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2 13:23:46

바베이도스의 움직이는 관 사건

13°03'59"N 59°32'16"W
사건이 발생한 지역.
1. 개요2. 납골당
2.1. 체이스 가문의 가족묘2.2. 먼저 안장된 집안 사람들
3. 섬뜩한 사건
3.1. 문을 여니 관들이 흩어져 있고3.2. 신임 총독의 초임 조사3.3. 조사관들의 파견과 미해결
4. 사건의 원인?
4.1. 자연현상 탓?4.2. 영혼들의 움직임인가?4.3. 원수들이 벌인 복수극?
5. 진실6.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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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Mysterious Moving Coffins of Barbados

19세기 초에 카리브해의 섬나라인 바베이도스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알려진 도시전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납골당(納骨堂) 안에 있던 관들이 움직였다는 도시전설이다. 바베이도스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교구의 오이스틴스(Oistins)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교구 교회(Christ Church Parish Church) 묘지의 지하 납골당 'Chase Vault'에서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내용을 정리한 한국어 글

2. 납골당

2.1. 체이스 가문의 가족묘

18세기 영국귀족인 토머스 체이스(Thomas Chase)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1798년서인도 제도의 섬나라 바베이도스로 이주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했고 가혹하게 부렸는데 비단 노예에만 해당하지 않고 당시 남아 있던 소수의 원주민에게도 동일하게 대해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본국으로부터 영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1807년 4월 10일 바베이도스 도심의 크라이스트 처치 교구 교회에 자신과 가족들 전용 납골당을 만들었다.

물론 이 납골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두 가지 정도 있다. 월론드라는 다른 귀족 가문이 건설했던 것이었다가 짓던 도중에 월론드 경이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월론드 경의 친구이자 지인인 체이스 경에게 넘겼다는 설도 있으며[1] 다른 설에 의하면 제임스 엘리엇이라는 귀족이 1724년에 먼저 건설하고 엘리엇 경이 부인 엘리자베스를 안치했다가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부인의 시신을 이장해가며 월론드 경에게 팔고 월론드 경도 뒤이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친구인 체이스 경에게 넘겼다고 하는 설도 있다.[2]

서양에서의 납골당이라는 건물은 당시 평민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매장 방법과는 다른 방식이었는데 한국에서 생각하는 화장한 유골을 담은 상자를 봉안하는 납골당과는 형식이 조금 다르며 관을 안치하는 용도로 지어진다.
파일:external/timtrott.co.uk/oldvault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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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이스 가문 납골당의 입구[3] 부분 출처 크라이스트 처치 교구 교회 묘지.[4]
출처: 위키백과
보통 평민들은 관을 흙속에 직접 묻는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부유층이나 귀족은 '지하 납골당(Burial Vault)' 형태로 무덤을 만들었는데 관이 들어갈 구덩이에 석벽이나 벽돌벽을 쌓아 석곽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한 다음 돌뚜껑을 닫거나 아예 지하에 방을 지어서 관을 여러 구 안치하는 방식이다. 귀족인 체이스 경도 관을 직접 땅에 묻지 않고 안치하는 이런 납골당 방식으로 가족묘를 건설했다.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후 체이스는 본인이 죽고 나면 관을 잠시 납골당에 안장했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후손들을 통해 고국인 영국으로 이장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2.2. 먼저 안장된 집안 사람들

그러나 토머스 본인이 죽기도 전에 납골당에 먼저 안치된 사람이 생겼는데 친척[5]인 토마시나 고다드 부인(Thomasina Goddard)으로, 납골당이 만들어진 1807년 7월 31일에 사망하였다. 체이스는 기꺼이 자신의 납골당 안에 고다드 부인을 안치하도록 허락하였다.

1808년 체이스의 2살 된 딸인 앤 마리아(Ann Maria Chase)도 사망해 그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체이스의 첫째 딸인 도커스(Dorcas Chase)는 아버지 체이스 경에게 "바베이도스 원주민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마세요. 아빠가 천벌을 받을까 겁이 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12년 7월 6일 사망했는데 사인은 아사(餓死)였다. 아버지의 가혹한 식민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는 달리 원주민과 노예들에게 어질게 대했다고 한다. 도커스가 죽은 사인에 대해서는 도커스가 아버지의 가혹한 식민 행위를 비판했다가 아버지 토마스가 이에 분노하여 벌을 준답시고 가둬놓고 금식을 시키는 학대를 저질렀다가 아사했다는 설도 있다.

아버지 체이스 경은 첫째딸인 도커스까지 죽자 자신의 악행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토머스 체이스도 식음을 전폐하다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1812년 8월 9일 사망했다. 체이스 경의 사인에 대해서는 자신 때문에 가족도 잃고 인망도 잃은 죄책감으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여기까지라면 그냥 슬픈 사연의 이야기나 자업자득의 이야기로 끝나겠지만... 이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3. 섬뜩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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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 후 상황이 경과됨에 따라 관이 움직인 모습.
① 토마시나 고다드 부인의 관
② 토머스 체이스의 딸인 메리 앤 체이스의 관
③ 토머스 체이스의 딸인 도커스 체이스의 관
④ 토머스 체이스의 관
⑤ 사무엘 브루스터 앰스의 관
⑥ 사무엘 브루스터의 관
⑦ 토마스티나 클라크 부인의 관
첫째줄 왼쪽 그림: 맨 처음 토마시나 고다드 부인, 토머스 체이스의 딸 도커스 체이스와 메리 앤을 안장한 직후.
첫째줄 오른쪽 그림: 토머스 체이스의 관을 안장하기 전에 묘당을 열었을 때. 고다드 부인과 메리 앤 체이스의 관이 엎어져 있다.
둘째줄 그림: 토마스티나 클라크 부인의 관까지 안치하고 관들을 제자리에 놓은 모습. 고다드 부인의 관은 부서져있어서 유골은 따로 수습하고 바닥에 석회를 뿌렸다.
셋째줄 그림: 이후 또 열었을 때 관들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 언제나 납골당을 열 때마다 관들은 엎어져 있었다. 하지만 석회에는 아무 흔적이 없었다.

납골당 안에는 안장할 때를 제외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관들이 움직였다.

그림참고 1 / 그림참고 2

3.1. 문을 여니 관들이 흩어져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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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제대로 놓인 모습(왼쪽)과 어지럽게 흩어진 모습(오른쪽) 출처
1812년 8월 9일 영국인 식민지 관리들은 토머스 체이스의 장례를 치르고 관을 납골당에 안장하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고다드 부인의 관과 체이스의 두 딸인 메리 앤과 도커스 관이 이상하게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관리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냥 체이스 집안과 척을 진 누군가가 뒤집어 놨나 생각하고 관들을 전부 늘어놓기엔 묘당 안이 비좁아서 아버지 토머스 체이스 경의 관 위에 딸 도커스의 관을 겹쳐 올려 놓고 다른 관들도 정리해 놓고 문을 닫아 버렸다. 전부터 체이스 경의 폭정이 바베이도스에도 소문이 자자했는지라 관리들도 처음엔 "원한 살 만한 짓을 밥 먹듯이 해 왔으니 인과응보지 뭐."라고 쿨하게 넘겼다고 한다.

그 다음날 이른 새벽에 한 원주민이 납골당 내부에서 빛이 나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관리들은 이 소문을 듣고 급히 납골당의 문을 열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전날 토머스 체이스의 관과 겹쳐 놓았던 딸 도커스의 관은 벽에 기대어 90도 직각으로 꼿꼿이 서 있었고 아버지 토머스 체이스의 관은 약 240도 왼쪽으로 기울어져 뒤집혀 있는 기괴한 광경이 발견되었다.

1816년엔 토머스 체이스의 가족 외에도 물놀이를 하다 익사한 아기인 새뮤얼 브루스터 앰스(Samuel Brewster Ames)란 친척을 납골당에 매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다시 납골당 입구를 열었을 때는 과거와 같은 현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앰스의 시신을 안장하고 다시 납골당을 봉하고 나간 52일 뒤에는 병으로 사망한 새뮤얼 브루스터(Samuel Brewster)[6]라는 다른 친척을 추가로 안장하기 위해 납골당 문을 다시 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먼저 들어갔던 관들이 사방팔방 흩어져 있었다.

바베이도스의 이 납골당에 대해 좋지 않은 의미로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는데 토머스 체이스의 가혹한 처우로 진절머리가 난 흑인 노예들이 원한 때문에 납골당 안을 헤집어 놓았다는 말이 제일 많이 퍼졌다.

3.2. 신임 총독의 초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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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총독 스테이플턴 코튼
1817년 바베이도스를 다스릴 신임 총독으로 영국에서 제1대 컴버미어 자작 스테이플턴 코튼(1773~1865. Stapleton Cotton, 1st Viscount Combermere)이 파견되었으며 그가 부임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1819년 7월 7일 그 무렵 사망한 체이스 가문의 또다른 친척인 토마시나 클라크(Thomasina Clark)라는 부인이 납골당에 안치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은 코튼 총독의 귀에도 들어갔고 호기심이 생긴 코튼은 그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파일:cripta_chase.png
당시 상황을 그린 일러스트(Francesco Baiocchi 작품) #
인부들이 클라크 부인의 관을 안치하기 위해 납골당 문을 열자 1807년 가장 처음 안치된 고다드 부인의 관이 부서졌고 부인의 두개골이 입구 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코튼을 따라 동행한 관리들과 인부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코튼 총독은 원주민 노예들이건 체이스 가문과 척을 진 또 다른 사람들이건 누군가가 이 납골당을 의도적으로 헤집어 놓는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범인을 직접 체포하기 위해 묘안을 짜내었다.

고다드 부인의 유골은 따로 수습한 후 새 관에 넣어 딴 곳으로 이장하고 모든 관들도 제자리로 놓은 다음 납골당 바닥에 석회가루를 잔뜩 뿌리고 입구를 봉한 뒤 영국 정부의 공식 봉인을 부착하였다. 이전에도 코튼 총독은 이 사건에 대한 소문 때문에 체이스 밑에서 일한 노예들이나 체이스 가문과 척을 진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을 전부 불러 심문과 조사를 해 봤지만 아무 증거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는지라 직접 자신이 나서서 체포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820년 4월 코튼 총독은 납골당 내부 상태를 다시 확인하기로 하였다. 곧 총독부 관리들과 토마스 오더슨(Thomas Orderson)이라는 신부(성공회 사제)를 대동하고 납골당의 문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6개의 관들은 묘당 내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더 괴이한 건 관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음에도 코튼이 납골당의 입구에 붙인 봉인과 묘당 바닥의 석회가루 모두 그대로였다는 점이었다. 이러니 총독은 도저히 모르겠다고 이건 내가 손쓸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것 같다며 영문을 몰라했으며 총독 임기 5년을 채우고 1822년에 전출하였다.

3.3. 조사관들의 파견과 미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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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7]이 잡지 더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 1919년 12월호에 기고한 글 <영혼의 법칙(The Law of the Ghost)>에 실린 삽화. 출처 이 삽화는 "서인도 제도의 전설"이라는 타 자료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네이선 루카스 판사가 그린 스케치를 다시 그려 재구성한 것이다. 원본1, 원본2 왼쪽은 1819년 관을 정리했을 때, 오른쪽은 1829년 묘당을 다시 열었을 때.
납골당을 열 때마다 계속되는 이 기괴한 사건 탓에 바베이도스의 많은 주민들이 동요했다. 영국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전술한 토마스 오더슨 신부를 조사관으로 임명하였고 추가로 오더슨 신부를 도와줄 조사단을 바베이도스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사단 중에는 몇몇 학자들과 명사들도 있었는데 그 중엔 문학가이자 심령학자인 아서 코난 도일 경도 있었다 한다.

오더슨 신부는 앞서 코튼 총독이 확인한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범인을 찾으려고 하였다. 우선 납골당의 묘당 바닥에는 모래를 뿌리고 관 6개를 쇠사슬로 감아 움직일 수 없도록 조치하였으며 납골당 입구 철문을 묶어 둔 사슬엔 밀가루를 뿌려 누군가가 손을 댄다면 흔적이 남도록 하였다. 추가적으로 납골당 문에 벽돌시멘트를 사용해 이중 삼중으로 벽을 쌓아 원천적으로 접근을 차단하였다.

바로 다음 날 조사관 토마스 오더슨 신부와 코튼 총독과 해당 지역 관리들은 납골당 문을 막은 벽돌과 시멘트를 부수고 문을 열어 내부 상태를 확인하려고 하였지만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납골당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에 공구까지 동원해 간신히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문이 열리지 않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토마스 체이스 경의 관이 세워져 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납골당 내부에는 쇠사슬이 풀린 관들이 여기저기 흩어졌고 시신들도 관에서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전날 바닥에 뿌린 모래와 쇠사슬에 뿌린 밀가루에는 사람이 접촉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조사관과 총독, 관리들은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1820년에 납골당에 안치되었던 모든 관을 전부 영국 본토로 이장시켰는데 신기하게도 이후에는 납골당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이 미스테리한 사건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고 체이스 가문의 관들을 전부 영국으로 이장한 후에는 일이 멈추었지만 사건의 원인을 찾지 못한 영구 미제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소문은 사건이 멈춘 이후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지금도 이 납골당은 빈 채로 남아 있는데 오컬트 매니아들과 심령학자들이 찾아와 인증샷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 가서 사진 찍고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구글 검색창에 Chase vault라고 치면 사진들이 나올 것이다.

4. 사건의 원인?

4.1. 자연현상 탓?

처음 사람들은 이 납골당에 발생하는 이상현상이 지진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였는데 바베이도스는 과거에도 몇 번이고 강한 지진이 휩쓸고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추측은 금세 부정되었는데 해당 관들이 두꺼운 같은 여러 금속으로 만들어져 굉장히 무거웠으며 그런 금속제 관이 7개나 되었다는 점이 근거로 작용했다. 안 그래도 제일 크기가 크고 무거웠던 토머스 체이스의 관은 두께가 두꺼워서인지 인부 6~8명이 달라붙어야 들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고 한다. 게다가 관들을 모두 움직일 정도라면 굉장히 강한 지진이 일어나야만 했는데 정작 사건 당시 그 주변에서는 어떠한 지진이 관측되지도 않았고 주민들 중 진동을 느낀 사람도 없었다.

납골당 아래의 암반에서 지하수가 나오거나 태풍으로 일어난 홍수 때문에 관들이 물에 잠긴 채 쓸려 이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는데 실제로 바베이도스는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추측도 조사 결과 납골당 일대는 지하수가 나올 수 없는 곳이었고 설사 지하수가 있더라도 납으로 된 관들이 움직일 정도가 되려면 수압이 엄청나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홍수가 나더라도 관들이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물에 잠기지 뜨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며 이것이 원인이라면 바닥에 뿌려 두었던 석회가루나 모래가 멀쩡했던 사실과 충돌한다.

4.2. 영혼들의 움직임인가?

홈즈 시리즈를 지은 대문호이자 심령학에 관심이 매우 깊었던 코난 도일도 토머스 오더슨 신부와 함께 조사단 자격으로 납골당 내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코난 도일은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조사하였는데 그는 초자연적 힘이나 영혼 때문에 관들이 움직였다고 주장하였다. 영혼들의 힘이 일종의 작은 가스 폭발과도 같은 신비한 효과를 일으켜 관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특히 내부가 두터운 납 재질로 된 토머스 체이스의 관을 보고 납은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영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단식투쟁을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살한 격이 된 도커스 체이스로 인해 다른 영혼들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자연사로 죽은 영혼들은 자살로 죽은 영혼들을 싫어하거나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코난 도일의 의견처럼 심령적인 설명을 지지하는 다른 조사원들은 이 현상이 타지에 묻힌 영국인들의 유령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표현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일각에서는 아버지의 식민지 정책을 원망하면서 죽었던 첫째 딸 도커스 체이스가 자기 관이 아버지 토머스 체이스의 관 위에 올려놓이자 원망스러워서 그랬다는 얘기도 나왔고 토머스 체이스의 잔혹한 식민지 정책에 희생된 바베이도스의 흑인 원주민 노예들의 영혼들이 일으킨 복수라는 주장도 했다.

추가로 이 소문을 들은 한 부두교 주술사는 이 사건 자체가 영혼들이 납으로 만들어진 관을 싫어해 다른 관으로 바꿔 달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는 아마도 앞서 서술한 코난 도일 경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4.3. 원수들이 벌인 복수극?

체이스 가문과 척을 진 사람들이나 체이스 밑에서 고생한 노예들이 납골당 안을 헤집어 놓는 일을 벌인 후 석회가루나 밀가루를 가지고 와서 뿌려서 침입하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는 설도 있었다. 안 그래도 가문의 당주인 토마스 체이스는 노예들과 원주민들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등 생전에 주변 여기저기에서 원한을 샀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누구든 묘소를 뒤엎을 동기 자체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주변 상황을 감안한다 쳐도 석회나 밀가루를 뿌리거나 근처를 치운 흔적조차 없이 말끔한 채로 관들만 움직인 것으로 보아 이 의견을 받아들여도 여전히 의문스러운 이야기라고 한다. 이 주장은 조사 때도 밝혀지지 않았고 설령 그랬다고 해도 납골당 안이 크지도 않았고 비밀 통로조차 없었기 때문에 뿌린 흔적이나 손이 닿은 흔적 등이 남아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예 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 시멘트로 봉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관이 움직였으니 이 의견은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설령 문에 바른 시멘트 봉인을 다 부수고 들어갔다 나와서 다시 시멘트로 봉한다고 해도 이런 삽질을 하기엔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티가 확실히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견 중에는 물리적인 방법 외에도 심령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했다는 설도 있는데 체이스 밑에서 학대당하던 노예들이나 그 노예들의 동료와 지인들이 부두교 주문을 읊어 관 안의 시신들에 저주를 걸어 이리저리 움직이게 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딱히 좀비까지는 아닐지라도 납골당이나 그 안의 관 속 시신들에 저주를 걸어 고인들이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저주였을 것이라고 한다. 토머스 체이스의 관을 안장할 때 관을 싣고 온 마차의 말 두 마리가 놀라며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체이스의 폭정에 분노한 노예들이 일으킨 저주의 전조라고도 한다.

5. 진실

그런데 역사학자와 문헌조사학자들은 이 일화를 재조사하여 '역사적으로 모호하다.'고 결론지었으며 이 일화도 알려진 내용만 해도 기본적인 골자를 바탕으로 세세한 내용이 서로 다른 버전들이 10가지가 넘게 넘게 있다고 한다. 앞서 나무위키에 서술된 내용, 즉 한국 버전은 미국의 미스터리 서적과 일본의 미스터리 서적에서 번역된 버전이 정리되어 소개된 것이다.[8] 한국에 알려진 판본 외에도 영국과 미국 등에도 세부적인 내용이 다른 이야기들이 꽤나 돌아다녔다.

이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는 출판본은 제임스 에드워드 알렉산더(James Edward Alexander)가 1833년에 쓴 대서양 횡단 스케치(Transatlantic Sketches)라는 책인데 여기에 나온 이야기는 위에서 말한 체이스 가문의 가족관계부터 달라서 도커스 체이스가 첫째 딸이 아니라 둘째 딸이라고 했다. 여기엔 관을 쌓은 순서, 즉 누구 관을 누구 관 위에 어떻게 올렸는지 따위도 구체적이지 않고 그냥 세 개를 나란히 배치하고 그 위에 올렸다고만 하였다. 심지어 여기에도 위에서 말한 지진이나 침수의 가능성을 거론한다. 출처: 대서양 횡단 스케치 스캔본

1844년1860년에 출판된 다른 기사들이 이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면서 달라진 내용이 등장했는데 이런 기사에 실린 이야기는 누구의 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납골당이 누구에 의해서 지어졌는지, 가족관계 및 납골당에 묻힌 사람은 누구인지, 그 목사(신부)의 이름이 무엇인지 다르고 목사가 아니라 가문에서 모래를 뿌렸다고 하는 등 구체적인 부분이 상이했으며 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나온 '토마스 체이스'라는 인물이 언제 죽었는지 등의 내용도 다르거니와 숫제 납골당에 안장된 인물들이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한다. 체이스 가문의 관들을 영국으로 이장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구체적으로 영국 어디인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위에서 조사단원에 포함되었다고 언급한 코난 도일은 1859년이다. 사건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소리다. 코난 도일은 과거의 여러 기묘한 사건들을 조사해 보다가 바베이도스의 움직이는 관 괴담을 접하고는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 1919년 12월호에 <영혼의 법칙(The Law of the Ghost)>을 한 꼭지 기고했다. 사건 당시 조사단원으로서 참가한 적 따윈 없었고 그저 강령술 관련으로 조사하다가 움직이는 관 괴담을 접하고 다른 괴담과 함께 소개하고 '영혼이나 강령술을 좀더 진지하게 대하자고' 독자들에게 촉구하는 정도로 글을 마무리지었을 뿐이다.

이 사건으로 문헌 조사를 한 민속학자 앤드류 랭(Andrew Lang, 1844 ~ 1912)은 1820년 4월 납골당 개봉에 참석했다고 '주장'한 네이선 루카스(Nathan Lucas) 판사가 쓴 "Unpublished firsthand account"라는 문헌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 교회 ​​매장 기록부나 당시 바베이도스의 신문에서 관련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카더라 소문이 여러 기사에서 출판되고 여러 버전으로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간의 트릭이라면 트릭이라고 할 수 있다.[9]

이후 미국의 문헌조사학자 조 니켈(Joe Nickell)은 기본적인 간단한 괴담에 여러 살이 붙었음을 알아냈다고 한다. 즉, 처음엔 그냥 '바베이도스에서는 납골묘 안에 안장된 관이 왠진 몰라도 움직였다고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있었다가 어느 때부터 아치형 구조 납골당, 봉인 등 수많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파생되었음을 발견했는데 이는 식민지 시절 프리메이슨이 남긴 우화가 이 괴담에 섞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있을 법한 일화들과 프리메이슨이나 강령술 등의 신비학들이 당시 여러 소문들과 함께 섞여 만들어진 기묘한 도시전설이다.

6. 매체에서

이 사건은 해외의 공포, 미스터리·오컬트 등의 관련 서적에도 많이 등장하며 한국의 여러 미스테리 관련 서적이나 공포를 소재로 한 학생 문고 같은 매체에도 등장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편찬한 책인 세계상식백과의 심령세계에 대한 부분에도 이 사건이 실려 있었다. MBC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방송한 바 있고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도 풀리지 않는 의혹 기묘한 미스터리로 방송하였으며 프리한 19에서 마찬가지 미스테리 오싹 원정대에서도 소개되었다.

[1] 리더스 다이제스트세계상식백과에선 이 설을 기록했다.[2] 이 설에 따르면 제임스 엘리엇이 부인 엘리자베스를 이장하면서 이 이장 사항에 대해서는 월론드가와 지인들 외에는 거론을 안 하는 바람에 아랫사람들이 엘리자베스 부인의 시신이 관채로 없어진 것으로 오해하고 엘리엇 가문이 뱀파이어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소문도 잠시 돈 적이 있었다고 한다.[3]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다.[4] 교회 뜰의 묘역 안에 이 납골당이 있다.[5] 일각에서는 토마스 체이스의 아내였다는 설도 있으며 친구 월론드 경의 부인이었다는 말도 있다.[6] 노예들의 반란 때문에 비명횡사했다는 말도 있다.[7] 코난 도일은 강령술을 믿는 등 오컬트에 심취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 사건에 관심이 지대했다.[8] 1970~80년대 과학도서나 학습도서 또는 미스테리 도서들은 일본의 도서들을 중역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일본 서적에 나온 내용을 대충 옮겨왔을 터이다.[9] 예를 들면 철수가 손가락 하나를 다쳤다고 했더니 철수의 손가락이 잘렸다 → 철수의 팔이 잘렸다 → 철수의 사지가 잘렸다 → 철수가 죽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해질수록 과장되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