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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 아내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 |||
관련 인물 | 블라디미르 레닌 · 보리스 옐친 | |||
평가 | 평가 | |||
사건 · 사고 |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 |||
관련 전쟁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 | |||
정책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
기타 | 전략무기감축협정 · 주권국가연맹 | |||
사회주의 | }}}}}}}}} |
1. 어린 시절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는 1931년 캅카스 산맥 인근에 위치한 스타브로폴 프리볼노예에서 농부였던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와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사이에서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당시에 스타브로폴 지방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고르바초프의 외가는 우크라이나계 카자크와 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다.#공산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출신성분은 농민으로서 사회적 계층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표방하는 소련에서 그의 출세는 아무 걸림돌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 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농장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기도 했다.
2. 정치인
평소 근면하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당시 소련 내 엘리트들이 진학하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해 1955년 법학 학위를 받았다. 재학 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로써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 스타브로폴 지구당 서기 시절 남들보다 매우 적극적으로 중앙에서 내려온 금주 조치를 실천한 까닭에 '광천수 서기'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1] 서기 재임 시절 휴양 차 스타브로폴 지역을 방문한 고위 당관료들을 성실히 맞이하는 모습이 당시 KGB 주석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다른 관리들과 달리 고르바초프가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모습과 더불어 하루에 10시간 정도 근무를 불평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고르바초프를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이렇게 고르바초프는 농업문제에 대해서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에게 직언하는 등 강단이 있는 간부로 여겨졌고, 1978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에 선출,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 되었다. 서기국 책임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도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여 바로 정치국 위원 자리를 주려고 했고 안드로포프도 그를 아꼈다. 반면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를 전임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인맥으로 생각하여 견제했다.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길 바랬으나 1984년 일찍 사망하면서 원로 정치인이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승계한다. 당시 체르넨코는 차후 서기장에 오를 수도 있는 유력자였던 고르바초프를 견제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를 정치국에서 해임하려고 했으나,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었고, 서기장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던 국방장관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하였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평소 앓던 지병으로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새로운 서기장 후보를 두고 고심했다. 당시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국과 군비경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비 소모, 경기침체 등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산재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치국은 이전 전임자들과 달리 장기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면서 동시에 체제 개혁을 주도할 지도자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국에는 수 십년 동안 소련의 외교를 이끈 안드레이 그로미코등 오랜 시간 동안 소련 정치계를 이끌던 원로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기 전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하는 해괴한 일들을 지켜본 공산당 지도부는 또다시 지도자를 맡은 원로 정치인이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노환으로 사망하는 일만큼은 피하고자 했기에 당시 정치국원 중 가장 젊으면서도[2] 평판이 좋은 신진인사에 속했던 고르바초프가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그리고 1985년 3월 11일, 정치국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신임 서기장에 선출했다.
3. 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다. 소련 공산당 역시 이전 프라하의 봄 당시 추진되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비슷하게, 공산당 내부에서 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다.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정책은 여러가지 문제를 촉발시켰다.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했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정치체제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돼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막장으로 몰아갔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 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 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혼란이 닥쳤던 것이다. 사실 이전, 그러니까 브레즈네프 집권 이전에도 코시긴이 비슷한 경제개혁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는 이와 비슷한 폭망이었다. 즉 계획경제에서 갑자기 자율성과 경쟁체제를 도입한 결과는 굉장히 파멸적이었다.
원래 의도는 보조금을 줄이고 고급 상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일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막상 경영 자율화를 시켰더니 국영기업들이 국영상점에 싼값에 내놓아야 할 물건을 암시장에 몇배 이상의 가격으로 비싸게 팔면서 수십년간 (강제적으로) 안정화시켜 놓았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통체계가 난잡해지면서 이전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될 상품을 (값싸게) 사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으며 줄을 서지 않으려면 시장에서 바가지를 써서 상품을 구해야했다.
또한 물가상승분을 벌충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통화량 증대로 은행에 예금은 넘쳐났고, 구매력도 크게 올랐지만 막상 돈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생산 부문 투자는 그에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줄은 더욱 길어지고 지하경제는 더욱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에는 물자부족 문제가 주로 소도시에 집중된 문제였기 때문에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키이우, 민스크 등의 주요 대도시 지역으로 가면 생필품이나 물자들을 값싸게 구할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 중후반기 들어서는 대도시에서 조차도 값싸게 물자를 구하기 힘들어져서 시장에서 비싼 돈을 주거나 줄을 길게 서야 했으며, 고르바초프 후반기에는 배급제가 다시 실시되는 등 계획경제체제의 마비가 뚜렷해지자, 생활경제는 점차 악화되었다.
처음부터 경제개혁이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라서 1988년에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5.5%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동구권 및 코메콘 붕괴를 기점으로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에 대조국전쟁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경제 불안정과 더불어 소련 루블의 암시장 환율은 급속히 상승했다.
또한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글라스노스트를 계기로 그동안 소련이 억눌러 왔던 다양한 정치적 요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날로 증가하는 인민들의 개혁요구를 수용하는데 벅차기 시작했다.[3]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가 하면, 연방 구성국들의 독립이 임박하자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에서도 나고르노-카라바흐나 남오세티아, 압하지아 및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주류민족과 소수민족 사이 유혈사태를 동반한 민족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1991년 고르바초프는 날로 팽창하는 지하경제와 높아져 가는 물가상승률을 잡으려고 1991년 1월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의 화폐개혁을 시행했다. 하지만 사전에 화폐개혁 정보를 입수한 당간부 등 노멘클라투라 계층은 미리 대비책을 마련한 뒤라 실질적인 효과는 크지 않았다. 여기에 뒤이은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는 허수아비가 되고 각 산하 공화국들은 세금을 중앙정부로 납부하지 않고, 각 공화국별로 연계가 되었던 산업시설간의 연계도 끊어지기 시작하며 생필품 공급이 급속히 줄기 시작하며 소련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내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결국 소련은 1991년 12월 해체된다.
4. 퇴임 후
2007년 루이 비통 광고에 출연한 고르바초프 (76세)
이후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보리스 옐친이 당선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0.5%를 기록했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명예고문 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퇴임 후 보리스 옐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 경제와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고 연금도 제때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 대우가 형편 없었다. 나름대로 전직 대통령이라는 고르바초프도 연금 지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일반 연금 생활자들은 말도 할 것도 없어서 몇 달씩 연금이 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는 외국 대학이나 기관의 강연료도 수입이었는데[4] 고르바초프는 루이 비통, 피자헛 등 외국 기업의 CF에 출연하여 생활비를 벌 정도였다. 어느 날, 자신의 매달 연금이 얼마일지 궁금해져 은행서 1달치 연금을 $로 환전했더니 불과 몇십 센트에 불과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탄하기도 했다.
1993년 4월 1일에 드미트리 무라토프 등 진보성향 언론인들에게 자금 후원을 해 노바야 가제타를 창간했으며, 지금도 10%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 언론사에 들어간 기자들은 정말 육체적 목숨을 걸고 일하고, 언론사에서 기자들에게 개인무장용 권총까지 지급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항목에서 알다시피, 푸틴은 개인이 자신을 욕하는 건 쿨하게 관심도 없다는 듯 넘기지만, 기자와 언론사 레벨로 올라가면 해당 언론사는 탄압당하고, 기자들은 의문사를 당하거나 실종당하는 경우가 많다.
1996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의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고, 소련 부활을 내세운 겐나디 주가노프가 1차 투표에서 옐친과 비슷한 득표율(옐친 35%, 주가노프 32%)을 받은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당대 평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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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가끔씩 푸틴을 치켜세우고, 푸틴도 나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라고 훈장도 달아주고 고르바초프의 말에 상당히 많이 대꾸하는 거 보면 서로 애증의 관계다. 반(反) 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 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 소속 국가두마 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고발한 적도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2014년부터는 갑자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러시아인이라면 당연한 것인데,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행정편의로 우크라이나에 간 것인데 이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상, 다시 러시아에 와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공통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진한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푸대접을 받았던 옐친 시대와는 달리 푸틴 집권 이후에는 대우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2008년 10월 국제환경포럼, 2009년 5월 세계평화의 종 공원 준공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두 행사 모두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2009년 5월에는 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와 함께 참석했다.
2011년 3월에는 러시아 최고 등급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받았다. 누가봐도 그냥 요식행위로 준 게 뻔하다.
2011년 8월에는 푸틴 정권이 소련 공산당의 다운그레이드판이며 구태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푸틴을 옐친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12월에는 148%에 대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푸틴은 대통령 2번, 총리 1번 했으면 충분하다며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러시아의 정치 불안이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6년 5월 23일에 크림 합병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입국을 금지한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던 만큼, 현재는 주로 사민주의 계열 군소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당수직을 역임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후에 정의 러시아당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에 합류하는 대신 사회민주연대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2016년 4월에 방한해 제주포럼에 참석했다.
2016년 6월에는 언론에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을 미국 스파이로 평가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였다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냉소만 받았다. 기사
2016년 10월 10일. AFP와의 인터뷰에서 심해져 가는 러시아와 미국간의 갈등을 "세계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갈등을 멈추고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7년 1월 27일 핵전쟁 위험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미-러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7년 6월, 나토의 확대를 두고 푸틴과 설전을 벌였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순진하게 나토 확장 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토가 확장되어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고 주장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푸틴 시절에 확장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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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6세의 고르바초프.
2017년 10월, 자신의 서기장, 대통령 시절 사건과 기억을 담아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라는 제목의 새 책을 발표했다.#
책 출간행사에서 한 시민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는 후문. 중국의 경제 모델을 호평한 적도 있다.
2019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태양 아래>, <푸틴의 증인들>로 유명한 반(反) 푸틴 영화감독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촬영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 이건 2021년에 <고르바초프. 헤븐(Gorbachev. Heaven)>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상영됐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만스키의 작품 자체가 배급금지를 먹었다.
9월에는 대통령 3번, 총리 1번이면 충분하다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제 물러나야 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민주적인 선거로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하는 등 또다시 푸틴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간 정치인인데다가, 고르바초프 본인의 영향력도 거의 없는지라 딱히 푸틴이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2021년에는 2016년에 이어 또 제주포럼에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참석했다.#
2021년 8월 17일, RI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탈출하는 미군과 아프간인의 참상에 대해,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며, 패배를 좀 더 일찍 받아들여야 했다고 평했다.#
다음 날인 8월 18일, 소련 보수파 쿠데타 30주년을 앞두고 도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정권의 독재적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고 또다시 푸틴을 건드렸으며, 그럼에도 본인은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에 어려움, 오류, 좌절이 있더라도 러시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2022년 1월 13일에 소련의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군사 작전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위기가 고조되자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부시가 한 약속을 깬 NATO와 미국을 비난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본인은 공개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 재단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첨예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호 존중과 이익에 입각한 협상과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라며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서방언론들은 러시아의 반푸틴 성향 언론인인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를 인용하여, 고르바초프는 베네딕토프한테 푸틴은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들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5. 사망
모스크바 현지 시각 기준으로 2022년 8월 30일 역대 소련 지도자들과 현재 러시아 대통령이 이용하는 모스크바 중앙병원에서 향년 91세로 사망했다.역대 소련 최고지도자들이 묻힌 크렘린 벽 묘지가 아니라 니키타 흐루쇼프와 보리스 옐친이 묻힌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크렘린 대변인의 발표와 같이 장례는 완전한 국장은 아니나 의장대와 정부 차원의 지원 기구 설치 등 국장적인 요소가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진행되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등의 전임 소련 최고 지도자들의 장례식이 거행된 조합회관(Дом союзов) 콜로니 홀에서 9월 3일 거행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추모를 하였으며, 장례식 당일이 아닌 9월 1일 모스크바 중앙 임상 병원에 방문 및 조문해 붉은 장미를 헌화한 뒤 관에 손을 얹고 있다가 성호를 긋고 자리를 떠났다. 장례식에는 일정상 불참했다.
완전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소련의 최고지도자들 중에는 니키타 흐루쇼프도 있다. 그는 실각 후에 격리되어 지내다 1971년 사망하였다.
일반 방문객들의 조문은 3시간 30분 가량 진행되었으며 가디언지에 따르면 조문한 러시아의 자유주의 계열 시민들은 고르바초프를 영웅이라고 칭송하였고, 수천 명의 인파가 고르바초프를 조문하기 위해서 조합회관에 방문하였다. 장례식 당일 모스크바 도심의 경비는 삼엄했는데 무장한 병력들과 차량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 한편, 발트 3국은 독립 시도를 유혈 진압했던 것을 이유로 추모를 가지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애도를 표했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장례식에 직접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시절 소련과 수교를 맺었던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조전을 보냈다. 윤 대통령은 조전을 통해 "고인은 대립과 갈등의 냉전 시대를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를 끌어낸 지도자이자, 한국과 러시아 간 우호, 협력 관계의 확고한 틀을 마련한 선구자였다"고 평가했다.
소련 최후의 지도자인 고르바초프가 사망함으로써 소련의 최고 지도자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냉전을 종식시키고 탈냉전 시대를 개막시켰으나 세계가 다시 신냉전으로 돌입하는 것을 보고 잠들게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면서 러시아와 서방간의 관계가 소련 시절 그 이상으로 악화되는걸 보게 된다.
또한 고르바초프 사망 후 약 열흘이 지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석 달 이후 장쩌민 전 중국 주석이 사망하면서 고르바초프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주요국 지도자들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1] 술을 멀리한 덕분에 장수에 도움이 된 듯. 고르바초프와 동갑인 보리스 옐친은 엄청난 술고래였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2007년 세상을 떠났다.[2] 1985년 당시 54세. 참고로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던 그로미코가 76세였다.[3] 고르바초프 이전 소련 정치인들이 바보라서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소련은 국가 특성상 매우 복잡하고 많은 다민족들이 얽힌 나라고, 특히 소련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어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큰 발트 3국이나 캅카스 3국 등의 경우 소련에서의 독립을 노렸다. 즉 소련 체제 특성상 언론의 자유 보장과 정치적 자유 허용이 소련 해체로 연결될 것을 두려워했다. 어찌보면 고르바초프가 너무 순진했다고 할수도 있다.[4]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이러한 강연료로 떼돈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