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6:22:10

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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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사회계급2. 신라, 고려, 조선행정구역3. 지명
3.1. 부곡면3.2. 부곡동
3.2.1. 釜谷洞3.2.2. 夫谷洞3.2.3. 富谷洞
3.3. 부곡리

1. 중국의 사회계급

部曲

일종의 가병(家兵), 사병, 사졸을 뜻하는 단어였다가 남북조시기를 거쳐 천민을 부르는 단어가 되었다. 객(客)이라고 하기도 하며 위진남북조시대 부곡은 군대의 편제 및 사병으로 불렸다. 남북조를 거쳐 수나라-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부곡은 노비와 양인 사이에 분류되는 사회계층이 되었다.

부곡의 기원은 후한 말년에 황건적의 난 이후,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제후들이 정벌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세족의 큰 성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방어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 사람들은 세족대성의 종족, 하객, 자제, 문하생, 고리라고도 하였고, 이들을 자위적 군대로 편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부곡이라고도 불리고 가병(家兵)이라고도 불리며 전쟁이 없을 때에는 부곡도 소작하였다. 또 정식 군대에서도 부곡이 있었다. 후한 말에는 장군에 속하는 부곡도 변화되었고, 부곡은 죽을 때까지 장수의 뒤를 계속 따랐고 개인 소유적인 색채도 강화되었다. 작전하지 않을 때에는 이들도 둔전했다. 이후에 일부 장수들은 이 제도의 유리한 점을 보고 더욱 널리 이용하였다.

부곡은 소작인과는 달리 반드시 토지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곡은 병사로서 소속 장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부곡의 주인은 '보호'의 책임이 있다. 부곡은 주인이 시킨 임무를 완수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농업이나 노역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었고 주요 직책은 역시 군사 작전이며 군사 행동이 잦을 때가 많았다. 모든 부곡이 사적인 소속인 것은 아니었으며 일찍이 누군가의 손에 장교로 있었던 사람들도 누군가의 부곡이라고 칭했다. 위진시대[1]에는 여전히 병사, 사졸의 의미로 쓰였으며 위진 이후 부곡의 지위가 비천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존경받는 빈객(宾客)이 있어 부곡의 위상은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다.

이후 시대가 지나 남북조 전기에는 주인이 부곡을 천인으로 간주하게 되었지만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북주 시대부터 천민의 호칭으로 사용되며 당나라 시대에 천민으로서의 용법이 정착한다. 노비와 달리 매매되지 않고 법적으로는 노비보다 상위에 놓였다. 부곡의 천인 신분은 <당율(唐律)>에서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북주의 방침을 계승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런 천인으로서의 부곡은, 이미 군사 조직과는 관계 없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당말, 오대십국시대, 송나라에 이르러, 이러한 부곡 제도는 서서히 붕괴되어, 대신 소작인제가 흥성했다. 부곡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주와 계약을 맺기 위한 방식으로서, 신체 및 이주의 자유가 있고, 법적으로 소작인은 더 이상 천민이 아니라 양민이었다. 소작인은 소작료를 계약할 때 많은 선택권을 가졌고, 소작인이 토지를 지주에게 돌려주면 소작인은 즉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송대의 호남북로(湖南北路), 사천 등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소작인이 대지주의 비호에 의존했고 소위 소작인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부곡이나 다를게 없었다.

2. 신라, 고려, 조선행정구역

일반적으로 고려의 행정구역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잡다한 언급을 생략했을 뿐이지 신라 때부터 존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신장조에서도 신라에서 전정과 호구 미달로 이 될 수 없는 곳을 향이나 부곡으로 해 상위 행정구역에 소속시켰다고 되어있다. 유래는 위 1번 항목의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같이 묻어왔을 것으로 유추 가능하지만, 사실 견련적 증거는 없다. 아래 서술된 것처럼 고려 시대 부곡이 완전히 천민 구역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반론이 있기 때문.

(鄕), (所),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이 있었으며 천역에 종사하는 천민들이 거주하는 구역이었다. 향과 부곡민들은 농업, 소의 주민들은 광업과 수공업에 종사했었다. 그러나 향, 소, 부곡, 처, 장 등의 특수 행정구역을 천민 주거구역으로 보는 논거가 부족하다는 반론도 존재하며, 실제로 부곡에 사는 이들 중 상당수가 성씨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한다.

시간이 흘러 환경이 변하면서 향, 부곡을 일반 현으로 바꾸거나, 반대로 현을 향, 부곡으로 바꾸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밀성군은 고려시대에 농민 반란이 진압된 이후 귀화부곡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반대로 류청신이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공을 세우자 고향이었던 고이부곡이 고흥현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밀성군 도읍 바로 남쪽의 수산현(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은 신라 때 천산부곡(穿山部曲)이었는데 고려 때 수산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 초까지는 이런 부곡들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하나하나 없어져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작성된 중종 때는 전국에 14군데만 남아있었다고 하며# 이후 부곡은 전부 없어졌다.

3. 지명

3.1. 부곡면

  • 경남 창녕군 부곡면. 부곡온천과 지금은 폐업한 부곡하와이로 유명하다. 위에 나와있는 부곡이 있었던 지역에 속하지만(정확히는 그 옆동네다), 그 부곡과는 한자가 다르다. 이 곳도 아래 서술된 부곡동과 마찬가지로 '釜谷'이다.

3.2. 부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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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釜谷洞

3.2.2. 夫谷洞

3.2.3. 富谷洞

3.3. 부곡리



[1] 삼국시대, 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