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02:15:50

만수대텔레비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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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대텔레비죤
Mansudae Television
萬壽臺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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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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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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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개국 1983년 12월 1일
상위 조직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담당 부서 텔레비죤총국
유형 국영방송
방송
품질
<colbgcolor=#FF2A13,#222222><colcolor=white> 화질 PAL-D/K 576-line/50㎐(1983년 12월 1일 ~ )[1]
DVB-T2 FHD 1080/50i (시기 미상/수도권)[D]
DVB-C2 FHD 1080/50i (시기 미상/지방)[D]
음향 스테레오[4]

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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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수대텔레비죤의 방송 시작 화면.

1983년 12월 1일[5] 개국한 (2015년 7월~11월 사이 일시중단) 북한국영방송이다. 줄여서 만수대TV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2. 상세

조선중앙텔레비죤과 동일하게 중앙방송위원회가 운영하며, 조선중앙텔레비죤과 같은 PAL-D/K방식으로 방송하며 디지털방송은 DVB로 송출된다. 단, 지방에서는 유선으로 송출된다. 채널번호는 12번이라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12통로'라고 부른다고. 남한으로 치면 KBS 2TV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방송국이다. 방송국 설립 당시 최신, 최고급 방송 설비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상당한 비용이 들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이미 타 공산권 국가에서든 TV채널을 2개, 3개씩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고, 당대의 북한이 여유가 없던 국가는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실 국가와 별도로 집권당(조선노동당)이 운영한다는 점에서는 옛날 국민당 전용 채널이 있던 대만의 지상파와 비슷하다.

북한의 대표 채널인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북한 전역에서 방송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1991-1995년 초의 남한 SBS[6]와 비슷하게 평양시 지역에서만 방송되고 있었으나, 김정은 집권 이후인 2016년에는 북한 전역으로 방송권역을 확충했다. 또한, 매일 방송인 조선중앙텔레비죤과는 달리, 이 방송은 오로지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만 방송된다. 이런 점에서 오랜 기간동안 이 채널이 소위 '일반 주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평양시민과 고위층들을 위한 방송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방송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후 4시부터 오후 10시까지로, 10시간 정도.

평양을 방문한 한 외국인이 찍은 방송시작영상[7]에서는 찬양곡 《충성의 한길로 가고가리라》가 나오면서 평양시내의 주체탑, 천리마동상, 평양대극장, 인민문화궁전, 마지막에는 조선로동당 마크와 만수대예술극장이 나오면서 만수대텔레비죤이라 나오고, 그 이후에는 조선중앙텔레비죤처럼 김일성•김정일의 노래를 내보낸 후, 방송순서를 내레이션 없이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970년대에 조선중앙텔레비죤이 금요일 오후, 외국 영화를 조선말로 더빙하여 방영하던 것을 아예 채널을 분리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채널에서는 보도 프로그램은 거의 하지 않으며, 대부분 예술공연과 영화, 스포츠 등, 오락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특히 미국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나 애니메이션 역시 방영된다는 점에서 조선중앙텔레비죤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8] 보도 프로그램도 있긴 하나, 대부분 북한의 보도가 아닌 해외의 보도를 중심으로 보여준다.[9] 여하튼 여러모로 구닥다리스럽다는 조선중앙TV에 비해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북한 주민, 특히 수신이 가능한 평양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외국의 방송을 수신하기 위하여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에 인공위성 중계소를 설치하여 남한을 포함한 다양한 나라의 방송화면을 받는다. 이것을 종합하여 김씨 일가에 보고하는 데 주임무가 있다.

북한의 두번째 TV 채널로 개국되었기는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이 방송의 수신 범위가 평양으로만 국한된 것은 전국 방송을 하면 북한 당국이 사상 통제가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0] 더구나 이 방송은 원래 김일성, 김정일의 전용 채널로 생긴 방송이었는데, 자본주의적 프로그램이 많은[11] 이 방송의 성격을 안 김일성이 관리자들을 꾸짖은 뒤 평일 방송이 없어지고 주말, 공휴일에만 방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단순히 자본주의적인 이유로 송출을 제한했다는 것은 너무 반공언론식으로 해석한 것이고, 사실 여타 공산권 국가에서도 알바니아와 80년대 중후반의 루마니아 정도를 빼면[12] 두번째나 세번째 TV채널을 만들고 이를 지방에도 송출하는 것[13]을 생각하면 이상한 말이다. 방송 지역이 평양 한정이라서 평양시민의 특혜[14] 중 하나로 간주되어왔고, 지방 사람들도 이 방송을 보기 위해 갖가지 물건으로 안테나를 만들어 몰래 봤다고 한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김일성이 대중문화에 있어서 꼰대여서 그런 것인데,[15] 김정일도 에산 제약 등의 이유로 그 기조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정일은 영화광인 만큼 해외문화유행에 있어서 어느정도 인지하던 편인지라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아버지보다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던 편이었다. 우선 1980년대 당시에 두발자유화를 시행하고, 여행제한을 없애는 시도를 하는 등 국정참여 초기만 하더라도 의외로 3S정책과 비슷하게 문화의 자유화 정책을 폈던 전적이 있었고, 당시 세계 대중음악 트렌드도 어느정도 참고하여서 보천보전자악단이나 왕재산경음악단이라는 음악단을 결성시켰을 정도였다.[16] 물론 두발자유화는 북한청년들 사이에서 장발이 유행하자 장발을 싫어하던 김정일이 그만두라 지시해서 다시 이전 상태로 되돌아왔고, 국내여행 제한 완화도 몇달 못가서 평양을 빼면 없던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기인 2016년에 송출제한을 없애면서 전국방송을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장마당이 활성화되고, 90년대 말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되며 북한경제가 차츰차츰 회복세에 접어들고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계층이 늘어나면서, 지방에서도 중국산 드라마•영화는 물론이고 남한 드라마와 영화, 노래를 비교적 쉽게 구입할 수있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즉, 북한당국으로써 만수대텔레비죤의 송출제한을 시킬만한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인데 그래도 상당기간 동안 비용상의 문제 등으로 송출제한이 유지되어왔다. 이 점에 있어서 김정일의 방송 취향이 심히 구닥다리였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17] 그러다가 김정은이 북한TV의 시청률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는 점을 캐치하면서 그나마 시청률이 높은 만수대TV의 송출제한 폐지를 지시했고,[18] 결국 2016년에 송출제한을 완전히 풀어버리며 전국방송을 시작했고 디지털 셋톱박스의 보급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지방에서도 만수대TV가 제2채널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선 2015년 7월, 만수대텔레비죤의 송출을 중단하고 8월 15일체육전문방송국을 신설했지만, 동년 11월 원상복구되고 송출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다만, 체육TV를 완전히 폐국시킨 것은 아니고 디지털 유선TV 채널로 송출하고 있다.

3. 관련 문서



[1] 디지털로 환산시에는 720ⅹ576@50i(576i50).[D] 아날로그 송출 당시 필드 주파수 50㎐였듯 디지털 송출도 인터레이스(비월주사) 기준 1080/50i이다. 프로그레시브(순차주사) 환산시 1080/25p.[D] [4] 북한식 표현으로는 '립체음'이라고 한다.[5]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향토대백과>에서는 1974년 12월 4일이라고 한다.[6] 북한과 다르게 중계유선방송을 통한 테이프 넷 방식으로 중계가 허용된다.[7] 오후 7시쯤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8] 물론 미국 것보다는 옛 소련이나 중국, 동구권, 인도 영화가 주로 방영된다.[9] 그러나 김씨 일가 찬양은 당연히 빠지지 않는다.[10] 여담이지만 남한에도 비슷한 이유로 동양방송도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에 수도권 지역과 부산•경남일부 지역에만 방송되었다.[11] 이라 쓰고 오락적인 프로그램이 많다고 읽는다.[12] 전자는 북한 뺨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였고, 후자는 무리한 산업화와 외채 상환으로 인한 전력난 때문에 원래 2개였던 TV 채널 중 하나를 없애고 방송 시간도 평일 2시간으로 줄이고는 대부분을 차우셰스쿠 찬양으로 떼웠다.[13] 물론 소련과 중국에서는 수도권 채널이 지방에 송출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국토가 너무 넓기 때문에 전국송출망을 확충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14] 평양시민이 징계를 받아 평양에서 추방되거나 타 지방으로 발령 등의 이유로 이사를 갈 때 제일 아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방송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기도 했다.[15] 김일성의 경우에는 독서를 적극 장려해서 이 당시 북한의 도서관이 남한 도서관보다 시설면에서 우월했을 정도였지만, 동시에 거슬릴만한 예술인들은 전부 숙청시켜서 많은 예술인들이 지방으로 쫓겨나거나 최승희처럼 감방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가 안막같이 처형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이 때문에 숙청바람이 분 이후로는 한 동안 북한 문화계는 하품나오는 수준의 작품들을 찍어내던 수준이었다.[16] 물론 가사의 경우에는 대부분 김씨일가나 조선로동당 참여 일색인것은 여전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자음악이라는것 자체가 당시 북한 젊은층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해서 인기는 높았다.[17] 다만, 김정일은 영화를 즐겨보던 영화광인데다가, 가끔씩 남한방송을 보기는 봤고, 일부 드라마들도 즐겨볼 정도로 영상 취향에 있어서는 딱히 구닥다리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북한의 영상제작 수준이 그리 높지않은 데다가 소재 제한은 쓰잘데기 없이 많지, 고난의 행군으로 새로 방송기술을 들여놓을 돈은 없지하면서 수준이 정체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조선중앙TV의 방송 수준이 말 그대로 구닥다리의 끝을 달리게 되어버렸던 것이 문제지. 그나마 김정은이 집권하면서는 좀 나아졌지만 그 나아졌다는것도 남한으로 치면 전두환 정부 시기를 연상케 하는 수준(...).[18] 애초에 북한 최고지도자 입장에서 자국TV 시청률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장마당에서 남한이나 외국방송 프로그램의 시청빈도가 늘어나는 것이 좋은 일일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