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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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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창원시장 재임시절2.2. 재선 국회의원과 제38대 경상남도지사

1. 개요

경상남도지사 박완수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생애

1955년 8월 10일[1] 경상남도 통영군(현 통영시) 도산면 도선리 신평마을의 농가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통영 도산초등학교, 고성 철성중학교(5회), 마산공업고등학교(19회)를 졸업한 후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동경전자[2]생산직으로 입사했다. 이때 친구의 권유로 1974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입학해 주경야독하였다. 1975년 대학교 편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1976년 졸업과 동시에 경남대학교 행정학과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77년 2월 19일 육군독자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제39보병사단에서 소총수로 복무했고, 1977년 9월 17일 이병으로 소집해제되었다.

1979년 2월 경남대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12월 제23회 행정고등고시합격하였다. 1980년부터 경상남도청 관료로 근무하면서 1994년 11월부터 1995년 6월까지 제33대 관선 합천군수, 경상남도청 농정국장·경제통상국장, 김해시 부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초기 생애와 공직 경력에 대한 내용은 창원시장 시절의 이 인터뷰에 자세히 나와 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04년 배한성창원시장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시장직을 상실하자 치러진 창원시장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창원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공자전거 정책인 누비자를 도입하는 등 전반적으로 시정을 무난하게 이끌었으나 2013년 진해구 육군대학 부지를 NC 다이노스의 새 야구장 건설 부지로 정하였다가 반발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NC 다이노스 홈구장 부지 선정 논란박완수/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바람.

2014년 2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창원시장직을 사퇴하고 새누리당 경남지사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홍준표에 밀려 패하였다. 이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20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재임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국회의원인 박성호를 경선에서 누르고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황교안자유한국당 대표가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이던 시절 창원시 시장을 역임한 바 있어 친황계로 분류된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경남지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고사했다.

2019년 12월 2일 초선 의원으로는 파격적으로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에 발탁되었다.[3] 단 박완수의 경우 국회의원 경력만 놓고보면 초선이지만 국회의원 이전에 창원시장을 3번씩이나 한 경력이 있고 창원시가 광역시급의 기초단체인 것을 감안하면 정치 경력면에서 전임 사무총장인 홍문표한선교 등에 밀린다고 보긴 힘들다.[4]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미래통합당의 단수 공천을 받았고, 59.04%의 득표율을 받아 더불어민주당 김기운 후보를 꺾고 재선 국회의원이 됐다. 또한 그가 당선되면서 2008년부터 시작된 보수 정당 사무총장의 총선 잔혹사[5][6]를 깨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당선에도 불구하고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을 합쳐야 간신히 개헌 저지선인 100석을 넘기는 수준의 대참패를 당했다.

2022년 3월 16일 경상남도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이주영과의 경선에서 승리, 국민의힘 경상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여 더불어민주당 양문석 후보를 36.27%p 차이로 누르고 제38대 경상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2.1. 창원시장 재임시절

민선 3기 배한성창원시장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시장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진 2004년 창원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당선하면서, 창원시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이때가 박완수 지사의 첫 선출직 공무원으로서의 출발점. 이후 민선4기 창원시장에도 당선, 2010년 7월 1일 새로이 출범한 통합 창원시 초대 시장까지 당선되었으니, 창원시정만 무려 3선, 10년을 이끈 셈이다.

후술된 논란 및 사건사고 부분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서술된 부분이 많은데, 이와 별개로 박완수 지사가 창원시정을 이끈 시절은 가히 창원시의 리즈 시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시정을 매우 안정적으로 이끌고[7] 시티메이어즈 세계 10대 시장에 선정된 이력을 갖고 있을 정도인데, 그만큼 도시 아이덴티티 및 브랜딩에 심혈을 기울일 정도로 개혁적 시정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가 환경수도 창원, Young City Changwon으로서 도시 캐치프라이즈를 내걸었고, 전국 최초의 도시 공유형 자전거 사업인 누비자 공영 자전거 서비스를 이끌어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내었다.[8][9] 이 때문에 창원시 어린이교통박물관, 창원시 자전거문화센터가 활성화 되는 등 창원 하면 '자전거 타는 도시' 로서 한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그 당시 시장이 바로 박완수 현 경남지사.

이 때문에 중화학, 기계공업도시로서 이미지가 강했던 창원에 '환경'을 내걸고 그린시티로서 브랜드 위상을 높였으며 그 결과 2008년 10월 28일부터 2008년 11월 4일까지 물새 서식 습지대를 국제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진행되었던 제 10차 람사르 총회를 창원시에서 개최하였다.[10] 국제적으로도 권위 있는 환경 총회로서 그 의의가 컸고, 무엇보다 전국 기초자치단체에서 이런 국제적 행사를 덥썩 개최한다는 것이 전국적으로도 큰 이슈이자 모범사례로 급부상 하였다. 이에 발맞춰 시정 차원에서 주남저수지 생태계 보존에도 심혈을 기울인 바 있다. 또, 기존 마산시에 상당부분 의존하였던 시외버스 교통 부분도 창원종합터미널을 창원시설공단에서 관리토록 하여 시설을 설립, 도시 미관 관리에 상당부분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옛 창원시 주민들에게 콘크리트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셈.

또, 문화 예술 부분 육성에도 시 차원에서 예산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예가 통합 창원시장 당선 이후에는 매년 7월 1일 개최되는 창원 시민의 날 축제에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유명 아이돌들을 축제에 대거 투입하여 시민 축제를 성대하게 열기도 하며 젊은 세대 눈높이에 맞는 시정 행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정도.[11][12]

2.2. 재선 국회의원과 제38대 경상남도지사

2014년 제36대 경남지사 출마 선언을 할 정도로 경남지사직에 관하여 근 10년 전부터 의욕적이었지만, 전략적으로 중앙정치에서 지방정치로 전향한 홍준표 전 지사와의 경선 패배, 이후 창원시 의창구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재선 역임하며 경상남도의 행정 지휘관으로서의 자리는 잠시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박완수 지사 본인은 본래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관료시절 경상남도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으므로 도정 행정 경험이 짙다는 명분이 존재하고[13] 실제로 경남 최대 도시 창원시에서만 무려 3선 시장을 역임한 사람으로 그 자질이 입증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리하여 본인의 8년 동안의 경남지사직 수행 숙원을 2022년 지방선거를 통해 마침내 이루었고,[14] 당선된 이후 2022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경남지사직에 취임하였다.

2022년 7월 11일 박완수 경남도정의 첫 경제사령탑으로 김병규 전 기재부 세제실장(진주시 출신)을 경제부지사로 임명하였고 7월 22일 행안부 지방재정정책관인 최만림 국장(고성군 출신)을 행정부지사로 임명하였다.

특이사항으로는 지사직 취임 직후 부울경 메가시티에 대한 전면 수정안을 제안하였다는 것이다.

경남 FC가 방만경영 문제가 발생하자 민선 8기 임기 내에 1부 리그에 승격하지 못할 경우 도민의 의견을 참고하여 해체하거나 K3리그로 하향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단장직을 창설하고 구단주 자리를 열어놓고 기업의 재정지원을 위해 공동구단주 형식이든 이사 위촉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받아서 도 재정에서 일정 부분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제안했으며, 이는 실제로 2024 시즌이 시작하기 전인 2월 13일 간담회가 열리며 공식화되었다. 줄어든 예산만큼 농협 포함 경남의 여러 기업의 이사들을 위촉하면서 충당할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1] 실제로는 음력 1954년 8월 26일(양력 9월 22일)생이라고 한다.[2] 산요전기의 한국 자회사였다.[3] 보통 유력정당의 사무총장은 3~4선 국회의원이 맡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4] 비슷하게 과거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맡았던 박맹우 역시 박완수와 비슷하게 재선 의원 신분으로 사무총장에 임명된 바 있다.이쪽도 국회의원 이전에 울산광역시장 3연임에 성공했었다.[5] 18대 총선 당시 사무총장이던 이방호 낙선, 19대 총선 당시 사무총장이던 권영세 낙선, 20대 총선 당시 사무총장이던 황진하 낙선.[6] 사실 '사무총장의 저주' 는 양당 모두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예외가 없었다. 민주당의 경우 18대 총선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신계륜은 낙선, 19대 총선 당시 사무총장이던 임종석은 불출마, 20대 총선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최재성 역시 불출마,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사무총장이었던 윤호중이 4선에 성공하면서 양당 모두 사무총장의 저주를 2020년에 깼다. 4년 뒤 22대 총선에서도 국민의힘 사무총장이었던 장동혁과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이었던 김윤덕 역시 당선되는데 성공했다.[7] 일단 당시 창원시 경제 자체가 리즈시절였다. 시정직을 처음 맡았을 시절 2008년 금융위기가 왔을 때에도 오히려 창원시는 무난히 지역경제 위기를 넘겼고, 오히려 관내 대기업들이 활발히 창원에 공장을 돌리며 승승장구 했을 시절이다. 집값 또한 오히려 부산광역시보다 더 높게 형성되며 도시 존재감이 확고했을 시절이다. 물론, 통합을 거치며 2010년대 후반부터는 수도권 과밀화, 조선 기계 불황으로 경쟁력이 많이 악화되었지만 말이다.[8] 2020년대 초인 현재에는 카카오바이크 등 공유형 모빌리티 서비스가 매우 활발히 뻗어있지만, 전국 최초로 공유형 모빌리티 서비스를, 그것도 공공 서비스로서 내건 창원시는 무려 시기가 10년 이상 빨랐던 셈이다.[9] 창원대로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은, 옛 창원시 시가지는 도로가 매우 네모반듯 하고, 이미 도시가 설계될 당시인 1970년대부터 자전거 전용도로가 시가지 전반에 설치가 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적극 활용토록 시정에서 유도한 정책이다.[10]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되었다.[11] 물론 추후 안상수창원시장이 당선되면서 시민의 날 축제 규모는 상당부분 축소되었다.[12] 또, 창원 K-POP 월드 페스티벌이 매년 창원에서 개최된 시점도 박완수 지사 때의 일이다. 이는 2020년대인 현재도 계속해서 매년 가을마다 진행중.[13] 김태호, 김두관, 홍준표, 김경수 전 지사 모두 경상남도청 소속 행시 출신 공무원은 아니었고, 이들 중 김태호를 제외한 셋이 공통적으로 도정 임기를 모두 못 채우고 사퇴한 경력이 있으므로 경남도민들은 도정 공백기를 무려 직접적으로 12년에 걸쳐 겪은 셈이다.[14] 한편 사퇴한 박완수 본인의 자리는 4선 의원 출신의 김영선이 재보궐선거를 통해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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