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7:58:48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1. 개요2. 역사3. 의의4. 이후5. 관련 문서

1. 개요

체코어: Socialismus s lidskou tváří
슬로바키아어: Socializmus s ľudskou tvárou
사회주의는 단순히 착취 계급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도 인간적으로 더 나은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야 한다.
1968년 4월 발표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기본계획 중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내세운 자유화 정책의 표어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주로 1968년 둡체크가 주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민주화 정책을 가리킨다. 정치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글라스노스트 정책이나 중국민주화 운동민주사회주의 운동 또는 개혁을 일컫기도 한다.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민주국가가 수립되었지만 1947년 2월, 공산당이 의회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공산당 정권은 1960년대 소련식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미 2차대전 이전부터 중공업이 발전해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1]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식 경제정책은 생각보다 저조한 효과를 내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많은 불만을 낳았다. 1960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연방제에 대한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아 중앙정부에 대한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이 높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 1월 5일, 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둡체크가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 1904년 12월 10일 ~ 1975년 1월 28일)를 대신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시 개혁파였던 그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총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출신 배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소련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만큼 공산당에서 소련 출신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 때문에 처음 둡체크가 제1서기에 선출되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단순히 내부인사교체라는 회의적인 여론이 높았다. (출처: 동유럽의 민주화,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4년)

둡체크는 당시 국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언론, 출판,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완화시켰고 공산당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함으로써 프라하의 봄을 열었다. 특히 이 시기에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던 요제프 스므르코프스키(Josef Smrkovský, 1911년 2월 26일 ~ 1974년 2월 15일)[2], 즈데네크 믈리나르시(Zdeněk Mlynář, 1930년 6월 22일 ~ 1997년 4월 15일)[3], 구스타우 후사크(Gustáv Husák, 1913년 1월 10일 ~ 1991년 11월 18일)[4] 등의 저명인사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아니라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에서 적대계급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 끝에 마침내 일소되었고 새로운 단계의 사회주의 국가인 전인민국가가 출현했다는 나름의 이념적 기반이 있었다.[5] 적대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계급 문제가 일소된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야당을 허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개혁파들이 절대로 반공주의자나 서구 간첩이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둡체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야당의 결성을 묵인함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다당제를 허용하고 비밀경찰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당시 체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설립했으며 프라하에서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토론이나 출판이 활발하게 늘어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가 추진한 개혁에 헝가리 서기장이었던 카다르 야노시 등은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소련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필두로 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이 자국 내 지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고있던 보수파들은 비밀리에 소련에 무력개입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군은 다른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군대와 함께 1968년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해 둡체크, 루드비크 스보보다(Ludvík Svoboda, 1895년 11월 25일 ~ 1979년 9월 20일) 등 개혁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소련군의 개입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공산당 서기장이 된 구스타우 후사크가 정상화 정책을 펼치면서 둡체크의 개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의의

비록 실패했지만 사회주의를 보다 더 민주적으로 바꾸려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은 당시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현실사회주의를 개혁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현실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서구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큰 인상을 주었다. 이후 서구 좌파는 정치적으로 소련식 사회주의를 벗어나 마오주의, 티토주의, 민주사회주의, 유럽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6]

체코슬로바키아의 이러한 개혁은 사회주의권에도 영향을 미쳐 고르바초프의 집권 당시 글라스노스트 정책과 1989년 동유럽 혁명 이후 개혁파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에서는 1989년 11월 26일 소련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프라우다지 논설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무력진압을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소련에서 재평가받게 되었다. 출처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체코슬로바키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서기장이 된 1968년부터 사회 풍조나 문화계 검열이 좀 완화되었고 밀란 쿤데라와 보후밀 흐라발도 이런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등장했으며 체코 영화계 역시 폴란드의 폴란드 학파를 이어받아 뉴웨이브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산권 국가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자유분방한 스타일과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체코 뉴웨이브의 종언 역시 둡체크가 물러나고 정상화 체제에 들어서면서부터다.

4. 이후

1989년 동유럽 혁명(벨벳 혁명)으로 체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6월 정식으로 자유 선거가 실시됨에 따라 체코의 공산주의 독재 체제는 막을 내린다. 한편 21년 전 쫓겨났던 알렉산드르 둡체크는 벨벳 혁명에 동참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복귀한다.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도입되었고, 새 정부 구성 과정에서 벨벳 이혼이라 불리는 합의를 통해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로 분리된다. 1992년 러시아 이즈베스티야지를 통해 당시 간부회 후보였던 안토닌 카팍이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정치적 위상은 완전히 추락해 버렸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다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활동만 금지되었을 뿐이지 사실 1990년대 이후에도 체코에서 보헤미아 모라바 공산당이 활동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나치 독일은 강제로 병합한 체코의 중화학공업 시설을 2차대전 내내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2] 둡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다.[3]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가 소련군 개입 후 스웨덴으로 망명한다.[4]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라하의 봄이 진압된 이후 서기장이 되어 둡체크의 개혁을 되돌리는 정상화 정책을 펼친다.[5] 둡체크는 소련 유학파였는데, 이 전인민국가론은 바로 1961년 소련에서 등장하면서 중소결렬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6] 앞서 언급된 '서구 좌파'란 동구권에 대한 연대 및 동지의식이 있었던 서유럽의 공산주의 계열을 가리킨다. 기존의 서구 좌파들 중 상당수가 소련 및 동구권을 마냥 좋게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는 이미 서구권에 있었던 이념이기도 하고. 즉,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구권의 공산주의 계열이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 진영과 결별하게 된다. 그렇게 서구권에서 탄생한 새로운 공산주의의 기조가 바로 유럽공산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