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08:57:38

릴리안 베탕쿠르


<colbgcolor=#cdcdcd><colcolor=#000> 릴리안 베탕쿠르
Liliane Bettencourt
파일:Liliane_Henriette_Charlotte_Bettencourt.jpg
본명 릴리안 앙리에트 샤를로트 베탕쿠르
Liliane Henriette Charlotte Bettencourt
[1]
출생 1922년 10월 21일
프랑스 파리
사망 2017년 9월 21일 (향년 94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 뇌이쉬르센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사업가
부모 아버지 외젠 슈엘레르[2]
어머니 루이즈 돈시외
배우자 앙드레 베탕쿠르[3]
자녀 장녀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예[4]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결혼2.2. 출산과 기업 상속, 사회공헌 활동2.3. 베탕쿠르 스캔들2.4. 사망
3.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사업가. 사망 당시 443억 달러의 순자산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고, 세계에서 14번째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2. 생애

2.1. 출생과 결혼

1922년 10월 21일 세계에서 가장 큰 화장품 및 미용 회사인 로레알의 창업자이자 화학자인 아버지 외젠 슈엘레르와 음악가인 어머니 루이즈 돈시외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5살에 어머니를 여의었기에 아버지와의 유대가 깊었다. 아버지는 저독성의 염색약을 처음 개발해 선보였고 공격적인 홍보와 사업수원을 발휘해 로레알을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키워냈다. 릴리안도 15세 부터 아버지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반공주의 성향이었고 인종차별적 행동도 종종했다. 그녀는 1950년, 오래된 가톨릭 노르만 귀족이자 파시스트 성향의 반공주의 무장단체인 La Cagoule[5]의 일원이었던 앙드레 베탕쿠르와 결혼해 로레알의 부의장이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La Cagoule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자본주의와 유대교를 반대하는 친나치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전후 그녀의 남편은 단체의 다른 일원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불편한 과거를 갖고 있었지만 빠르게 노선을 갈아타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게다가 로레알이라는 대기업의 가족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후 드골과 퐁피두 정부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6] 아버지 외젠 슈엘레르도 친나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처벌은 피할 수 있었다.

2.2. 출산과 기업 상속, 사회공헌 활동

1953년, 외동딸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예를 출산했으며 1957년, 창업자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로레알의 지분을 물려받아 최대 개인 주주로서 다시 한번 자리매김 했다. 1963년, 그녀가 계속해서 과반수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회사는 상장되었고, 1974년, 선거 이후 그녀는 회사가 국유화 될 것을 두려워하여 지분의 거의 절반을 식품회사인 네슬레의 지분 3%로 교환했다.

1987년, 남편, 딸과 함께 의료, 문화 및 인도주의 프로젝트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베탕쿠르 슈엘레르 재단(la Fondation Bettencourt Schueller)을 설립했다. 재단은 뇌이쉬르센을 기반으로하여 1억 5천만 유로의 자산과 연간 약 1천 5백만 유로의 예산으로 약 55%의 자금을 과학 교육 및 연구에, 33%는 인도주의 및 사회 프로젝트에, 12%는 문화 및 예술에 기부하고 있으며 본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해 과학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1995년, 로레알 이사회에 합류했다. 그는 사업에 직접 관여하기 보다는 기업가로서의 사회공헌과 지분 보유, 기업 방향성을 제시하며 로레알의 확장에 영향력을 끼졌다. 그는 사업가로서, 또 정치인의 아내로서 세계적인 왕족, 부호들과 교류했지만 어마어마한 재력과 영향력에 비해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다.

2.3. 베탕쿠르 스캔들

그러나 2007년, 프랑스 전체를 뒤흔든 떠들썩한 스캔들에 휘말려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릴리안의 외동딸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예가 어머니의 친구인 사진작가 프랑수아-마리 바니에를 고소한 것이 발단이 됐다. 바니에는 10대 때 살바도르 달리의 연인이었으며 이브 생 로랑, 칼 라거펠트 같은 유명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진작가였다. 그는 한 잡지에 실릴 사진을 촬영한 것을 계기로 릴리안을 만나게 되었는데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한 사진으로 신뢰를 얻고 괴짜같은 성품으로 릴리안과 친구가 되었다. 그가 동성애자였던 것 또한 두 사람이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나고 함께 여행하며 누구보다도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릴리안이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까지 바니에가 간섭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07년에 남편 앙드레 베탕쿠르가 별세했고 곧 릴리안이 바니에를 양자로 입양하려고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참다못한 프랑수아즈가 바니에를 고소한 것. 바니에가 릴리안으로부터 무려 10억 유로의 현금과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 중에는 릴리안이 구입한 초고가의 미술품,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같은 에술품도 있었다. 프랑수아즈는 바니에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인 어머니를 이용해 거액을 뜯어냈다고 비난했다.

릴리안의 측근들은 바니에와 릴리안이 가까워진 것은 릴리안의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보수적이고 부유한 환경에서만 생활한 릴리안이 거침없고 무례하기까지 한 예술가인 바니에에게 끌렸고 사람의 환심을 사게 하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즐거움을 찾고 위로받았다는 것이다.

릴리안과 남편인 앙드레 베탕쿠르의 사이는 겉으로는 원만했지만 사실은 공허했다. 그는 2대 정부에서 여러 차례 장관까지 지낸 정치인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지루한 사람이었고 남편으로서 릴리안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외동딸인 프랑수아즈도 그런 아버지를 닮아 어머니와 성향이 전혀 맞지 않았다. 패션에도 조예가 깊고 활동적인 모친과 달리 프랑수아즈는 사람과 교류도 하지 않고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릴리안이 자기 딸에 대해 '차가운 아이' 라고 할 정도로 모녀간에는 통하는 점이 거의 없었다.

릴리안과 프랑수아즈 모녀간의 이 법적 분쟁은 2010년 어머니와 딸이 화해할 때까지 확대되었고, 릴리안은 자신의 손자인 프랑수아즈의 장남을 후견인으로 지정받아 궁극적으로 가족의 법적 보호 아래 있게 되었다.

결국 2015년, 바니에는 릴리안 베탕쿠르로부터 10억 유로(약 1조 4천억 원)에 달하는 금액과 선물을 부당하게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징역 4년(2년 집행유예 포함) 과 37만 5천 유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릴리안의 자산은 딸 프랑수아즈와 신탁 관리자의 보호 아래로 넘어갔다.

한편, 모녀의 분쟁 중에 바니에에게 반감을 가진 베탕쿠르 저택의 집사가 릴리안과 바니에의 대화 내용을 녹취해 프랑수아즈에게 전달했는데 이것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의 몰락을 불러왔다. 총 25개의 CD에 담긴 대화 녹취에는 릴리안이 세금 탈루 계획에 연루되었고 당시 프랑스의 최고위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전달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건으로 인해 노동부 장관 에릭 워스는 2010년에 축출되었고, 사르코지도 릴리안의 허약한 판단력을 이용해 수백만 유로의 불법 선거자금 수수한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사르코지는 수사를 받으면서 현직 판사를 매수해 수사 기밀을 전달받았는데 2024년 12월 19일에 부패와 직권남용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1, 2심에서 받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2년, 3년간 공직출마 금지, 1년간 전자팔찌를 착용한 채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2.4. 사망

2017년 9월 21일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에 있는 자택에서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딸 프랑수아즈는 모친이 평화롭게 영면했다고 전했다.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망 전부터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딸과의 소송에서 실제로 그녀가 치매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음이 드러났으며, 2012년부터는 건강 문제로 인해 공적 활동에서 물러나 있었다.

3. 여담

화려한 패션 감각으로도 알려져 있다. 풍성한 웨이브를 넣은 단발머리에 강렬한 색깔의 실크스카프, 캐시미어 머플러를 포인트로 한 더블재킷이나 팬츠수트를 즐겨 입었고 강렬하고 화려한 색상을 선호했고 다양한 모피와 10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도 즐겼다. 소송 후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그런 스타일을 유지했다. 이브 생 로랑, 크리스챤 디올, 아르마니 등 당대 최고 디자이너 의상의 주요 고객이었다.

딸인 프랑수아즈는 피아니스트이자 그리스 신화 문학의 작가로 활동했고 외모를 꾸미는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사교적인 사업가 모친과는 맞지 않는 성향.

노년에 정부에 '부유세' 의 개념으로 '특별기부세' 를 신설해달라는 청원을 한 적 있다. 많은 혜택을 받은 부유층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취지. 다른 프랑스의 거부 16명과 함께 특별기부세 도입 서명애 동참했다.

아버지는 친나치 성향으로 파시스트 단체를 후원했고 남편도 같은 성향이었다. 그녀 역시 극보수 성향으로 유대인을 싫어해서 같이 앉는 것 조차 피했다고. 그런데 그가 친구로 지내며 거액을 주었던 프랑수아 마리 바니에가 유대인 혈통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바니에도 그 사실을 몰랐는데 바니에 아버지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해서 유대인임을 숨겼기 때문이라고.

그녀와 딸의 분쟁 이야기는 넷플릭스 시리즈 <베탕쿠르 스캔들: 상속녀, 집사 그리고 남자친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1] 혼전성은 슈엘레르 (Schueller).[2] 로레알 창업자.[3] 1950년 결혼, 2007년 사별. 프랑스 상원 의원, 1966년 1월 8일부터 1973년 3월 28일까지 다수의 장관직 역임, 이후 오트노르망디 지역 위원회 의장, 생모리스데틀랑 시장 역임.[4] 지분 35%를 가지고 있는 로레알 최대주주이자 이사회 부의장.[5] 비시 프랑스에 협력했으며 암살, 폭탄 테러, 군비 사보타주 등을 자행했다.[6]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활동으로 크루아 드 게르 훈장, 저항 훈장, 심지어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서훈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