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4:00:18

비오 12세/교황 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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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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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스칼리나 수녀2. 정치적 성향3. 나치 관련 논란들4. 건강 문제5. 동아시아 관련 행보6. 성모몽소승천 교의 반포7. 기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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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스칼리나 수녀

몇몇 논자들은 비오 12세를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 겸 가정부 노릇을 한, 비오 12세 재임 내내 여교황 소리까지 들었던 바티칸 정계의 1인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를 들고 있다. 파스칼리나 수녀와 당시 교황청 국무차관이었던 도미니크 타르디니 추기경, 티스랑 추기경과의 배틀은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근위병들을 불러 추기경을 내보내라고 명령하자, 근위병도 두 추기경도 모두 당황하고 어이없어 잠시 멍하니 있었고, 근위병들이 추기경들을 강제로 내보내려 하자 티스랑은 파스칼리나를 죽여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장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너무 적이 많아서 비오 12세가 사망한 뒤, 배웅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로이 바티칸을 떠나야 했다. 더군다나 후임 교황이, 하필 그녀가 평생 경계했던 인물이었으니 더더욱. 하여간, 수녀는 바티칸을 나온 뒤 몇 년 후 바오로 6세의 지원을 받고 거물급 자선 사업가가 되어 죽기 직전까지 정열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활동 시기가 2차 세계대전 때인지라 그에 따른 일화도 많다.

2. 정치적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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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 본인은 부패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19세기의 교황들 수준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다. 후임이 탈권위적이었던 요한 23세라 더 부각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비오 12세의 권위주의적 면모는 재임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거의 중세에서나 쓸법한 극존칭이나 예의범절을 요구한다거나…권모술수에 탁월했기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바티칸 정계는 2차대전 시기를 제외하건 항상 정쟁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다. 친 교황파와 반 교황파의[1] 대립이 거셌는데, 비오 12세는 친 교황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반 교황파를 견제하는 등의 수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가졌던 교황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 아래에 언급할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도,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추기경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교황으로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비오 12세의 건강이었다. 재임 후반기에 건강이 악화된 비오 12세는, 도저히 교황으로서 종교적 책무와 정치적 책무를 함께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교황 본인은 종교적 책무에만 집중하고 정치적 책무는 대부분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넘겼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는 굉장히 유능했고, 교황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으며, 정치·종교적 성향까지 비오 12세와 비슷했다.[2] 당장 비오 12세가 권력을 강화할 때도 파스칼리나 수녀가 참모 겸 행동대장으로 맹활약했다. 능력이나 공로로 보면 비오 12세가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긴 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수도회장도 아닌 일개 수녀였다는 것이다. 일개 수녀가 바티칸의 추기경 저리가라 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바티칸 정계는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비오 12세가 한껏 강화시킨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파스칼리나 수녀는 이후 수년간 일명 여교황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바티칸 정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이런 상황은 비오 1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임자인 요한 23세는 당시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이 보기엔 너무 탈권위적이라 그걸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전권을 넘겨받은 파스칼리나는 좋은 말을 해주며 비오 12세의 비위를 맞춰주기는커녕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강직한 성품이라서, 비오 12세와 파스칼리나가 서로 언성을 높여 가며 말다툼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비오 12세가 화가 난 나머지 파스칼리나의 뺨을 때렸다는 소문까지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기조는 교황이 된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이를 위해 파시스트와 타협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사제들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던 프랑스의 노동 사제 운동도 공산주의적 성격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3. 나치 관련 논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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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건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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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와 애완용 새

난세를 살았던 교황으로, 그 자신도 말년에는 꽤 심한 신경증 증세를 보였다. 가령 파리를 보면 잡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이었다. 한 번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였는데, 신경병에 따른 딸꾹질로 하마터면 굴욕을 겪을 뻔했다. 또 치아가 좋지 않아 자기가 신뢰하는 치과의사가 특별히 처방한 치약[3]으로 이를 섬세하게 닦았는데, 이 의사가 돌팔이라 해당 치약이 치아에 좋지 않을 뿐더러, 신경병 증세를 더 심하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건강이 썩 좋지 않았는데다가 의사운이 지독하게도 없었다. 위의 치과의사 에피소드도 그러려니와 주치의도 실력이 썩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오죽하면 '교황 성하의 주치의는 성하의 애완용 새도 고칠 능력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게다가 이 주치의는 인성도 좀 막장이었는데 비오 12세가 임종하기 직전 혼란스런 와중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를 따라다니며 파파라치 짓을 하다가 걸려서 이탈리아 의료계에서 매장당했다.

5. 동아시아 관련 행보

1939년 제일성성훈령(第一聖省訓令)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전통적 문화인 조상 제사신사 참배가 과거와는 달리 문화적 요소로만 남아가는 추세로서, 그리스도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조상제사에 대한 조건부 허용을 승인하는 훈령을 내렸다.

18~19세기에 이루어진 조선 조정의 가혹한 천주교 박해에는 국내의 정치적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탄압이 민중의 호응을 얻거나 적어도 큰 반감을 자아내지 않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관혼상제, 특히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가톨릭 교리와의 충돌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의 조상제사는 중국 선교 시기부터 많은 신학적 논쟁이 있어왔고, 오랜 논쟁끝에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동양의 조상제사는 미신적 요소를 분리하기가 힘든 우상숭배적 요소가 많으므로 금지한다"라고 선언한 뒤로 200여년간 조상제사는 천주교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그러나 1939년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과거엔 조상숭배 요소를 분리해내기 힘들었으나, 현대에는 조상숭배적인 요소보다는 민속적 관습 내지는 사회적 문화풍속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인정하여 일부 미신적 요소(이를테면 '신' 자가 들어간 신주 등)를 '제외'한 조상 제사는 더이상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서를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제사 논쟁을 둘러싼 오랜 충돌은 최종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조상제사에 대한 가톨릭의 달라진 가르침은 제사/종교별 입장의 천주교 항목을 참고하자.

비오 12세는 동아시아 문화의 존중 차원에서 이를 허용하는 칙령을 내렸지만, 이에 대한 일본 제국의 다음 대답은 성당 폐쇄 및 징발성직자의 징집이었다.

중국의 공산화에 우려를 표했으며, 국공내전 이후에도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지속했다.[4] 이는 비오 12세의 동북아시아의 선교에 관심을 나타낸 것과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경계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 비오 12세는 8.15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제 무대에서 승인받기 위해 경쟁할 때 1947년 교황특사 패트릭 번 주교를 한국으로 파견해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힘을 실어줬다. 1948년 제2차 유엔총회 때는 교황 비서 조반니 몬티니 몬시뇰과 주프랑스 교황대사 주세페 론칼리 대주교에게 대한민국 대표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남미 가톨릭 국가의 지지를 이끌어내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통과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5]

그리고 1949년에는 전세계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고 교황특사로 한국에 체류하던 번 주교를 주한 교황대사로 격상시켰다. 패트릭 번 주교는 한국 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납북되어 11월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이러한 행보는 앞서 중국에 대한 입장과 함께, 비오 12세의 공산주의 반대, 비판 노선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1939년에는 춘천교구, 1948년에는 대전교구, 1957년에는 부산교구, 1958년에는 청주교구를 설정했다.

6. 성모몽소승천 교의 반포

1950년 11월 1일 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발표하여 교황무류성[6]을 통해 성모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정했다. 이것은 1950년에 갑자기 생긴 교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성전(거룩한 전승)의 형태로 믿어오던 교리를 교황의 무류지권으로써 재확인한 것이다.

이 반포는 한동안 에큐메니컬 신학계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7. 기타 행적

한편으로 비오 12세는 1943년 그동안 천주교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던 성서비평학을 일정 기준 아래 수용, 도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아울러 추기경단에서 비이탈리아계 추기경의 수를 늘려 천주교회가 세계 보편교회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라디오, TV 방송을 통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력하게나마 그의 후임인 요한 23세를 비롯한 후대 교황들이 보다 개방적인 현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점들을 근거로 비오 12세를 '바티칸의 마지막 전통주의, 보수/권위주의자 교황'이 아닌 '전통주의에서 현대화 시대로의 전환기에서 가교 역할을 해낸 교황'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1946년에 있었던 이탈리아 군주정 유지 투표 당시 사보이아 왕조움베르토 2세를 지지했다. 비오 12세는 군주정을 유지하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교회가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였고, 투표 전날에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움베르토 2세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적어도 로마에서는 군주정 유지 득표가 높았지만, 교황의 지지도 이탈리아 북부의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분노를 사그라들게 만들지는 못했고 결국 군주정이 폐지되어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1] 물론 반 교황파는 교황의 지나친 권력 집중을 반대했다는 것이지 무슨 쿠테타를 획책했다는 건 아니다. 공화제의 야당 수준.[2]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오 12세가 하자는 대로 따른 건 아니었다. 사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비오 12세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이양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바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강직한 성격이었던 파스칼리나 수녀는 가끔씩 비오 12세가 지시한 내용을 쌩까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비오 12세가 파스칼리나의 뺨까지 때린 적도 있었다.[3] 그 치약의 재료가 크롬성분이어서 딸꾹질 증상을 악화시켰다고 한다.[4] 이에 따라 바티칸은 현재 유럽에서 대만의 유일한 공식 수교국으로 남아있다.[5] 1948년 유엔총회 당시 대한민국 승인에 찬성한 40여개국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20개국 이상은 가톨릭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이었는데, 이는 바티칸의 지원이 큰 영향을 준 결과였다.[6]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해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여’ 발표한 것에는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가톨릭의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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