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23:36:58

하먼 킬러브루

하먼 킬러브루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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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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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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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먼 킬러브루 로드 커류 토니 올리바 켄트 허벡 커비 퍼켓
캘빈 그리피스 허브 카닐 짐 카트 버트 블라일레븐 톰 켈리
밥 앨리슨 밥 케이시 얼 배티 프랭크 바이올라 칼 폴해드
조일로 베르사예스 게리 가이에티 짐 랜츠 릭 아길레라 브래드 래드키
조지 브로피 그렉 개그니 짐 페리 카밀로 파스칼 에디 과다도
톰 미 존 고든 토리 헌터 마이클 커다이어 앤디 맥파일
요한 산타나 조 네이선 제리 벨 저스틴 모노 론 가든하이어
댄 글래든 세자르 토바 조 마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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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존슨 하먼 킬러브루 하이니 마누시 샘 라이스 얼리 윈
워싱턴 세네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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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Killebrew%20Harmon%20Plaque_NB_0.png
하먼 킬러브루
헌액 연도 1984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3.1% (4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6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데니 매클레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하먼 킬러브루
(미네소타 트윈스)
부그 파웰
(볼티모어 오리올스)

워싱턴 세네터스 등번호 25번
제리 란
(1953)
하먼 킬러브루
(1954)
바비 클라인
(1955)
워싱턴 세네터스 등번호 12번
웨인 터윌리거
(1953~1954)
하먼 킬러브루
(1955~1956)
텍스 클레빈저
(1957~1960)
워싱턴 세네터스-미네소타 트윈스 등번호 3번
칼 올슨
(1956~1957)
하먼 킬러브루
(1957~1974)
영구결번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3번
팀 창단 하먼 킬러브루
(1975)
데이브 넬슨
(1976~1977)
}}} ||
파일:Harmon Killebrew.jpg
<colbgcolor=#091f40><colcolor=#ffffff> 미네소타 트윈스 No. 3
하먼 클레이튼 킬러브루 주니어
Harmon Clayton Killebrew Jr.
출생 1936년 6월 29일
사망 2011년 5월 17일 (향년 74세)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아이다호 주 파예트
신체 180cm / 96kg
포지션 1루수, 3루수, 좌익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WSH)
소속팀 워싱턴 세네터스-미네소타 트윈스 (1954~1974)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5)

1. 개요2. 선수 생활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명예의 전당 입성
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6. 사망7.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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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Killebrew Twins.jpg
미국의 전 야구 선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1960년대를 빛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21시즌을 보낸 최고의 원 클럽 맨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윌리 메이스행크 애런이 건재하던 1960년대에만 저들보다 적은 타석 수로 393홈런을 때리며 1960년대 통산 홈런 1위를 기록했다.[2] 또한 1960년대에 가장 많은 볼넷을 얻은 선수이기도 하다.(970BB)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통산 성적은 22시즌 동안 타율 .256, 출루율 .376, 장타율 .509, 2086안타, 573홈런, 1584타점, BB/K 0.92, wRC+ 142를 기록했다.

2. 선수 생활

1936년 아이다호 주 파예트에서 태어난 하먼 킬러브루는 대학 시절 미식축구 풀백으로 활약하였던 아버지에게서 강한 근력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농장에서 일하면서 힘을 기른 그는 43kg의 우유통을 들고 다니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킬러브루는 파예트 고등학교 시절 다양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미식축구에서는 쿼터백으로 뛰면서 전미 아마추어 올스타팀에 선정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쳐 후일 학교에서 그의 등번호는 영구결번되었다. 그를 주목했던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체육 장학금을 제안받았지만 킬러브루는 이를 거절했다.

킬러브루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시절 지역의 세미 프로 리그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았던 아이다호 주 상원 의원인 허먼 웨커는 당시 워싱턴 세너터스[3]의 구단주였던 클락 그리피스에게 그를 추천했고 세너터스에서는 곧장 팜 디렉터였던 어시 블루지를 파견해 경기를 관전하게 했다. 그리고 블루지는 곧장 팀에게 킬러브루를 영입해야 한다고 전보를 보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도 그를 노리고 있었으나 보너스 룰[4]을 어길 생각이 없었던 레드삭스는 킬러브루를 놓치고 만다.

1954년 5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워싱턴 세너터스에 입단한 킬러브루는 보너스 룰로 인해 메이저 리그에서 곧장 데뷔하게 되었다. 2년 동안 메이저 리그에 머무르면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킬러브루는 1956년부터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를 오가게 되었다. 팀에서도 그를 포기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으나 그의 재능을 믿고 있던 당시 구단주인 캘빈 그리피스는 1959년 당시 팀의 주전 3루수였던 에디 요스트[5]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 시키고 킬러브루를 주전으로 기용하게 하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쿠키 라바제토는 선구안과 수비력이 뛰어났던 에디 요스트를 트레이드시킨 구단주에게 반발하였지만 킬러브루는 실력으로 감독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는 시즌 중반 한 때 베이브 루스의 시즌 60홈런 기록을 경신할 듯한 기세를 보였으며 전국의 야구 팬들은 새로 등장한 이 슬러거에게 매료되었다. 특히 5월 말에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직접 세너터스의 홈구장인 그리피스 스타디움을 찾아 세너터스와 레드 삭스 간의 경기를 관전하고 킬러브루를 만났으며 자신의 손자 데이비드[6]를 위하여 킬러브루의 사인볼을 받아 가기도 하였다. 비록 킬러브루는 60홈런을 넘기지 못했지만 .242 .354 .516 42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올스타에도 뽑히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이듬 해인 1960년에도 많은 경기에 출장하진 못했지만 .276 .375 .534 31홈런 80타점이란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고지 이전 문제로 인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팀은 이듬해 워싱턴 D.C.를 떠나 미네소타미니애폴리스-세인트 폴로 연고지를 옮기게 된다. 팀 이름 역시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로 바뀌었다.

1961년 주로 1루수로 출장한 킬러브루는 .288 .405 .606 46홈런 122타점을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팬들의 관심은 로저 매리스미키 맨틀이 벌이는 홈런 경쟁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62년 좌익수로 자리를 옮긴 킬러브루는 .243 .366 .545 48홈런 126타점으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독식하고 미키 맨틀과 바비 리처드슨에 이어 MVP 3위에 올랐다.

이후 미키 맨틀이 부상으로 쇠퇴할 기미를 보이면서 킬러브루는 명실상부한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슬러거가 되었다. 1963년과 1964년 그는 각각 .258 .349 .555 45홈런 96타점과 .270 .377 .548 49홈런 111타점을 기록하면서 3년 연속 홈런왕을 석권했으며 1964년 5월에는 7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5년 8월 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1루수를 보던 그는 수비 중 3루수의 송구를 받다가 러스 스나이더와 충돌로 왼팔에 부상을 입어 남은 시즌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시즌 그는 .269 .384 .501 25홈런 75타점에 그쳤다. 그러나 이 시즌 트윈스는 워싱턴 시절 이후 처음으로 리그 정상에 올랐고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상대는 샌디 코팩스돈 드라이스데일로스앤젤레스 다저스였다. 1차전 유대교의 속죄일로 인해 샌디 코팩스가 등판하지 못한 다저스를 무너뜨리고 2차전에서는 코팩스마저 무너뜨렸다. 그러나 다저 스타디움에서 이루어진 3차전에서 5차전까지를 모두 다저스에 내주었고 코팩스가 5차전과 7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면서 트윈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은 좌절되었다. 4차전에서 나온 킬러브루의 홈런 역시 빛을 바랬다.

1966년과 1967년 동안 킬러브루는 .281 .391 .538 39홈런 110타점과 .269 .408 .558 44홈런 113타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리고 1967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공동 홈런왕과 MVP 2위에 올랐으나 2년 연속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프랭크 로빈슨칼 야스트렘스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뺏겼다.

2년 동안 좋은 성적을 올렸음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킬러브루는 1968년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다. 1968년 7월 9일 애스트로돔에서 열린 올스타 게임에 출장한 킬러브루는 이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210 .361 .420 17홈런 40타점이라는 부진한 시즌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재활을 거쳐서 돌아온 킬러브루는 양 리그가 동서 지구로 나뉘던 첫 해인 1969년 .276 .427 .584 49홈런 140타점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석권하고 아메리칸 리그 MVP에 오르는 등 개인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70년에도 .271 .411 .546 41홈런 113타점을 기록하고 MVP 3위에 올랐으나 두 시즌 동안 팀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1971년 8월 19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500홈런을 기록한 킬러브루는 .254 .386 .464 28홈런 119타점으로 홈런 수가 줄어들었으나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에 올랐다.

그러나 1972년부터 노쇠하기 시작한 킬러브루는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1974년 팀은 킬러브루에게 은퇴하고 코치를 맡을 것을 제의했으나 선수 생활을 연장하기 원했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캔자스시티 로얄스로 이적했다. 미네소타 트윈스에서는 20년간 고생해준 팀의 레전드에 대한 예우로 그가 처음 옛 홈으로 돌아온 날 영구결번식을 열어줬고 경기에서 홈런을 치자 팬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1975년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슬러거는 573홈런과 1584타점이라는 업적을 뒤로 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선수 생활 동안 수비 불안으로 인해 포지션을 여러 번 옮겼을 정도인 동시에 발이 빠른 편도 아니어서 선수 전체로 봤을 땐 윌리 메이스 등의 다른 선수들에게 밀렸지만, 컨택을 뺀 타격 능력에서만큼은 당대 빼어난 족적을 남긴 파워형 OPS 히터였다.

특히나 제일 돋보이는 기록은 단연코 홈런으로, 1960년대 최정상급 홈런왕을 꼽을 때 1순위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처음 주전이 된 1959년부터 마지막으로 40홈런을 기록한 1970년까지 12년 동안 그는 40홈런 시즌만 8회 달성했으며 6번 홈런왕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 476홈런을 기록했던 킬러브루보다 홈런을 많이 친 타자는 아무도 없었다.[7] 또한 그는 3번 타점왕에 올랐으며 4번 최다 볼넷 1위에 올랐다. 지독한 투고타저의 시대였던 1960년대에 이러한 기록을 달성하여 수많은 OPS 히터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4. 은퇴 이후

킬러브루는 은퇴 후 1978년까지 트윈스의 방송 캐스터로 일했으며 이후 에인절스와 애슬레틱스에서도 같은 자리를 맡았고 보험 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5. 명예의 전당 입성

1981년부터 명예의 전당 입성 후보로서의 자격을 얻은 킬러브루는 첫 번째 투표는 밥 깁슨, 두 번째 투표는 행크 애런프랭크 로빈슨, 세 번째 투표에는 브룩스 로빈슨후안 마리샬에 밀려 입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 번째 투표에서 83.1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루이스 아파리시오, 돈 드라이스데일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그레이잉크HOF 모니터HOF 스탠다드
하먼 킬러브루 48 193 178 46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21st)
career WAR7yr-peak WARJAWS
하먼 킬러브루 60.4 38.1 49.2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6. 사망

2010년 12월 29일 식도암 투병 소식을 알렸다. 이후 암이 급속도로 전이되면서 치료를 포기했고 결국 2011년 5월 17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7. 이모저모

  • 1968년 제리 디올에 의해 디자인 된 메이저 리그 공식 로고의 모델이라 알려져있고 그의 사진중 로고에 대조할때 거의 일치하는 사진이 있을뿐 이는 공식적으론 사실이 아니다. 제리 디올은 모델이 없다고 밝혔다. 출처
  • 킬러브루의 통산 타율은 .256으로 이는 명예의 전당에 투표로 입성한 타자 중 가장 낮은 타율이다.[8]
  • 미네소타 트윈스 통산 홈런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트윈스에서만 559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2위 기록인 켄트 허벡의 293홈런보다 월등히 높은 기록이다.

[1] 데뷔 초에는 주로 3루수로 뛰었지만 수비 불안으로 인해 1루수와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겼다.[2] 킬러브루: 393홈런/6,042타석, 메이스: 350홈런/6,213타석, 애런: 375홈런/6,661타석.[3] 미네소타 트윈스의 전신이다.[4] 당시 4천 달러 이상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선수는 무조건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도록 하는 룰이 있었다. 이 제도는 당시 과열되는 유망주 계약금 규모를 낮추고, 몇몇 팀이 자본빨로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마구 사들여 자기들 팜에 짱박아 놓는 행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제도로 인해 메이저 리그에 직행하는 루키들은 보너스 베이비라고 불렸다. 1965년부터 메이저 리그에 아마추어 드래프트 제도가 도입되며 보너스 룰은 폐지되었다.[5] The walking man이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눈야구에 능했던 선수로 메이저리그 역대 볼넷 11위이다[6] 캠프 데이비드의 그 데이비드다.[7] 행크 애런 452홈런, 프랭크 로빈슨 377홈런.[8] 최저 타율 1위는 .253의 레이 샬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