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23:47:42

변옥주

파일:대한민국 법원 휘장.svg
서울고등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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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沃柱
1906년[1] 6월 29일 ~ 1962년 2월 25일 (향년 55세)

1. 개요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대한민국법조인이다. 본관은 초계(草溪)[2]. 창씨명다나카 마모루(田中護, たなかまもる)이다.

2. 생애

1906년 6월 29일 전라남도 장흥군 군내면(현 장흥군 장흥읍)에서 아버지 변일수(卞一洙, 1876.7.16. ~ ?.1.3.)[3]와 어머니 김해 김씨(? ~ ?.7.16.)[4]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5]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히로시마고등학교[6] 졸업 후 1931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해 1935년 졸업하였다.

1935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1936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로 등록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 판사로 발령되어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 부산지방법원, 청진지방법원,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계속 재직하면서 1948년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1951년 전주지방법원 원장, 1954년 서울고등법원 원장을 지냈다. 1958년 10월 29일에 대법관으로 임명되어[7] 진보당 사건상고심을 맡아보기도 하였다.[8] 그 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인 6월 9일 사표를 제출했다.[9] 이후 변호사를 개업하여 활동하였다.

1962년 2월 25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구기동[10]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뒤쪽에서 500m 떨어진 비봉 서쪽 골짜기를 홀로 등산하던 중 실종되었고, 그날 오후 1시 5분에 또다른 등산객에 의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모진 바람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한다.[11] 유해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 초계변씨대동보 권3 173쪽에는 1896년생으로 오기되어 있다.[2] 이조참판공파(吏曹參判公派) 28세 상(相) 항렬. 족보명은 변상주(卞相柱).[3] 자는 태일(太一).[4] 김석신(金錫信)의 딸이다.[5] #[6]히로시마대학[7] 1958년 10월 31일 동아일보 기사[8] #[9] 1961년 6월 9일 조선일보 기사[10] 1975년 10월 1일 종로구 관할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11] 1962년 2월 26일 조선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