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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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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근대적 역사 서술3. 근대 역사학의 성립
3.1. 랑케와 근대 역사학의 탄생3.2. 드로이젠과 주관주의적 전환3.3. 19세기와 20세기 초 각국의 역사학
3.3.1. 독일3.3.2. 프랑스3.3.3. 미국3.3.4. 영국3.3.5. 일본
4. 1945년 이후의 역사학
4.1. 사회사의 시대: 구조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
4.1.1. 프랑스: 아날 학파와 사회사4.1.2. 영국: 서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4.1.3. 독일: 구조사와 역사적 사회 과학4.1.4. 미국: 합의학파와 신좌파 역사학
4.2.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4.3. 1990년 이후: 전지구적 전환

1. 개요

역사학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전근대적 역사 서술

역사학의 역사도 당연히 있는 법이다. 역사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에서도 역사가 있는 것을 봤을 때 결국 모든 학문에는 해당 학문의 역사가 존재한단 것을 의미하며 이는 역사는 다른 학문들의 하위 학문으로 평가 받았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서구에서 최초의 역사 서술은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로 여겨진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담고 있으나, 구전되는 전설이나 설화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연구하는 역사학이라는 학문에서 봤을 때 거리가 좀 있는 편이다. 그러다 그리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하면서 역사는 비로소 신화와 전설이 배제되고 문헌 고증 위주의 서술이 핵심이 된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 서술도 신학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역사를 신의 의지의 실현으로 보았고 역사 서술도 자연히 기독교적 역사 서술로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인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연히 역사학은 종교가 배제되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역사를 정치적 교훈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대표적인데, 그는 역사가 현실 정치에 실용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러한 개념으로 집필된 것이 바로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이다.

그러나 근대 초기의 역사 서술은 아직 독립적인 학문 분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역사는 주로 문학가나 신학자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18세기 계몽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서술은 기본적으로 수사학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 역할을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데 있었다. 계몽 시대의 역사학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이다.

하지만 계몽 시대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집합 단수 명사로서 '역사(History/Geschichte)'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계몽 시대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과거 사실들을 그저 과거의 '이야기들'로만 인식하였고, 지나간 과거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집합 단수 명사로서의 역사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과거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 즉 '근대(Moderne)'에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비로소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살고 있고,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으로 18세기 계몽 시대에는 독일의 괴팅엔 대학교를 중심으로 고문헌 연구의 방법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요한 크리스토프 가터러, 아우구스트 폰 슐뢰처, 아르놀트 헤렌 등의 괴팅엔 학파는 문장학, 도상학, 문서학, 고화폐학과 같은 역사 보조과학(Historische Hilfswissenschaft)을 발전시키고 역사학을 대학 내 독립적인 분과 과학으로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후의 랑케로 이어지는 근대 역사학의 출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3. 근대 역사학의 성립

3.1. 랑케와 근대 역사학의 탄생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레오폴트 폰 랑케는 괴팅엔 학파의 전통 및 바르톨트 니부어와 같은 선배 역사가들의 영향 속에서 등장했다. 1824년 출간된 랑케의 첫 저작 로망스 및 게르만 민족들의 역사(Geschichten der romanischen und germanischen Völker)는 과학적인 학문으로서의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데, 이 책의 서문에서 랑케는 역사가의 직무가 '과거를 재판하고, 미래의 유용성을 위해 현대인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래 어떠했는지(wie es eigentlich gewesen ist)를 서술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기존의 수사학적이고 교훈적인 역사 서술(Geschichtsschreibung)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학문으로서의 역사학(Geschichtswissenschaft)의 출현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문구였다. 이는 변증법적 보편 원리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헤겔의 역사 철학에 대한 반박이기도 했다.

또한 랑케는 괴팅엔 학파의 문헌 연구 전통을 종합하면서 역사학의 방법론으로서 사료 비판(Quellenkritik)을 정립하였다. 랑케는 사료 비판은 기본적으로 역사 연구가 2차 자료가 아닌 당대인들의 자료인 1차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로망스 및 게르만 민족들의 부록인 근대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Zur Kritik der neueren Geschichtsschreiber)는 귀치아르디니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가들이 1차 문헌이 아닌 전해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상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역사 연구는 1차 자료로부터 근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랑케의 또다른 업적은 대학 내 정식 분과 학문으로서 역사학의 '제도화'였다. 랑케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학생들을 불러 모아 수업을 진행하는 세미나 형식의 사적 연구 및 강의 모임을 운영하였다. 랑케의 세미나 모임에 참가했던 하인리히 폰 쥐벨, 빌헬름 폰 기제브레히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빌헬름 바이츠와 같은 제자들은 이후 독일 역사학계를 이끄는 대가로 성장하였고, 스승의 세미나 모델을 각 대학으로 전파했고,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윽고 이러한 세미나가 대학의 정식 전공 과정, 즉 사학과로 인정되면서 이로부터 역사학은 대학의 정식 전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

랑케의 역사 사상은 역사주의(Historismus)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18세기 잠바티스타 비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빌헬름 폰 훔볼트 등의 주도하에 나타난 역사주의는 보편성과 단선적인 진보를 강조한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로 형성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기본적으로 인류의 보편적 이성을 강조하였고, 인류의 역사는 이성의 '진보'를 핵심으로 보았다. 반면 역사주의 사상가들은 각 민족의 개체성(Individualität)을 강조하였고, 인류 역사의 각 시대 역시 단선적인 진보가 아니라 고유한 발전(Entwicklung)을 이룩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각 시대의 개체성과 발전을 강조한 역사주의의 이념은 낭만주의와 결합하면서 중세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역사주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분권적 역사 전통을 바탕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이론과 같은 개체성을 중시하는 관념이 일찍부터 출현하였던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랑케는 이러한 역사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모든 시대는 신과 직결되어 있다(Jede Epoche ist unmittelbar zu Gott)라고 한 랑케의 말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랑케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각 시대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하고, 과거 시대가 현재 시대의 발전에 매몰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2] 이후 역사주의는 독일 역사학의 기본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20세기 전반부까지 독일 역사학을 지배하였다.

3.2. 드로이젠과 주관주의적 전환

한편 랑케의 후배이자 역시 근대 역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역사학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드로이젠은 랑케와 역사주의적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랑케의 객관성 추구를 '환관적 객관성(eunuchischer Objektivität)'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면서 역사 연구에 있어 역사가의 주관 및 관점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엄밀한 객관성을 요구한 랑케와 필연적으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드로이젠 간의 대립은 이후 역사학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난제로 자리잡았다.

또한 드로이젠은 역사학의 이론적 측면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랑케와 달리 역사학 방법론의 이론적 체계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실증주의 철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로부터 시작되는 실증주의 철학은 당시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과 맞물려 모든 학문 분야에서 체계적인 법칙을 도출해 내고자 하는 사상으로,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을 제시하고자 한 영국의 헨리 토마스 버클과 프랑스의 프랑수아 기조 등의 문명사 서술은 역사 서술에서의 실증주의 경향을 대표하였다.

드로이젠은 이러한 실증주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역사학의 방법론으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창시한 해석학(Hermeneutik)적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드로이젠은 설명(erklären)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과학과 달리 역사학은 이해(Verstehen)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해의 방법론으로서 해석학적 순환 모델에 기초한 탐구적 이해(forschend zu verstehen)를 제시하였다. 탐구 대상에 대한 이해와 몰입을 강조한 드로이젠의 해석학적 방법론은 이후 역사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는 드로이젠의 역사 이론과 해석학을 계승하여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라고 하는 인문학과 사회 과학을 포괄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 활동의 방법론으로 '이해'를 내세웠고, 이해를 위한 방법으로 추체험(Nacherleben)을 제시하였다. 신칸트주의 서남독일학파(바덴학파)에 속하는 빌헬름 빈델반트하인리히 리케르트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역사학과 자연과학,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구분하고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인간학의 방법론 구축을 시도하였다.

3.3. 19세기와 20세기 초 각국의 역사학

3.3.1. 독일

랑케로부터 시작된 독일 역사학은 근대 역사학 발전의 중심지였다. 랑케와 드로이젠을 비롯하여 테오도어 몸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기라성 같은 역사가들은 불멸의 대작을 남겼다. 또한 1859년에는 하인리히 폰 쥐벨의 주도하에 최초의 역사 학술지인 사학 잡지(Historische Zeitschrift)가 창간되어 역사 연구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19세기 후반을 거치며 독일의 대학 제도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국가에서도 독일 역사학을 모델로 역사학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일 역사학 및 랑케는 과학적, 경험적 사료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 역사학을 상징하는 일종의 이미지가 되었는데, 특히 영미권을 중심으로 랑케를 '실증주의자' 혹은 '실증사학'으로 부르는 오류 역시 널리 확산되었다.

한편 드로이젠에 의한 주관주의적 전환은 19세기 유럽을 풍미하던 민족주의 열풍과 맞물리면서 또다른 부산물을 낳았다. 바로 역사의 정치화, 즉 국민 국가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역사 서술이었다. 드로이젠은 쥐벨,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등과 함께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역할을 지지하는 보루시아 학파(Borussische Schule) 혹은 프로이센 학파(Preussische Schule)의 역사 서술을 발전시켰다. 민족주의적이고 소독일주의적인 보루시아 학파의 역사 서술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지배적인 조류가 되었으며, 드로이젠의 Geschichte der preussischen Politik(프로이센 정치사), 쥐벨의 Die Begründung des deutschen Reiches durch Wilhelm I(빌헬름 1세에 의한 독일 제국 건국), 무엇보다도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는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었다.

한편 1880년대를 거치며 랑케, 드로이젠, 쥐벨, 트라이치케 등 기성세대의 역사가들이 사망하고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세가 집권하는 등 변화기를 거치면서 독일 역사학계에는 어느 정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보루시아 학파의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에 대한 피로감은 랑케 르네상스(Ranke Renaissance) 혹은 신랑케주의(Neurankeaner)라고 하는, 랑케적 객관성의 추구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막스 렌츠, 막스 레만, 에리히 마르크스 등이 주도한 이러한 경향은 하지만 결국 빌헬름 시대의 세계정책(Weltpolitik)을 지지하는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중앙(Mittellage)에 위치한 독일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독일의 군사 정책 및 외교 정책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독일사 해석의 중요 개념인 존더베크의 출현이기도 했다. 결국 국가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랑케 르네상스 역사가들은 보루시아 학파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개로 위인과 정치사, 외교사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전통적인 독일 역사학에 대한 반발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의 시초는 랑케의 제자이기도 했던 부르크하르트로부터 기원하는데, 부르크하르트는 문화사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역사주의가 지배적이던 독일 역사학계의 이단아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조는 세기전환기를 지나면서 카를 람프레히트 및 그의 역사학에 대한 일대 논쟁인 방법논쟁(Methodenstreit)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람프레히트는 경제사 및 사회사적 접근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보수적인 주류 역사학계에서 금기시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결국 게오르크 폰 벨로브와 같은 보수주의적 역사가들은 물론 한스 델브뤼크,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와 같은 자유주의적 역사가들 역시 람프레히트를 일제히 비판하였고, 람프레히트는 유물론자라는 비난을 들으며 학문적으로 고립되었다. 하지만 람프레히트의 사회사, 문화사적 접근은 이후 프랑스 아날학파의 출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20세기 초를 지나며 고전적 역사주의는 가치의 상대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보편성 대신 개체의 고유성과 상대적 측면을 강조했던 역사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가치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는 격변의 시대였던 세기전환기의 시대상과 맞물리며 역사주의는 보편적인 규범 및 가치를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러한 '위기'에 대한 의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주의의 위기에 대해 후기 역사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고전적인 지성사인 이념사의 창시자인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역사주의를 레싱과 빙켈만, 뫼저, 헤르더와 괴테를 거쳐 랑케에서 완성된 독일 정신의 산물이자 인간이 가진 잠재력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위대한 정신적 혁명으로 파악함으로써 대응하고자 하였고,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치 역시 유사한 견해를 보였다. 한편 오토 힌체의 경우 역사주의의 틀 내에서도 사회학과 비교사적 방법론을 폭넓게 채용하여 방법론적 쇄신을 모색하였다. 또한 사회학의 창시자이면서도 역사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은 막스 베버는 과학 연구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가치자유를 강조하면서도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주관성의 문제는 연구 대상 선택에서의 '가치연관' 및 이를 통한 '이념형'의 설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편 카를 마르크스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하며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만들어냈다.

3.3.2.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프랑수아 기조, 아돌프 티에르, 쥘 미슐레 등이 자유주의적, 낭만주의적 역사서술을 주도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회학의 시조인 에밀 뒤르켐은 역사학을 사회학의 보조 학문이라고 보았으며 단순히 사실들의 연구를 넘어 일반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역사관을 사회 과학적 역사학이라고 한다. 사회 과학적 역사학은 전통적인 랑케 사학을 비판하였는데 개별 사건보다는 사회적 맥락과 심층 구조를 중시해 전체사와 구조사가 등장했고 문헌 중심의 역사 연구 대신 사회과학적 개념과 방법이 역사 연구에 동원되었으며 공적 문서 외에도 다양한 자료가 역사 연구에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은 현재를 이해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기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리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프랑스에선 마르크 블로크뤼시앵 페브르가 경제 사회사 연보 <아날>을 창간하고 아날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정치사 중심의 독일 역사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으며 사건이나 개인 중심의 편협한 정치사나 사건사를 연구하는 기존의 역사학에서 벗어나 구조를 연구해야한다고 보았다. 아날 학파의 형성은 역사학의 19세기 독일의 근대 역사학 성립에 이은 역사학의 두 번째 혁명인 사회사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 연구에서는 19세기 알렉시 드 토크빌이 대표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적 해석과 쥘 미슐레가 대표하는 공화주의적 해석을 지나 20세기 초 알퐁스 올라르, 알베르 마티에즈, 조르주 르페브르 등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이 주도하는 자코뱅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프랑스 혁명을 구체제의 모순이 촉발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한 자코뱅 해석은 이후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고전적인 정통 해석으로 자리잡았다.

3.3.3. 미국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 허버트 백스터 아담스 등을 중심으로 독일 역사학의 수용이 이루어졌다. 백스터의 제자인 프레데릭 잭슨 터너는 The Significance of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미국사에서 프론티어의 중요성)이라는 논문에서 '프론티어 테제'라고 하는 중요한 테제를 발표했다. 이는 미국사가 서부 개척 과정에서 나타나는 프론티어(경계)의 확장과 그로부터 나타난 미국의 특수성과 독창성을 강조하였다. 터너의 프론티어 테제는 미국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의 출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역시 20세기 초 찰스 비어드칼 베커가 주도하는 혁신주의 역사학 혹은 신사학(New-History)이 출현하여 프랑스의 아날학파와 함께 사회사의 발전을 이끌었다. 비어드의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An Economic Interpretation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저작으로, 신사학 역사가들은 비어드학파라고도 불리며 사회 경제사의 발전을 이끌었다.

3.3.4. 영국

영국 역시 19세기 후반 존 액턴 등의 주도하에 독일 역사학이 수용되면서 역사학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역사학은 19세기 토마스 배빙턴 매콜리의 제임스 2세 즉위 이후의 영국사(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Accession of James the Second) 등이 대표하는 휘그(Whig) 역사관과 함께 발전했다. 영국사를 자유를 향한 진보의 여정으로 파악하는 휘그 역사 서술은 액턴과 G.M. 트레벨리안 등에 의해 발전하였다.

이에 대해 루이스 네이미어는 1929년 조지 3세 즉위 당시의 정치 구조(The Structure of Politics at the Accession of George III)라는 저작에서 실증적인 문헌 연구를 통해 휘그 사관의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네이미어를 비롯한 '실증적' 역사가들은 사료를 절대시하면서 역사학자의 관점을 철저히 배격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이후 에드워드 카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또한 허버트 버터필드는 1931년 역사의 휘그 해석(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이라는 저작을 통해 휘그 사관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정립하였고, 이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면서 휘그 해석의 기반을 총체적으로 공격하였다.

한편 에드워드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 관계의 나열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카의 주장을 기점으로 역사에는 역사가의 주관이 포함된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3.3.5. 일본

일본에서는 랑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루트비히 리스(Ludwig Riess)[3]를 통해 역사학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리스의 지도를 받은 시게노 야스츠구, 쿠메 쿠니타케 등은 일본 근대 역사학의 태동기를 이끌었다.

한편으로 독일 역사학 내에서도 역사주의의 방법론적 전제에 관심이 없었고 사료 비판을 비롯한 경험적 연구를 중시했던 경향에 속했던 리스의 영향 속에서 일본 역사학자들은 사료의 '실증'을 강조하였다. 이는 유럽어 Positivism의 번역어인 '실증주의'와 혼선을 빚게 되는데, 이러한 언어 사용은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한국 역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쳐 현재까지도 랑케를 '실증주의자'라고 부르는 잘못된 관행이 자리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4]

시게노와 쿠메 등 1세대 역사가들을 거쳐 시라토리 쿠라키치, 쓰다 소키치, 나이토 코난, 키타 사다키치과 같은 2세대 역사학자들은 2차 세계 대전 이전 시기 일본 역사학을 대표하는 대가로서 동양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중국사 연구를 개척하면서 일본 대학에서 '동양사'가 독자 분과로 자리잡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국사(일본사)/동양사/서양사의 3분과 체제가 수립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이토 코난 역시 중국사 연구의 쿄토학파를 이끌면서 당송 변혁기 이론을 제시하여 송을 근세로 구분하였다. 또한 시라토리와 나이토는 야마타이국의 위치를 두고도 치열한 논쟁을 펼쳤는데, 시라토리가 이끄는 도쿄학파는 큐슈설을, 나이토가 이끄는 쿄토학파는 긴키설을 내세웠다.

한편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의 거두쯤으로 알려져 있는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 및 일본사기 신연구(1919)라는 저작을 비롯해 일본서기 기록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제시하면서 일본 고대사 연구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쓰다는 문학에서 나타난 우리 국민사상 연구(1916-1921)과 같은 저작에서 일본 사상사의 발전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 검열이 심해지면서 쓰다의 비판적 연구는 정부의 탄압을 받아 그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중세 이후 일본사 연구에 있어서도 20세기를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쿄토대학의 하라 카츠로(原勝郎, 1871-1924)와 우치다 긴조(内田銀蔵, 1872-1919)는 각각 일본 중세사(日本中世史, 1906), 일본 근세사(日本近世史, 1903)라는 선구적인 저작을 발표하며 일본 중세 및 근세사 연구의 출발을 알렸다. 이외에도 쿄토대 교수를 역임한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1871-1931)는 법제사 연구(法制史の研究, 1919)에서 법제사 분야를, 니시다 나오지로(西田直二郎, 1886-1964)는 일본 문화사 서설(日本文化史序説, 1932)에서 문화사 분야를 개척했다.

도쿄대 교수를 역임했던 중세사 분야의 히라이즈미 키요시(平泉澄, 1895-1984)는 황국 사관을 주도한 인물로, 전후에는 불명예 퇴직당하였다.[5] 한편으로 불교사 연구를 개척한 츠지 젠노스케(辻善之助, 1877-1955)는 히라이즈미의 정치적 역사학과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1938년 정년 퇴임 이후 전후에도 불교사 및 문화사 연구에 진력하여 10권에 달하는 대작 일본 불교사(日本仏教史, 1944-1953)를 발간하였다.

한편 20세기 초 정부에게 탄압받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메이지 유신의 성격을 두고 일본 자본주의 논쟁이라고 하는 역사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전후 일본 역사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공산당의 주류였던 '강좌파'는 메이지 유신 이후 건설된 일본 국가를 절대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일본에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2단계 혁명론'을 제시하였다. 반면 '노농파'의 경우 메이지 유신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고, 당시 일본 국가를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보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다.

4. 1945년 이후의 역사학

4.1. 사회사의 시대: 구조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

4.1.1. 프랑스: 아날 학파와 사회사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세계 역사학은 프랑스 아날 학파와 미국 신사학이 촉발한 사회사로의 전환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아날 학파의 본거지인 프랑스인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 있었고, 1970년대까지 아날 학파 2세대인 페르낭 브로델이 주도한 사회 경제사 중심의 구조사 경향을 이끌었다. 브로델은 전체사를 지향했으며 이러한 전체사에 장기 지속과 구조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브로델을 기점으로 역사학자들은 점차 개인보다는 개인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의 파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역사 발전에 있어서도 혁명과 전쟁 등이 초래한 단절적 측면만큼이나 지속성의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 국내에서는 에르네스트 라브루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라브루스는 노동, 가격, 물가의 역사를 비롯한 사회 경제사 분야를 개척한 역사가로, 라브루스의 영향하에 프랑스 근대사 연구는 사회사적 접근이 지배적으로 자리잡았다. 프랑스 혁명사에서는 조르주 르페브르와 알베르 소불과 같은 소르본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역사가들이 고전적, 사회 경제사적 접근을 주도하면서 혁명 해석의 주류를 형성했다.

4.1.2. 영국: 서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아날학파와 함께 사회사의 양대 축을 형성한 것은 에릭 홉스봄을 비롯한 영국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1945년 이후 소련 및 동구권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인도와 일본, 라틴아메리카 등 비유럽 지역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을 가리지 않고 마르크스의 5단계 역사 발전론을 교조적으로 적용하여 역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을 도출해 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기점으로 소련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서구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교조적인 5단계 역사 발전론에서 벗어나 역사를 좀더 유연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의 결정적인 기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Below)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는 데 있다. 아날학파와 신사학 역사가들이 경제사 분야에 집중하면서 역사적 구조 분석과 계량화에 집중하였다면,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역사 속 위대한 개인이 아닌 민중에 주목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 해석을 전개해 나가고자 했다. 에드워드 P. 톰슨의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1968)은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4.1.3. 독일: 구조사와 역사적 사회 과학

독일(서독)에서는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테오도어 쉬더 등이 1950년대부터 구조사(Strukturgeschichte) 경향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나치 지지자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사회사는 독일 역사학의 뿌리깊은 보수적, 폐쇄적 경향과 공산주의 동독과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는 특수성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보다는 독일 역사학 내부의 혁신 움직임[6]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이들의 영향을 받은 한스-울리히 벨러, 위르겐 코카빌레펠트 대학의 전후 세대 역사가들은 마르크스와 특히 베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역사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을 지향하며 사회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역사학을 주장하였다. 한편 벨러, 코카와 함께 빌레펠트 대학에 재직했던 라인하르트 코젤레크는 사회사를 지향하면서도 전통적인 역사주의의 해석학적 접근을 계승하면서 개념사(Begriffsgeschichte)라고 하는 독창적인 지성사 접근 방식을 발전시켰다.

4.1.4. 미국: 합의학파와 신좌파 역사학

1950년대 미국에서는 리처드 호프스태터, 다니엘 부어스틴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사를 구성원들 간의 '합의'를 중심으로 조화롭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합의학파(Consensus History)의 역사학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신좌파 성향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역사관을 비판하고 미국사의 불평등과 차별 등의 요소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는데,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4.2.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1970년대부터는 클리포드 기어츠, 미셸 푸코, 헤이든 화이트 등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영향 속에서 사회와 구조에 개인을 매몰시키는 구조사에 대한 반발 및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문화'에 대한 접근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사회 과학계의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의 영향을 받은 신문화사는 엘리트들의 고급 문화가 아닌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문화를 인간 생활의 총체적 양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사회사로부터 발전한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영향이 지대하였고, 카를로 진즈부르그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주도한 미시사(Mikrohistorie)는 신문화사의 시작점이었다. 1977년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가 발간된 이래로 미국에서는 나탈리 지몬 데이비스, 로버트 단턴 등이, 영국에서는 피터 버크 등이 주도하였고, 서독에서는 한스 메디크알프 뤼트케,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울리히 헤르베르트 등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가 이어졌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3세대인 조르주 뒤비자크 르 고프,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 등 역시 '망탈리테'를 연구하는 심성사를 주도하면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였다.

한편으로 헤이든 화이트를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이론은 사료에 절대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포스트모던 역사학에서는 하나의 진리나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료들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역사는 과거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만이 존재하며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로서의 역사를 추구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화이트는 대표작 메타역사(1973)에서 역사 서술과 창작 사이에 차이가 없으며 단지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창작한 허구를 이야기하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7]

4.3. 1990년 이후: 전지구적 전환

냉전 종식 이후 역사학계의 최대 화두는 전지구적 전환(Global Turn)글로벌 히스토리/지구사(Global History),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초국가사(Transnational History)의 대두라 할 수 있다. 전 지구적 전환은 기본적으로 국민 국가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인류 역사가 서로 연결되어 전개되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며, 전지구적, 초국가적(트랜스내셔널, transnational) 연결성을 강조한다. 영미권과 독일에서 이러한 연구 경향을 선도하고 있는데, 위르겐 오스터하멜의 대변혁(Die Verwandlung der Welt, 2009)는 지구사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평가된다.

현재의 지배적 경향인 지구사와 더불어 2020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감정사, 동물사와 같은 다양한 영역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다.


[1] 다만 랑케는 이러한 사적 세미나 모임의 공식적 제도화를 기피하였기에 베를린 대학은 오히려 정식 전공으로서의 역사학과의 창설은 늦은 편이다.[2]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 문구는 루터파 종교인으로서 랑케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랑케 역사관의 신학적 특성을 보여 준다.[3] 그는 랑케의 제자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그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할 당시 랑케는 이미 은퇴한 시점이었기에 아니라고 여겨진다.[4] 일본에서 말하는 '실증'은 서구권에서는 경험적 연구(empirical studies) 정도의 언어로 표현된다.[5] 전후 농업사 연구를 개척한 나카무라 키치지가 히라이즈미에게 졸업 논문 주제로 농민의 역사를 다룬다고 하자 히라이즈미가 "돼지에게도 역사가 있습니까?"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6] 막스 베버와 오토 힌체가 대표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와 관련이 깊은 민족사(Volksgeschichte)와도 연결된다.[7] 화이트의 접근은 너무나도 급진적이라 역사가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화이트 역시 말년에 역사학과에서 문예 비평으로 적을 옮겨 버렸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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