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서적. '베네치아공화국 1천년의 메시지' 라는 제목이 달려 있듯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2. 설명
보통 베네치아라고 하면 물의 도시라고 함에도 바다의 도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정적이지만 베네치아의 역사는 그와 달리 시종일관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라고.베네치아의 창건(1장)에서부터 시작하여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2장, 3장, 6장, 8장, 11장, 12장, 14장)는 물론 이른바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와 대항해 시대에 직면한 상황에서의 경제 체제(4장, 10장), 정치 체제(5장, 11장), 문화(7장, 13장), 당시의 관광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성지순례(9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간혹 지나치게 원색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1]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시각에서 흥미롭게 글을 썼......
3. 오류들
...을 리가 있나. 이 책은 상권이 1980년, 하권이 1981년에 쓰인 것으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인 이야기가 나오기 10여년 전의 작품이지만 항목에서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편향된 관점과 근거없는 추측은 로마인 이야기에서부터 나온 버릇이 아니다. 베네치아는 장점은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져 나오는 반면 문제점에 대해서는 적장자 귀족에게만 정치에 참여할 권한을 주었다는 점 정도만 언급될 뿐이며, 반면 베네치아와 싸웠거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라들은 밑도 끝도 없이 까이는 걸 볼 수 있다.[2]이하는
3.1. 상권
3.1.1. 1장. 베네치아 탄생
84쪽에서 자급자족형 국가인 육지국가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자급자족이라는 개념이 없는 해양국가는 침략이라는 걸 하지 않는다고 썼는데, 이런 이분법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야 수두룩하지만 딱 한 가지의 예만 들자면 4차 십자군. 이것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이라는 나라를 침략한 전쟁이며, 그 결과 베네치아는 영토를 확장했다. 그런데 베네치아가 자급자족형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이 1장에서 시오노가 누차 강조한 내용이다.[4]3.1.2. 2장. 바다로!
3.1.3. 3장. 제 4차 십자군
184쪽에서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이 '병력도 영국인을 주체로 하는 용병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라고 썼는데, 뒤에 로마인 이야기나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십자군 이야기 등에서도 쓰는 '상비군은 고대 로마 제국만 가지고 있었고 비잔틴한테는 상비군 그런 거 없었음.' 이라는 말의 시초. 1204년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누일 1세의 치세였던 12세기 중후반에 비교하면 꽤 쇠약해져 있었으나, 여전히 무시 못할 강국이었고, 용병이 주력이었던 것도 아니었다.197쪽에서는 알렉시오스 4세가 4차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20만 마르크를 지불할 수 없었던 원인이 '역재 황제들의 방만한 재정운영' 에 있다고 썼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의 경제가 좋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그것을 황제들에게 돌리는 것은 심히 억울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알렉시오스 3세 항목에 몇 가지가 언급되어 있으니 참고.
여담으로 '동로마'라는 표현을 극도로 피하고 이들을 '그리스인'이라 서술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성향이 이 때부터 나타나며,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격하의 뉘앙스로 받아들여 거슬리다고 여길 수 있다.
3.1.4. 4장. 베니스의 상인
3.1.5. 5장. 정치의 기술
312쪽부터 315쪽까지는 귀족 계급만 정치를 도맡아 하도록 만든 피에트로 그라데니고의 개혁을 장황하게 옹호했고 340쪽부터 342쪽까지에서는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일반 시민들의 욕구는 각 직업별로 형성된 조합으로 해소될 수 있었다고 썼는데, 책의 다른 부분을 보면 실제로 그랬을지 의문이다. 가령 419쪽과 433쪽에서는 제노바와의 전쟁 당시 평민으로서 거액의 기부를 하면 귀족의 자리를 주었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정말로 시오노의 말처럼 귀족은 정치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는 만큼 희생도 앞장서서 해야 하며 정치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매력이 없는 자리였더라면 거액의 기부를 하는 보상으로 내걸 수도 없었을 것이며 '여러 가지 속셈을 가진 사람까지 기부를 신청' 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변호하는 근거로 든 것이 '베네치아사의 최고 권위자인 존스 홉킨스 대학의 레인 교수' 단 한 사람의 말인데, 출처를 정확히 밝히지도 않았다는 점은 시오노의 책 모두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므로 넘어간다 쳐도 한 사람의 말만 인용하며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문제다.[5]
3.1.6. 6장. 라이벌 제노바
347쪽에 1311년 당시 프랑스 왕의 이름이 '앙리 7세' 라고 썼는데, 프랑스 역사상 앙리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네 명, 명목상 국왕인 경우까지 쳐도 다섯 명 뿐이다. 1311년 당시 프랑스 왕은 앙리도 7세도 아니고 필리프 4세.[6]431쪽에서는 1380년 당시의 사부아 백국을 가리켜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과 친하며 그 때문에 십자군 정신에서도 이탈리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강했' 다고 평했는데, 4백년 뒤 이탈리아 통일을 해내는 나라가 사부아이기는 하지만 이때까지 사부아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의 일부였다. 수도도 오늘날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샹베리에 있었고, 공용어도 프랑스어였기 때문. 사부아가 이탈리아화된 것은 1559년에 이탈리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 이탈리아로 천도도 하고 공용어도 이탈리아어로 바꾸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인 결과이지, 16세기가 아니라 14세기 말의 사부아를 이탈리아의 일부로 보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3.1.7. 7장. 베네치아의 여자들
451쪽에 셀림 2세의 애첩이 '누르 바누' 라고 되어 있는데, 현대 터키어로 'Nur Banu' 가 아니라 'Nurbanu Sultan' 이라 쓰므로 '누르바누' 라고 붙여 써야 한다.453쪽에서 454쪽까지는 16세기 중엽 당시 베네치아와 오스만의 건축 양식을 서로 비교했는데,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베네치아가 좋으니 오스만이 낫느니 할 수는 있지만 다소 지나친 표현들이 쓰였다. 특히나 '터키는 군사적으로는 대제국이었다. 그렇지만 16세기 당시 문명의 수준에서 본다면 서유럽 쪽이 완전히 오리엔트를 앞지르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당시 서유럽의 최첨단을 가는 문명국이었다.' 라는 어마어마한 말까지 썼는데, 베네치아가 서유럽의 최첨단이었다는 부분도 문제지만 오스만은 절대로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니었다. 누르바누를 진상받은 황제 셀림 2세의 시대에 오스만은 셀리미예 모스크라는 건축물을 짓는데, 이 건물은 2011년에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이자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축물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454쪽에서는 오스만이 비잔틴 문명을 '타도' 했다고 소개하며 보석 장식품 단 하나만 비잔틴 문명을 계승했다고 썼는데, 역시 아주 무식한 소리다. 오스만과 비잔틴은 종교적으로는 비록 다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연속선상에 있는 나라이며, 오늘날 그리스인과 터키인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함에도 음식이나 생김새 등이 여러 모로 유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에 오스만이 정말로 비잔틴 문명을 파괴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면 메흐메트 2세는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왜 자칭했던 걸까? 건축사상으로도 1396년부터 1399년까지 지어진 부르사의 대(大)모스크는 비잔틴 돔 양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평가받으며, 바로 위에서 소개한 셀리미예 모스크나 블루 모스크 등도 아야 소프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456쪽에서는 셀림 2세가 키프로스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포도주 때문이었다고 서술했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가지 야사들이 있으며 동지중해의 한복판에 있는데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도 있는 키프로스 섬의 중요성이 컸다는 해석도 있다.
레판토 해전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는 하권에서도 이러한 서술은 바뀌지 않아서, 355쪽에서도 포도주가 원인이었다고 되어 있다.
458쪽부터 460쪽까지 오스만의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베네치아 출신의 모후 누르바누 술탄의 부추김을 받은 황제 무라드의 명령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며, 개중에는 예니체리 병사에게 암살당했다거나 하사신에게 살해됐다는 것도 있다.
3.2. 하권
3.2.1. 8장. 숙적 터키
29쪽에서 초창기 오스만 제국이 서쪽의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며 영토를 넓혀나간 것을 두고 '동쪽의 몽골제국은 만만찮은 상대이고 서쪽의 비잔틴제국은 약체였으므로 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 이라고 평했는데, 실제로 1300년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는 몽골 제국이 아니라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이 난립해 있었다. 오스만이 비잔틴을 노린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33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에디르네를 함락한 해가 1363년이며 1365년에는 부르사에서 천도를 했다고 썼는데, 에디르네가 함락된 해는 사료마다 달라서 1360년대의 어느 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천도라기보다는 사실상 공동 수도로 삼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후 메흐메트 1세에 이르기까지 오스만의 술탄들은 부르사에 머물렀으며, 메흐메트 이후에야 에디르네를 거처로 정하기 때문.
또한 공식적으로 비잔틴령이었던 마케도니아가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다고 썼지만, 당시에 마케도니아라는 세력은 없었다.
34쪽부터 35쪽까지는 황족끼리의 다툼으로 황제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술탄 바예지트 1세가 중재하여 결말을 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황위를 둘러싸고 내전을 벌인 세력이 서로 오스만에 도움을 요청했고. 어떻게도 손해를 볼 것이 없었던 오스만은 양쪽을 교대로 도와주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
또한 같은 페이지에서 바예지드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허물 것을 요구했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요안니스 5세가 성벽을 보강한 것을 원상복구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역시 위 항목에 나오는데, 요안니스는 원상복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서거한다.
43쪽에서 무라트 2세가 1422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것을 두고 '전혀 뜻밖에도‘ '갑작스레' 포위당했다고 썼는데, 당시 비잔틴은 메흐메트 1세가 죽고 무라트 2세가 즉위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무라드 대신 다른 인물을 술탄으로 앉힘으로써 이득을 보려 했다.[7] 즉 콘스탄티노플 포위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한 것이 아니라, 오스만에 대해 명백한 적대행위를 보인 비잔틴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43쪽부터 44쪽까지는 1422년부터 1430년까지의 테살로니카 공방전에 대해 묘사했는데, 일단 무라트 2세가 1430년에 공격한 것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10년에 걸친 공방전이었다. 즉 오스만이 베네치아를 공격한 것이 아니고 바로 위에서 언급한 콘스탄티노플 포위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수비측이 비잔틴에서 베네치아로 바뀐 것을 알지 못한 오스만측은 비잔틴과 싸운다고 생각하며 베네치아를 공격하고 베네치아 수비군도 오스만이 비잔틴뿐 아니라 자기네들도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여기며 방어했던 것.
46쪽에서는 무라트 2세가 벌인 전쟁이 대부분 방어가 목적이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발칸 반도에서의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 세르비아 공국이 일시 멸망했다가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에 오스만이 패하면서 복원되기도 했다. 무라드가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잠시 양위하고 물러났던 것도 정복지를 뱉어내는 등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무라트의 퇴위가 언급되지 않았다.
47쪽에서는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할 즈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29쪽에서 썼듯이 시오노는 오스만이 창건될 무렵 아나톨리아 반도에 여러 투르크계 공국들이 난립했던 사실을 몰랐던 듯 하므로 같은 투르크계가 공격한 것이니 내전인 모양이라고
48쪽에는 메흐메트 2세 이전까지 술탄들이 '온갖 사치스런 것들을 갖추고 꾸몄다지만 광대한 영토의 주인이면서도 일종의 천막 비슷한 데서 살고 있었' 다고 썼는데, 비록 지금은 지진과 화재 등으로 인해 다 허물어진 폐허로 남아 있지만 시오노의 사전에는 번듯한 궁궐도 천막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8] 참고로 현재 에디르네 왕궁은 복원 공사 중이다.
49쪽에서는 아나돌루 히사리를 지은 바예지트 1세가 메흐메트 2세의 조부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증조부다.
52쪽부터 53쪽까지는 비잔틴 제국을 굳이 멸망시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이유가 충분히 많았다. 일단 오스만령 아시아와 오스만령 유럽 사이에 비잔틴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에디르네와 부르사 두 군데에 두어야 했고, 1366~1367년의 사부아 십자군이나 1443~1444년의 바르나 십자군처럼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에 대한 전진 기지로 삼으려 했거나 아예 삼아버렸던 사례도 있다. 즉 오스만으로서는 두 군데의 수도를 하나로 합하여 지방 통치를 보다 편하게 하는 동시에, 기독교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느닷없이 드롭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필요가 충분히 있었다. 또한 메흐메트 2세 자신으로서는 튀르크계 귀족들에게 밀려 왕권이 약하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전제군주로 군림하기 위한 위업을 세울 필요가 있었으며, 쇠퇴해가는 비잔틴 제국을 아예 지워버리고 자신이 '로마 황제' 로서 새로운 로마 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54쪽에서는 1453년 당시 잉글랜드가 장미전쟁 중이었다고 썼지만, 이 전쟁은 2년 뒤에 터졌다.
64쪽에서는 1453년 당시의 오스만을 가리켜 '유랑의 백성 터키' 라고 했는데, 오스만 국가 체제의 기반을 다진 무라트 1세를 기준으로 잡으면 유랑생활 그만둔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메흐메트 2세 즉위 당시의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1세 때랑 똑같이 본다는 건 누르하치 시대나 건륭제 시대나 여진족은 거기서 거기였다는 소리와 똑같다.
73쪽에 오스만이 베네치아에 특사를 파견할 경우 직위가 낮은 자나 '터키 국적도 없는 유대인' 을 보냈다고 썼는데, 그 유대인의 국적은 '터키' 가 아니라 '오스만' 이었을 터이므로 '투르크인도 아닌 유대인' 이라고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아니 그 이전에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기 이전까지 민족이 아니라 종교로 신민들을 구분했으므로, 굳이 비하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다면 '무슬림도 아닌 유대인' 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다.
더불어, 16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현대적 의미로서의 '조약' 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이때까지 오스만이 타국과 가장 많이 맺은 조약은 강화조약이었는데, 이들은 이 조약을 '상대방과 화해한다' 가 아니라 '상대방이 우리 제국의 힘과 위엄에 굴복하여 항복하고 신하가 된다' 라고 받아들였다.[9] 실제로 오스만 제국에서 오늘날의 외무장관이라고 할 만한 직위는 2차 빈 공방전 이후에나 마련된다[10]. 요컨대 오늘날 기준으로는 지위가 낮은 자를 특사로 파견했으니 무례하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오스만으로서는 '신하' 에게 지체 높은 자를 파견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91쪽, 110쪽, 111쪽에서는 알바니아의 민족영웅 스컨데르베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알바니아의 앞날을 베네치아에 부탁한 것으로 소개했는데, 항목을 들어가보면 확인할 수 있지만 평생 알바니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때로는 베네치아와 맞서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비록 같은 기독교도 국가이기는 하지만 베네치아에 알바니아를 맡겼다는 것은 대단히 어색하다. 실제로 베네치아에게 부탁한다는 스컨데르베우의 유언 같은 것은 없었으며, 오히려 베네치아 쪽에서 스컨데르베우의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접근하여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삼았던 것이다.
92쪽에서는 1468년과 1469년 당시 아나톨리아가 오스만에게서 떨어져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럴 리가. 이것도 카라만 베이국이라는 나라를 시오노가 몰랐기 때문에 반란으로 서술한 것이다.
107쪽과 108쪽에서는 헝가리가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최전선이므로 오스만과 싸우고 있으면 베네치아와 교황이 자금 원조를 해주었다고 서술했는데,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당시 헝가리 왕이었던 마차시 1세는 한참 부족하다고 판단.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버렸다. 또한 '헝가리는 유능한 군주 마티아슈 1세가 이끌고 있었던 만큼 어느 정도 용병화해 있었던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용병화라는 말은 아마도 마차시 시대 헝가리를 동유럽 최강국으로 만든 상비 용병대인 '검은 군대'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책만 놓고 보면 무슨 뜻인지가 모호하다. 헝가리사에 밝지 않은 사람은 '마치 용병처럼 베네치아와 교황으로부터 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터키와 싸웠나' 라고 이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109쪽, 282쪽에서는 오스만의 국기를 '붉은 바탕에 하얀 반달이 새겨진' 것으로 묘사했는데, 시오노가 묘사한 것과 같은 국기는 이 책에서 다루어진 시기 이후인 1843년에 제정되었다. 그 이전의 국기는 이렇게들 생겼다.
114쪽부터 116쪽까지는 슈코더르 공방전에 대해 다루며 1474년, 1477년, 1478년에 벌어진 세 차례의 공방전에서 베네치아가 모두 이겼다고 서술했는데, 실제 공방전은 1474년, 1478~1479년에 두 번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2차전에서는 수비군이 기력이 다할 때까지 포위하는 전술을 쓰기는 했지만 오스만이 승리를 거두었다. 1477년의 무슨 전투를 슈코더르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오해했는지는 불명이지만, 이 해에 스컨데르베우의 본거지였던 크루여가 함락되었으니 아마 이와 혼동했던 듯. 실제로 책에 스컨데르베우는 나와도 크루여는 안 나온다.
124쪽에서는 메흐메트 2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트 2세를 메메드 시대에 확장된 영토를 다스리는 것만도 힘에 부쳐한 인물로 평가했는데, 이는 바예지드를 심하게 과소평가한 것이다. 바예지드는 실제로 내정에 힘을 쏟기는 했지만 그것은 동생 젬의 문제[11]와 함께 메메드가 거의 해마다 군사 원정을 벌이느라 재정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나 아들, 손자 등에게 밀려서 그렇지 바예지트도 마냥 내정만 한 것은 아니며, 베네치아에 맞선 해전에서 첫 승을 기록한 것이 그의 치세에 있었던 일이다.
125쪽에는 그야말로 시오노식의 궤변이 나오는데, '해양국가에 비해 육지형인 국가는 손바닥만한 땅에도 집착하는 법이다. 그리고 자기네 영토를 조금이라도 확장할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만족감을 느낀다.' 가 그것이다. 이 문장은 이 장의 맨 첫머리를 장식할 정도로 강조되는데, 다른 '육지형의 국가' 는 어떤지 몰라도 오스만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것은 이런 집착이나 만족감 때문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지방행정단위와 군대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지방관의 인사고과를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 바로 군공이었기에 어느 시대에나 호전파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12], 창건자 오스만 1세가 이슬람 입장에서 이교도인 비잔틴 제국에 맞서 성전을 선포한 것을 계기로 이교도에 맞서 이슬람의 세력을 넓힌다는 사상이 국시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즉 이렇듯 종교적, 제도적으로 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던 오스만 제국의 사정은 무시한 채 집착이니 만족감이니 했다는 것은 문제.
3.2.2. 9장. 성지순례 패키지 투어
3.2.3. 10장. 대항해 시대의 도전
227쪽에서 이집트. 즉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칼리프라고도 불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건 '쇼군은 천황이라고도 불렸다' 나 마찬가지인 소리다. 그나마 비교적 최근에 낸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개념을 찾고(?) 칼리프를 천황. 술탄을 쇼군에 비유했다.243쪽에서 오스만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한 것이 메카를 손에 넣어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홍해를 완전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맘루크 왕조를 멸한 목적이 칼리프위(位)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칼리프위 때문이었다면 시리아를 정복한 시점에서 이미 칼리프의 신병을 확보한데다[13] 아라비아 반도로 군사를 보낼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굳이 황제 셀림 1세가 이집트로 친히 진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게다가 오스만의 황제가 칼리프라는 칭호를 강조하는 것은 한참 뒤인 제국 쇠퇴기 때의 일이다.
끝으로 오스만이 홍해 지배뿐 아니라 인도양으로 함대를 계속 파견했던 것은 인도와의 무역 문제였지, 종교 때문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맘루크 왕조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인도와의 교역에 나서볼까 하던 차에 포르투갈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니, 그쪽을 배제하고 싶어했던 건 당연한 일.
3.2.4. 11장. 2대 제국 사이의 골짜기에서
282쪽에서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 등을 언급하면서 이 무렵 프랑스는 이들만큼 걸출한 군주를 맞이하지 못했다고 썼는데, 물론 사람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만 프랑수아 1세는 그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는 국왕이 아니다.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부당한 일.292쪽에서 16세기 전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보름스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신성 로마 제국은 정식 수도를 지정하지 않고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수도라고 간주했다.
297쪽에서는 파비아 전투에 대해 완전히 잘못 서술했다. 실제로는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황가의 세력을 꺾기 위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던 파비아를 공격한 전투인데, 책에는 합스부르크군이 교황령 파비아를 공격했다고 나온다.
300쪽에 '터키측 교섭대표인 파샤' 라는 부분이 있는데, 파샤(Paşa)는 이름도 관직도 아니고 경칭에 불과하다. 즉 이 말을 조선으로 옮겨 보면 '조선측 교섭대표인 대감'(...)이라는 말밖에 안 된다. '오스만 측 교섭대표인 ㅁㅁㅁ 파샤' 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며, 이 인물의 이름을 모르겠다면 그냥 교섭대표라고만 하는 게 차라리 낫다.
308쪽에서 탐관오리가 일반적이었던 16세기에 본토 외에 속령을 통치하는 베네치아 관료들이 청렴하고 공평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칭송했는데, 북동부 이탈리아 속령이면 혹시 모를까 크레타 섬이나 키프로스 섬 등에 파견되었던 관료들은 청렴하고 공평한 태도로 현지인들이 아니라 본국의 번영을 위해 근무했다. 즉 현지인들의 허리가 휘어지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키프로스 섬의 경우 1571년에 오스만의 공격을 받자 저항하기는커녕 환영했다는 것은 책에도 간접적으로 나오는 이야기.
322쪽에 쉴레이만 1세가 1528년에 빈 공격에 나섰다는 서술이 있는데, 1년 더 뒤로 미루어야 맞는다.
324쪽에서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종종 오스만에 맞선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인즉 순혈 투르크인들이 혼혈이거나 비(非)터키인인 술탄의 지배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전근대의 오스만 제국은 민족이 아니라 종교로 신민들을 구분했으므로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반란이라는 것은 아마 제랄리 반란(Celali rebellions)을 일컫는 것인 모양인데, 이 반란들의 이유는 민족 같은 것이 아니라 오스만 정부가 소수 이슬람 종파인 알레비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14]
또한 같은 페이지에 '말하자면 터키제국은 국명과는 반대로 비(非)터키인에 의해 통치되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오스만 1세를 시조로 하는 국가의 이름은 '터키제국' 이 아니다. 'Devlet-i ʿAlīye-i ʿOsmānīye'. 즉 '숭고한 오스만 국(國)' 이 정식 명칭이며, 이른바 근대화가 된 이후엔 Osmanlı İmparatorluğu(오스만 제국)이나 Osmanlı Devleti(오스만국(國)) 같은 명칭도 사용되었다. 애초에 '투르크인' 들은 오스만 제국이 존속하던 시기에는 스스로를 '오스만인' 으로 여겼지, 터키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343쪽에서는 '바르바로사'. 즉 하이르 앗 딘이 그리스 태생의 기독교도라고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무슬림이었으며 어머니는 그리스인, 아버지는 투르크인이었으므로 그리스 태생이라는 말도 절반만 맞는다.
360쪽, 380쪽에는 레판토 해전이 벌어진 16세기 중, 후반 무렵 프랑스가 알제리에 야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위그노 전쟁 중인데 무슨 수로? 더군다나 아직까지 오스만이 두드러지게 쇠퇴한 시대도 아니므로 프랑스 정도는 전쟁을 벌여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무엇보다 프랑스와 오스만은 당시 동맹국이었다. 오히려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프랑스가 오스만 궁정에 스페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15] 네덜란드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며, 프랑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네덜란드가 콘스탄티노플로 사절을 보내는 형편이었다.[16] 덤으로 프랑스와 오스만의 동맹은 이후 루이 14세 때 잠시 중단되기까지 계속되며, 최종적으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 끝을 맺는다.
366쪽에서 라라 무스타파 파샤가 파마구스타를 정복하여 키프로스 섬을 완전 정복한 다음 항복한 파마구스타의 주민과 수비군을 학살한 대목을 소개했는데, 문제는 딱 그것만 소개했다는 것. 공방전 당시 무스타파 파샤의 장남이 전사했고 무스타파는 그 원한으로 인해 학살을 벌였던 것인데, 이런 사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살육만 소개한 것은 공정하지 않다.[17]
3.2.5. 12장. 지중해 최후의 성채
424쪽에서는 베네치아 정부가 크레타 전쟁을 일으킨 황제 이브라힘의 암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으며 이러한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이브라힘이 1648년에 암살되었다고 소개했는데, 실제 이브라힘의 죽음은 베네치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아들을 앞세워 오스만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던 태후 쾨셈 술탄이 그 아들이 폭정만 일삼으니 자신의 권위에도 흠이 갈까 두려워해, 폐위하고 살해해버린 것.431쪽에서 1683년부터 1699년까지 벌어진 대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 대해 서술하면서 트란실바니아와 보스니아에서 오스만을 몰아냈다고 썼는데, 트란실바니아는 맞는 얘기지만 보스니아가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2백년 뒤인 1878년의 일이다.
3.2.6. 13장. 비발디의 세기
3.2.7. 14장. 베네치아의 죽음
4. 기타
시오노의 초창기 작품이라 그런가. 아니면 번역가가 로마인 이야기를 맡은 김석희가 아니어서 그런가, 문장의 전체적인 수준이 로마인 이야기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는 편이다. 문장이 지나치게 짧아서 전후 문장과 합치는 게 나은 경우나 같은 문장에 똑같은 단어가 불필요하게 2회 이상 쓰이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1] 가령 대표적인 부분이 레판토 해전에 대해 다룬 부분인데, 기독교 연합함대 총사령관이었던 돈 후안은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로 해군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총사령관이었다는 이유로 '레판토 해전의 영웅' 이라고 평하며 '그 지위에 걸맞은 큰 그릇과 역량' 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찬양했다.[2] 제노바는 그나마 양반인 편이지만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이 책을 쓸 때부터 좋은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 하며, 오스만 제국은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비뚤어지게 바라보게 됐는지 한 마디로 답이 없다.[3] 실제로 이런 예를 한두 가지 들면 책에서는 '오늘날' 의 리알토 다리 주변이 채소나 생선 따위를 파는 시장가가 되었다고 썼지만 정말 '오늘날' 에는 베네치아사에 무관심한 관광객이라도 꼭 둘러보곤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으므로 시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지 어쨌는지 찾아볼 수가 없고, 하권 시작 부분에서 완전 폐쇄되었다고 쓴 이스탄불 해군박물관은 오늘날 멀쩡하게(?) 재건되어 있다.[4] 또다른 예시로는 중국을 들 수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을 얻고자 교역하기를 바랐지만, '자급자족' 이 너무나도 잘 되고 있던 중국은 영토를 더 확장하거나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리고 아편 전쟁을 시작으로 '자급자족형 국가인 육지국가' 였던 중국은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5] 이게 왜 문제인지 스타크래프트로 비유하자면, A라는 전략이 있는데 임요환만 아주 훌륭하고 강력한 전술이라고 주장하고 그 밖의 테란 플레이어들. 즉 이윤열이나 최연성, 이영호 등은 '그렇게 했다간 게임 말아먹는다' 라고 비판했다고 해 보자. 이 때 이윤열이나 최연성 등의 말은 싸그리 무시한 채 임요환의 말만 인용하며 'A라는 전술은 아주 유용하다' 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6] 당시 신성로마 황제가 하인리히 7세였으며 앙리와 하인리히는 영어로 모두 Henry라고 쓰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프랑스 왕으로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7] 바예지트 1세가 서거한 이후의 내전에서 비잔틴 제국은 바예지드의 아들 사형제 가운데 첫째이자 루멜리아(대략 오스만령 유럽)를 차지한 쉴레이만과 동맹을 맺어 잃어버렸던 영토 일부를 되찾은 적이 있었다. 즉 이번에도 무라드에 맞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자의 편을 든다면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8] 엄밀히 따지자면 무라트 2세 때 공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완공하지는 못했고, 완성은 메메드 2세 때 했다. 그래도 책에서는 메메드가 궁전다운 궁전을 처음 지으려던 것으로 묘사했으므로 여전히 오류.[9] 그도 그럴 것이 이 때까지 오스만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례 자체가 드물었으며, 강화조약의 단골 손님(?)이었던 베네치아는 매번 오스만에게 영토를 내주고 배상금을 지불했고 합스부르크 황가 역시 오스만에 매년 공물을 바친다는 문서에 몇 번 서명했었다.[10] 본래 제국의 최고 국정기구이자 황제의 자문기구인 디완에서 논의할 서류들을 챙겨 가져오고 논의된 서류들을 정리해 보관하는 니샨즈(Nişancı)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 서류들 중에는 다른 나라와 체결한 조약문도 있었다. 조약문을 관리해 왔으니 조약에 대해 잘 알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사실상 외무장관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11] 자세한 사항은 항목을 참고하고 여기에서는 간단히 쓰면, 반란을 일으킨 동생이 기독교 세계로 튀었는데 교황이 그 동생을 십자군의 우두머리로 삼으려는 계획이 있었다.[12]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여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화된 뒤에는 지방 총독들이 제멋대로 군사 행동에 나서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13] 사파비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셀림 1세는 뒤이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는데, 당시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었던 칸수 알 과리는 당연히 이를 경계하고 시리아로 직접 진군할 준비를 했지만 '이 군사는 이집트가 아니라 다시 페르시아로 갈 것' 이라는 셀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만다. 이 때문에 시리아행을 친정이 아니라 순행 정도로 바꾸고, 칼리프를 비롯해 여러 요인들을 대동했다.[14] 또 열 번 양보하여 민족 때문이라고 해도, '순혈 투르크인' 자체가 거의 없었다. 비잔틴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과 피가 마구 섞였기 때문으로, 오늘날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도 터키인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어내면서 민족이나 혈통으로 구분하면 안 되며 터키어를 쓰고 터키에 살면 누구든 터키인이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정의했다. 즉 로마 제국으로 치면 오현제 시대 즈음에 '순혈 로마인' 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를 생각해보면 된다.[15]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독립운동.[16] 이 때 사절을 접견한 오스만 측의 답을 간단히 줄이면, '개신교라는 종파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신성로마)황제와 교황에게 맞선다 들었는데, 그럼 가톨릭보다도 우리 이슬람과 통하는 부분이 더 많구먼?'[17] 물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한이 작용했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베네치아-교황령-스페인 연합 함대의 사기를 올리고 말았으므로, 복수를 하는 게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는 점은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