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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朴致祐
1909년 8월 22일 ~ 1949년 11월 20일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 시절2.2. 해방정국2.3. 월북2.4. 최후
3. 매체에서4. 평론/저술

1. 개요

일제강점기 때 철학자이자 교수이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시절

박치우는 1909년 8월 22일 함경북도 성진군(現 김책시)에서 개신교 목사 박창영(朴昌英)[1]의 아들로 태어났다.[2] 본적은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면 미길정 7번지.# 부친 박창영은 그의 출생 직후인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13년 3월 졸업한 후 함경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함경도 벽촌을 비롯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기에 박치우는 넉넉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

1928년 3월 함경북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제5회(문과B)로 입학하였다. 1930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철학 및 철학사를 전공했으며, 1933년 3월 철학과를 졸업하였다.[3] 졸업 직후 그는 지도교수였던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의 연구실 조수#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였다. 1934년 9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에 채용되어 경성제국대학 연구실 조수를 사직하고 4년여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그 사이, 1935년 1월 동아일보에 <나의 인생관: 인간철학 서상>을 기고하면서 민간 학술 영역에 발을 들였고, 같은 해 6월 「불안의 정신과 인테리의 장래」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36년 1월 잡지 『조광』에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 우리 비평사의 중요 논점이었던 고전론·교양론·신체제론 등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신남철(申南澈)·서인식(徐寅植)·인정식(印貞植) 등과 함께 전형기 비평계의 신경향을 대표하는 평론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1938년 3월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자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그해 4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및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고, 이때 이원조·김기림을 상관으로 만나기도 했다. 1940년 6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고대철학 전공으로 입학하였는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면서 퇴직금 천원을 받고 퇴사하였다. 1942년 6월경 그는 방응모가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해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독립시켜 개편한 '조광사(朝光社)'에 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1943년 2월 절필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2.2. 해방정국

그후 1945년 8월 베이징에 체류하던 중 단파방송으로 일제가 곧 항복할 것을 듣고 장춘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그는 재류동포들을 모아 '신경(新京)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대표위원에 취임하고 동시에 중국국민당 지하조직체와 연락하여 "조선민족과 중국민족은 조금도 충돌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이번 종전으로서 한층 더 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의 삐라와 포스터를 국민당의 이름으로 찍어 트럭에 실어 가지고 중국인 거주지에 뿌리고 중국인을 상대로 가두연설도 하는 등 쓸데 없는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이튿날인 16일 그는 조선학술원 산하 실무진에 선임되었고 18일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문학건설본부 평론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후 10월 북한을 거쳐 그 달 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1월 '임시정부 영수 환국 전국환영회'의 보도부 위원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자 평론부 위원에 취임하였다. 또 같은 달 조선과 소련 양국의 친선과 문화 교류 및 발전을 위하여 자연과학·인문과학·예술계·법조계·언론계 등 각계를 망라한 대표 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하여 '조소(朝蘇)문화협회'를 창립하였을 때 이에 참여하여 경과 보고를 맡기도 했다.

1946년 1월 좌익 29개 단체가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를 개최하자 박치우는 결성준비위원으로 1차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같은 해 2월 결성준비위원회 사무국 선전부원에 취임하였다. 이때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가 개최되자 참석하여 특별보고로서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는 이원조의 제안으로 긴급동의에 부쳐져 참가자들에 의해 결의안으로서 채택되기도 했다. 그는 이 발표를 통해 민족 감정에만 호소하는 국수주의 및 파시즘이 비합리성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합리성의 원리, 합리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민주주의 전선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이때 조선문학동맹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칭되었는데, 여기에 그도 가입하였다. 2월에는 YMCA 회관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4]에 조선문화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달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문화대책 연구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3월 25일 좌익 계열 신문인 현대일보(現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발행인 및 주필을 맡았다.[5] 4월에는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할 때 동행하였으며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의 '민족문화건설 전국회의' 첫째 날에 문화 일반에 관한 보고의 일환으로 <민족문화와 세계관>을 발표했으며, 6월에는 조선문학신인회 결성에 참여했고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자 재차 동행했다.

그러다가 그해 7월 13일 평안청년회 소속 20여 명의 청년들이 같은 달 11일에 기고된 <지방열을 타파하자!>라는 글이 우익을 자극한다며 현대일보사를 방문하여 박치우에게 4시간 가량 보복을 가했다. 이들은 곧 구속 수사를 받았으나 테러 사건이 아닌 단순 폭력 행위로 처리되어 곧 석방되었으며, 당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박치우가 고소를 한다면 폭력범으로 입건하겠다고만 표명했다. 결국 현대일보사는 16일 평안청년회 문봉제 대표에 사과문을 보내고 이튿날 문제의 기사를 취소했다.

한편, 박치우는 7월 20일부터 1주일 간 조선문학신인회에서 주최한 신인문학 강좌 강사로 활동하였고 8월 1일에는 조선민주청년동맹에서 개최한 청년 반전 대회에 참여하여 '반전과 문화'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같은 달 29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국농민회총연맹·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부녀총동맹 등의 민주적 대중단체들이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동문제를 객관적 입장에서 검토하기 위해 간담회를 개최하고 토의 결과 3당합동촉진위원회 구성하였는데, 이때 박치우는 사무장에 임명되었다.

2.3. 월북

그해 9월 미군 헌병들에 의해 현대일보사가 수사에 착수되었고 소속 기자들 다수가 연행되었으며, 이튿날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이 내린 미태평양 점령군사령부 포고령 제2호에 의해 현대일보가 박헌영·리강국 등과 관계되어 조선공산당의 성명서[6]를 싣었다는 이유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이때 박치우는 책임자로서 법정에 소환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잠적하였다. 결국 미군정청은 박치우의 부재를 이유로 현대일보의 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1947년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의 서상천에게 발행을 맡겼다.

1947년 초 박헌영은 서울 및 남한과의 연락을 위한 전초기지로 황해도 해주군에 지도부를 설치했는데, 박치우는 남조선노동당 간부 박승원(朴勝源)과 문학가 이원조, 이태준, 임화, 김태준(金台俊) 등과 함께 실무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부대시설로서 인쇄소와 출판사, 상사 등을 북측으로부터 제공받았는데, 북조선로동당 황해도당이 사용하던 제일인쇄소를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 서울에 살포하였다. 그해 10월 박치우는 노동당 간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의 정치부·교무부 주임을 맡았고 부원장을 겸임하였다.

2.4. 최후

1949년 9월 6일 박치우는 9월 총봉기를 위해 이호제 전 남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이 지휘하는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제1병단 5개 중대 360명과 함께 조선인민유격대 제1병단 정치위원으로서 태백산 지구를 통해 남하, 먼저 침투했던 제3병단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2개월간 국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0일경 태백산 지구에서 국군 및 경찰 토벌대와의 교전 중 사살되었다.[7]

3. 매체에서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태(李泰)는 저서 '남부군'에서 박치우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180명을 유격대로 편성해서 1948년 11월 오대산 지역에 침투시켰고 박치우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6개월 동안 약 600명의 유격대원이 추가로 투입됐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살되거나 도주했다.

4. 평론/저술

  • 현대철학과 인간문제 (조선일보, 1935.9.3.∼11.)
  • 세대 비판의 완성으로 (조광, 1937.1.)
  • 고문화 음미의 현대적 의의 (조선일보, 1937.1.1.∼3.)
  • 고전의 성격인 규범성 (조선일보, 1938.6.14.)
  • 예지(叡智)로서의 지성 (비판, 1938.11.)
  • 전체주의 철학적 해명 (조선일보, 1939.2.)
  • 교양의 현대적 의미 (인문평론, 1939.11.)
  • 지식인과 직업 (인문평론, 1940.5.)
  • 동아협동체론(東亞協同體論)의 일성찰(一省察) (인문평론, 1940.7.)
  • 사상과 현실 (백양당, 1946. 11. 20.)


[1] 1880년 ~ 1940년. 함경도 단천도호부(現 함경남도 단천시) 출생.[2] 1940년 1월 발간된 잡지 『문장』의 <조선문예가 총람>에는 출생지가 함경북도 성진군으로 기재되어 있는 반면, 1936년 1월 발간된 잡지 『조광』의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에 소개된 저자 약력에는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같은 시기 졸업한 동기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낸 박종홍·고형곤 등이 있었다.[4] 당시 여운형·허헌·박헌영·김원봉이 공동의장으로 취임했었다.[5]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주간을, 시인 김기림(金起林)이 편집장을 맡다가 나중에 이원조가 편집장을 맡고 김기림은 고문을 맡게 되었다. 외보책임자에는 김영건(金永健)을 기용했다.[6] 현대일보 제165호 9월 6일자 2면에 <하 중장 성명에 대하여 (상)―조공 중앙위원회 서기국 성명>(9월 3일 조선공산당의 성명서)[7]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1949년 12월 4일자에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했다'는 육군총참모장의 발언을 인용한 보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