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밀양 박씨 |
출생 | 1890년 1월 17일 |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장고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장고마을)[1] | |
사망 | 1977년 5월 23일 |
전라남도 목포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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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복영은 1890년 1월 17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장고리(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장고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에 참가한 뒤 귀국한 남궁혁(南宮赫)이 뜻 있는 청년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때마침 서울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박복영 역시 참여하여 같은 기독교인 서상봉(徐相鳳)·곽우영·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강석봉(姜錫奉)·양병진(楊炳震) 등과 함께 미리 독립선언서·경고문·태극기 등을 만들어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수백명의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함성을 올렸다. 이 일로 동지 80명과 함께 체포된 그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이후 윤성덕(尹聖德) 목사와 함께 상해로 망명하려다가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州)형무소에 수감된 바 있으며, 1925년을 전후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 책임을 맡아 상하이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문재열(文在烈) 외 2명과 함께 친지 및 동지를 방문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다. 또한 1925년 3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비밀 문서를 서울에 있는 이상재에게 전달하기 위해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7년 5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복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