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01:26:12

샘 라이스

샘 라이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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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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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세네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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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Sam Rice HOF.png
샘 라이스
헌액 연도 1963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추천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2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도루왕
에디 콜린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샘 라이스
(워싱턴 세네터스)
조지 시슬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워싱턴 세네터스 등번호 2번
결번 샘 라이스
(1931)
하이니 마누시
(1932)
워싱턴 세네터스 등번호 22번
재키 헤이스
(1931)
샘 라이스
(1932~1933)
거스 더가스
(193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29번
조니 오울리버
(1933)
샘 라이스
(1934)
로이 휴즈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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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am Rice.jpg
에드가 찰스 "샘" 라이스
Edgar Charles "Sam" Rice
출생 1890년 2월 20일
사망 1974년 10월 13일 (향년 84세)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신지 인디애나 주 모로코
학력 로드 아일랜드 컨트리 고등학교
신체 175cm / 68kg
포지션 우익수[1]
투타 우투좌타
소속팀 워싱턴 세네터스 (1915~193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34)

1. 개요2. 생애3. 가족을 모두 잃다4. 선수 생활
4.1. 선수 생활 초기4.2. 전성기 & 선수 생활 말년4.3. THE CATCH4.4. 샘 라이스 데이 & 선수 생활 말년
5. 평가6. 플레이 스타일7.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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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워싱턴 세네터스 역사상 최고의 타자이자, 3000안타에 가장 근접한 선수로 인간승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찰스 라이스와 루이사 뉴마이어 사이에서 6명의 자녀 중 첫 째로 태어난 에드가 라이스[2]는 16살의 나이[3]에 결혼을 했고, 아내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가졌고, 세미프로 리그에서 야구 선수로써 두각을 드러냈다. 이렇게 그의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갈 것 처럼 보였으나...

3. 가족을 모두 잃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3일 전에 그에게 엄청난 비극이 찾아온다.[4] 토네이도로 인해 그의 아내와 두 아이, 어머니, 두 여동생 모두 사망하고 만 것. 아버지 또한 토네이도로 인한 후유증으로 일주일뒤에 사망했다. 라이스는 이 동안 2번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는데, 첫 번째는 부모와 남매, 두 번째는 아내와 자식의 장례식이었다. 결국 그는 이 때문인지 몰라도 1913년에는 야구를 하지 않고, 여러 직장을 떠돌며 방랑자 생활을 하던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한 시즌 동안 투수로써 리그를 뛰었다. 그리고 1914년에 버지니아 리그의 피터스버그 구버스라는 팀에 입단해 1.54의 방어율과 9승 2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그 다음 해에도 11승 12패라는 호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1915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구버스의 구단주였던 닥 레이는 클라크 그리피스[5]라는 구단주에게 300달러라는 금액의 빚을 지고 있었고, 이를 갚기 위해 에드가 라이스를 워싱턴으로 팔려고 했던 것. 그리고 레이는 에드가 라이스에게 2가지 제안을 하는데 첫 번째는 선수 등록명을 "에드가" 라이스에서 "샘" 라이스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두 번째는 포지션을 투수에서 우익수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4. 선수 생활

4.1. 선수 생활 초기

1915년 워싱턴에 입단했을때의 그의 나이는 25살로 당시로 봐도 상당한 나이였다. 이때문인지 몰라도 그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었고, 타석에 별로 들어서지도 못했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5년 동안 기록한 그의 기록은 고작 1371타수 426안타에 불과했다. 이대로 라이스가 은퇴했다면 그저 평범한 야구 선수로써 선수 생활을 은퇴하거나 대수비 요원으로나 쓰였을 것이었겠지만, 라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4.2. 전성기 & 선수 생활 말년

1920년대에는 야구의 최전성기나 마찬가지였다. 베이브 루스, 월터 존슨, 조지 시슬러와 같은 슈퍼스타들이 마구 튀어나왔고, 이로 인해 야구는 당대 최고의 스포츠로 군림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1920년대 최고의 안타기계를 뽑으라면 샘 라이스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1920년 3번째 풀타임 시즌[6]을 가진 그는 211안타와 63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에 올랐다. 이 것은 라이스의 첫 번째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1922년, 1924년, 1926년에는 리그 최다 타수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1924년과 1926년[7]에는 최다 안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8] 특히 그의 전성기는 1925년이었는데, 무려 227안타와 0.350의 타율, 87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한 시즌 최다 안타, 최고 타율, 최다 타점을 경신했다. 그리고 1928~1930년 동안 3년 연속으로 190안타, 0.320의 타율을 기록하며 계속해서 전성기를 누렸다.

4.3. THE CATCH

현대 야구에서의 "더 캐치"는 윌리 메이스의 호수비를 떠올리겠으나, 이는 호수비로서 유명해진 것이고, 샘 라이스의 "더 캐치"는 포구 여부에 대해 논란이 생겨 불린 이름이다. 1925년 월드 시리즈 3차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포수 얼 스미스가 홈런성 타구를 날렸고, 샘 라이스는 관중석으로 넘어가버린다. 그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을때, 공은 라이스의 글러브 안에 있었고, 심판은 그대로 아웃 선언을 한다. 이 것으로 인해 스미스의 타구는 큰 논란거리로 번졌다. 파이리츠의 팬들은 관중들이 라이스의 글러브에 공을 넣어줬다며 항의했지만[9], 라이스는 말을 아꼈다.[10] 그러나 훗날 라이스가 사망하고 아내 메리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타구를 제대로 캐치했다"고 설명하며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4.4. 샘 라이스 데이 & 선수 생활 말년

1932년 시즌 막바지에 워싱턴 세네터스가 라이스를 위해 개최한 날로, 당시 팀에서는 라이스를 위해 2200달러 짜리 수표와 스튜드베이커 자동차 등 여러 고급 선물을 라이스에게 주었다. 그리고 1933년 그는 25안타를 기록한 것을 끝으로 세네터스와의 작별을 고하였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여 한 시즌을 뛴 뒤 은퇴했다.

5. 평가

인간승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인물로써, 세네터스에서 만큼은 레전드로 대우받는 인물이다. 아마도 세네터스 시절 유일한 우승에 크게 기여한 3명의 선수들 중 한 명[11]이라 그런듯.

6. 플레이 스타일

볼넷이 적고 안타가 많은 커비 퍼켓과 비슷한 유형의 타자로써, 2987안타라는 메이저리그 역대 33위라는 안타 수에 비해 그가 기록한 볼넷은 고작 708개. 그렇지만 삼진이 굉장히 적어 20년 동안 그가 당한 삼진수는 고작 275개. 거의 한시즌에 14개씩 밖에 안 당한 꼴 그리고 달리기도 빨라 도루왕도 한 차례 차지한 적이 있고, 컨택력도 좋아 통산 타율이 0.322이나 된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굉장히 저평가되었는데 이유는 같은 아메리칸 리그에 베이브 루스루 게릭라는 거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12] 그리고 3000안타에 불과 13개만을 남겨놓고 은퇴했는데 그가 은퇴 후 2년 뒤에 클라크 그리피스 구단주가 이를 알고 그에게 복귀를 권했으나 그는 "연연하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13]

7. 말년

1940년대에 라이스는 한 시대를 풍미한 야구선수 치고는 다소 평범한 농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1963년 베테랑 위원회로써 존 클락슨, 엘머 플릭, 에파 릭시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그는 당시 자신이 헌액된 것이 매우 기쁘다고 얘기하였다. 그리고 1974년 미키 맨틀화이티 포드의 헌액식에서 드러낸 모습을 끝으로 그는 다시는 자취를 감췄으며 그 해 10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1] 우익수 이전의 포지션은 투수.[2] 당시에는 샘이라는 이름 대신 에드가라는 이름을 썼었다고 한다.[3] 김형준의 레전드 스토리에서는 18살로 나오나, 실제로는 16살이 맞다.[4] 또한 펜웨이파크 개장 8일전이기도 했다.[5] 이렇게 써놓으니 별거 아닌 구단주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세네터스 역사상 최고의 구단주라 평가받는 인물로 구단주로써의 업적만으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대단한 인물이다.[6] 사실 1917년, 1919년에도 600타석을 넘으며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기는 했다.[7] 이 해에 MVP 4위까지 기록했다. 당시 MVP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조지 번즈.[8] 그리고 1924년에는 월터 존슨과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다.[9] 웃긴건,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파이리츠가 기록했다(...)[10] 심지어 라이스는 포구 사실 여부를 토네이도에서 살아난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11] 나머지 두 명은 월터 존슨구스 고슬린.[12] 그리고 세네터스가 약팀이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13] 그리고 그는 애초에 자신이 안타 몇개 치고를 세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