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 소련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미하일 안 Mikhail Ivanovich An | |
본명 |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Ан | |
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52년 2월 19일 | |
소련 우즈베크 SSR 타슈켄트주 오르타키르치크 구[1] | ||
사망 | 1979년 8월 11일 (향년 27세) | |
소련 우크라이나 SSR 드니프로제르진시크[2] | ||
신체 | 키 178cm | |
포지션 | 중앙 미드필더[3]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폴리토트델 타슈켄트 (1968~1969)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FK (1970~1979) |
국가대표 | 2경기 0골(소련 /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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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축구를 이끌 천재
1974년 올레흐 블로힌과 더불어 소련 축구선수 33인에 선정되면서 달린 평가
1974년 올레흐 블로힌과 더불어 소련 축구선수 33인에 선정되면서 달린 평가
1970년대 소련 축구계에서 소수민족인 고려인 신분으로 U-23 대표팀 주장까지 맡았던 유망주였으나 불운의 항공사고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한국계 축구선수였다. 국내에는 김현회 기자의 2013년 칼럼을 통해 처음 알려졌고, 이후 2020년 한국계 미국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브라이언 송의 작품 미샤를 통해 다시 한번 재조명되었다.
소련 대중음악의 불세출의 스타 빅토르 최와 더불어 소련 사회에서 고려인들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었다.
2. 유년 시절
1952년 미하일 안은 우즈베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타슈켄트에서 한국계 3세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에 오게 된 한국인으로, 러시아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고 한국어만 평생 사용하셨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미하일 안은 그의 형 드미트리 안과 같이 한국어를 자주 사용하는 집안 문화로 인해 한국어를 곧잘 구사했다고 알려져있다. [4]어릴 때 부터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났던 미하일 안은 형인 드미트리 안과 같이 지역 어린이 축구팀인 콜호즈 어린이 축구단에 등록했고,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소련 축구 유망주들만 모인다는 티토프 스포츠 전문학교에 들어가게 되며 본격적으로 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3. 폴리토트델 타슈켄트
1968년 미하일 안은 당시 소련 2부리그에 속해있던 지역 클럽 폴리토트델 타슈켄트에 입단하며 자신의 첫 성인무대 경력을 시작한다. 2년간 이 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타슈켄트 지역의 최강자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에서 영입 제안을 하게 되고 미하일 안은 이적을 수락하며 소비에트 톱 리그에 데뷔하게 된다.4.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FK
1970 시즌부터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에 합류한 미하일 안은, 입단 초기에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당하며 벤치자원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흐타코르가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게 되고 이 대회에서 미하일 안의 플레이를 본 여러 동유럽 구단들이 미하일 안에게 영입 제의를 하며 상황은 반전된다. 이 때 미하일의 일종의 에이전트 역할을 해주던 형 드미트리는 구단에 1군 대우를 제대로 안해준다면 바로 이적 제안이 오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명문 팀으로 동생을 이적시키겠다고 선전포고를 했고, 구단은 그제서야 미하일 안을 잔류시키기 위해 동등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고 한다.미하일 안의 성장세는 빨라서 이듬해부터 팀의 주장을 맡기 시작했고, 1972년 팀이 소련 2부리그로 강등된 시즌부터 핵심선수로 거듭나며 팀의 2년만의 1부리그 복귀를 견인했다. 1부리그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1974년에는 중앙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리그 29경기 11골을 넣는 괴력을 보이며 리그 득점 공동 6위에 올랐고 그 해 올레흐 블로힌과 함께 소련 연방 축구선수 33인[5]으로 고려인으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팀은 1975년 다시 한 번 강등의 쓴 맛을 봤지만 1977년 다시 한 번 톱 리그 승격을 이끌었고, 1978년 팀의 안정적 잔류를 이끌며 다시 한 번 소련 연방 축구선수 33인에 이름을 올렸다. 1979년 8월까지 그는 파흐타코르 소속으로 리그 통산 233경기 50골을 기록하며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5. 드니프로제르진시크 상공 공중충돌 사고
자세한 내용은 드니프로제르진시크 상공 공중충돌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1979년 8월 19일,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선수단은 소비에트 톱 리그 디나모 민스크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민스크로 향하는 아에로플로트 투폴레프 Tu-134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지만 오후 1시 35분, 이 비행기가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상공에서 타 비행기와 공중 충돌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파흐타코르 선수단 전원은 즉시 사망했고, 이 중에는 미하일 안도 있었다. 그렇게 26세의 젊은 나이에 미하일 안은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심지어 이 죽음이 더 허망한 이유는, 그가 당시 부상 중에 있어 디나모 민스크전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팀의 주장이라는 이유로 선수단의 멘탈을 잡아주기 위해 원정길에 자청하여 동행했다 이런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고 이후 8월 한 달 동안 열린 모든 소련 내 축구 경기에서 경기 시작 전 희생자들을 기리는 묵념을 했고, 파흐타코르를 제외한 나머지 리그 17팀이 한 팀 당 최대 세 명의 선수를 파흐타코르에 지원해주는 특별 드래프트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또한 파흐타코르는 1979 시즌부터 1982 시즌까지 강등 대상에서 면제되었다.
6. 국가대표 경력
1968년, 17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소련 청소년 축구 대표팀에 발탁되어 대표팀 경력을 시작했다. 소련에서 고려인이 축구 대표 선수로 발탁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고, 발탁 자체로 이슈가 많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청대에서 미하일 안은 주장직을 맡아 활동하는 등 리더십도 두드러졌다고 한다.이후 파흐타코르의 핵심 선수가 되어 1976년 UEFA U-23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소련 U-23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미하일 안은 소련 대표팀 주축 선수로 활약했고, 소련은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제압하며 사상 첫 우승을 기록했다.
연령별 대표팀에서 연이은 두각을 나타냈기에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 데뷔는 시간 문제였고, 1978년 9월 6일 유로 1980을 준비하는 소련 대표팀 멤버로 첫 발탁되어 이란과의 평가전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14일 뒤 9월 20일에는 유로 1980 지역예선 그리스와의 예선 첫 경기에도 선발출전해 공식대회 데뷔전까지 소화했다.
7. 플레이 스타일
<미샤>를 통해 공개된 당시 소련 선수들은 미하일 안은 안드레아 피를로를 연상케 하는 선수였다고 말한다. 미샤의 활약상을 담은 몇 안 되는 영상을 확인해보면, 실제로 그는 중원에서 볼을 받아 공격 진영으로 찔러주는 날카로운 중장거리 패스가 돋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2020년 10월 골닷컴 한만성 기자의 미샤 다큐멘터리 소개 기사에서 언급된 미하일 안의 플레이스타일 묘사
2020년 10월 골닷컴 한만성 기자의 미샤 다큐멘터리 소개 기사에서 언급된 미하일 안의 플레이스타일 묘사
현대적인 포지션 개념이 정립되가던 과도기에서 미하일 안은 현재의 수비형 미드필더에 해당하는 하프백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나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으로 인해 점점 공격형 포지션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피를로에 비유된 것 처럼 패스를 찔러주는 뿐만 아니라 직접 마무리도 자주 시도하는 미들라이커 스타일이었으며 실제로 득점력도 미드필더라고 하기엔 여느 공격수 못지 않았고, 선수생활을 하면서 오른발 외발잡이에서 후천적 양발잡이가 되어 더 막기 어려운 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동구권에서 가장 양발을 잘 쓰는 선수 중 한 명이라는 수식어도 이 시기 얻었다.
8. 여담
- 그가 태어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여전히 미하일 안을 유명인사로써 기리고 있다. 애칭 미샤를 본뜬 도로명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히 그가 전성기를 누렸던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구단과 팬은 여전히 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다. 후에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역임한 삼벨 바바얀 당시 파흐타코르 구단 부회장이 직접 그의 묘지에 가서 묘비를 껴안고 우는 사진도 있을 정도다.
-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배출한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세 명 중 한 명이다. 그 세 명중 고려인, 동양계 선수는 미하일 안이 유일했다.
- 1989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구단이 대한민국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위해 입국하면서 소비에트 톱 리그의 창설을 주도한 전설적인 축구인 니콜라이 스타로스틴 당시 구단 회장이 “미하일 안의 나라에 와보고 싶었다. 늦게라도 그의 나라에 올 수 있게 돼 기쁘다.”라고 입국 인터뷰를 한 것이 뒤늦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9년만 해도 적성국이었던 소련에 대한 이해도나 연구가 매우 미진했던 상황에서 한국계 선수가 소련 축구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던 한국인들은 당연히 미하일 안이 대체 누구냐는 반응을 보였고 자연스럽게 그 인터뷰 내용은 국내에서 묻혀버렸다. 이후 수십년이 지나서야 미하일 안에 대한 재조명이 되기 시작하며 다시금 발굴되었다.
- 2020년 10월 한국계 미국인 영화감독인 브라이언 송이 미하일 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미샤를 제작했다. 그는 다큐 제작을 발표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직 한국에서 미샤의 삶은 더 자세히 조명한 작품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미샤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샤의 스토리는 단순한 스포츠 스토리가 아니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휴먼 스토리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 생전에도 비행기에 대한 공포증이 꽤나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인인 앨라 세르게에프나의 증언에 따르면 미하일 안은 과거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 원정경기를 위한 미국행 비행기에서 심한 난기류를 만나 불안정한 비행을 경험한 뒤 극심한 비행 공포증에 괴로워했다고 하며 이후 국내 리그 장거리 원정을 위해 벨라루스, 조지아 등을 갈 때도[6] 매우 불안해하며 동행했다고 한다.
- 우크라이나인으로 70년대 소련 최고의 축구선수로 불리던 올레흐 블로힌과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은근한 라이벌 관계였다고 하며 포지션은 달랐지만 두 선수 모두 소련의 주류였던 러시아계가 아니었고, 블로힌은 서양계 소수민족 팬들을, 미하일 안은 동양계 소수민족 팬들을 대변하는 선수로 둘 다 인기가 많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