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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1949년 이후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다당제의 허울을 쓰고 일당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대체로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 성향을 띤다.2. 역사
중화민국 시절부터 훈정에 반대하고 민주적인 다당제 정부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이 문서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한정하여 설명한다.1953년 중국 공산당은 토지의 개별 소유를 금지하고 집단농장을 설치했다. 이는 농민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반대하는 농민이 많았는데 공산당의 정치인인 량슈밍이 마오쩌둥의 정책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서 반기를 들었다. 위키백과에선 이 사건을 중국의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으로 잡고 있다.
1976년에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천안문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며 4인방과 문화대혁명 등을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1차 천안문 사태로 알려져 있다.
문화대혁명이 지나가고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이른바 자유화가 짧게나마 이뤄진다. 이는 베이징의 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민주벽(民主墙)이라 하여, 베이징 시청구의 벽돌에 사람들이 대자보를 붙이며 중국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항의하였다. 초기의 정치적 선언들은 사인방이나 화궈펑 등을 비난하는 것이어서 덩샤오핑은 묵인하였으나, 점차 덩샤오핑을 비난하는 문건들도 붙게 되었다. 당시 방중 중이었던 일본 민사당 대표들에게 덩샤오핑은 헌법에 따라 이런 활동이 합법이라고 말하였다.
중국 공산당 내에도 1980년대 들어서 공산권들이 다소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자,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과 같이 이런 분위기에 소극적으로나마 동조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개혁개방이 10년을 넘어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은 대학생들이 등장하자 이들은 자유화와 민주화를 주장하였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중국의 경제는 점차 성장하고 있었고 생활 환경도 개선되었으나, 부패가 만연하였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체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학생 운동가들은 이런 정치적 상황에 변혁을 시도했고, 1989년에 들어서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강력해졌다. 민주화 운동가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였고 정부에 변화를 요구하였다. 공산권에서도 자유화 분위기가 일어났기 때문에, 낙관적으로 이 상황을 예측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강경 진압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참고.
이후 중국 정부는 탄압 일변도로 노선을 전환하였고, 공산당 내부에서도 민주화 운동에 동조하거나 온정적이었던 인물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당장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의 유족회를 이끌던 딩즈린 본인도 공산당원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 자유화와 민주화 운동은 극도로 탄압되었고[1], 검열 때문에 3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의 새로운 세대들은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잘 알지 못 하거나 공산당의 공식적인 논평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다만 공산당이 공동부유를 추진하는 등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한 국민들의 욕구 충족에는 나름 신경을 쓰고 있어 경제난이 반정부 활동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 있어 민주화 운동로 가기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2]
1990년대에 빌 클린턴의 방중에 맞춰, 중국민주당이 결성되기도 하였으나 해산되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는 홍콩이 반환되고, 덩샤오핑이 사망하는 등 다소 지난 몇 년간 보다 분위기가 누그러진 편이었기에 다시금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곧 중국 정부는 일방적인 탄압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민주화 운동가들은 징역을 받고 갇혔다가 의료 가석방 형식으로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고 있다.
2011년에 아랍의 봄과 맞물려, 일부 활동가들이 중국 각지에서 민주화 시위 중국 재스민 혁명을 벌였으나 35명의 활동가와 변호사가 체포되는 결과로 끝났다.
2022년에는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시진핑의 3연임이 예상되자, 베이징에서 이를 반대하여 투표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붙는 일이 있었다. #
不要核酸要吃饭,不要封控要自由,不要谎言要尊严
不要文革要改革,不要领袖要选票,不做奴才做公民
PCR 말고 밥이 필요하다. 봉쇄 말고 자유를 원한다. 거짓말 말고 존엄이 필요하다.
문화대혁명 말고 개혁이 필요하다. 지도자 말고 투표 용지가 필요하다. 노예가 아니라 시민이 되자.
不要文革要改革,不要领袖要选票,不做奴才做公民
PCR 말고 밥이 필요하다. 봉쇄 말고 자유를 원한다. 거짓말 말고 존엄이 필요하다.
문화대혁명 말고 개혁이 필요하다. 지도자 말고 투표 용지가 필요하다. 노예가 아니라 시민이 되자.
3. 기타
한국의 인터넷에선 이들을 반중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망명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 많다 보니[3], 중국 공산당과 중국을 동일시하는 한국인들 입장에선 다소 그런 경향이 있으나, 이들은 반당(反黨)은 말이 되어도 반중이라 보기는 어렵다.[4]대만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세력들과 같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5] 대만의 독자화를 바라는 타이완 독립운동 성향이 주류인 대만의 활동가들과는 차이가 꽤 크다. 즉, 중국에서 이들이 집권한 상태에서 대만에서 범록연맹이 집권한다면 통일문제를 둘러싼 양안간의 대립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대로 대만에서 범람연맹이 집권한다면 양안통일이 급속도로 추진되거나, 양안통일의 진행과 그 방식을 두고 민주화된 중국이 주도하는 통일도 수용할 수 있다는 범람연맹 온건파와 중화민국 위주의 통일을 강하게 주장하는 범람연맹 강경파, 대만 독립론자 사이의 정치적 다툼이 격화될 수도 있다.
홍콩 민주화 운동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한다. 사실 중국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그나마 자유로운 홍콩으로 옮겨 갔는데[6] 2010년대 말부터 홍콩의 민주주의 또한 종말을 맞으면서 활동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반역자로 몰려 비참하게 죽거나, 모든 걸 포기하고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4. 중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 인물/단체
4.1. 민주화 운동가
위키백과 출처- 구이
- 궈궈팅
- 궈꽌
- 니위란
- 딩즈린
- 란윈페이
- 류샤오보
- 류샨빈
- 리다퉁
- 리훙콴
- 리왕양
- 마오위스
- 샹리
- 성쉐
- 쉬원리
- 아이웨이웨이
- 완룬난
- 왕단
- 왕빙장
- 왕완싱
- 왕유차이
- 왕자오스
- 우양위
- 우젠민
- 우얼카이시 둬라이티
- 위에신
- 웨이징성: 드물게 홍위병 출신의 민주화 운동가이다.
- 자오쯔양: 중국 공산당의 정치인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에게 온정적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한 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 자오창칭
- 차이링
- 천광청
- 팡리즈
- 탕바이차오
- 탱크맨
- 텅뱌오
- 황치
- 후야오방: 중국 공산당 소속으로 정치개혁 차원에서 다당제까지 검토하였다가 실각하였다. 그의 사망으로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몰려들게 되었고, 이게 천안문 6.4 항쟁으로 가게 된다.
- 후지아
민주화 운동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 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탈권위 활동가로는 천추스, 쉬샤오둥 같은 인물이 있다.
4.2. 민주화 운동 관련 단체
[1] 주로 써먹은 수법은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중형을 내린 뒤, 의료적인 치료를 이유로 해외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면 망명의 형태가 되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 하게 되었다.[2] 그리고 민주주의적 기반과 국민들의 책임의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국가에서는 섣부른 민주화는 곧 포퓰리즘과 재정파탄으로 연결되어 보통 그리스 경제위기 같은 재앙으로 이어지고, 최악의 경우 베네수엘라 같은 지옥도를 연출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과두정체제가 유리한 측면도 있다.[3] 천멸중공 같은 표어가 대표적이다.[4] 쉽게 생각해서, 전두환에 반대하면서 들고 일어난 한국인들을 반-전두환으로 간주할 수는 있지만 자국혐오자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5] 현재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일국양제 통일 대신 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주장한다는 차이는 있다.[6] 홍콩의 언론들은 꾸준히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추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