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친위대 돌격대지도자 베른하르트 크뤼거 Bernhard Krüger | |
출생 | 1904년 11월 26일 |
독일 제국 리자, 작센 왕국 | |
사망 | 1989년 1월 3일 (향년 84세) |
서독 함부르크 | |
복무 | 친위대 SD (1931~1942) |
소속 | 친위대 국가보안본부 (RSHA) - 해외 정보국 VI F 4a 부서 |
국적 | 독일국 -> 서독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최종 계급 | 친위대소령 |
[CLEARFIX]
1. 개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2. 상세
1904년 11월 26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28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당원번호 528,739번으로 입당했다.그는 친위대에 입대 후 빠르게 진급하면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군번은 15,249였다.
위조 분야의 전문가로, 영국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목적으로 위조 영국 지폐를 생산하는 비밀 작전인 유명한 "베른하르트 작전"을 이끌었다.
3. 베른하르트 프로젝트
"베른하르트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실행했던 비밀 작전으로 영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위조 영국 지폐인 파운드화를 생산하는 작전으로, 지시한 사람은 하인리히 힘러였다. 진짜 영국 파운드 지폐와 매우 흡사한 위조지폐는 영국 경제를 약화시키고 파운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영국 경제 곳곳에 스며들 예정이었다.작전의 이름은 총괄책임자로서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크뤼거 소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작전은 그가 위조 지폐 제조를 담당하는 유대인들을 감독하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1944년까지 수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이나 독일인 수감자들 중 화폐 및 서류 위조 전과자, 그래픽 디자이너, 경제나 은행 관련 업종 종사자 등을 여럿 선발해 위조 지폐를 생산해냈다. 이들은 비록 수용소 내 감금 생활을 하긴 했어도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수감자 번호가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쓸 수 있었고, 죄수복에 삭발이 아닌 사복을 입고 머리를 기를 수 있었으며, 제대로 된 식사와 독일군 사병 생활관 수준의 거주 공간이 제공되고 탁구대와 같은 소소한 오락 시설도 주어지는 등 수감자들치곤 나름 사람 대접은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위조 지폐가 무사히 유통되는 등 성과를 냄에 따라 크뤼거 소령이 동기 부여 차원에서 포상으로 처우 개선을 단계적으로 시켜 주기도 했다. 단, 동원된 수감자들 일부가 자신들의 실력을 믿고 나태해지거나 고의 태업할 조짐이 보일 때마다 "너희 말고도 대체할 인력은 얼마든지 뽑을 수 있으니 착각하지 마라"는 경고를 가끔씩 했다고 한다.
베른하르트 작전 중에 약 1억 3천만~3억 파운드에 달하는 위조지폐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치는 1등급 위조품들은 스파이들의 공작금으로, 2등급 위폐는 스위스, 포르투갈, 스웨덴 등 중립국과의 무역 결제용으로 사용했으며 가장 질이 떨어지는 3등급은 비행기로 영국 상공에서 마구 뿌려버릴 계획이었다. 나치는 이것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영국의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영국 상공에서 위폐를 살포하는 작전은 비행기를 못 구해서 실행되지 않았다.
파운드화의 위조 성공 이후 미국의 달러화도 위조하면서 프로젝트를 이어나갔지만 결국 베른하르트 작전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동쪽에서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 소련군이 몰려오고 있었고 남서쪽에서는 아프리카 전역을 정리한 후 순차적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영국군과 미군이 상륙하면서 또다시 제대로 양면전선이 열려 헬게이트가 시작된 독일의 미래는 그저 암울하기만 했다.
힘러는 강제수용소를 폐쇄했듯이 위조지폐 공장도 폐쇄하고 수용자들을 모두 처리해서 프로젝트 자체를 은폐하려고 했다. 하지만 크뤼거 소령은 이 조치에 맹렬하게 반대했는데,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자기도 일선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크뤼거 소령은 힘러에게 "독일이 연합군에게 점령된 이후에 지하에서 저항운동을 이어가려면 위조 증명서와 외조지폐를 제작할 공장이 필요하다"라고 설득했고, 힘러가 이에 동의하면서 프로젝트를 유지하고 공장을 알프스 요새로 이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세가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결국 프로젝트는 중단되었고 1945년 수감자들은 오스트리아(당시 나치 독일 오스트마르크주)에 위치한 에벤제 강제 수요소로 이송되었으며, 인쇄기 등도 오스트리아 곳곳에 유기하거나 파괴했는데 일부는 연합국에 발견됐다. 위조지폐 중 일부는 이탈리아와 영국으로 유통되어 흩어지거나 손실되었고 전쟁 말기에 친위대원의 급여로 지급되기도 했으며 나머지는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에 의해 압수되었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남은 물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위조 파운드화가 얼마나 정교했던지 유입되었던 영국에는 1980년대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화폐개혁을 했다.
역사상 가장 큰 위조 작업 중 하나로 간주되는 베른하르트 작전은 많은 국가에서 지폐의 보안 기능에도 영향을 미쳐 그러한 위조가 얼마나 위험하고 효과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수감자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살해될 수도 있었으나, 크뤼거 소령이 그들을 풀어주는 대신 자신이 수감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해 줬음을 증언해달라고 거래하여 대부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수감자들도 크뤼거 소령이 일단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긴 했으니 그 정도는 납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전을 다룬 작품으로, 위폐 제조에 동원된 유대인 생존자들 중 한 명인 아돌프 브루거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2007년 개봉한 오스트리아의 영화 카운터페이터가 있다.
4. 종전 이후
전후 베른하르트 크뤼거의 머그샷 |
1946년에 종전 후 그는 다셀에서 영국 육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2년간의 구금 후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그의 재능을 활용해 속죄케 하기로 한 프랑스 정부의 방침으로 1년간 프랑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위조 문서를 제조하는 일을 맡았다.
1948년에는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왔으며, 주요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인으로 등재되지 않았고 서독 정부가 수립된 1950년대에 탈나치화 법원에서도 그가 감독했던 수감자들의 증언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석방 후 그는 자신이 주도했던 위조 작전용 종이를 납품하던 제지업체인 하네뮐레 사(Hahnemühle)에 취업해 근무했으며 1989년 1월 3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향년 8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4.1. 무죄 선고의 이유?
당시 그가 주도한 위조지폐 제작은 전시에는 다른 국가들도 하던 짓거리(...)라서 전쟁범죄라고 보긴 어려웠으며, 그는 지폐 제작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서 작업에 참여하는 유대인들에겐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해 주었고, 이 때문에 당사자들도 그에게 우호적으로 증언을 해 주어서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물론 그렇다고 친위대 소속으로 수용소에서 근무했고 전쟁이 끝나기 전 일부 유대인 수감자들의 사살도 지시한 적이 있어 아주 무고한 인물은 아니다. 1970년대까지 서독의 주요 정치, 행정, 군사 등 국가 전반을 재건한 인물 상당수가 나치 시대의 능력 있던 공직자, 군인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과거 청산에 미적지근했던 것이 유대인들의 증언과 더불어 그가 무죄를 선고받았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