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8:28:50

마이크 그린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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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그린웰
Mike Greenwell
본명 마이클 루이스 그린웰
Michael Lewis Greenwell
생년월일 1963년 7월 18일 ([age(1963-07-18)]세)
국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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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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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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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신지 켄터키 주 루이빌
포지션 좌익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2년 드래프트 3위
소속팀 보스턴 레드삭스(1985~1996)
한신 타이거스(1997)

1. 개요2. 커리어
2.1. 보스턴 레드삭스2.2. 한신 타이거스2.3. 여담
3. 은퇴 이후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프로야구 선수.

한신 타이거즈를 넘어서 NPB 역사상 최악의 외국인 선수로 평가된다.[1]

2. 커리어

2.1. 보스턴 레드삭스

1982년 드래프트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1985년 처음으로 메이저에 콜업되어 17경기를 뛴 후, 조금씩 출전 시간을 늘려 나가더니 80년대 후반부터 포텐이 터지며 짐 라이스의 뒤를 이어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 좌익수를 맡았다. 1986년에는 뉴욕 메츠와의 1986년 월드 시리즈 출전 경력도 있었다. 보스턴이 3승 2패로 앞선 6차전에서 투수 로저 클레멘스의 대타로 나갔으나 삼진을 먹었고, 그린웰의 삼진을 기점으로 보스턴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6차전을 역전패했고, 7차전마저 역전패하며 콩라인에 그쳤다. 이는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회자되는 선수 기용이기도 하다.

아무튼 전성기에는 평균 20홈런에 가까운 수준의 일발 장타력 외에 선구안도 좋아 볼넷도 잘 골라냈으며 삼진도 잘 당하지 않는 타자였다.[2] 1988년엔 타-출-장 .325-.416-.531의 아름다운 비율 스탯과 함께 22홈런 119타점을 기록,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93타석에서 볼넷을 87개 얻어내는 동안 삼진을 38개밖에 당하지 않은 정교함을 보여주며 호세 칸세코와 MVP 대결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칸세코가 역사상 최초의 40-40 클럽 가입을 내세워 MVP를 땄고 그린웰은 MVP 투표 2위에 머물렀다.[3] MLB 올스타전에도 두 차례나 출전했던, 이름값만 놓고 보면 아시아 리그를 찾은 전 메이저리거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커리어를 지녔던 타자다.

단 그린 몬스터가 버티고 서있는 펜웨이 파크의 좌익수임을 감안해도[4] 최악의 수비력을 지녔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린웰이 보스턴에 있던 시절 댄 듀켓 단장을 보좌하던 아마추어 세이버메트리션 마이크 김블은 그린웰의 좌익수 수비력을 '재앙'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고, 일본으로 왔을 당시 한신의 주전 유격수이던 쿠지 테루요시는 "외야에서의 송구가 체인지업으로 날아왔다"고 하여 그린웰의 소녀어깨를 저렇게 표현했다.

2.2. 한신 타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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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엔 성적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고, 시즌이 끝나자 한신 타이거스가 역대 최고급 대우를 해주며 모셔 왔다. 한신 타이거스가 그를 모셔오기 위해서 투자한 금액만 연봉 3억 6천만엔. 거기에다가 오사카 시내에 고급 아파트를 2채[5]나 제공해 주기까지 하는 등 파격의 연속이었다. 한신이 뭘 해 줬는지는 일단 밑 문단에 후술하기로 하겠다. 이 때만 하더라도 오사카 및 효고현 일대 언론들은 랜디 바스의 재래다 뭐다 하며 그런 역대급 최고 용병이 한신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신나게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정작 스프링캠프 때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그는 결국 개막 엔트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개막이고 뭐고 간에 스프링캠프 때 허리 통증을 이유로 이미 미국에 돌아간 상태. 그러나 결국 4월 말에 다시 입국하여 일단은 소동이 일단락되나 싶었다. 당시 한신은 4번 타자 후보 자체가 부재해 고생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1997 시즌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한신에 오긴 커녕 이제 막 히로시마에서 주전 타자로 도약했던 시기였고, 외국인 선수들은 왔다하면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 버리든가, 설령 첫 해에 잘해도 그 다음 시즌부터 다시 부진하여 마찬가지로 돌아가버리는 게 일상다반사요,[6] 1985년 우승 당시 주전 타자들은 4번타자 같은 1번타자는 1995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백스크린 3연발 멤버 중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오카다 아키노부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 후 은퇴했던 상황이었다. 주전이었던 와다 유타카[7], 세키카와 코이치, 쿠지 테루요시[8] 이 셋은 장타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똑딱이형 선수들이었는지라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4번을 칠 형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과거 20홈런 이상 친 적이 있던 야기 히로시가 있었지만 그는 1992년 부상 이후 주전 자리를 내주고 출전 기회를 대부분 빼앗긴 건 물론이고 기량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려 결국 1996년 시즌 종료 후 방출 후보까지 오를 정도였기에[9] 4번타자를 맡을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히야마 신지로신조 츠요시 같은, 장타 포텐은 있지만 컨택이 좋지 않은 선풍기형 타자들이 4번을 번갈아가며 맡고 있었다.

그래서 1997년 5월 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 첫 출전해 결승타 포함 2안타 2타점을 적립하며 일단은 걱정을 없애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얼마 안 가 다시 생기고 만다.

5월 1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자신이 친 파울타구에 발목을 맞아 부상을 입은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야구를 더 이상 하지 말라는 의 계시라고 말하며 돌연 은퇴 선언 후 5월 16일에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도 은퇴 선언 자체는 진짜였다. 다른 리그에서 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한신에서 남긴 성적은 7경기 26타수 6안타 .231 .310 .346 0홈런 5타점[10]. 한신은 1안타당 6천만엔을 투자한 꼴이 되었다. 당연히 한신 팬들에게 그린웰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먹튀 용병이 등장할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존재가 되었다.

다만 2019년에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연봉의 40%를 구단에 돌려주었고, 계약금도 구단에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구단주 측에서 정직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그냥 가지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가 사실이라면 사람 자체는 좋은 것으로 보인다. 옵션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닌[11] 한 먹튀용병이 자기 연봉의 일부라도 돌려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3. 여담

한신은 그에게 아파트를 2채나 제공해 줬다. 원래는 아파트도 한 채만 제공해 줬으나, 그린웰이 방이 작다고 징징대는 바람에 옆 집을 매입해서 사이즈를 2배로 키우는 공사를 해줬다. 그러나 정작 그린웰이 살았던 시기는 한 달도 안 됐다. 결국 구단은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만 살라던 그린웰을 위해 멀쩡한 집을 두 채나 개조하고 그걸 원상복구하는 비용까지 써야 했다. 게다가 당시 고시엔 구장 전광판에 그린웰의 이름적을 공간이 모자라, 전광판 리뉴얼까지 하는등 손해가 어마어마하다.

그 외에도 몸값 비싼 용병이다 보니 여러 특혜라든지 서비스를 충실히 해 줬으나, 정작 그는 개막 두 달도 안돼서 먹튀가 되면서 한신을 떠나 버렸다. 심지어는 한신의 철천지 원수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들, 아니, 요미우리를 넘어 일본프로야구 12개팀 전체 팬들에게 그는 사기꾼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나중에 빡친 한신 측에서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그린웰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기도 했을 정도.

당시 한신 감독이었던 요시다 요시오"폭풍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가버린 선수"라 평했다. 그리고 한신의 전설적인 외국인 타자였던 랜디 바스는 그린웰에 대해서 "애초에 제대로 뛸 생각이 없었던 선수" 라는 혹평을 남겼다. 또한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의 증언에 따르면, 주니치에서도 그린웰 영입을 검토했으나 호시노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미국 소식통이 "그는 그저 일본에서 골프를 치고 싶을 뿐이다." 라고 평한 뒤 영입전에서 깨끗이 손을 뗐다고 한다. 또한 그린웰의 에이전트였던 조 슬로버는 굉장히 의심스런 사람이었는데, 과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메이저리그 MVP 출신 케빈 미첼을 입단시켰으나 지랄 맞은 성격으로 오 사다하루 감독을 비롯한 수뇌진과의 불화, 무릎 부상 치료를 명목으로 일삼은 무단귀국 등이 문제시되어 법적 문제까지 일으키게 했었다. 같은 시기 킨테츠 버팔로즈 또한 그린웰의 영입을 고려했으나 그린웰의 에이전트가 케빈 미첼의 에이전트였던 조 슬로버였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그린웰 영입을 포기하고 대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에서 뛰었던 필 클라크를 영입했다.[12]

그러나 후일 자발적으로 연봉을 반납한 데다가 계약금까지 반납하겠다고 할 정도로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긴 했다. 이후 자기 돈으로 가족공원도 짓는 등 지역사회에 봉사도 많이 하고 독실한 기독교도 생활을 이어간 좋은 아저씨. 한신에게만 먹튀였을 뿐.

3. 은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플로리다 주 포트 마이어스에 자기 이름을 딴 마이크 그린웰 패밀리 펀 파크라는 공원을 운영하기도 하고[13], NASCAR 경주에 출전하기도 하며 살고 있다.


[1] 공교롭게도 NPB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불리는 랜디 바스 역시 한신 소속이었다.[2] 통산 460볼넷(79 고의사구) 364삼진으로 메이저 통산 통산 BB/K가 1.26이다[3] 여기에 한이 맺혔는지, 그린웰은 칸세코의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난 이후 칸세코의 MVP 박탈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4] 펜웨이 파크는 좌측 폴대 거리가 94.5m밖에 안되지만 11m 그린몬스터라는 거대한 펜스에 맞고 튕겨져 나오는 타구를 처리하기가 까다롭다. 수비수 중에서 비교적 수비가 쉽다는 좌익수임에도 펜웨이 파크에서 만큼은 어렵다. 전체적으로 수비범위나 송구력 등의 요구치는 낮지만 판단력과 센스, 기교가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 그래서 보스턴 레드삭스는 명 좌익수(테드 윌리엄스-칼 야스트렘스키-짐 라이스)가 많기도 했지만, 일단 타 구장에 비해 좁으므로 수비범위가 극도로 좁은 선수를 세워나도 외야가 그럭저럭 돌아간단 점 때문에 매니 라미레즈나 그린웰처럼 지명타자급 수비력의 좌익수가 서는 일도 많았다.[5] 일본의 집이 작다보니 여기에 대해 불평이 심해서 구단에서 옆집도 사서 하나로 합쳐줬다.[6] 그나마 토마스 오말리 같은 예외도 있는데 이쪽은 홈런이 적다는 이유로 한신 구단에서 내쳐버리는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고 결국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가서 1995년 야쿠르트의 우승에 공헌하면서 한신이 땅을 치게 만들었다.[7] 해당 시즌에 개막전부터 연속경기안타 기록을 24경기로 갱신했다. 기존 기록은 래리 레인즈가 40여년 전에 세웠던 20경기였다.[8] 세키카와와 쿠지는 1997 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그 댓가로 건너온 선수가 타이호 야스아키야노 아키히로. 이렇게 한신에 온 포수 야노 아키히로는 포텐이 대폭발하며 주전 포수 자리에 앉았지만 팀은 다른 부분이 못나가서 4466566664의 비밀번호가 200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비밀번호를 끝낸 2003년엔 하위타선에서 팀을 견인해 리그 우승을 하고 비밀번호를 끝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타이호도 나름 준수한 활약은 했으나 해가 갈수록 성적이 급락, 2000 시즌 후 전력외 통보를 받아 한신을 떠나 주니치로 돌아가 은퇴했다. 세키카와는 주니치에서도 나름대로 준주전으로 오래 나서다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무상 트레이드 되어 초창기 암울하던 라쿠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잠시 했으며, 쿠지는 주니치로 트레이드된 뒤 이종범후쿠도메 코스케를 외야로 보낸 장본인이 되었다.[9] 당시 재취임한 요시다 요시오 덕에 방출은 면했고, 이후 대타로 각성하여 다시 부활에 성공해 맹활약하긴 했다.[10] 6안타 중 2루타는 1개, 3루타가 1개였다. 3루타를 친 뒤 대주자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감독이 직접 격려차 3루까지 나가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11] 2015년 두산에서 뛴 잭 루츠의 사례.[12] 클라크는 이적 후 20홈런/OPS +.870를 꾸준히 찍어주면서 3년 연속으로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는 등의 출중한 성적을 보여주며 터피 로즈와 함께 외국인 거포 콤비로써 활약했다.[13] 이 공원은 훗날 200만 달러 가까이 되는 돈에 팔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