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01:31:51

레치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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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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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비 4대 국왕
Rechiar | 레치아르
제호 한국어 레치아르
라틴어 Rechiar
생몰 년도 미상 ~ 456년 12월
재위 기간 448년 ~ 456년 12월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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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에비 왕국 4대 국왕.

2. 행적

수에비 왕국 3대 왕 레칠라의 아들로, 왕이 되기 전에 니케아파 기독교[1]으로 개종했다. 일부 학자들은 레칠라가 교회와 좋은 관계를 행성해 현지인들이 지배에 순응하게 하기 위해 아들을 가톨릭 신자로 삼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44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그는 449년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크 1세와 동맹을 맺고 테오도리크 1세의 딸[2]과 결혼했다. 이때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툴루즈로 가는 길에 서고트 분견대의 지원을 받고 사라고사 일대를 약탈하고 일레르다를 공략했다.

그는 브라카라(현재 브라가)를 수도로 삼고 브라카라와 메리다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 조폐국을 설치하여 금화와 은화, 그리고 청동 동전을 주조하게 했다. 이때 생산된 동전은 서로마 제국의 동전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며, 호노리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등 로마 황제들의 초상화를 그대로 담았다. 이는 동전 주조 기술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도 했고, 로마의 앞선 문화에 대한 경외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에 주조된 동전에는 "레치아르 왕의 명령에 따라(IUSSU RICHIARI REGES)"라는 문구가 항상 실려서 그의 권위를 드러냈으며, 수도 브라카라를 의미하는 'BR'을 그 옆에 실었다.

아버지가 이베리아 남부 일대를 주로 공략했던 것과 달리, 그는 이베리아 북부와 동부로 향했다. 449년 2월, 북부에서 바스크인을 격파한 뒤 에브로 계곡으로 진군하여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 일대를 공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하려 했다. 그의 군대는 사라고사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레리다 시를 함락해 많은 주민을 생포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과 군대의 저항이 거세지자 타로코니아 일대의 수도인 타라고나 시에 접근하지 않고 철수했다.

45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만수에타와 프론토를 수에비 왕국에 사절로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는 이에 응했고, 양자는 다음의 합의를 이뤄냈다.
1. 수에비는 카르타헤나와 타라코니아에서 빼앗은 영토 일부를 로마에게 돌려준다.
2. 로마는 갈리시아, 루시타니아, 바이티카 등 나머지 히스파니아 일대에 대한 수에비 왕의 권위를 인정한다.
3. 로마는 매년 수에비 왕국에 공물을 바쳐야 하며, 수에비 왕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조군을 보낸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타라코니아와 카르타헤나에서 세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었지만, 454~455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등 로마 권력자들이 잇따라 죽고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군이 로마 약탈을 자행하는 등 일련의 혼란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타라코니아 지방에 대한 정복 전쟁을 재개했다. 막시무스 사후 새 황제가 된 아비투스는 456년 프론토를 사절로 보내 휴전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레치아르는 사절 앞에서는 이에 응하겠다고 밝혔지만 프론토가 돌아간 직후 약탈 원정을 떠나 타라코나 일대를 철저히 약탈했다.

이에 아비투스는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크 2세에게 수에비족을 응징해달라고 요청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테오도리크 2세는 수에비 궁정에 사절을 보내 로마인들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레치아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대가 나를 원망하고 적대한다면, 나는 그대가 옥좌에 앉아 있는 툴루즈로 가겠다. 거기에서 할 수 있다면 저항해봐라!"

테오도리크 2세는 서고트군을 동원해 수에비족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했다. 456년 10월 5일, 양군은 아스토르가에서 12마일 떨어진 우르비코 강둑에 있는 캄포스 파라무스에서 맞붙었다. 당시 서고트군에는 서고트족 외에도 부르군트족, 프랑크족도 함께 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레치아르는 부상을 입고 갈리시아의 가장 외딴 곳인 오포르토 시로 가까스로 피신했다. 서고트군은 456년 10월 28일 브라가를 함락시키고 일부 수에비족을 처단했으며, 테오도리크 2세는 수에비족으로부터 히스파니아 남부 일대가 해방되었다고 선포했다. 히다티우스에 따르면, 고트인들은 브라가를 공략한 뒤 교회를 더럽히고 제단에 침입하고 수녀들을 납치했으며 사제들을 발가벗기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고 한다.

레치아르는 적이 접근해오자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폭풍우에 가로막혀 그러지 못하다가 서고트족에게 체포되었고, 456년 12월에 처형되었다. 서고트군은 뒤이어 메리다를 함락시키고 457년 아스토르가와 팔렌시아를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한 뒤 아키텐으로 귀환했다. 테오도리크 2세는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수네리크 공작과 키릴라에게 해당 지역의 방위를 일임했다. 이리하여 수에비 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히다티우스는 수에비 왕국이 사실상 멸망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잔존 세력은 여전히 남아 아이울프, 말드라스, 프람타, 리치문트, 프루마르의 지도하에 각지에서 할거했다.


[1] 당시는 가톨릭이랑 정교회를 구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칼케돈 공의회는 그의 치세인 451년 열렸으므로 이당시는 칼케돈/비칼케돈 구분조차 없었다.[2]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