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43:42

리버풀 FC/달글리시 체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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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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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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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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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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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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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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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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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샹클리
(샹클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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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대
페이즐리
(페이즐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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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대
페이건
(페이건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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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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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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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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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스&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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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울리에
(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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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테스
(베니테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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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호지슨
(호지슨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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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달글리시
(달글리시 체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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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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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달글리시 체제
[[케니 달글리시|
파일:Kenny2_3014126.jpg
]]
제20대 감독
케니 달글리시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케니 달글리시 / 제20대 감독
코치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스티브 클라크 (수석 코치)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케빈 킨 (수석 코치)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욘 아흐터베르흐 (골키퍼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대런 버지스 (컨디셔닝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조던 밀섬 (컨디셔닝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마크 헐스 (피트니스 코치)

[[호주|]][[틀:국기|]][[틀:국기|]] 피터 브룩너 (스포츠 의료 및 과학 총괄)
주장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스티븐 제라드 / 제47대 주장 (2003~2015)
계약 기간 2011년 1월 8일 ~ 2012년 5월 16일
(1년 4개월/ 494일)
계약 종료 (성적 부진에 따른 상호 협약 해지)
연봉 미상
전술 스타일 킥 앤 러시를 활용한 다이렉트성 축구
4-4-2, 4-4-1-1 포메이션
┗ 빅 앤 스몰 투톱 활용
┗ 측면 크로스 공격 활용
역대 전적 74경기 35승 17무 22패 (승률 47.3%)
우승 경력 2011-12 EFL컵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4. 공격 포인트 순위5. 시즌별 주요 성적6. 평가

[clearfix]

1. 개요

리버풀 FC의 제20대 감독 케니 달글리시 체제를 정리한 문서.

2. 감독 선임 과정

셀틱 FC에서의 커리어를 끝으로 오랜시간 감독직에서 물러나 있던 달글리시는 2009년 리버풀 감독인 라파엘 베니테스의 제의를 받아 리버풀 FC 아카데미의 관리를 책임지게 됨과 동시에 리버풀 구단 대사직을 겸하는 중이었다.

이후 2010년 여름, 베니테스가 리버풀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팀을 떠나자 달글리시는 자신이 팀을 맡을 것을 구단 수뇌부에 건의하지만 팬들의 바람과 본인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로이 호지슨이 베니테스의 후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1]

그러나 호지슨이 부임한 이후 리버풀의 성적이 좋아질 기미는커녕 최악의 수준으로 추락하기에 이르자, 팬들이 경기장에서 케니 달글리시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호지슨의 경질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2010년 10월, 펜웨이 스포츠 그룹리버풀 FC을 인수하면서 구단을 둘러 싸고 괴롭히던 구단주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 이후 호지슨이 2011년 1월 8일을 끝으로 경질[2]되었다. 그리고 펜웨이 스포츠 그룹은 전설적인 감독 달글리시의 컴백을 선언한다. 달글리시는 그렇게 19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리버풀 FC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며 2기 체제를 열게 되다.

3. 연혁

3.1. 201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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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글리시의 복귀 후 첫 번째 경기는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FA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이었다.[3] 비록 이른 시간대의 페널티킥 판정으로 인해 1-0으로 패하긴 했지만 달라진 경기 내용으로 인해 팬들은 앞으로의 반등을 기대감을 품었다. 그러나 이후 21라운드를 승격팀 블랙풀 FC에 역전패하며 불안하게 리그를 이어받아 22라운드 머지사이드 더비는 무승부. 이후 리그 23라운드 울버햄튼 원정에서야 3-0으로 승리하면서 복귀 후 첫 승을 신고하게 된다. 이후 24라운드에서는 2연승을 달성하며 리그 7위로 뛰어올랐다.

이어진 겨울 이적시장에서 달글리시는 새로운 구단주의 지원을 받아 주포 페르난도 토레스의 짝으로 루이스 수아레스를 영입,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는 대형 영입을 신고한다. 그러나 토레스가 이적 시장 막판에 이적 의사를 표하며 첼시 FC로 급작스럽게 이적하게 되었고, 이적 마지막날 리버풀은 뉴케슬에서 부상으로 재활중인 앤디 캐롤을 대체자로 영입, 엄청난 도박수를 두게 되었다.

달글리시호는 겨울 이적 시장 이후 26라운드 첼시 FC 원정까지 잡아내며 리그 4연승을 질주해 반등하는 모습을 곧장 보여주었다. 이후 중하위권 팀을 상대로 승점을 잃기도 했으나, 앤디 캐롤의 멀티골로 맨체스터 시티를 격침하고 수아레스의 무쌍과 디르크 카윗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3-1로 잡아내는 등, 좋은 모습을 지속하며 순위를 5위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리그 마지막 2경기를 패배로 장식. 결국 최종 순위는 6위로 끝내며 1999-20 시즌 이후 처음으로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32강 토너먼트부터 물려받은 유로파 리그에서는 스파르타 프라하를 만나 2차전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SC 브라가를 만나 원정에서 1-0으로 패배한 후 홈에서도 무기력하게 0-0으로 비기면서 16강에서 허탈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해당 시즌 유로파 리그는 달글리시 1기 체제를 포함하여 달글리시가 감독으로서 리버풀을 이끌고 치른 유일한 유럽 대항전이었다.[4]

비록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하고 유로파 리그에서 허무하게 탈락했지만, 공격적인 겨울 이적 시장을 보내며 즉각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리그 12위로 처져있던 팀을 6위까지 반등시킨 달글리시호는 호지슨 체제에서 고통받던 팬들을 달래며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이에 달글리시는 3년 계약을 체결하며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3.2.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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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감독으로서 리버풀을 지도하게된 달글리시는 이적시장에서 다수의 선수를 영입하며 스쿼드 강회를 꾀했다. 스튜어트 다우닝, 조던 헨더슨, 세바스티안 코아테스, 찰리 아담, 호세 엔리케가 영입되었으며, 크레이그 벨라미가 자유 계약으로 합류했다. 그러나 중원에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던 하울 메이렐레스를 뜬금없이 첼시 FC로 보내면서 다소 아쉬움을 남긴채 시즌이 시작되었다.

개막전을 선덜랜드 AFC와 비기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이후 아스날 FC 원정에서 2-0으로 신승을 거두며 2000년 이후 아스날 원정 첫 승리이자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첫 승리를 챙긴 달글리시호는 이후 3라운드까지 승리하며 리그 3위로 치고올라갔다. 그러나 기대감은 정말 잠시 뿐이었고, 이후 5라운드에 토트넘 홋스퍼에게 4-0 대패를 당하며 2연패를 거둔 리버풀은 영입생들의 답답한 경기력과 앤디 캐롤의 부진으로 갈수록 졸전에 가까운 경기들을 펼쳤고, 결국 20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3-0 완패를 당하기까지 6~7위권을 전전했다. 그러나 20라운드 이후의 성적은 더 암담했다. 리버풀은 3월에서~5월까지 이어진 후반기에 최악의 부진을 거듭하며 20라운드 이후 5승 3무 11패를 기록, 리그 8위로 추락하며 리그를 마쳤다. 최종 성적은 14승 10무 14패로 1993-94 시즌 이후 최악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 시즌 컵 대회에서는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리버풀은 리그컵 5라운드에서 첼시 FC를 격파한 뒤, 준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합산 스코어 3-2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2012년 2월 26일, 실로 오랜만의 결승전에 오른 리버풀은 카디프 시티와 격돌하게 되었다. 비교적 약체를 만났으나 리버풀은 선제골을 허용하며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결국 꾸역꾸역 동점골을 집어넣어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디르크 카윗의 역전골로 리버풀이 승리를 거두는듯 했으나 118분 극장 동점골이 터졌고, 결국 양 팀은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승부차기에서는 1번 키커 스티븐 제라드부터 실축이 이어졌으나 카디프 시티의 키커들이 더 절망적인 킥들을 구사하는 바람에 결국 리버풀이 승리. 통산 8번째 리그컵 우승을 들어올렸다. FA컵에서도 좋은 모습이 이어졌다. 리버풀은 4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침하고 준결승에서 에버튼 FC마저 꺾으며 더비 라이벌들을 모두 이겨내는 활약을 보여주었고 무난하게 결승에 올랐다. 이후 2012년 5월 5일의 결승 상대는 첼시 FC. 리버풀은 후반까지 2-0으로 끌려가다가 앤디 캐롤이 추격골을 집어넣으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으나, 결국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5]

해당 시즌은 팀 창단 이후 120번째 시즌이었기에 의미가 더해진 시즌이었지만 리그에서의 완벽한 실패로 인해 빛이 바랬다. 달글리시는 1억 유로에 가까운 이적료를 쓰면서 선수들을 영입하여 야심차게 지난 시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으나, 영입된 선수들은 다수가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고, 중원에서 루카스 레이바의 부재는 전혀 메워지지 못했으며, 구시대적인 전술은 한계를 노출했다. 클럽 레코드딜로 영입된 앤디 캐롤은 최악의 영입생이 되었고, 조던 헨더슨은 오른쪽 윙으로 기용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스튜어트 다우닝찰리 아담은 낡은 킥 앤 러시 전술을 위해 영입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달글리시는 이 시즌 리그에서 그레이엄 수네스 체제 이후 최악의 성적인 8위[6]로 주저 앉아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보다도 못한 순위를 기록했으며, 루이스 수아레스-파트리스 에브라 간의 스캔들에 연루되어 졸렬한 구단 대응을 보여주면서 외부적인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나마 리그컵을 우승해 무관을 끊어내고 다음 시즌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확보한 것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야말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최악의 시즌 중 하나. 8위라는 저조한 순위보다도 지난 시즌의 기대를 품고 투자를 감행했음에도 팀의 잠재력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달글리시에게 주어진 1억 유로에 가까운 이적자금은 그야말로 팀의 운명이 걸린 거액이었지만 달글리시가 영입한 잉글랜드산 이적생들이 처참하게 망하면서 리버풀의 투자여력은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7]

결국, 리버풀을 구원할 것으로 기대받았던 팀 레전드 달글리시는 오히려 최악의 이적 시장을 보내며 팀의 암흑기를 재촉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시즌 종료와 함께 상호 협약 해지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8]

이후 펜웨이 스포츠 그룹은 젊은 유망주 감독 브렌던 로저스를 선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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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케니 달글리시의 시즌별 주요 성적
시즌 리그 FA EFL CS UCL UEL USC ICC 감독
2010-11 시즌[9] 6위
( 1)
64강 32강 - - 16강 - - 로이 호지슨

케니 달글리시
2011-12 시즌 8위
( 2)
준우승 우승
(8회)
- - - - - 케니 달글리시

6. 평가

붉은 제국의 에이스로 활약한 구단 최고의 레전드 선수이자 헤이젤 참사힐스버러 참사로 발생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세기 마지막 명장 달글리시였던 만큼 2기 체제에서의 처참한 성적과 시대에 동떨어진 경기력은 리버풀 팬들에게 엄청난 아쉬움과 허탈감을 남겼다. 로이 호지슨을 대체하면서 2010-11 시즌 후반기 소방수로 부임했을 당시에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모습이 보였고, 이에 구단을 막 인수했던 펜웨이 스포츠 그룹과 팬들의 기대감도 증폭되었으나 2011-12 시즌의 대실패는 팀의 암흑기를 연장하며 바닥을 찍는 결과를 낳았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구시대적인 전술에 있었다. 달글리시는 4-4-2에 기반한 다이렉트 플레이와 선 굵은 축구로 승부를 보려고 했으나, 2010년대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이 제시한 대륙식 축구가 정점을 찍고 있던 시기였고 프리미어 리그도 이러한 전술 트렌드로 돌아서고 있었다. 직선적인 윙플레이와 빅 앤 스몰의 투톱을 활용한 달글리시의 전술은 그야말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통했던 고전적인 전술이었고[10], 리버풀은 이로 인해 졸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특히나 공격진에서의 부진한 경기력과 처참한 득점력이 두드러졌다. 2011-12 시즌 리버풀은 실제로 수비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리그에서 47득점에 그치며 답답한 경기들을 양산했다. 앤디 캐롤의 제공권을 활용해 크로스 플레이를 살리겠다는 낡은 전술이 통할리가 만무했기 때문. 오히려 해당 시즌에 캐롤과 스튜어트 다우닝 등의 잉글랜드 선수들이 빠지고 아기자기한 플레이가 가능한 막시 로드리게스크레이그 벨라미가 기용되었을 때 훨씬 우수한 플레이가 나왔다. 그러나 달글리시는 FA컵 결승전에서 첼시 FC에게 강한 막시 로드리게스를 기용하지 않는 등 전술과 선수 기용에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결국 리버풀은 유럽 대항전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리그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나 최악의 리그 성적을 기록했다.

전술과 게임 플랜이 잘못되어있었기에 영입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달글리시 체제 하에서 리버풀은 최악의 이적 시장을 보냈다. 타겟맨 역할을 주려고 영입한 캐롤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영입이 되었으며, 오직 킥력을 위시한 플레이에 장점이 있는 찰리 아담, 스튜어트 다우닝 또한 최악의 부진을 거듭하며 리버풀 커리어를 망쳤다. 조던 헨더슨은 재능이 있는 좋은 유망주였으나 오른쪽 윙에 배치해 크로스 플레이를 시키는 이상한 기용으로 달글리시 밑에서는 빛을 못 봤다.[11] 그나마 2011년 겨울에 영입된 루이스 수아레스[12]가 지속적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좋은 영입으로 평가받았고, 호세 엔리케가 나름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또한 하울 메이렐레스를 어이없게 판매하며 스티븐 제라드루카스 레이바 이외에 믿을 선수가 없던 중원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루카스가 시즌 아웃을 당한 뒤 더욱 뼈아픈 실책이 되었다. 달글리시는 완전히 실패한 이적 시장에 1억 유로에 가까운 금액을 사용했으나, 결국 팀은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와 더불어 저조한 리그 순위로 암흑기를 지속, 거액의 이적료와 주급 지출이 겹치면서 리버풀의 투자 여력이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능한 선수들이 고액의 주급을 수령하며 주급 체계마저 흐트러졌으며 돈은 돈대로 쓰고 팀의 전력과 잠재력마저 약화되었다. 이에 달글리시의 퇴임 후의 2012-13 시즌 이적시장에서 리버풀은 전례가 없을 정도의 절약 정책을 펴게 된다.

여기에 수아레스와 파트리스 에브라인종 차별 발언 문제로 충돌한 뒤 사건에 관련된 일련의 발언과 대처가 큰 비난을 불러모으기도 했다.[13] 달글리시가 직접적으로 모든 책임을 질 사건은 아니었지만, 구단의 원로이자 레전드, 감독으로서는 실망스러운 행보였다. 또한 부진이 이어지면서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날카로운 답변을 보이는 등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베테랑답지 않게 불안한 팀 운영이 이어졌다.

종합하자면 구시대적인 전술과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 및 영입 플랜으로 1기 체제에서의 호성적을 다시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완전히 짓밟은 재임기였다. 달글리시가 위대한 감독으로서 성적을 구가한 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로 남게 되었으며, 결국 바뀐 축구의 트렌드를 전혀 따라잡지 못한 채 그는 레전드로서의 자존심을 구겨야 했다. 덕분에 리버풀은 2010년대 이후 계속해서 암흑기를 이어가야 했으며, 프리미어 리그 시대 이후 최저의 성적을 찍으면서 최악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2011년 FA컵 결승 진출과 리그컵 우승으로 인하여 라파엘 베니테스 이후 2010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던 무관의 시기를 종식시키고[14] 오랜만에 컵 대회 경쟁력을 보여줬다는 사실은 그나마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래도 감독 대행으로서 호지슨 이후 파탄 상태였던 팀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기에 침체기와 암흑기에 졸전을 펼친 감독들과는 궤를 달리하며 이전에 쌓은 위업과 그에 대한 전설적인 평가가 보존될 수 있었다.
[1] 당시 이를 결정한 단장 퍼슬로우와 구단주 톰 힉스, 조지 질레트 주니어는 엄청난 비판을 들었다. 당시 후보는 달글리시, 호지슨, 마누엘 펠레그리니였다. 호지슨 체제를 생각해본다면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 그러나 호지슨의 뒤를 이은 달글리시도 결국 부진을 거듭하며 실패했기에 달글리시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2] 실질적으로는 상호 협약 해지였지만, 경질에 가까웠다.[3] 이 때 퍼거슨이 케니 달글리시의 귀에 대고 속삭인 첫 마디는 'Welcome Back.'이었다고 한다.[4]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감독을 맡았던 1기 체제에서는 헤이젤 참사 이후 받은 징계로 유럽 대항전 진출이 금지된 시기였다.[5] 직후에 이어진 리그 37라운드도 첼시와의 경기였는데, 어차피 순위가 확정된 리버풀은 지던 말던 별다른 상관이 없었지만 첼시 입장에서는 리그 4강 진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그런데 리버풀은 분풀이라도 하듯이 첼시를 안방에서 4-1로 털어먹었고, 첼시의 4위권 희망을 박살냈다.[6] 득실차는 +7에 불과했으며 챔스권과의 승점차가 무려 17점인 처참한 성적이다.[7] 달글리시의 리버풀은 아스날의 잉글리시 코어 정책에 영향을 받은건지 미친듯이 선 굵은 축구에 특화된 잉글랜드 선수들만 사 모았는데, 결국 이 시절 선수들중 제대로 된 족적을 남긴 선수는 후에 위대한 주장으로 올라선 조던 헨더슨 단 한 명 뿐이다. 이 시즌 리그 5위를 기록한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스쿼드 전체 이적료가 앤디 캐롤 하나만도 못했다.[8] 상호 협약 해지로 구단과 합의 하에 팀을 떠났지만, 경질에 가까웠다. 참고로 팀을 떠난 후, 트위터에서 그가 계약 해지 보상금을 팀의 이적 자금에 보태쓰라고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팬들을 감동시켰으나 그 다음날, 그게 사실이 아니며 그가 보상금을 전액 수령해갔다는 사실이 지역지 리버풀 에코를 통해 확인되었다. 보상금 수령 자체는 달글리시 개인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앞선 오보 때문에 모양새가 더 우습게 되며 리버풀 팬들로서는 더 쓴 퇴장이 되었다.[9] 시즌 중도 부임[10] 물론 달글리시 1기 체제 당시에는 이런 전술이 강력함을 발휘했던 시기였다. 실제로 달글리시 본인도 4-4-2 기반의 투톱 축구에서 활약했고, 첫 번째 감독 시절에도 4-4-2, 4-4-1-1 전술로 리그를 지배했다.[11] 이후 중원 자원으로 출장하며 팀의 엔진으로 올라섰고, 브렌던 로저스 감독 밑에서 착실히 성장하여 위르겐 클롭 감독 아래 리버풀의 위대한 주장으로 변모했다.[12] 수아레스는 엄밀히 말하면 달글리시가 데려왔다고 하기엔 좀 애매한데, 호지슨이 감독이었던 2010년 겨울 경부터 이미 리버풀과 강력하게 링크가 있어왔기 때문이다.[13] 물론 상호 주장이 다른 사건이라면 팀의 선수에 대해 옹호가 필요한건 사실이며, 수아레스가 다른 표현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호가 필요하긴 하지만, 수아레스를 옹호한답시고 제대로 된 정황 파악도 안 한 채 워밍업 티셔츠에 옹호 문구를 넣는 실망스러운 대처를 보여줬다.[14] 달글리시의 해당 시즌 리그컵 우승이 아니었다면 2019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무려 13년간 무관 행진을 이어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