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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 |
본명 | 러시아어: Меер-Генох Моисеевич Валлах 한국어: 메이어헤노흐 모이셰비치 발라흐 |
출생 | 1876년 7월 17일 |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현 벨로스톡군 벨로스톡[1] | |
사망 | 1951년 12월 31일 (향년 75세) |
소련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국적 | 러시아 제국 → 소련 |
학력 | 벨로스톡 직업학교[2] |
직업 | 외교관, 공무원 |
정당 | [[소련 공산당|]] |
병역 | 러시아 제국군 (1893~1898)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배우자 | 아이비 로우 리트비노바[3] |
경력 | 소련 외무인민위원 |
1930년 7월 21일 ~ 1939년 5월 3일 | |
주미 소련 대사 | |
1941년 11월 10일 ~ 1943년 8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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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심 리트비노프는 소련의 외교관이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 외무인민위원을 역임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미 소련대사를 역임했다.2. 생애
메이어 헤노흐 발라흐는 1876년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폴란드 비아위스토크의 유대계 리투아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비아위스토크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1893년 러시아군에 자원병으로 입대하여 1898년까지 복무했다.발라흐는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으며, 이후 활동 가명으로써 막심 리트비노프라는 이름[4]을 쓰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키예프 지역 당 위원이 되었으나 1901년 체포되었다. 1902년에는 감옥 동료 11명과 함께 탈옥을 조직하여 루키야니우스카 감옥에서 탈출하여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후 1903년 사회민주노동당 2차대회에서 당이 노선 차이로 분당했을 때 볼셰비키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후 이스크라 지의 유포를 맡거나, 3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등 당원으로써 활발히 활동했다. 영국에 갔을땐 항구의 선원들과 시비가 붙어서 몰매를 맞고 있던 스탈린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리트비노프는 나중에 이 일 덕분에 자신이 숙청당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러시아 제국에서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불가리아를 통해 러시아로 무기를 반입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907년부터는 망명객으로써 프랑스에 거주했다. 1908년 티플리스에서 은행강도 사건이 발생하자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영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때 런던에서 10년 가까이 거주하면서 제2 인터내셔널 소속 국제 사회주의사무국에서 볼셰비키당 대변인을 역임하면서 외교관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이 발발한 직후 1918년 영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 주미 전권대리로 발령되었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는 소련외무인민위원부 제1부부장을 역임하면서 게오르기 치체린 휘하에서 영소무역협정 체결 등 대미, 대영 외교의 중요한 안건을 도맡아 진행했다. 1930년 리트비노프는 소련 외무인민위원, 즉 소련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1934년 2월, 1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39년 3월, 18차 당대회에서도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리트비노프는 외교장관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집단안보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특히 리트비노프는 소련이 국제연맹에서 국가간 분쟁에서 평화적 해결을 중요한 켈로그 브리앙 조약에 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소련의 접경국들과 부전조약에 따라 군비 감축을 체결하는 일명 리트비노프 협정을 주도했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에는 나치 독일 견제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와 방위동맹을 서두르고자 했다. 하지만 뮌헨 협정 등으로 서방 국가들의 소극성에 실망한 스탈린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이용해 리트비노프를 비난하면서 1939년 5월 3일 리토비노프를 외무장관에서 해임시켰다. 1941년 2월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당시 리트비노프는 외무장관에서 해임되면서 숙청될 위기에 처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숙청 위기에 몰렸던 리트비노프를 구원한 것은 독소전쟁이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소련 정부는 대미 외교통이었던 리트비노프를 주미 대사로 복귀시켰으며 이후 1943년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내정될 때까지 제2차 세계 대전 초창기 미국에서 소련 외교계를 대표했다. 1946년에는 공직에서 은퇴했다.
리트비노프는 1951년 12월 31일 심장마비로 모스크바 저택에서 사망했다. 훗날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비롯한 여러 소련 정치인들은 스탈린이 리트비노프가 서방 외교관들과 접촉했다고 의심하고 있었으며,[5] 리트비노프의 죽음이 반유대인 음모를 꾸미던 스탈린의 음모라 주장했다. 하지만 리트비노프의 가족은 그가 평소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사망 직전 리트비노프의 건강이 매우 안좋아 간호사가 항상 함께있었다고 회고했다.
3. 평가
흔히 리트비노프는 2차대전 동안 소련 외교정책의 중심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나 냉전 시기 소련 외교계를 주도해 온 안드레이 그로미코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친서방노선 및 주변국과 평화적인 관계를 추구했던 리트비노프는 대외적으로 무력에 기반한 패권주의를 추진했던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 입장에 어울리지 않는 외교관이었다. 또한 리트비노프는 볼셰비키 당원으로써 오랫동안 활동해 왔던 베테랑이었음에도, 유대인이라는 혈통은 그가 결국 스탈린에게 밉보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하지만 리트비노프는 소련 건국 초창기 대미, 대영 교섭에서 경력이 굵었던 외교통이었으며, 무역 등 여러 교섭에서 소련을 대표하면서 서방 국가들이 소련을 주권국가로써 인정하고 무역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기여한 외교관이었다. 리트비노프는 국제연맹의 평화노선을 존중하여 주변국과 평화를 추구했으며, 특히 1933년 나치 독일의 대두 이후에는 서방 국가들과 함께 외교적인 동맹을 강화하면서 나치 독일의 확장을 견제하려 했다. 이처럼 리트비노프는 힘의 논리가 만연했던 1930년대 외교계에 맞지 않게 현대적인 식견을 지녔던 비운의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서방은 파시즘 독일보다 공산주의 소련을 위험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고 그의 독일에 대한 외교 정책은 실현 불가능했으며 결국 리트비노프의 해임과 함께 소련은 나치 독일과 비밀리에 동유럽을 분할하여 점령하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동안 이득을 보는 듯 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패권욕을 과소평가했던 스탈린은 결국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패권주의와 단기적 이득에 근거했던 소련의 외교적 오판은 결국 2천만명의 희생이라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