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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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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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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나치와 관련된 의혹들
2.1. 나치 학살 방조설
2.1.1. 반박
2.2.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의혹2.3. 히틀러에 의한 납치미수 의혹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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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오 12세의 논란을 정리한 문서이다.

2. 나치와 관련된 의혹들

2.1. 나치 학살 방조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대인 학살을 방조하고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이 있고 미국의 연극 '신의 대리인'[1]부터 해서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이라는 전기까지 출판될 정도인데 관련 이야기는 끝없는 논쟁에 휩싸여 있다. 적어도 그가 어느 정도 유대인의 참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분명하지만 왜 공개적으로 그걸 비난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가톨릭계 정권의 잔학성에 대해서 침묵하고 거기 가담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축복했는지,[2] 또한 나치 전범 도피에 바티칸이 개입했다는 이야기 등은 여러모로 논쟁거리이다.[3]

2.1.1. 반박

1939년에 폴란드의 랍비 바이스만텔이 교황청에 "무고한 아이들만이라도 제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 편지를 보냈지만 당시 교황청에서는 "무고한 유대인 아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의 피는 그 자체로 불결한 것이며 유대인은 사라져 마땅하다"라는 굉장히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외면해 버렸다는 이 있지만 신빙성이 없다.

이 "바이스만텔"의 정확한 이름은 미하엘 도브 바이스만들(Michael Dov Weissmandl)인데, 이 사람은 헝가리 왕국 출신으로 폴란드는 밟아본 적도 없다. 상술한 이야기도 바이스만들의 회고가 와전된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44년 가을 아우슈비츠행 열차에서 탈출한 뒤 만난 어느 교황대사(Papal nuncio)에게 유대인 구출을 호소하던 중 이런 대답을 들었다는 것인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실은 바이스만들이 회고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교황대사가 한 것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장 아우슈비츠행 열차에서 탈출하여 은신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바이스만들이 교황대사와 같은 높으신 분과 만날 수가 없기도 하고.

즉 바이스만들의 착각이 그의 회고록에 기록되고 그게 떠돌다가 어느 순간 "교황대사와 나눈 대화"가 "교황청에 보낸 편지"로 변하고 심지어 비오 12세가 직접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식으로 또다시 변한 것이다. 물론 비오 12세 성격상 이런 반응을 보였을리는 만무하다. 이런 생각을 대놓고 내뱉을 사람이 어떻게 수천여 명의 유대인을 자발적으로 도울 생각을 하겠는가.

반유대주의 의혹과는 달리, 비오 12세는 1937년[4] 나치즘을 비판하는 독일어로 된 회칙을 만든 바 있으며[5], 1939~1941년 사이 3,000명의 유대인 난민이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 남아메리카로 무사히 이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약 5,000명 이상 유대인 난민이 이주할수 있도록 여권, 경비, 비행기표, 외국 정부에 제출할 추천사를 마련했으며, 1940년 시카고의 유대인 연맹은 바티칸에 종교나 인종 문제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해달라며 12만 5천달러를 기부한바 있다. 이에 나치가 1942년 네덜란드주교들이 '조국에서 압제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자행되고 무자비하고 부당한 대우'를 규탄하는 문서를 발행한 것을 빌미로 사제수도자 등 300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어 처형한 일을 계기로 공연히 성명을 발표하여 나치를 자극하여 박해대상을 구하거나 돕는데 지장을 주지 않으려 했으나, 1942년 성탄 사목교서를 통해 유대인, 집시, 슬라브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의 박해 행위를 간접적으로 규탄하며 전 인류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또한 비오 12세는 바티칸 성직자들에게 유대인 등 난민들을 성당과 수도원에 숨겨주라고 강력히 촉구했으며 바티칸만 해도 477명, 교황의 여름 휴양지인 카스텔간돌프에는 3,000명 이상 숨겨주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비오 12세는 3,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남미로 피신시켰고,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위해 여권, 경비, 비행기표, 외국 정부에 제출할 추천서, 서류들을 마련해주었다. 전후 이탈리아의 유대인 생존자들이 자신들이 목숨을 구한 이야기를 전하자 전 세계의 랍비장과 유대인 단체들이 바티칸에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그중 이탈리아 유대인 원조위원회 회장이던 라파엘레 칸토니 박사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600만명의 우리 유대교 신자들이 나치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비오 12세의 효율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외에도 로마 게토에 있던 유대인 200여명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을 내주기도 했다.

비오 12세에 대하여 비판적인 전기 "히틀러의 교황"을 쓴 존 콘웰의 논지에 따르면, 교황 개인적으로 히틀러나치즘에 대해 혐오한 것도 사실이고 몇몇의 활동은 분명히 나치에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교황의 권위를 통해서 충분히 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황뿐 아니라 적어도 전쟁 전에 유럽 전반에 퍼진 반유태주의나 반공주의에 파첼리 자신이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고 교황 선출전 외교 활동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관련 문제도 문제지만 유고슬라비아 내 크로아티아계 친독 가톨릭 정권의 부대 우스타샤 관련자들의 만행[6]에 대해서 상당히 미화한 점은 비판받을 일이고 로마 점령 이후 로마의 유태인 지구 소개 작전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은 점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7] 비오 12세의 생전에도 반발은 있어 해외의 성직자들은 그가 로마가 잿더미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계적 중립을 유지한다는 비판을 가했다.

결국 2013년에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재임중에 비오 12세의 나치 협력 의혹을 밝힐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으며, 2019년 3월 4일 비오 12세 재위 중 작성된 공식 외교 문서에 대한 봉인을 재위 종료 70년이 지나 해제하는 관례를 깨고 약 10년을 앞당긴 2020년 3월 2일부로 해제한다고 교황이 밝혔다. 그리고 2020년 3월 2일부로 재위 기간 작성된 각종 기록물을 보관한 문서고를 학자들에게 개방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워낙 문서량이 많아서 이들을 검토하고, 관련된 평가를 내리는 데 5년 가량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

검토된 문서들 중에는 가톨릭 교회의 나치 독일의 직접적인 비판과 교회 내부의 성범죄를 문제 삼는 것을 거래했단 역대급 흑역사가 밝혀졌다.# 해당 기사에서 서적을 낸 저자는 교황 비오 12세가 즉위한 후 히틀러는 가톨릭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위인 필립 폰 헤센 공을 통해 그와 연락을 취했으며 이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저자의 오류로서 이미 교황 바오로 6세 시절에 출간되었던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관한 법령과 문서(Actes et Documents du Saint-Siège rélatifs à la Seconde Guerre Mondiale)"를 보면 제1권에서 당시 독일의 왕자가 교황과 만남을 가졌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2권에서도 교황과 독일 대사의 방문을 포함한 교류를 언급한다. 또 해당 책에서 히틀러와 교황이 주고 받은 편지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는데, 정작 그 주고받은 전체 편지의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법령과 문서에 전부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은 교황이 독일의 진로방향을 바꾸고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애초에 이 당시는 나치 정권이 강제수용소와 같은 일을 벌이는 등 어떤식으로 폭주할지 아직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독일 내의 가톨릭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일단 독일 왕자와의 만남을 진행하는 게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또 해당 기사의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 중 일부는 최근에 바티칸이 공개한 문서가 아닌 1966년 사학자의 자료같은 낡은 사료를 인용하기도 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이 꽤 있는 것으로 나온다. #

2023년 9월,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 1942년 12월에 독일 신부가 비오의 개인 비서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 해당 편지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베우제츠 절멸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유대인 학살이 언급되어 있다. 마침 10월에 비오 12세가 전시에 취한 태도를 주제로 바티칸에서 개최되는 학술회의를 앞둔 시점에 중요한 증거가 발견되어, 논쟁에 한층 더 불이 붙었다.

2.2.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의혹

교황이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거나 묵인, 방조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에 따르면 교황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나치내의 동향과 히틀러의 바티칸 공격 및 교황 납치계획을 알려준 스파이 요제프 뮬러(Josef Müller, 1898 ~ 1979)로 부터 빌헬름 카나리스 (Wilhelm Franz Canaris, 1887 ~ 1945)[8],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 계획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히틀러가 암살 연루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교황의 문장이 인쇄된 편지지에 교황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를 발견했고 히틀러는 이를 보고받은 후 교황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문에 요제프 뮬러는 사형될 위기에 몰렸으나 그가 교황의 스파이라 종전후 교황의 협력을 구하는 카드로 그를 살려두기로 해 간신히 살아 남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요제프 뮬러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한 진술이라 교차검증이 안된다는 문제가 있어 의혹으로 남는 상황이다.

2.3. 히틀러에 의한 납치미수 의혹설

전쟁 말엽 히틀러가 그를 납치하려고 한 적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때부터 나온 이야기이다. 납치뿐만 아니라 아예 바티칸으로 쳐들어가서 바티칸을 불태우고 교황을 성 베드로 광장에 끌어내 총살시키려 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치아노의 일기나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이탈리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말로만 그랬고, 부하들조차도 위험하다고 만류할 정도였다.[9] 만약 히틀러가 진짜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는 빼도박도 못하고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를 적으로 돌렸을것이다.

나치는 바티칸을 포위만 했을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교황청의 끄나풀이 어디까지 뻗어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교황청과 돌이킬 수 없이 척을 지지 말고 적당히 구슬러 이용하는 쪽이 낫기 때문이었다.[10] 헤르만 괴링도 반대론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교황청은 나치가 교황청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3국으로 교황청을 옮기려 한 적이 했다. 하지만 비오 12세가 자신은 로마 주교이므로[11] 로마에서 죽겠다며 바티칸에 남기를 고집하자 추기경들도 더러는 감동과 충성심으로, 더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바티칸에 남았다. 비오 12세는 "나는 끝까지 로마를 지키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원하면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지만 추기경 누구도 '교황 버리고 도망간 추기경'이라고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역사에 영원한 오명으로 새겨지기는 싫었던 듯 모두 바티칸에 남았다. 이후 비오 12세는 나치 기갑 사단이 교황청을 포위하자 교황은 근위병들과 나치군 사이 교전이 일어나면 근위병들이 전멸하리라 예상, 총포류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한다. 근위대가 아무리 정예부대라고 해도 겨우 수백 명의 병력으로 나치의 대군과 정면으로 교전하면 전멸한다는 건 불보듯 뻔하기 때문. 그래서 포위 당시 근위병들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나치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을 들고 순찰을 돌고 경계를 섰다.[12]

2016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가 슈츠슈타펠이 비오 12세를 납치하려 했다고 보도했는데, 여러 차례 기사화되었던 다른 언론들의 보도와 달리 이번 기사에서는 비오 12세가 이 위협으로부터 피하는 과정을 새롭게 보도했다.


[1] 사실 이 작품 자체는 블랙 코미디로서 홀로코스트보다는 주식매매와 이권에 눈이 어두운 가상의 교황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몇몇 설정은 홀로코스트 방조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암시한다.[2] 우스타샤에 적극 협력해 세르비아인 학살에 앞장섰던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자그레브 대주교가 전범재판에서 16년형이라는 죄에 비해 대단히 관대한 형을 받았음에도 이에 반발하며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해버렸다. 분노한 티토는 스테피나츠를 석방하고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이 인물은 1998년 시복까지 받았다.[3] 그렇다고 교황의 침묵에 대해서 항의하는 학자들조차도, 교황 자신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나 인신공격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점은 전쟁 당시 교황의 침묵에 대해서 비판적인 영국의 학자 콘웰조차도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진 반유태운동이나 반유태적인 시각, 그리고 반공주의에 교황 자신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벌인 일이 워낙 일이니.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지은 '교황의 역사'에도 나오는데 그도 유대인 차별 및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이 없던 것에 대해 비판한다.[4] 사실 그는 전쟁 전부터 유대인들을 돕기는 했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유대인 차별 정책을 펼쳐 대학 교수들이 쫓겨나게 되었는데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로베르토 알마지아 교수를 위시해 전 로마 대학 법학과장이던 조르조 델 베키오 교수, 이슬람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인 조르조 레비 델라 비다 교수, 이탈리아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툴리오 레비치비타 박사등을 바티칸 도서관 분과로 데려왔고, 수학자 비토 볼테라, 폐 전문의인 구이도 멘데스 교수 등이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5] 이 회칙은 비오 11세가 교황이고 비오 12세가 교황청 국무장관이던 시절 만든 회칙이다. 이때 이 회칙을 모든 교구에서 낭독하게 했다.[6] 라이프 2차 대전에 나와 있는 잔학행위를 보면 춤을 추면서 정교회 수사의 살을 저민다던가 고문당하며 죽는 아들의 피를 어머니에게 받게 한다던가하는 인륜을 저버린 온갖 고문과 학살의 선봉이었다.[7] 대체역사 떡밥을 모은 책 What if 2권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교황이 만약 공식 교서를 통해 나치의 학살을 비판하고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나치에게 저항하고 유대인을 도울 것을 부탁했다면… 하는 가정을 했는데, 분노한 히틀러가 교황을 바로 아래 단락에 나온 것처럼 체포해 처형하자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들고 일어나 나치 정권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8]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에 암살 미수가 들통나면서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으로 마감하게 된다.[9] 물론 케셀링이 신속하게 로마를 비롯한 중, 북부의 이태리군을 장악하고 연합군에 대해 방어전을 펼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로마를 포기하고 이태리의 북부의 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생각하기도 했다.[10] 히틀러의 입장에서도, 지나친 나치의 괴뢰로서 가톨릭 신도들조차도 등을 돌리는 교황보다는, 이런저런 저항을 하더라도 자기 할 말을 하는 교황이 있는 편이, 독일 국내의 가톨릭 정치 세력을 다독이기에는 더 나았다.[11] 교황은 전 주교단의 수장인 동시에 로마 교구의 주교이다.[12] 그런데 플래툰의 기사에 의하면 스위스 근위병들이 회색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기관총박격포를 꺼내 들고 독일군과 대치했다고도 한다. 정말 창만 들고 다닌 것은 일부 근무자들뿐일 수도 있고, 저 대치 이후에 교황이 무장해제령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인을 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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