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0:56:20

별건곤

1. 別乾坤2. 잡지
2.1. 개요2.2. 창간 취지2.3. 역사2.4. 구성
2.4.1. 대경성 탐사기
2.5. 인기와 영향력

1. 別乾坤


명사
특별히 경치가 좋거나 분위기가 좋은 곳을 이르는 말.

건곤(乾坤)이란 천지, 세계와 같은 말인데, 앞에 별() 자를 붙여 별난, 혹은 특별한 천지라는 의미가 되었다. 유의어로는 꿈나라, 이세계, 별천지 등이 있으며, 모두 빼어난 장소를 일컬어 이 세상 경치가 아니라는 식의 은유로 사용하는 말이다.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아니나, 본 문서의 2번 항목에서 설명하는 유명한 잡지의 표제가 『별건곤』인지라, 별건곤이라 하면 대개 동명의 잡지를 가리킨다.

2. 잡지

별건곤
別乾坤
파일:별건곤 창간호.jpg
▲ 별건곤 창간호 (1926년 11월 1일)
<colbgcolor=#e3ddcb><colcolor=#000> 분류 잡지, 종합지, 월간지
출판사 개벽사
창간 1926년 11월 1일
종간 1934년 7월 1일

2.1. 개요

“아픈 생활에서 때때로는 웃어도 보아야겠다. 웃어야 별수는 없겠지마는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것도 아니다. 우리는 형편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지만 웃음을 웃을 줄도 모른다. 자! 좀 웃어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너털웃음 웃어보자. 그렇다고 아픈 것을 잊어서도 아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써 1년이나 전부터 취미와 과학을 갖춘 잡지 하나를 경영해 보자고 생각하였었다. 『개벽』이 금지를 당하자 틈을 타서 『별건곤』이라는 취미잡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별건곤 창간호 여언(餘言) 중 일부분
개벽사(開闢社)에서 1926년 11월 1일부터 1934년 7월 1일까지 발행했던 월간 종합 잡지로, 제호인 별건곤은 본 문서의 1번 항목에서 설명한 별건곤의 의미와 같이 낯설고 다른 세계를 소개하겠다는 잡지의 목표를 담은 것이다. 취미나 가벼운 읽을 거리를 표방하였다. 사실상 한국 대중잡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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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창간 취지

빈취미증만성의 조선인(貧趣味症慢性의 朝鮮人)[1]

『빈취미증만성(貧趣味症慢性)에 걸린 조선인』은 거의 생활의 조락(凋落)이 극도에 달하야 그 기식(氣息)은 자못 엄엄한 상태에 잇다고 말하고 십다.

(중략)

진실로 그럿타. 우리 조선에 활동사진관(活動寫眞館)[2]이 몃 개지만 그것이 노농대중에게 무슨 위안을 주엇스며 무도(舞蹈), 음악이 유행하지만 그것이 또한 노농대중에게 무슨 취미가 되엿느냐? 박물관, 동물원, 공원, 극장이 다 그러하다. 그것은 다 일부 인사의 독점적 향악(享樂) 기관(機關)이 되고 마랏다. 우리의 노농대중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든지 이 빈취미증(貧趣味症)을 면(免)해 볼 길이 업다. 이제 만성(慢性)에서 운명을 재촉할 뿐이다.

(중략)

······나는 이번 나온 이 취미 잡지가 빈취미증만성(貧趣味症慢性)에 걸린 조선인에게 기사회춘(起死回春)의 양제(良劑)되기를 바라고 붓을 놋는다.”
별건곤 창간호에 실린 「빈취미증만성의 조선인」 중 일부
별건곤 창간호에 보면 「빈취미증만성의 조선인(貧趣味症慢性의 朝鮮人)」이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글의 전문을 대략 살펴 보면, 별건곤이 당시 엘리트 계층에서만 향유되던 근대적 교양과 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는 목적을 띄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전까지는 거의 민족 계몽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졌던 잡지들이 별건곤을 기점으로 하여 여가오락 등의 장르로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훗날 출판된 『삼천리(三千里)』나 『조광(朝光)』으로 이어졌다.

2.3. 역사

천도교에서 세운 잡지사였던 개벽사는 별건곤을 발행하기에 앞서 1920년부터 1926년까지 개벽이라는 언론 잡지를 발행하였던 바가 있었는데, 창간 이후 불과 4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미 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해 다른 잡지들을 압도할 정도로 크게 흥행하였고, 당시 조선일보에서도 개벽을 가리켜 조선 잡지계의 패왕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대중 친화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여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라는 화려한 기록을 세웠고, 결국 1926년 8월 1일에는 일제의 압박에 의하여 폐간하고 말았다.

별건곤은 개벽이 폐간하고 3개월이 지난 1926년 11월 1일에 개벽의 후속작으로 나오게 되었다. 일제의 언론 검열에서 보다 자유롭고자 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인의 계몽을 표방하였던 개벽과는 달리, 별건곤은 여러 취미나 가벼운 읽을 거리를 실은 취미 잡지를 표방하였다. 다만 창간호의 '여언(餘言)'[3]이라고 한 편집 후기에서는 "취미라고 무책임한 독물(讀物)만을 늘어놓는다든지, 혹은 방탕한 오락물만을 기사로 쓴다든지 하는 등 비열한 정서를 조장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취미는 할 수 있는 대로 박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취미잡지를 시작하였다."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별건곤은 대중 잡지를 표방하였지만, 시사적인 내용도 많이 실으려고 하였다.

1931년 2월호까지는 200쪽가량의 분량으로 한 권에 50전씩 판매되다가, 1931년 3월호부터는 분량을 60쪽 정도로 줄이고, 가격을 종전의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5전으로 내렸다. 이러한 파격적 조치를 단행한 목적에 대해서 “일반 대중에게 보다 널리 읽히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다만 이러한 조치에는 당시에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잡지들 간의 경쟁을 의식한 것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값을 5전으로 내린 뒤부터는 독자층이 지식인 중심에서 일반 대중으로 급격히 퍼졌고, 당시의 인기는 발생 3일 만에 절판된다고 하여 '삼일 잡지', 혹은 '절판 잡지'라고 부를 만큼 대단하였다. 그러나 이 즈음부터 시사적인 내용은 점차 사라지고, 에로그로테스크한, 소위 통속적인 기사들을 많이 싣기 시작하였다. 결국 1934년 8월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4]

2.4. 구성

별건곤에는 ·소설·희곡 등의 문예 창작물부터 경험담·에세이와 같은 수필, 상식·역사·식문화·음악 등의 지식 분야, 그리고 번역물·전기물(傳記物)·사설·르포·인터뷰·풍자·실화·야담(野談)·기담(奇談)·괴담·만화 등 광범위한 장르의 이야깃거리가 실렸다. 현대에는 신문조차도 이러한 양식으로 발행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하지만, 실은 이러한 양식은 별건곤이 그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사적인 내용도 많이 실었는데, 「조선 자랑호」(3권 2호)나 한용운·이상협 등의 「생활개선안」(통권 16·17호)·「교육계·독서계·문단·공업계·종교계 등의 최근 10년간의 변천」(5권 1호), 언론계 등 각계의 인사들의 「조선은 어디로 가나?」 등이 있다. 이는 1920년대 후반, 마땅한 시사 잡지가 없는 상황에서 별건곤이 단순 대중 잡지를 넘어 시사 잡지의 기능까지도 담당하였던 것이다.

또한 별건곤에 글을 실은 사람만 봐도 한용운, 방정환, 이상화 등 유명한 사람이 많다.

2.4.1. 대경성 탐사기

별건곤에서 가장 특색 있는 시리즈라고 한다면, 1927년 2월호부터 1929년 2월호까지 만 2년간 연재된 「대경성 백주 암행기」와 「대경성 암야탐사기」라고 할 것인데, 이게 요즘 말하는 현장르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경성의 불특정 지역을 정해진 시간 동안 탐방하고, 그 즉시에서 기사거리를 찾아 쓰여진 기사인 것인데, 「암야탐사기」는 경성의 한밤중 풍경을, 「백주 암행기」는 경성의 낮 풍경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글에는 거지노숙자부터 백화점끽다점모던보이모던걸, 음란한 연애 스토리, 기생이 된 여학생, 야앵(夜櫻, 밤벚꽃놀이), 마약중독자, 인신매매범 등 경성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들, 그리고 한밤중 경성의 뒷골목이나 경성일보, 백화점, 한성은행·재판정에서 눈물 흘리는 사연, 경찰서, 검사국 대기실, 직업소개소, 경성의 토막민 등 당시 근대 도시로 변모하던 경성의 풍경과 계급·계층의 분화 양상을 낱낱이 낱낱이 파악할 수 있어 오늘날에는 아주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재밌는 것은, 이것이 일개 기자가 임의적으로 쓰는 기사가 아니라 편집장의 명령으로 기획된 시리즈라서, 밤 12시에 출동하느라 졸린 눈을 비벼 뜬다든지, 밤거리를 다니기 위해 동네 야경꾼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 등 기자들의 웃지 못 할 비하인드 스토리들마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당시 별건곤 편집진이 이 시리즈의 리얼리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2.5. 인기와 영향력

당시 별건곤의 정확한 판매 부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략 2만 명 정도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발행 부수만으로 그 인기를 다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에는 책 하나를 여러 사람들이 돌려서 보던 게 흔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것과 맞먹는 정도의 인기였다고 볼 수 있다.

별건곤은 비록 8년 정도 발행하다가 사라졌지만, 별건곤이 발행을 끝낸 지 거의 9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별건곤은 종종 이나 방송에서 언급되곤 한다. 그 이유인즉, 별건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 때문이다. 별건곤은 당시 시대상을 면밀하게 기록하였는데,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던 문물이나, 조선 시대가 끝났음에도 당시까지 남아서 이어지고 있던 각지의 고유 풍속·음식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쪽에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이 음식의 기원이나 당시 모습, 명칭 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 지방의 별미에 대해 소개하는 정도의 글이었겠지만, 옛날부터도 음식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아 여러 음식들의 역사가 추정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이 분야에 있어서는 별건곤이 조선시대와 현대 사이의 미싱 링크를 어느 정도 채워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근대화를 거치며 생겨난 음식들이나, 일본에서 건너오던 외래 음식들이 소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당대에 '대구탕반(大邱湯飯)'이라 불리던 육개장대구에서 생겨났다는 것이 확실히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 역시 별건곤이다.

[1] '만성적으로 취미가 빈약한 조선인'이라는 뜻이다.[2] 영화관[3] 현재 나무위키에서 애용하고 있는 여담(餘談)과 같은 말이다.[4] 개벽과 같이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