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櫛文土器[1] / comb-pattern pottery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서, 전체적인 모양은 타원포물면과 흡사하며 그릇 표면을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그어서 점·금·동그라미 등의 기하학무늬를 나타낸 등의 특징이 있다. 한자어 명칭인 '즐문토기'의 즐문(櫛文)은 '빗 모양 무늬'라는 뜻이다. 빗살무늬를 넣은 이유에 대해서 주술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토기 이전에 사용했던 게 버드나무나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도구들이라 그것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새겼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이 같은 예술 행위가 발생 된 원인으로 수렵채집 시절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실제 농경시대로 가면 빗살무늬 토기보다 좀 더 발전되고 기능적인 형태지만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들이 나온다.
2. 용도
토기의 용도는 그 크기에 따라 각각 달랐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의 독과 같이 대형은 음식저장용, 중형은 취사용, 소형은 식기와 음식준비 과정에 각각 사용되었다고 한다.현대의 그릇과는 달리 아래가 평평하지 않고 뾰족해서 이걸 어떻게 쓰냐 싶겠지만, 땅을 파서 밑부분만 묻어 세우거나 아궁이같은 구조물로 지탱하여 썼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3. 분포지역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토기는 핀란드, 스웨덴 남부, 북부 독일, 서북 러시아의 카렐리아 지방에서 오카 강·볼가 강 상류지방에 걸친 북유럽 일대, 우랄 산맥을 넘어서 오브 강·예니세이 강 유역 일대, 바이칼호지역, 몽고지방, 연해주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 지역의 토기도 빗같은 무늬새기개의 끝으로 눌러서 새기고, 그어서 생긴 선으로 토기 겉면을 장식하고 있고, 토기의 기형면(器形面)에서도 공통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옛날에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유럽에서 한반도까지 빗살무늬토기가 전파되었다는 이른바 캄케라믹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강원도 양양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이전의 오산리식 토기등을 이용해 자체 발생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늘어났고 캄케라믹 설은 주류 가설에서 단순히 여러 기원설 중 하나가 되었다.한반도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는 135개에 달한다.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고 주로 해안가·강가 그리고 도서지방에서 발견된다. 교과서에도 단순히 빗살무늬토기라는 이름으로만 나오는 덕에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는 이상 모르고 넘어가기 쉽지만 빗살무늬토기도 여러 양식으로 나뉜다. 지역별로 나눴을 때는 크게 청천강 이북으로 중국의 동북지방과 맞닿아있는 서북 지역, 러시아의 연해주와 맞닿아있는 동북 지역, 대동강·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서부 지역, 강원도 영동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부 지역 그리고 남부 지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지역군 사이에는 뚜렷한 지역차가 있다. 청천강 이남으로는 신석기 중기 이후로 바닥이 뾰족한 첨저 빗살무늬 토기가 사용된 반면,[2] 청천강 이북의 동북 및 서북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바닥이 평평한 평저 토기가 유지된다.
4. 의의와 평가
한반도 신석기 시대 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빗살무늬 토기의 성격이나 변천 과정은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문화 내용이나 편년설정 규명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한반도에 번영했던 빗살무늬토기도 서기전 1세기 전후에는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문화의 융성으로 대부분은 무문토기에 흡수, 동화되어 버렸다. 일부 도서지방 같은 곳에서는 그 문화의 전통을 보다 오래 이어가다가 점차 쇠퇴해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5. 언어 논쟁: 고대 한국어설 vs 미분류어설
이 당시에 어떤 언어가 사용되었는지를 둑느 논쟁이 오간다. 알타이제어설의 주요 지지자인 언어학자 마르티너 로베이츠(Martine Robbeets)는 서기전 3500년 무렵 랴오닝성의 조 농부들이 남하하면서 한국어족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로비츠의 주장에 따르면 서기전 1300년쯤에 랴오닝성과 산둥성 지방에서 넘어온 벼 농부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민무늬 토기와 일본어족을 가져왔다가, 서기전 800년 즈음에 토착 한국계 세력에 밀려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한다.[3]한편 존 휘트먼이나 알렉산더 보빈 등은 민무늬 토기 문화에서 반도일본어가 통용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한국어족 화자는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기전 300년 즈음을 기점으로[4] 한국어족 세력이 남한에 정착했다고 본다. 이 학설에 따르면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언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분류어가 된다. 다만 즐문시대의 유골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의 조몬인, 아이누인 등과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는 한다.
그러나 서울대 고고학자 김장석은 두 주장에 다 회의적이다.[5] 김장석은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서기전 8200년 무렵에 이미 형성되었고, 서기전 3500년에 조가 도입되었음에도 고고학적으로 큰 사회 변화가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 로베이츠의 주장대로 조의 도입을 기점으로 아예 새로운 언어집단이 정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
김장석은 휘트먼의 주장 역시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 시기 남한에서 세형동검은 지배층의 분묘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나, 그 분묘 수에 비해 '세형동검 집단' 내지 '점토대토기문화 집단'이라고 불릴 만한 생활유적은 거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다.[6] 따라서 이때 나타난 세형동검을 반드시 '세형동검 집단'이 대규모로 한반도로 이주한 결과로만 해석할 이유가 없고, 설령 이주민의 영향이라 할지라도 그 규모는 토착민을 압도할 만큼 크지 못했을 터이다. 이때 지배층만 한국어족 화자로 교체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부유한 상류층만 고조선의 동검 제작자들을 고용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7][8]
더 자세한 내용은 김장석의 논문 참조.#
6. 소장 박물관
거의 원형에 가까운 빗살무늬토기를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은 다음과 같다.7. 해시 태그
서울 암사동 유적중 5호집터에서 출토된 완성도가 높은 빗살무늬토기의 크로스 빗살무늬문살무늬로 언급되는 빗살무늬의 크로스햇지트 무늬(해시 태그) 줄(line)[9] [10] |
8. 여담
특유의 무늬 외에 밑부분이 뾰족한 걸로도 유명해서, 작붕이나 과도한 뽀샵, 성형으로 턱이 지나치게 뾰족한 걸 빗살무늬토기에 비유하기도 한다.수학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프링글스가 쌍곡포물면과 엮이듯이 타원포물면이 빗살무늬토기와 자주 엮인다.
강동구 지역화폐의 모델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빗살머니카드 그래서울 참고.
학교에서 시험 문제의 대부분을 틀려서 소나기가 내린 걸 이 토기의 무늬에 빗대서 빗살무늬 시험지라고 부르는 개드립이 있는데, 네이버 웹툰 중 하나인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의 120화에 이 드립이 등장한다[12].
8.1.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루리웹이나 디씨를 비롯한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망갤 판독기' 일명 망갤테스트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빗살무늬토기 사진만 덜렁 올라온 게시물이 베스트에 오르면 그 게시판은 망한 게시판이라는것. 망커뮤의 특징들 중 하나가 별 영양가도 없는 글이 친목질이나, 글 리젠 부족 등으로 인해 베스트에 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영양가가 없는 글을 빗살무늬토기에 빗대어 게시물에 빗살무늬사진만 덜렁 올린 후 '이게 베스트로 가면 이 게시판은 망한 거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일종의 자조적인 블랙유머라고 볼 수 있다.#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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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紋(무늬 문)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을 수 있겠는데, 文(글월 문)에도 '무늬'라는 뜻이 있다.[2] 중동부 지역과 남부 지역에서는 신석기 조기 단계에 평저 토기가 사용된 바가 있다.[3] 또한 로비츠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은 애초에 뿌리가 같고 요서~요동~북한 일대에서 등장했으나, 서기전 3500년쯤 한국어족이 먼저 남하하고 서기전 1300년 무렵에 일본어족이 뒤따라 남하했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 논문 참조.#[4]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대패하여 요서•요동에서 북한 일대로 이동했을 때.[5] 김장석은 고고학자이고 나머지는 언어학자이니 같은 근거를 두고도 초점 및 해석이 다른 것은 당연지사. 포괄적인 절충안이 나오기 위해서는 두 학계가 직접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다만 문제는 언어학자들이 이러한 고고자료들을 임의로 취사선택해서 활용하거나, 점토대토기단계 주민교체론과 같은 비교적 철지난 학설에 근거하여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한국 학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들을 외국인 언어학자들이 빠르게 흡수하기는 어렵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6] 김장석은 과거 논문(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 2009)에서 이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7]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초기 신라어(진한어)와 가야어는 일본어족이었다. 이에 따르면 서기전 300년 즈음 한국어족 지배층이 일부 정착했으나 인구 전체가 동화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렸다고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마한은 진/변한에 비해 일찍 한국화되었다고 봤는데, 세형동검 집단이 금강 유역에 가장 먼저 정착했다는 정황과 얼추 들어맞는다.[8] 그러나 당시 한반도에서 대규모 무력정복이 일어났던 흔적도 없고, 재지사회가 이주민들에 비해 세력적으로 열세했던 정황도 없기 때문에 재지사회가 이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흡수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점토대토기문화는 한반도 중서부에서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재지문화와 융합하였는데(이형원,충청서해안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유입과 문화변동, 2016 / 이형원, 만경강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과 특징, 2016) 이 양상은 영남지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기원전 시기에 양 문화는 상당한 수준의 접변을 거치며 공존하다가 차츰 와질토기문화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통합되었다.(신영애, 영남지방 점토대토기 단계 문화접변, 2012) 이러한 과정은 비교적 재지문화가 자발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이들 이주민과 우호적으로 교섭한 결과인 듯하다. 즉, 어느 쪽이든 일방적으로 이주민이 지배층이 되어 피지배층 토착민을 지배하는 구도는 아니었다. 이 때 고고학계에서도 이 무렵 새로 융합된 사회 주도권을 이주민이 행사했다는 '재편론'이 존재하나 이 입장에서도 이주민이 일방적으로 흡수했다고 보지는 않고, 재지문화의 영향을 상당부분 인정한다. 결정적으로 신라가 위치한 경주지방은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권이 아니었다.[9] 국립중앙박물관 빗살무늬토기(신석기)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99[10] 서울암사동유적 (온라인박물관)빗살무늬토기 https://sunsa.gangdong.go.kr/site/main/home[11] \[Natural History Museum\] The oldest drawing ever found is a stone 'hashtag' By Katie Pavid First published 12 September 2018 https://www.nhm.ac.uk/discover/news/2018/september/the-oldest-drawing-ever-found-is-a-stone-hashtag.html[12] 주인공인 불사조가 전교 1등을 놓치지않는 우등생이다보니, 그 여동생인 불사영이 오빠와 같은 정글고에 입학한다는 소식에 교사들이 남매가 모두 공부를 잘할 줄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정작 그녀의 성적이 내내 바닥을 기는 바람에 빡친 교사들이 불사조에게 "네 동생 공부 안 시키냐?"며 쪼인트를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