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비 퍼켓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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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커비 퍼켓 | ||||||||||||||||||||||||||||||||||||||||||||||||||||||||||||||||||||||
헌액 연도 | 2001년 |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
투표 결과 | 82.1% (1회) |
커비 퍼켓의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
1987 | 1991 |
199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 ||||
데이브 스튜어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 | 커비 퍼켓 (미네소타 트윈스) | → | 로베르토 알로마 (토론토 블루제이스) |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 | 커비 퍼켓 (미네소타 트윈스) | → | 프레드 맥그리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아지 스미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커비 퍼켓 (미네소타 트윈스) | → | 에릭 데이비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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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40><colcolor=#ffffff> 미네소타 트윈스 No. 34 | |
커비 퍼켓 Kirby Puckett | |
출생 | 1960년 3월 14일 |
일리노이 주 시카고 | |
사망 | 2006년 3월 6일 (향년 45세) |
애리조나 주 피닉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3cm / 80kg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3번, MIN) |
소속팀 | 미네소타 트윈스 (198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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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수 생활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1991년 월드시리즈 6차전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환호하는 모습 |
And we'll see you tomorrow night!-그리고 저희는 내일 밤에 뵙겠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당시 중계 아나운서 잭 벅의 마지막 코멘트
너무나도 유명한 당시 중계 아나운서 잭 벅의 마지막 코멘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미네소타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중견수. 미네소타의 1987년과 1991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자, 배드볼 히터로서 정교함과 장타력을 겸비한 타자. 조 디마지오가 은퇴한 1951년 이후 최고의 통산 타율을 기록한 우타자로 남아있다.
미네소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팬들에게 친절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선수였다. 비운의 녹내장으로 인해 조기 은퇴를 했고, 그 뒤 사생활을 둘러싼 여러 구설수와 너무 일찍 은퇴한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건강이 악화되어 겨우 만 45세에 타계했다.
통산 성적은 1,783경기 0.318 2,304안타 207홈런 1,085타점.
2. 선수 생활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야구를 접하고, 야구에 인생을 걸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키. 고교 시절 평범했던 성적에 키도 고작 173cm에 몸무게도 100Kg가 나가는 그의 체구를 보고,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고, 고교 졸업 무렵에 결국 프로는커녕 대학에서도 그를 찾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포드 자동차의 공장에 취직해서 야구 선수로서의 삶도 포기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년 후에 기어이 브래들리 대학에 입학해서 야구 선수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했고, 대학에서 실력이 급상승하며, 마침내 1982년 1월 드래프트에서[1] 미네소타의 1라운드 3번 지명을 받는데 성공한다.마이너리그는 일찍 졸업한 후, 1984년 데뷔하는데 데뷔전에서 4안타를 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미네소타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해 신인치고 훌륭한 0.296 165안타의 성적을 기록했다. 신인 시절 컨택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찰리 매뉴얼의 지도를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 다만 문제는 거대한 체구에 비해 장타력이 형편없었다는 것. 데뷔 첫 해 단 하나의 홈런도 치지 못했고, 이듬 해인 1985년에도 단 4개의 홈런에 그쳤다.
그런데 1986년 미네소타 트윈스의 또 다른 레전드인 토니 올리바의 지도를 받아 장타력이 급상승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파워 히터가 된 것은 아니고, 컨택은 그대로 유지한 채, 무려 30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퍼켓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500타수 이상 무홈런 시즌(1984년)과 30홈런 시즌을 모두 보낸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 후로도 20홈런 정도는 꾸준히 기록해 주면서 퍼켓은 완전히 미네소타의 주전 중견수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퍼켓의 활약 속에 미네소타는 점차 성적이 상승하며, 1987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승 3패로 누르고 미네소타 이전 이후 최초이자, 무려 63년만의 정상 등극에 성공했다. 퍼켓은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 0.357의 타율을 기록했다. 정규시즌에서도 빛나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최다안타왕 3연패를 기록하며 2006~2010년 스즈키 이치로가 5연패를 할 때까지 최다안타왕 3연패를 달성한 마지막 선수가 되었고, 1989년에는 타격왕에도 올랐다.
1987년 우승 이후, 주춤했던 미네소타는 1990년 꼴찌를 딛고 1991년 월드시리즈에 다시 오르는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극적인 승부에서 퍼켓은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상대의 역전 적시타를 호수비로 막아내고, 역전 희생플라이를 쳤으며, 11회말 끝내기 홈런을 작렬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만든 것. 7차전에서 잭 모리스의 10이닝 완봉승에 힘입어 미네소타는 다시 월드시리즈를 차지했다.
그 뒤 퍼켓은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팀의 주축들은 모두 떠났지만, 퍼켓만이 홀로 남아 미네소타의 중견수와 3번 타자 자리를 지키며 변함없는 활약을 선보였다. 1992년 최대안타왕, 파업으로 조기 중단된 1994년에는 108경기에서 112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에 올랐다.
1995년 9월 2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와의 경기 1회말 때 상대팀 선발투수 데니스 마르티네즈의 공에 턱을 정통으로 맞는 부상으로 시즌을 종료했지만[2], 1996년 시범 경기에서 0.346의 타율을 기록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던 그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1996년 3월 28일 아침에 일어난 퍼켓은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오른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청천벽력 같은 악성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거듭된 수술과 치료에도 녹내장이 회복되지 않자 퍼켓은 허망하게 선수 생활을 끝내야 했다. 그리고 이게 퍼켓 개인으로서의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3. 은퇴 이후의 삶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전국구 스타 퍼켓이었지만 불행한 은퇴 이후, 그의 삶은 뒤흔들리고 말았다. 비극적인 은퇴 때문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쉽게 입성했지만, 아쉬운 은퇴로 인해 퍼켓의 마음은 크게 혼란해졌고 결국 여러 구설수로 이어졌다. 아내와의 이혼 소송 및 여러 보도를 통해 팬들과 동료들에게 친절했던 그가 여자에게만은 폭군처럼 굴고 폭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 알려졌던 것.그리고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해 재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비록 무죄 선고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 와중에서 또 다시 앞의 여자에게 폭력적이었다는 보도와 맞물리면서 퍼켓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그 사이 퍼켓은 그렇지 않아도 적지 않던 100Kg의 몸무게가 절제를 잃으면서 점차 불어나 135kg로 늘어났다. 비록 새로운 연인을 만나 약혼하면서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급격하게 늘어나 버린 몸무게는 결국 가족력인 뇌졸중과 만나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2006년 3월 5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자택에서 퍼켓은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3월 6일 향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루 게릭 다음으로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입성자였다. 만약 정석적인 선수 생활을 보냈다면 갓 은퇴해서 미네소타에서 행복하게 존경받으면서 가끔 구장에도 오고 그랬어야 할 인물이 급작스레 찾아온 녹내장으로 인한 불행한 은퇴와 여러 구설수로 흔들린 것이 결국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4. 명예의 전당 입성
연도 | 득표율(%) |
2001 | 82.1 |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커비 퍼켓 | 22 | 122 | 160 | 39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Center Field (14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커비 퍼켓 | 50.9 | 37.5 | 44.2 |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 71.2 | 44.6 | 57.9 |
5. 연도별 성적
로드 커류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84 | MIN | 128 | 583 | 156 | 12 | 5 | 0 | 63 | 31 | 14 | 16 | 69 | .296 | .320 | .336 | .655 | 3.3 | 3.4 |
1985 | 161 | 744 | 199 | 29 | 13 | 4 | 80 | 74 | 21 | 41 | 87 | .288 | .330 | .385 | .715 | 2.8 | 2.9 | |
1986 | 161 | 723 | 223 | 37 | 6 | 31 | 119 | 96 | 20 | 34 | 99 | .328 | .366 | .537 | .903 | 5.3 | 5.7 | |
1987 | 157 | 668 | 207 | 32 | 5 | 28 | 96 | 99 | 12 | 32 | 91 | .332 | .367 | .534 | .900 | 3.8 | 4.2 | |
1988 | 158 | 691 | 234 | 42 | 5 | 24 | 109 | 121 | 6 | 23 | 83 | .356 | .375 | .545 | .920 | 7.1 | 7.8 | |
1989 | 159 | 684 | 215 | 45 | 4 | 9 | 75 | 85 | 11 | 41 | 59 | .339 | .379 | .465 | .843 | 4.7 | 4.9 | |
1990 | 146 | 615 | 164 | 40 | 3 | 12 | 82 | 80 | 5 | 57 | 73 | .298 | .365 | .446 | .811 | 2.4 | 2.8 | |
1991 | 152 | 661 | 195 | 29 | 6 | 15 | 92 | 89 | 11 | 31 | 78 | .319 | .352 | .460 | .812 | 3.8 | 4.3 | |
1992 | 160 | 696 | 210 | 38 | 4 | 19 | 104 | 110 | 17 | 44 | 97 | .329 | .374 | .490 | .864 | 5.9 | 7.1 | |
1993 | 156 | 682 | 184 | 39 | 3 | 22 | 89 | 89 | 8 | 47 | 93 | .296 | .349 | .474 | .824 | 0.3 | 1.4 | |
1994 | 108 | 482 | 139 | 32 | 3 | 20 | 79 | 112 | 6 | 28 | 47 | .317 | .362 | .540 | .902 | 3.1 | 3.6 | |
1995 | 137 | 602 | 169 | 39 | 0 | 23 | 83 | 99 | 3 | 56 | 89 | .314 | .379 | .515 | .894 | 2.1 | 3.1 | |
MLB 통산 (12시즌) | 1783 | 7831 | 2304 | 414 | 57 | 207 | 1071 | 1085 | 134 | 450 | 965 | .318 | .360 | .477 | .837 | 44.9 | 51.2 |
6.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다. 12시즌을 뛰면서 얻은 통산 볼넷 개수는 고작 450개에 234안타를 쳤던 시즌에도 볼넷은 23개에 그쳤다.[3] 그가 눈야구에 능한 출루형 타자와는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 나온 것은 퍼켓이 선구안이 나쁘다기보단 공을 때려서 나가는 것을 선호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들어오는 공은 죄다 맞출 수 있는 컨택 력과 20+홈런을 바라볼 수 있는 장타력이 존재했던 데다 출루를 중시해야 하는 테이블 세터보단 득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타격을 중시해야 하는 중심타선에 더 많이 위치했던 선수였기 때문에 볼넷이 적은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비록 볼넷은 적었어도 삼진도 마찬가지로 적었기 때문에 시즌 100삼진을 1번도 당한 적이 없다. 물론 볼넷보다 항상 삼진은 조금 많았지만 심하게 삼진만 당하는 공갈포 유형의 타자도 아니었던 것.안타제조기라서 첫 10년간 안타 개수는 메이저리그 역대 5위이며, 그가 뛴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안타 개수로 따지면 메이저리그 1위다. 비운의 은퇴만 아니었다면, 3,000안타는 무난했을 것이다. 나이 35세 시즌에 0.314에 169안타를 친 실력에 비춰볼 때, 녹내장이 아니었다면, 4년 정도 더 뛰면 충분히 700안타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웨이드 보그스와 토니 그윈이 3000안타를 때려내는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4]
퍼켓을 상징하는 것은 뛰어난 컨택과 준수한 장타력도 있지만, 수비력이 빼어났다. 체구는 있었지만, 의외로 민첩하고 날렵해서 타구 판단을 잘 했고, 무엇보다 송구 능력이 기가 막혔다. 아직 무명이던 시절에 그의 송구 능력을 얕잡아보고 뛰다가 걸린 상황이 많았다. 데뷔 년도인 1984년 어시스트 숫자가 16개, 그 이듬 해에는 19개를 기록했고, 그 뒤로는 퍼켓의 어깨를 의식해서 주자들이 알아서 자제하면서 어시스트 숫자는 줄어들었다. 대신 골드글러브를 6번 차지했다. 무엇보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인품이었다. 팀 동료들의 리더였고, 동료와의 사이도 정말 좋았다. 아울러 팬들에게도 항상 친절했고, 언제나 팬들의 싸인에 흔쾌히 응한 선수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그는 10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로도 선정되었다. 비록 은퇴 이후 사생활 때문에 이미지를 많이 깎아 먹었지만, 적어도 현역 시절의 퍼켓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선수였던 것은 틀림없다.
다만 명전감인지에 대해서는 찬반논란이 팽팽해지는데, 세이버메트릭스가 득세하는 2020년대 초반 추세는 명예의 전당 라인에서 최하위 수준이라는 평. 명전에 가지 못 한 중견수 중에 앤드루 존스, 짐 에드먼즈, 케니 로프턴이 퍼켓보다 절대 못 하지 않다는 것이다. 로프턴은 빼더라도 퍼켓보다 존스가 월등하다는 것은 사실이고, 존스가 명전감이라면 에드먼즈도 명전감이라는 것. 키스 로는 그래서 비운의 은퇴로 인한 동정표 덕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고 비판한다. 물론 명전은 성적 만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운의 은퇴도 은퇴지만 원클럽맨+빅 게임 플레이어+현역 시절의 인망이라는 요소를 모두 갖춘 이상 퍼켓이 명전감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공수 겸장 플레이어로서 토니 그윈에 버금가는 WAR을 쌓고도 첫 턴 광탈을 당한 짐 에드먼즈의 경우가 심하게 저평가를 당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앤드루 존스는 아직 투표가 진행중이며 입성 가능성이 높게 평가 받으니 아직은 '명전에 못 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의 등번호 34번은 은퇴와 동시에 미네소타 트윈스의 영구결번이 되었고, 2010년 새로 개장한 타겟 필드에는 1991년 월드시리즈 6차전 끝내기 홈런을 친 그 장면(맨 위 프로필 사진)을 그대로 묘사한 그의 동상이 서 있다.
[1] 제프 쇼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는, 정식 드래프트가 아닌 JUCO 출신나 퍼켓처럼 사정이 있어서 정식 드래프트에 지원 못한 선수를 구제하기 위해 있었던 추가 드래프트이다.[2] 어차피 정규시즌 막판이었다.[3] 얼마나 적은 수치냐면 국내프로야구 심정수 선수가 2003년 한 시즌에 얻어낸 볼넷 갯수는 124개이며 전성기 테드 윌리엄스가 3년만 뛰어도 460개를 넘게 얻어냈었다. 물론 테드와 심정수가 현역 시절 출중한 선구안을 자랑한 선수긴 하나 그만큼 커비의 볼넷 획득 능력도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그리고 꼴랑 11년동안 2304안타나 쳤으니 약 20년정도 뛰었고 슬럼프가 오지 않는다고 가정했을때 4200안타나 칠 수 있었으므로 녹내장만 아니었다면 피트 로즈의 4256안타를 이겼을지도 모른다. 물론 40대 중반까지 연 평균 200안타를 꾸준히 쳐내는 건 약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니 이건 가정법에 불과하나, 그가 만 35세에도 전혀 노쇠화 기미 없이 꾸준하게 OPS+ 130 근처의 타격 성적을 유지해온 것을 감안하면 정상적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을 경우 3500안타까지는 충분히 노려볼 만했고, 조금 더 낙관적으로 보면 행크 애런의 3771안타 기록까지는 노려볼 법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