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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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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유럽

1. 개요2. 창설3. 동요와 붕괴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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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빈 체제(Vienna System)란 1814년에서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에서 개최된 빈 회의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 사이에 약속된 복고적(復古的) 세력 균형 체제를 이른다. 회의의 주재자였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따 메테르니히 체제(Metternichsches System),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 또는 5두 체제(pentarchy)[1]라고도 한다.

2.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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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개최된 빈 회의에서는 온 유럽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든 나폴레옹 전쟁의 발발 원인을 프랑스 혁명, 더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내셔널리즘의 확산이라고 보았다. 이에 권력층은 단순히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민들의 불만을 받아들이고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구(舊) 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결정하였고, 그것이 빈 체제의 골자였다. 때문에 만약 각국에서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일어날 경우 유럽 국가들은 이를 진압할 책임이 있었고, 만약 진압하지 못 할 경우 제국의 군대들이 학살로 진압하였다. 각국은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언론 검열을 펼쳤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정부 체제를 복귀시켰다.

3. 동요와 붕괴

빈 체제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럽 각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이 퍼져 있었다.

곧 유럽 각지에서 빈 체제에 대한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빈 체제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반발했고 독일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내셔널리즘 열풍이 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가 폐위되었다.

또한 이 체제에서 중요 역할을 맡았어야 할 영국산업 혁명과 해외 식민지 진출에 골몰하느라 관심이 없었으며[2] 러시아도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국러시아는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빈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했다. 게다가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유럽에는 다시 열병에 가까운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불기 시작했다. 샤를 10세의 뒤를 이은 것은 친(親) 혁명 성향의 루이필리프 1세였으나 1848년에 프랑스 2월 혁명이 벌어져 프랑스에 공화정이 세워졌고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 혁명이 벌어져 메테르니히가 축출되면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 외교적으로 본다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왕국-러시아신성 동맹이 붕괴된 크림전쟁(1854년)이 결정타였다.

4. 평가

메테르니히의 기민함에 힘입어 오스트리아는 한 세대 동안 사건의 전개 속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메테르니히가 두려워했던 러시아를 보수주의 세력의 이익 단결에 기초해서 파트너로 만들었고, 메테르니히가 신뢰하는 나라였던 영국을 세력균형에 대한 도전을 저지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이렇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궁극적인 결말이 단지 늦춰졌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지역의 지배적인 추세와 맞지 않던 가치에 기초한 오래된 국가를 한 세기 동안 존속시켰다는 점은 대단한 업적이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빈 체제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구(舊) 체제 복원을 희망하였으나, 빈 체제가 성립되고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보면 이 체제의 목적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이였고 결국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한 협력 체제의 붕괴와 내부에서의 반발이 맞물려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빈 체제를 근대적 국제기구의 첫 사례로 본다. 실제로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이기도 하다. 웬만한 외교사 관련 서적 첫머리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빈 체제의 기원이 된 빈 회의일 정도다. 특히 현실주의 외교의 거두이자 빈 체제 연구에 큰 공헌을 한 헨리 키신저는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메테르니히에 대한 팬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이미 변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인 조치였다고 평가한다.

성과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빈 체제는, 크림전쟁 시기까지 40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유럽의 세력 균형을 이뤄내었다.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빈 체제는 고작 40여 년의 시간을 벌기 위해 인간의 자유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억누른 반동적인 체제로 보일 것이다. 빈 체제는 평화라는 긍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론 기득권의 사익을 보호하려는 동기가 강하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반면 전쟁의 폭력성에 주목한다면, 그리고 역사를 본질적으로 그 시대 그 문화의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역사의 진보라는 표현을 회의적으로 본다면, 빈 체제는 옛 질서[3] 붕괴의 혼란 속에서 제2의 나폴레옹 전쟁을 막고 40여 년의 평화를 가져온 체제로 보일 것이다. 빈 체제는 100년 후의 베르사유 조약과 달리 패전국에게 관용을 베풀고 국제체제의 한 축으로 끌어안았으며, 강대국 다섯의 다극체제라는[4] 악조건에서 평화라는 실리적이고 본질적으로 민중 친화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게다가 외교가 아닌 각국 내정에서는 무작정 변화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5]

주도국인 오스트리아로서는 매우 큰 이득을 주었다. 헨리 키신저가 말한 대로 빈 체제가 아니었더라면 제국은 훨씬 더 빨리 붕괴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스트리아는 정치 체제상 자유주의, 내셔널리즘의 확산을 방지하는 빈 체제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였다. 이 시기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발칸 반도에서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빈 체제를 무너트린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리고 기존 유럽의 평화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하게 되었다.

이후 빈 체제는 1860~1870년대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1년)을 거쳐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3년삼제 동맹(비스마르크 체제)으로 부활한 측면이 있지만, 다시 빌헬름 2세에 의해 붕괴되면서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과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의 삼국 협상으로 재대립하였다. 이것이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1914년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것으로 빈 체제가 이루어진지 정확히 99년 만에 평화는 상실되고 30년간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이 몰아닥쳤다.

[1] 빈 체제를 지탱한 프랑스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다섯 강대국을 뜻한다. 이 중에서도 핵심 국가는 빈 체제를 주도한 메테르니히의 조국인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나폴레옹을 몰락시켜 빈 회의를 여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러시아 제국이다.[2] 게다가 영국은 이미 100여년 전 오랜 세월에 걸친 왕권과의 투쟁의 결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유로운 사회 환경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타국에 비해 탄압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심지어 구체제를 혐오하는 성향도 다분했다.[3] 물론 진보주의적 세계관에선 질서라는 표현을 회의적으로 사용하지만, 이러한 세계관에서 보더라도, 질서의 붕괴는 새 질서를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붕괴 자체로는 유해한 현상이다.[4] 패권을 주도하는 압도적 강대국 2개와 나머지 종속적 국가들로 이뤄진 양극체제(예: 냉전)보다는, 여럿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각자 독자적인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다극체제(예: 1914년의 유럽)가 훨씬 변수가 많고 불안정하다.[5] 가령 프랑스만 하더라도 굳이 7월 왕정까지 갈 것도 없이 복고 부르봉도 결코 18세기식 절대왕정은 아니었다. 이는 프랑스 내부 정치 논리에서 나온 복잡한 타협의 결과이지만, 최소한 루이 18세 시절은 18세기식 절대왕정을 박제하고 보존한 국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