear)이 양각으로 새겨져있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안다" 는 문구도 포함되었다. 이도 역시 가사이다.

레딧의 어떤 유저는 4월 30일과 5월 1일이 독일 민속 설화의 '마녀의 밤'(Walpurgisnacht)에 해당하는 날임을 지적했다. 5월 1일은 International Dawn Chorus Day[18]이기도 한데, 라디오헤드가 새 앨범의 판매 목적으로 설립한 주식회사가 Dawn Chorus LLP임과 연관되어 있는 듯 하다.[19]

한국 시각 5월 4일 자정 무렵,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신곡 Burn the Witch의 뮤직 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영화 The Wicker Man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듯하다.

한국 시각 5월 7일 자정, 연달아 신곡 Daydreaming이 공개됐다. 뮤직비디오의 감독은 폴 토마스 앤더슨. 여러 매체에 따르면 Kid AIn Rainbows의 중간에 위치한 몽롱한 앰비언트 사운드라고 한다.

한국 시각 5월 9일, 라디오헤드 9집 A Moon Shaped Pool이 공개되었다. 단, 디지털 발매 한정으로, Special Edition 등은 9월에 배달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앨범을 구매할 수 있으며, 디지털 구매는 이곳에서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아이튠즈, 애플 뮤직, 아마존닷컴에서 공식으로 구매할 수 있다. 디지털의 가격은 9유로, CD의 가격은 10유로로 채택되었다.

앨범에 대한 설명은 A Moon Shaped Pool 참고.

11. 공백기 및 더 스마일 (2020~)

에드 오브라이언은 "현재 라디오헤드는 활동하지 않으며, 5명 모두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지만 5명 모두 서로 관심분야가 매우 다르다. 우리는 돈 때문에 모이는 그룹이 아니며, 5명 모두 '너와 함께 이걸 만들고 싶다' 라는 합치된 의견이 있어야 재결합이 가능하다. 라디오헤드는 여기서 해체될수도 있으며, 어쩌면 아닐수도있다." 라고 말했다. #

한편 톰 요크와 조니 그린우드는 더 스마일이라는 3인조 프로젝트 밴드를 새롭게 결성해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해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정도일 뿐이지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던가 해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던 부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립 셀웨이 역시 해체와 관련해서 적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라디오헤드는 여전히 한 밴드라며 해체설에 대해서는 일축한 것으로 보아 에드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일 뿐일 것이다. 또한 2023년 초에 멤버들이 모일 예정이라고 하며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Hail to the Thief의 박스 셋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안 나왔다

현재까지 라디오헤드의 마지막 라이브는 2018년 8월 1일 필라델피아에서의 공연이다.

그러나 2024년 9월즈음 콜린에 의하면 "우리는 두달 전쯤 런던에서 옛날 노래들을 합주했다."라는 발언으로 팬들은 오아시스 재결합에 이어 린킨파크까지 새보컬을 장착하고 돌아오더니 이제 라디오헤드 컴백까지?, 이제 커트 코베인의 부활만 남았다(...)는 등등의 반응을 보이며 록팬들은 행복사 할 것 같다는 반응이다.


[1] 조니는 찍히지 않았다. 조니가 찍은 걸 수도(?) 참고로 저 풍성한 머리의 사람은 필립이 맞다.[2] 학교가 엄해서 모여 연습할 수 있는 날이 금요일뿐이었다고 한다.[3] 조니는 원래 톰 요크의 동생 앤디 요크와 같은 밴드였다.[4] 특히 프론트맨인 톰 요크가 증세가 심각해서, 노래를 부르던 도중 필름이 끊기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노래를 부르고는 있었고, 이 경험은 훗날 4집의 수록곡인 How to Disappear Completely의 모티브가 된다.[5] 에드는 더블 앨범으로 발매할 경우 사람들이 곡 하나 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스킵하는 경향이 클 거라 생각해 반대했고, 필립도 비슷하게 이 앨범이 더블 앨범으로 나올 경우 나라면 두 번 이상 듣지 않을 거라 지적하면서 반대했다.[6] Kid A와 Amnesiac이 다른 성격을 가진 작품이라는 말은, 이미 완성체로 발매된 앨범들을 각각 별개의 데이터로서 감상해 온 팬들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Kid A는 원래 준비 과정 당시 Amnesiac의 마지막 트랙을 제외한 모든 곡들과 구분 없이 섞인 상태에서 라디오헤드의 선별 작업을 통해 선택된 트랙들이 모인 앨범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Kid A에 Amnesiac의 곡이 들어갈 수도 있었고 Amnesiac에 Kid A의 곡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앨범을 만들던 당시 그들 입장에서 보면, Kid A와 Amnesiac이 서로 다른 앨범이라는 인식은 당연한 말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자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7]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음악감독을 맡았다[8] 톰 요크 솔로앨범인 The Erazer에 나오는 곡 이름이다[9] 라이브를 보면 플리의 베이스와 톰 요크의 음악이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10] In Rainbows의 MP3 다운로드 수익은 해석이 양면적인데 수익 자체는 700만 달러에 달했기에 결코 적다고 할 순 없겠지만 문제는 절대 다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0'을 넣고 다운로드를 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ail to the Thief 앨범 판매수익보다 많았다.[11] 다른 게스트는 이분들[12] 이 와중에 Lotus Flower 공연에서 장비에 문제가 있었는지 보컬이 들리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다, 톰이 "for the first time, we're gonna try and play some king of limbs and shit"라고 말한다.[13] 이변이 없는 한 리드 싱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팬들의 중론이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14] 이 말은 슬프게도 2015년 7월에 돼서야 여기 추가되었다. 불쌍한 대머리 아저씨 톰의 머리가 필의 대머리를 가린다[15] 한국에서 재생이 불가능하다[16] 본드 영화 주제곡은 여러 아티스트들이 낸 곡 중 제작자들이 하나를 정하는 방식으로 정해진다.[17] 파일:external/1k3aqn3mjgka2g4fs44eloci.wpengine.netdna-cdn.com/Xjme8hk-726x1024.png[18]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소리를 듣자(...)는 건전한 취지의 기념일이다.[19] 90년대 중반 머천다이즈 판매를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을 시초로, 멤버 각자의 수입을 관리하는 주식회사가 따로 있으며, In Rainbows 이후 라디오헤드는 매 앨범 발매 시 해당하는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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