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당시, 마르티니크 섬에 정박하던 배에서 유일하게 생존자가 나온 영국 화물선 로라이마 호에서 찍은 사진. 로라이마 호도 선원 절반 이상이 후술하는 대로 이 폭발 여파로 사망하였다.
1. 개요
프랑스어: L' éruption de la montagne Pelée en 19021902년 5월 8일 프랑스 해외 영토인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에서 일어난 화산폭발이자 높으신 분의 권위주의로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대참사이다.
2. 전개
2.1. 폭발 징조
화산 폭발 이전의 생피에르 시.
해발 1397m 높이인 몽펠레(Mont Pelée) 화산은 활화산으로 이미 1792년, 1851년에 분화하였으나 별다른 피해가 없어서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르티니크 섬에 자리한 생피에르 시는 풍경도 좋아 이런 외딴 섬에 있는 도시치고는 인구도 많아서 3만 명이 넘었는데 당시 마르티니크 섬 전체 인구가 3만 8천 명이었으니 이 섬에서 가장 큰 중심도시였다.
그런데 1902년 4월 들어서 몽펠레 화산이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 23일에 작은 폭발을 일으킬 때만 해도 섬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이전과 달리 독한 유황을 마구 뿜어대자 새들이 질식사하여 떨어졌다. 섬에 있던 지리학자들은 충격에 빠져 화산 가까이에서 조사를 시작했고, 화산은 점점 폭발 징조를 보였다. 27일에 연기가 크게 일어났으며 28일에는 땅이 울렸다. 30일에는 산 근처 나무들이 쓰러졌고 지리학자들은 이제 곧 화산이 과거와 달리 크게 폭발하리란 결론을 내렸다.
2.2. 막장 주지사
루이 기욤 무테(Louis Guillaume Mouttet 1857.10.6 ~1902.5.8)
문제는 당시 마르티니크 주지사였던 루이 무테의 태도였다. 무테 주지사는 프랑스 제2제국에서 태어나 프랑스 여러 식민지 대사관 직원, 외교관을 거쳐 마르티니크 섬에 이주해 1898년 선거에서 주지사에 오른 인물로, 식민지 행정 경험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테 주지사는 화산 폭발에 대한 학자들의 경고와 주민 대피 권고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무시해버리고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전단지를 인쇄하여 주민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무테의 태도는 얼마 후인 5월 11일 열리는 주지사 선거 때문으로, 재선을 노리던 무테는 선거에 영향이 갈까봐 학자들의 경고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무테 주지사의 호언장담과 달리 시간이 지나자 폭발의 징조는 더욱 분명해졌다. 2일 금요일 오후 11시 30분에는 화산에서 짙은 검은 연기와 함께 시끄러운 폭음과 지진이 발생하며 바보라도 알아차릴 수준의 전조 증상이 나타났으나 무테 주지사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며 고집을 계속 부렸다. 지리학자들은 주지사의 이런 답없는 태도에 포기하고 자신들이라도 피신하고자 마음먹고 가족 및 지인에게 알리고 같이 피신하였다. 이튿날인 3일 토요일에는 전날의 화산 활동으로 검은 연기가 퍼져 나와 섬 주변 하늘이 온통 검게 보이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교회로 가서 두려움 속에 기도하고 일부는 포르드프랑스에 있는 주지사청으로 몰려와 정말 괜찮느냐고 항의하였다. 그런데도 무테는 주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를 외치며 걱정하지 말라고 헛소리나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런 헛소리를 사람들이 믿었는지 실질적인 대피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주지사처럼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주지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한편으로는 경제적 상황이 넉넉하지 않아 재산의 기반이 전부 있는 섬을 떠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대피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미리 섬을 떠난 사람들은 지리학자와 같이 폭발 가능성을 인지한 전문가들, 또는 재산에 걱정이 없는 소수 부유층 뿐이었다.
이틀 후인 5일, 독충과 뱀이 갑자기 흥분하여 섬 밖으로 나가려들면서 사람들이 여럿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전에는 바다가 100미터 가까이 물러났고, 오후에는 분화구 사면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화산이류(lahar)가 마을을 덮쳐서 럼 양조장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나며 화산 활동이 더욱 거세졌다. 이에 무테 주지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결심했고, 이틀이 지난 7일에 비서 조르주 뢰르(Georges L'Heurre)에게 주지사 권한을 넘긴 뒤 자문단을 만나기 위해 아내 엘렌과 함께 SS 토파즈호를 타고 포르드프랑스를 출발해 생피에르로 향했다.
그러나 정작 무테 본인은 회의장에 얼굴만 비추고 본회의에는 출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문단이라고 참가한 학자들이라고 해봐야 고등학교 선생이 최고 전문가 수준이었는데, 제대로 된 전문가인 지리학자들은 이미 화산이 터질 것을 경고한 뒤 진작에 피난을 가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학자들을 비롯해 군인, 기술자들로 구성된 자문단은 대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엇갈린 끝에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흐지부지한 결론을 내렸고, 현장을 일단 방문해보고 주민대피를 할지 말지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무테와 자문단 일행은 몽펠레 화산을 찾아가 보기로 했고, 다른 대표인 가스통 랑뒤스는 무테 주지사의 아내와 함께 생피에르시에 남아 추가적으로 조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2.3. 참극
결국 1902년 5월 8일이 밝았다. 이날은 예수 승천 대축일[1]이었지만, 이 섬에 찾아온 것은 축복이 아니라 아마겟돈이었다.무테와 조사단 일행은 오전 7시 40분경에 생피에르를 출발했고, 십수 분 뒤에 몽펠레 기슭의 마을인 프레쉬르(Prechur) 항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즈음인 7시 52분, 화산이 대폭발했다. 폭발과 함께 무려 섭씨 1,000도를 넘는 화산쇄설류가 물밀듯이 쏟아졌고, 압력도 강한 데다 속도도 빨랐다. 화산쇄설류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생피에르를 덮쳤고, 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게다가 럼 증류소와 럼 창고에 화산쇄설류가 부딪히며 폭발해 피해를 더 키웠다.
폭발 뒤 생피에르 시. 남아 있던 것은 몇 개의 건물 벽뿐이었고, 특히 예수 승천 대축일 미사가 막 시작되던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성당은 폐허가 되어버렸고 성당에 달았던 종은 녹고 비틀어져 반으로 굽혀진 채로 발견되어 지금도 남아있다.
생피에르 시 중심에 있던 극장도 폐허가 되었으며 지금도 폐허인 상태로 남아있다. 1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당시 많은 건물 및 난파선 잔해와 폐허는 그대로 남아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되었지만, 아직 지정되지 않았다.
시에 남아 있던 가스통 랑뒤스[2]와 아내 엘렌은 화산쇄설류에 휩쓸려 그대로 사망했다. 화산쇄설류가 바다까지 순식간에 닿았기 때문에 항구에 정박해 있던 17척의 배 가운데 살아남은 배는 아래 설명될 로라이마 호 1척에 불과했다. 나머지 배는 죄다 불타버렸고, 바다 위로 긴급히 탈출한 이들도 뜨거운 화산쇄설류로 인해 바닷물이 펄펄 끓어서 바다에서 삶아진 채 죽었다. 인근 마을에서 화산 폭발 징조에 놀라 생피에르시로 피난을 왔던 1,000명이 넘는 주민들도 끝내 재난을 피하지 못했다.
화산폭발에서 그나마 멀쩡히 며칠 동안 유일하게 남은 배 로라이마 호의 사진. 이 로라이마 호는 정말 행운이었다. 로라이마 호보다 더 멀리, 섬에서 680m 이상 떨어진 곳에 있던 타마야(Tamaya) 호도 화쇄류에 휘말려 불타서 침몰해 생존자가 1명도 없었다. 그저 섬에서 멀리 있어서 살아남았던 게 아니었다.
무테와 조사단 역시 재난을 피할 수 없었다. 화산쇄설류는 프레쉬르 마을 중심지를 살짝 비껴갔지만, 무테가 있는 항구를 덮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덮쳐오는 화쇄류에 배는 불타서 침몰했고, 무테를 포함한 승객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3]
그날 마르티니크 섬 주변 섬에서는 엄청난 화산연기와 함께 마르티니크 섬으로부터 모든 무전연락이 끊어졌음을 확인했다.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소리가 조용해져 섬으로 가본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화산 분화로 초토화된 생피에르는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으며, 살아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 뒤인 12일에서야 구조 및 상황 조사를 위하여 사람들이 왔으나 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로라이마 호 선원 사망자들처럼 섬 사람들도 대다수가 그야말로 잿더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4. 생존자
참사 이전에 미리 피해간 이들을 제외하고 이 참사를 겪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는 인구 약 3만 명에 달했던 생피에르 시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생존자인 뤼드게 실바리스.[4] 등에는 이 당시 입은 깊은 화상이 남았다. 실바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전날 도시에서 싸움을 벌여 교도소에 임시로 갇혔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한 막노동자였던 실바리스가 싸움으로 누군가를 찔러서 부상을 입혀 복역 중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본인의 주장대로라면 경범죄자에 불과한데 왜 창이 없는 지하 감방에 수감되었는지도 이상하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일부 서적에선 실바리스가 중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였기 때문에 가장 경비가 삼엄한 지하 감방에 있었다가 겨우 살아남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아침부터 도시 여기저기가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 안가 하늘이 무너질듯한 소리와 같이 교도소도 흔들렸고, 교도관들이나 재소자들도 비명지르고 뭐가 뭔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바리스도 떨고 있었는데 정말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것을 잠깐 보고 벽이 무너지는 기억을 마지막으로 기절해버렸다. 그러나 그 동안 다른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은 모조리 죽었으므로 정말 운이 좋았다. 사흘동안 그는 빗물과 오줌을 마셔가며 깔린 채로 겨우 버틸 수 있었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온 뒤 사면되었는데, 그에 대하여 얘기해 줄 만한 증인들도 이 화산폭발로 모조리 죽고 기록은 박살나서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상세한 판단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프랑스의 P. T. 바넘 서커스단에서 등에 깊게 남은 상처를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그 날의 참사를 회고하는 일로 벌어먹으며 1929년까지 살다가 파나마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본인이 화산폭발 유일한 생존자라는 과장광고를 해댔기는 하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적인 흑인 단독 쇼를 한 사람이 되었다. 실바리스는 성격이 욱하는 면이 있어서 섬에서 누굴 죽였을 거라는 설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28살 젊은 구두수선공인 레옹 콩페르레앙드르(Léon Compère-Léandre)는 아침부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봐야 했다. 생피에르 시 여기저기서 쥐와 뱀들이 출몰하여 바다로 마구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시로 가면서 사람들을 물기도 해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맞서기도 했지만 이제 누가 봐도 이 섬은 틀린 상태였다. 병원에서 의식을 찾은 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더불어 곳곳이 뜨거워지고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독한 연기가 도시를 덮쳐 사람들은 기침하면서 흐느적거리고 노약자는 쓰러져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지옥인가? 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두려움에 빠져 집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집보다는 일하던 구두가게가 있던 건물이 훨씬 튼튼하고 거기에는 지하에 먹을 것도 갖추고 튼튼한 지하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로 달아날까 생각도 했지만 사람들이 배로 올라가려고 마구 달려가던 터에 아무래도 어려워 보이기에 포기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 아버지를 불렀으나 아버지는 이미 침대에 누운 채로 질식하여 숨을 거둔 다음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무조건 달렸다. 달리면서 온 몸 곳곳에 화상을 입기 시작했다. 이젠 도시 곳곳에 구름이 사람을 덮쳤으며 비명 속에 쓰러져서 타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게가 있는 건물 지하로 들어가 문을 잠갔던 순간, 세상이 뒤집혀지는 소리랑 같이 기절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 아버지를 불렀으나 아버지는 이미 침대에 누운 채로 질식하여 숨을 거둔 다음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무조건 달렸다. 달리면서 온 몸 곳곳에 화상을 입기 시작했다. 이젠 도시 곳곳에 구름이 사람을 덮쳤으며 비명 속에 쓰러져서 타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게가 있는 건물 지하로 들어가 문을 잠갔던 순간, 세상이 뒤집혀지는 소리랑 같이 기절했다.
콩페르레앙드르는 나중에 구조될 때 의식을 차렸지만 자신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구조대원들이 증언하길 미친 사람처럼 "지옥이다! 지옥이다. 모든 게 불바다야! 하하하!!!"라고 웃어대고 날뛰어서 묶어서 진정시켜야 했다고 한다. 한참을 그러던 그는 다시 기절했고, 깨어난 다음에는 이성을 찾아서 얌전히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화상이 그리 크지 않아 의식을 차리고 정신적으로 안정되자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르 모른루주(Le Morne-Rouge)라는 가까운 섬마을로 가 살았는데 재수없게도 1902년 8월 30일 후술하는 대로 또 화산폭발을 겪고 만다. 다행히 여기서도 그는 살아남아서 2번이나 화산폭발에서 살아남아 유명세를 떨쳤지만 정작 당사자는 2번이나 이런 일을 당한 그는 PTSD 때문인지 사람을 피하고, 화산폭발에 대해서는 괴롭다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어느 서커스단이 거액을 주고 그에게도 화산폭발에서 2번이나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쇼를 해달라 제의하자 구두로 그 사람 얼굴을 치며 욕을 퍼붓고 나가라고 화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그는 섬에 계속 남아 포르드프랑스에서 살다가 나중에 생 피에르가 재건되자 거기로 이사가서 구두 수선 가게를 차려 평범하게 살다가 193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이 남아서 흑인 혼혈이었음이 알려진 뤼드게 실바리스와 달리 콩페르레앙드르는 백인인지 흑인인지조차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바닷가에서 600 m 떨어진 바다에 정박 중이던 영국 상선 로라이마 호는 천운으로 승무원 47명 중 선장과 항해사를 포함해 20명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배도 화산 폭발의 여파를 완벽히 피할 수 없어, 절반이 넘는 선원들이 즉사, 혹은 극심한 부상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갔다. 게다가 배도 큰 타격을 받아 구조대가 올 때까지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그저 사흘 동안 다친 몸을 추스리며 배 안에서 견딜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이 화산 폭발에서 살아남았던 배 로라이마(Roraima) 호에 타고 있던 목격자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불의 파도가 우리 위에 있었고, 번갯불처럼 머리 위를 지나갔습니다. 마치 수천 문의 대포를 한꺼번에 쏘는 소리 같았습니다.
섬에서 쿠르르르릉 소리가 나서 배에서 모두들 섬을 보니 엄청난 연기가 치솟았다. 선원 누군가가 사진기를 가지고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5] 선장은 놀라 항해사에게 어서 배를 출항시키라고 했는데 몇 초도 안가 검은 연기가 바다를 덮어 다른 배들을 불태우고 가라앉혔다. 우리 배도 갑판에 있던 반수 이상이 타죽어갔다. 나는 서둘러 배 안으로 들어와 큰 부상은 없었지만......아....잊혀지지 않는다. 나중에 갑판으로 나가보니 몸이 타들어가며 죽어가던 선원들 참상이 선하다. 차라리 즉사했으면 행운이었다. 살아있던 몇몇은 몸이 뜨겁다며 물을 달라고 했다. 나랑 몇몇이 물을 주다가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타버린 그들 몸에 기관지가 녹아서 물이 주르르르륵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기에 그들은 물을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을 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어도 그들은 물을 마실 수 없기에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했고 보다못해 몇몇 선원들이 원한다면 편하게 해준다고 하자 그들은 울부짖으며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우린 자살을 도운 셈이지만 그 현장을 보면 살인이란 말을 못 한다. 차라리 고통없이 영원히 눈감게 해주는 게 나았으니까.
로라이마 호 생존 승무원 제임스 테일러 증언
로라이마 호 생존 승무원 제임스 테일러 증언
나중에 이들도 구조되었으나, 로라이마 호는 심각하게 파손되었기에 결국 금세 완전 침몰해버렸다. 생존 선원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게 한 것을 스스로 인정했지만, 당시 현장을 보면 누가 봐도 회생 가능성이 없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준 것이기에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자들 PTSD에 시달려 선장인 패트릭 버크먼을 포함한 여럿이 뱃일을 그만둬야 했다.
또 이 참사에서 10살 소녀 아비브라 다 이프릴르(Havivra Da Ifrile)는 사고가 나던 날 아침에 엄마 심부름으로 이모네 가게로 가던 길에 화산폭발을 목격하고 겨우 오빠가 타고 다니던 보트를 잡아 탈출했고 불타버린 보트 조각을 잡고 바다를 떠돌다 해안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서 프랑스 순양함 쉬셰(Suchet) 호 해병들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그 외에 한 메이드 여성이 며칠 동안 살아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심한 화상을 입어 죽어가다가 며칠 뒤에 섬으로 온 수색팀에게 화산이 폭발했다는 증언만 겨우 남기고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오래 전 KBS1에서 자연재해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화산폭발에 대해 나올 때 이 사건도 나왔는데 거기선 위 2명만 언급하고 이프릴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적이 있다. 2명이 생몰연도와 이후 행적이 알려진 것과 달리 이프릴르에 대해서는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심지어, 그녀가 흑인 여성이라는 주장을 하는 해외 사이트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생몰연도도 자세히 없고, 프랑스어 사이트를 찾아봐도 구조되었다는 것만으로 행적이 끝이다.
생존자 뤼드게 실바리스 이야기는 2019년 12월 29일에 방영된 MBC 프로그램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2.5. 2차, 3차 폭발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참사가 바로 끝나지 않고 수 차례의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으로 몽펠레 화산이 분출한 뒤 프랑스 정부는 안전해졌다고 믿고 생 피에르 시를 재건하고자 피해 복구팀 및 프랑스 해군을 파병했는데, 보름도 안 된 1902년 5월 20일에 화산이 또 폭발해 복구팀 및 해군 장병 2천여 명이 죽었다.그리고 8월 30일에 화산은 또다시 대분화를 일으켜 1차 폭발 당시 달아났다가 이제 폭발이 없다고 여겨 돌아왔던 사람들이 많은 동쪽에 있던 작은 마을 르모른루주(Le Morne-Rouge)를 덮쳐 1,085명을 추가로 죽였다. 이때 1차 폭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zhdvpfm레앙드르 역시 2번이나 화산 폭발을 겪고 만 셈이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는 살았고 폭발 규모는 훨씬 적어서 2,000명 가까운 생존자가 있었다. 이러고 나서야 화산은 사람들이 펠레의 탑이라고 부른 화산 돔을 만들어냈는데 이 놀라운 화산 돔은 매우 높고 가파르게 솟구쳤으며 밤에 불꽃을 튀기다가 멈췄고 11달 동안 굳은 채로 남아서 사진도 남았는데 나중에 알아서 무너졌다.
이리하여 모두 3만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산폭발로 죽었다. 이 정도면 한국의 읍이나 행정동 하나 정도의 인구가 한 번에 날아간 것과 맞먹는다. 1883년에 있던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로 인한 사망자 3만 6천 명보단 약간 떨어지지만 그나마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은 엄청난 위력의 화산 폭발로 인하여 크라카타우 섬이 3분의 2 가량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덤으로 폭발로 인해 벌어진 파도까지 합쳐져 주변 다른 섬 항구를 덮쳐 벌어진 피해자 수를 다 합친 수인데, 몽펠레 화산폭발은 오로지 마르티니크 섬에서만 나온 사망자가 이 정도다. 근현대에 와서 화산폭발 사망자로 세계적인 사망자 기록을 기록했으며, 화산쇄설류 피해로 가장 대표적인 화산폭발이 되었다.
3. 이후
이 정도로 섬 곳곳으로 피해가 늘어나자 아직 피해를 입지 않은 다른 마르티니크 섬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차례로 섬을 떠났다. 아직도 이 섬에는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는데 이대로 있다가 또 언제 터질지 몰랐고 섬이 가라앉는다는 소문까지 나올 판국이었다. 그리고, 안전하리라 믿고 군대와 피해복구팀과 의료진을 보냈다가 2천여 명이나 사망한 프랑스 정부도 또 화산이 터질까 봐 더 이상 피해복구팀이나 의료진, 군대를 보내지 않고 섬 전체에 대피령을 내렸다. 다만 화산폭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죽는다 해도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며 배를 타고 섬 근처를 둘러보며 꾸준히 화산 사진을 찍고 관찰하며 기록을 남겼다.이 참극에 대하여 세계 언론의 집중보도가 이어졌고 미국이나 주변 나라들의 원조도 뒤따랐다. 더불어 이 화산폭발로 달라진 게 있으니 바로 현재의 파나마 운하였다. 원래 니카라과에서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할 계획도 있었지만 이 몽펠레 화산재가 도달할 위치 등 여러 모로 타격이 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 피해가 덜 미치는 파나마가 결정된 것이었다.
이후로도 작게 화산에서 연기가 나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곤 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번 연기와 폭발이 작게 일어났으며 1929년과 1932년에 작은 폭발이 일어나 섬 사람들은 또 터진 줄 알고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1932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몽펠레 화산은 다시 잠들었다.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이때 정도로 가공할 폭발을 또다시 일으키려면 적어도 몇만 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생피에르 시는 재건됐으나 또 언제 화산이 터질지 몰라서 겨우 인구 1,000명 수준 마을로 지어졌다. 재난 이전의 1/30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다. 이러다보니 중심도시로서의 입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2020년대에 이른 지금조차도 인구가 5천명 수준이먀, 행여나 또 모르니 화산이 폭발한다면 언제라도 피난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대비한다고 한다.
화산폭발 피해가 없던 남쪽의 포르드프랑스는 사고 이후 생피에르를 대신해 중심도시로 떠올라 마르티니크 섬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마르티니크 섬의 인구는 38만 명 가량인데 그 중 9만 명 정도가 포르 드 프랑스에서 거주한다. 생피에르가 몽펠레 산 바로 아래 자리한 것과 달리 포르 드 프랑스는 몽펠레 산 남쪽의 퐁 생드니 산이 포르 드 프랑스를 몽펠레로부터 방어해주고 있는 형태이며 파도를 막아주는 만(灣)또한 발달되어 있다. 다만 수심은 생피에르보다 얕다.
가라앉은 로라이마 호의 잔해는 1972년에 미셀 메트리라는 잠수부가 발견하였는데 바닷속 46m에 가라앉은 채로 지금도 그대로 있다. 다이버들이 즐겨찾는 곳이 되었다.
당시 마르티니크 섬에는 마르티니크 큰쌀쥐라는 설치류가 살았다.[6] 농사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사냥당하고, 인간에게 잡아먹히기도 했지만 당장의 멸종 징후는 없었는데 이 화산 폭발로 인해 한 큐에 멸종하고 말았다.
이레니스 물롱게(Irénise Moulonguet, 1900~2013)라는 마르티니크 출신 여성은 2살 때 고향 마을 근처에 있던 펠레 산이 폭발했을 때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그녀는 화산 폭발로부터 무려 111년 후인 2013년 5월 28일 향년 112세를 일기로 사망하며 몽펠레 화산폭발을 목격한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그녀는 21세기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19세기 출생 프랑스인이었으며, 특정 대형 사건을 직접적으로 겪은 인물 중 해당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죽을 때까지 걸린 기간이 가장 오래 걸린 사람이기도 하다.
[1] 가톨릭에서 예수가 부활한 후 40일째 되는 날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복음서의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 원래는 부활절을 1일로 삼아 정확히 40일째가 되는 부활 후 6번째 목요일에 지내야 하지만, 한국처럼 가톨릭 전통이 없는 나라에선 신자들의 편의상 부활 후 7번째 일요일에 기념한다. 몽펠레 화산폭발이 일어난 1902년에는 3월 30일이 부활절이었고, 40일째 되는 날이 5월 8일이었다.[2] 타버린 시체만 발견되어 나중에서야 시계와 유품으로 겨우 신원이 파악됐다.[3] 이 사고로 부모를 죄다 잃고 만 무테의 자녀들은 이후 외가로 보내져 자랐다고 한다. 참고로 무테가 거주하는 주지사 관저와 주지사청은 생피에르가 아닌 포르드프랑스에 있어 화산쇄설류를 피할 수 있었다.[4] 이름이 루이 오귀스트 시파리스(Louis-Auguste Cyparis)라고 적힌 기록도 있다.[5] 이 항목 맨 위 사진을 비롯하여 화산폭발 당시 사진들이 바로 이 때 찍힌 거다.[6] 기록에 고양이만큼 크고 다른 섬으로 건너갈 정도는 아니지만 천적을 만나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섬의 다른 곳으로 올라올 정도로 수영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