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c0033><colcolor=#ffffff> 모니카 셀레스 Monica Seles[1] | |
출생 | 1973년 12월 2일 ([age(1973-12-02)]세) |
SFR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노비사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조건 | 179cm, 65kg |
프로데뷔 | 1989년 |
은퇴 | 2008년 |
사용 손 | 왼손잡이 (양손 백핸드, 양손 포핸드) |
통산 상금 획득 | $14,891,762 |
1. 개요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현 세르비아) 노비사드 출신의 미국 국적의 前 테니스 선수이다. 1993년까지 유고슬라비아 국적이었다가, 보스니아 전쟁의 여파로 미국에 망명해 1994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1990년 프랑스 오픈대회 '롤랑 가로스'에 혜성과 같이 등장해서 1990년대 초중반, 세계여자 테니스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위대한 선수이건만 아래에 서술할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 불세출의 기량을 더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면서 슬픈 운명이 되고만다. 메이저대회 우승 회수만으로 선수의 능력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세레나 윌리엄스의 파워 및 쥐스틴 에넹의 테크닉과 더불어 모니카 셀레스의 양손 스트로크의 정확성은 영원히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2. 주요 성적
- 통산 상금 : 14,891,762달러
- 여자 단식 통산 성적 : 595승 - 122패
- 여자 단식 타이틀 획득 : 53회
- 여자 복식 통산 성적 : 89승 - 45패
- 여자 복식 타이틀 획득 : 6회
4대 그랜드슬램 여자 단식 : 우승 9회
* 호주 오픈 : 우승 4회(1991, 1992, 1993, 1996[2])
* 롤랑 가로스 : 우승 3회(1990[3], 1991, 1992)
* 윔블던 : 준우승 1회(1992[4])
* US 오픈 : 우승 2회(1991, 1992)
* 호주 오픈 : 우승 4회(1991, 1992, 1993, 1996[2])
* 롤랑 가로스 : 우승 3회(1990[3], 1991, 1992)
* 윔블던 : 준우승 1회(1992[4])
* US 오픈 : 우승 2회(1991, 1992)
2.1. 역대 메이저 대회 단식 성적
연도 | 호주 | 프랑스 | 윔블던 | US |
1989 | 불참 | 4강 | 4라운드 | 4라운드 |
1990 | 불참 | 우승 | 8강 | 3라운드 |
1991 | 우승 | 우승 | 불참 | 우승 |
1992 | 우승 | 우승 | 준우승 | 우승 |
1993 | 우승 | 불참 | 불참 | 불참 |
1994 | 불참 | 불참 | 불참 | 불참 |
1995 | 불참 | 불참 | 불참 | 준우승 |
1996 | 우승 | 8강 | 2라운드 | 준우승 |
1997 | 불참 | 4강 | 3라운드 | 8강 |
1998 | 불참 | 준우승 | 8강 | 8강 |
1999 | 4강 | 4강 | 3라운드 | 8강 |
2000 | 불참 | 8강 | 8강 | 8강 |
2001 | 8강 | 불참 | 불참 | 4라운드 |
2002 | 4강 | 8강 | 8강 | 8강 |
2003 | 2라운드 | 1라운드 | 불참 | 불참 |
3. 선수 소개
왼손잡이인데 특이하게도 포핸드와 백핸드 모두 양손을 사용하면서 더욱 파워풀한 경기를 이끌어 냈다. 그녀가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 최고의 선수로 불리던 슈테피 그라프를, 잔디코트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압도해버린 신성으로 등장한다.그녀는 1990년 16세의 나이로 메이저 대회인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이 대회 최연소 우승자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91년과 1992년에 윔블던 대회를 제외한 나머지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모두 쓸어가면서 1991년 세계랭킹 1위에 올라 1992년에도 이를 유지하며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199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Citizen 컵[5] 8강전 도중 악몽같은 습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2년 이상 코트를 떠나게 된다. 이후 돌아온 그녀는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1995년과 1996년의 US오픈 결승전에서 그라프에게 연거푸 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6][7] 1994년 미국 국적을 취득한 후 아픔을 딛고 WTA 1000[8] 토너먼트 중의 하나인 1995년 캐나다 마스터스로 복귀하면서 곧바로 우승을 차지했고, 그 해 US 오픈 결승에도 진출했으며, 다음 해 1996년 첫 메이저 대회인 호주 오픈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 후로도 여러번 메이저 결승 진출 및 주요 대회를 우승한 후 2008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전 마지막 투어 참가는 2003년 이었다.
2009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경기 중 피습 사건
셀레스의 라이벌이었던 슈테피 그라프는 셀레스가 그랜드 슬램을 처음으로 제패한 1990년에 이미 호주 오픈 3회, 프랑스 오픈 2회, 윔블던 2회, US 오픈 2회 등 총 9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고 있는 어마어마한 선수였다. 당시 셀레스는 그라프보다 4살이나 어렸지만 피습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 호주오픈을 우승한 뒤 만 19살의 나이에 8회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따낼 정도로 승승장구했고 그라프를 훨씬 뛰어넘을 만한 페이스를 달렸다. 그러나 한국시간 1993년 5월 1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진행 중인 Citizen 컵 대회에서 불가리아의 막달레나 말리바 선수와의 8강전을 치르며 휴식을 취하던 도중, 코트에 난입한 독일인 남성 귄터 파르히[9]가 휘두른 보닝 나이프[10]에 어깨를 찔리고 만다. 그는 셀레스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그라프의 광팬이었다고 하며 셀레스가 없어져야 그라프가 세계 1위를 탈환할 수 있다며 이 사달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고공행진하던 셀레스는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평범한 선수가 되었고, 적수가 없어진 그라프는 슬럼프에서 벗어나며 우승을 휩쓸었다. 그런데 범인은 정신병력을 이유로 집행유예에 그치는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셀레스는 독일에서는 두 번 다시 테니스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셀레스 피습 사건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9년 2월 10일 방송분에서 다뤄졌다. 또한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는 잘못된 사랑이 불러온 비극이라는 주제로 7위에 랭크되었다.
5. 외부 링크
[1] 세르비아어 : Моника Селеш, Monika Seleš, 헝가리어 : Szeles Mónika. 세르비아 출생이지만, 부모는 헝가리인이다. 헝가리는 우리나라처럼 성이 앞쪽에 온다.[2] 미국 국적[3] 롤랑 가로스 최연소 우승자[4] 결승전에서 슈테피 그라프한테 0:2로 패했다.[5] Tier II (현재의 WTA 500) 토너먼트[6] 일반적인 선수의 기준으로 보자면 셀레스는 돌아온 후에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복귀 하자마자 Tier I (현재의 WTA 1000) 대회를 무실세트로 우승했으며 (결승 스코어 6-0, 6-1), 복귀 당시 그 해에 남아있던 마지막 메이저인 US 오픈에서도 결승에 진출한다. 복귀했던 해인 1995년 성적은 11승 1패였으며, 1996년에도 7번 결승에 올라 5개의 우승 타이틀을 추가했다. 그러나 최전성기에 2년 이상 커리어를 더 쌓아 올릴 기회를 날려버린 것은 물론 피습 이전의 셀레스가 가진 막강한 수준으로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로 인해 1996년 이후로 힝기스, 윌리엄스 자매, 데이븐포트 같은 새로운 세대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대체로 그라프보다 낮게 평가되는 힝기스와 1996-97 2년 동안 5번 맞붙어 모두 패배했는데 10대에 이미 최전성기의 그라프를 상대로 3번이나 그랜드 슬램 결승에 승리했던 셀레스가 정상적으로 성장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7] 물론 복귀 후에도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긴 했으나 피습 전의 기량에는 미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테니스 선수의 에이징 커브는 보통 20대 초중반에 절정을 이루는 점을 고려했을 때, 10대 시절에 이미 그랜드슬램 8회 우승을 차지했던 셀레스가 제 기량을 유지했다면 2배 이상의 우승 기록을 쌓았을 것이다.[8] 당시엔 Tier I, 남자 테니스 ATP 투어 마스터스 1000에 상응한다.[9] Günter Parche[10] 과도의 일종으로 뼈칼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과도에 비해 끝이 좀 더 날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