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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설 白年雪 | Baek Nyeon-seol | |
<colbgcolor=#808080><colcolor=#fff> 본명 | 이갑룡 (李甲龍)[1] → 이창민 (李昌民)[2] |
본관 | 성주 이씨[3] |
출생 | 1914년 5월 19일[4]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예산리[5] | |
사망 | 1980년 12월 6일 (향년 66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가족 | 아버지 이형순, 어머니 선산 김씨 배우자 심연옥 (1957년 결혼)[6] 딸 이혜정, 아들 이길영 |
직업 | 가수, 작사가 |
종교 | 불교 → 여호와의 증인 |
데뷔 | 1938년 '유랑극단' 입단 |
경력 |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사가 태평양레코드사 전속가수 가수협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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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 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를 누렸다.2. 생애
1914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서 아버지 이형순(李瀅淳, 1887. 6. 20 ~ 1948. 5. 19)과 어머니 선산 김씨(1887. 4. 15 ~ 1918. 8. 3)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7]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습학교(現 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과 같은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8]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대 중반에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지만 극적으로 회복했다. 1979년,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이민생활에 적응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9]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2.1. 일제강점기 활동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지만 이후에 그의 이름은 친일명단에서 삭제되었다. 그 결정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심의 과정에서 기각이유로 첫째, 단체 소속인 전속가수의 경우 소속단체의 요구를 뿌리치기가 어렵고, 둘째, 이창민(백년설)은 대중음악 가수로 ‘혈서지원’ 등 군국가요를 부른 사실과 기타 친일행위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당시 대중가수가 지니는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이 참고돼 기각한다”고 했다. 출처 : 백세시대(http://www.100ssd.co.kr)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야마구치 요시코(중국명 리샹란)[10]가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3. 여담
1980년대에 건설부장관, 내무부장관, 대구직할시장을 역임하였던 성주군 출신의 이상희 전 장관이 한때 백사모 (백년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장을 맡으며, 백년설의 인생을 알아보기위해 전국에 있는 백씨의 지인들 수십명을 직접 만나 그의 인생경험과 철학, 가치관들을 알게된 그는 백년설이란 인물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고, 그가 한때 일제강점기 시절에 불렀던 일본 군가때문에, 그의 인생전체가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를 개탄하고 그의 인생을 재조명해서 《오늘도 걷는다마는》이라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야인시대 패러디로 자주 사용되는 심영의 장면 중 중앙극장 앞에서 학생들이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을 외치는 장면에 나오는 배경음악이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1940)이라는 곡이다.
고향인 성주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이 개최될 때마다 백년설이 언급된다.
4. 대표곡
- 1939년 유랑극단
- 1939년 두견화 사랑
- 1939년 일자일루
- 1940년 나그네 설움
- 1940년 번지없는 주막
- 1940년 산 팔자 물 팔자
- 1941년 고향 길 부모 길
- 1941년 대지의 항구
- 1942년 고향 설
- 1943년 고향 소식
- 1940년대 어머님 사랑
- 1940년대 석유등 길손
- 1940년대 만포진 길손
- 1940년대 복지만리 - 처음 복지만리가 나왔을때에는 3절이 일본어였던 점에서 3절 가사를 바꿨으나, 2000년대 이후부터 방송사 내부 규정으로 사실상 방송 금지곡이 되었다.
- 1940년대 눈물의 수박등
[1] 본명이 이갑용(李甲勇)이라는 설도 있다.[2] 족보상 이창민(李昌珉).[3] 문열공파 21세손 ○용(○龍) 항렬.(족보)[4] 성주이씨대동보 4권 912쪽에는 11월 19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5] 現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6] 아내의 노래 등을 부른 가수이다.[7] 성주 성밖숲과 성주고등학교에 백년설 노래비가 있다.[8]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9] 일설에 따르면 더 생존할 수 있었는데 종교적 수혈거부로 사망하였다고 하는 말도 전해진다. 백년설이 50년대부터 심취했던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다른 사람의 피가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교리를 어긴다고 여겨 수혈거부로 죽는 신도가 꽤 있다.[10] 중국인으로 위장해 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펼친 일본인 여가수. 히키아게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