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나라의 보르지긴씨 황족.《조선왕조실록》과 《명사》에서는 백백태자(伯伯太子), 《고려사》에서는 박박태자(拍拍太子)라고 일컫는다.
2. 생애
제2차, 제3차 대월(베트남) 원정때 원나라군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의 손자이자,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였던 바이바이(백백)는 위순왕(威順王) 콘체크부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순왕은 지정 23년(1363년) 운남과 촉을 오가며 명군과 싸우다가 성주(成州)에서 전사했는데, 백백은 아들 육십노(六十奴)와 함께 사로잡혔다. 이후 홍무 7년(1374년) 홍무제의 조서를 받고 운남에 가서 백성들을 회유한 일이 있었다.홍무 15년(1382년) 백백태자의 가속은 양왕(梁王) 바자르오르미(把匝剌瓦兒密)[1]의 가속과 함께 고려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고려 제34대 공양왕 원년(1389년) 홍무제가 백백의 아들 육십노와 환자(宦者) 복니(卜尼)를 불러오게 했다. 이듬해(1390년) 7월에 명나라에 도착한 두 사람은 홍무제로부터 은과 교초를 하사받았다. 1392년에는 공양왕의 왕세자 왕석이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양왕의 자손이었던 아얀테무르(愛顔帖木兒) 등 4명과 함께 돌아왔는데, 황명에 따라 이들도 백백태자와 모여 살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5년 태조 이성계로부터 쌀과 콩, 포(布)를 하사받았고, 백백은 1400년 환자를 보내 정종에게 말과 금고리(金環)를 바쳤다. 1404년 10월 4일 제주에서 죽었다.
3. 가족관계
- 처
- 아들: 육십노
- 딸
- 사위: 임울
백백 사후 40년 뒤인 1444년, 세종은 백백의 처가 늙고 빈궁함을 불쌍히 여겨 제주에서 특별히 존휼할 것을 명령했고, 사위 임울(林鬱)의 군역을 면제해 장모를 보필하도록 했다.
[1] 양왕은 저항을 계속하다가 결국 이 해에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