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31 17:14:15

샘 누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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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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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
샘 누조마
Sam Nujoma
파일:Samuel Shafiishuna Daniel Nujoma.webp
<colbgcolor=#009543><colcolor=#fff> 본명 새뮤얼 샤피슈나 다니엘 누조마
Samuel Shafiishuna Daniel Nujoma
출생 1929년 5월 12일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 오밤보랜드
(現 나미비아 오밤보랜드)
사망 2025년 2월 8일 (향년 95세)[1]
나미비아 빈트후크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90년 3월 21일 ~ 2005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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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543><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다니엘 우토니 누조마(1893~1968)
어머니 헬비 음핀가나 콘돔볼로(1898~2008)[2]
배우자 코밤보 누조마(1933~, 1956년 결혼)
자녀 4명
학력 나미비아 대학교
종교 루터교회
정당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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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나미비아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초대 대통령.

2. 생애

1929년 5월 12일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의 오밤보랜드에 위치한 옹안제라 마을의 에툰다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훗날 부모님과 11남매, 총 13명으로 늘어났고9 그는 11남매 중 맏이였다. 동생들을 돌보고 농사일을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10살 때부터 핀란드에서 지은 선교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고, 당시 흑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학업과정을 마쳤다.

17살이 되던 1946년 월비스베이로 이주하여 이모와 함께 살면서 잡화점 점원, 포경소 직원 등으로 일했다. 1949년 성인이 되면서 빈트후크로 이사했으며, 남아프리카철도(SAR)사에 입사해 청소부로 일하는 한편 성 바르나바스 성공회 교단에서 설립한 성인 야간학교에서 영어 등을 공부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트랜스아프리카통신대학에서 추가로 수학했다.

지식을 쌓고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면서, 그의 삶은 점차 나미비아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나미비아 지역은 1884년부터 독일의 식민지배를 받아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군대를 동원해 독일군을 물리치고 이 지역에 계엄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었다. 종전 후 나미비아국제연맹의 승인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배하에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남아공의 백인 중심 국민당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면서 나미비아에도 똑같이 흑백분리 인종차별이 극심해졌다.

그는 남아프리카철도에서 퇴사한 후 나미비아 일대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외치는 저항운동에 투신, 1950년대 후반 이 운동을 이끄는 저항단체 '오왐보 인민기구'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흑백분리와 흑인 강제 이주 방침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이다 경찰에 체포되고, 지속적인 탄압을 피해 해외로 잠시 망명하기도 했다. 해외로 피신한 1960년 그는 오왐보 인민기구를 개편해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를 결성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남아공을 이끄는 백인 정부가 진압 작전을 벌이면서 독립전쟁이 지속되었고, 1976년 유엔이 SWAPO를 나미비아의 유일한 국민대표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뒤 1978년 "남아공이 나미비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음에도 충돌은 이어졌다. 양측의 전쟁은 1989년 4월에서야 휴전협정을 맺으며 중단되었다.

휴전한 그 해 유엔의 관리하에 치러진 총선에서 SWAPO가 압승하고, 1990년 나미비아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확정됨과 함께 의회의 간선제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나의 나미비아, 하나의 국가"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국민통합에 앞장서면서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보수적 가부장제가 뿌리 깊었던 나미비아의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옹호하고 이를 지원하는 법제를 정비하기도 했다.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5년 더 집권했고, 재임 중인 1998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며 2005년까지 총 15년을 재임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재자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또한 카프리비 반군을 잔인하게 유혈 진압한 점,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 불편한 기색을 공공연히 드러낸 점, 동성애를 강하게 비난한 점 등은 국내외 비판 여론을 일으키며 논란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확고한 좌익 공산주의자로, SWAPO를 이끌면서도 당내 반대파와 비판론자들을 가차 없이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그 후신인 러시아에 대단히 친화적이었고 재임 중에 북한·쿠바·중국사회주의 독재 국가들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반서방 기조를 드러내는 선명하고 과격한 언사로 서구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2005년 임기 만료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일반 시민의 한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퇴임 이후에도 SWAPO는 이후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현재까지도 나미비아 정치를 주도하는 일당우위정당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퇴임 후에는 별다른 정치 행보 없이 야인으로 조용히 살다가 2025년 2월 8일 수도 빈트후크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95세. 제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하게 게인고브가 임기 중 암투병 끝에 사망한 지 1년여 만이었다. 게인고브의 사망으로 직을 승계한 난골로 음붐바 대통령이 "해방 투쟁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우리 나미비아 국민을 단결시킨 영웅"이라며 애도를 전했고, 국민적 추모 분위기 속에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1] 그가 사망한 2025년 기준으로 나미비아의 평균 수명이 74살인것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장수하였다.[2] 이건 오타같은게 아니라 정말로 110년을 살았는데, 비록 검정은 못받았지만 그녀는 나미비아 최초의 여성 초백세인이자 사망 당시 나미비아에서 가장 오래 산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