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25번 | ||||
짐 고스거 (1963) | → | 토니 코니글리아로 (1964~1967, 1969~1970) | → | 켄 타툼 (1971)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번호 10번 | ||||
제이 존스톤 (1966~1970) | → | 토니 코니글리아로 (1971) | → | 제리 모세스 (1971)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번호 4번 | ||||
샌디 알로마 시니어 (1969~1971) | → | 토니 코니글리아로 (1971) | → | 켄 맥멀렌 (1972) |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25번 | ||||
올랜도 세페다 (1973) | → | 토니 코니글리아로 (1975) | → | 스티브 렌코 (1979~1980) |
앤서니 리차드 "토니" 코니글리아로 Anthony Richard "Tony" Conigliaro | |
출생 | 1945년 1월 7일 |
매사추세츠 주 리비어 | |
사망 | 1990년 2월 24일 (향년 45세) |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세인트 메리스 고등학교 |
가족 | 동생 빌리 코니글리아로 |
신체 | 190cm / 83kg |
포지션 | 우익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보스턴 레드삭스 (1964~1967, 1969~1970)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71) 보스턴 레드삭스 (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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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야구선수. 어린 나이에 뛰어난 단기 임팩트를 선사한 선수이지만, 불의의 눈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가 일찍 끝난 비운의 선수로, 인간으로써도 결코 많다고 보기 힘든 나이인 45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2. 선수 경력
1964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데뷔해 첫 타수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그 해에 0.290/0.354/0.530 24홈런 52타점을 기록했다. 8월에 팔과 발 부상을 당해 111경기밖에 나가지 못했고 32홈런에 타율 0.323을 기록했던 미네소타 트윈스의 토니 올리바에게 신인왕을 넘겨줬다. 그래도 브라이스 하퍼가 2012년 데뷔해서 20홈런을 치기 전까지 유일한 10대 20홈런 기록 보유자였다. 지금은 후안 소토까지 총 3명이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쳐서 10대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다.[1]1965년에는 32홈런으로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당시 아메리칸 리그 최연소 홈런왕이다.
1967년에는 올스타에도 나가고 아메리칸리그 최연소 100홈런의 기록도 세웠다.[2] 이때까지만 해도 워낙 어려서 데뷔했기에 부상 없이 페이스만 유지해도 500홈런과 명예의 전당은 무난해 보였다.
그해 8월 18일에 잭 해밀턴이 던진공에 왼쪽 광대뼈를 맞았고 이게 왼 눈의 시력저하로 이어졌다. 혐짤주의 맨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야구 헬멧은 말 그대로 헬멧에 가까운 물건이라 귀와 광대뼈 쪽을 보호해줄 어떤 장치도 없었다. 그가 실려나가기까지 10여분간 펜웨이 파크는 적막이 흘렀다고 한다. 당시 선수들은 호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고 회고했으며 약 90여미터에서 좌익수 수비를 보던 에인절스의 좌익수 릭 레이처트가 몸을 움찔거릴만큼 소리가 매우 컸다고 한다.
1년 넘게 쉬고 1969년 복귀해서 20홈런, 1970년 36홈런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지만[3] 줄어든 시야 탓에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1970년 11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1971년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후 선수생활에 미련이 남았던 코니글리아로는 레드삭스 소속으로 1975년에 다시 복귀했지만 21게임을 뛰는데 그쳤고 완전히 은퇴했다. 500홈런은 가볍게 넘길 것 같았던 그의 홈런은 166개가 전부였다.
3. 은퇴 이후
1982년 레드삭스 중계 팀 합류를 위한 오디션을 보고 동생인 빌리와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이후 8년여간의 투병생활 끝에 1990년 2월 24일에 만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사후 보스턴 레드삭스 측은 2007년 4월 4일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포지션이 우익수였던걸 감안, 외야 오른쪽 관중석 일부(200석)를 "코니글리아로 코너"로 명명했다.
4. 토니 코니글리아로 상
그의 이름을 딴 토니 코니글리아로 상이 있다. 그가 사망한 해인 1990년에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그의 이름을 기려 이 상을 제정했다. 기자들과 MLB 커미셔너 등의 심사를 거쳐 미국야구기자협회 보스턴 지부에서 매년 12월 혹은 다음 해 1월에 열리는 모임을 통해 코니글리아로의 가족이 직접 수상을 한다.단순히 성적이 나아진 것을 넘어서 역경을 넘은 선수들에게 수상하기에 올해의 재기상과는 다르다.
연도 | 이름 | 팀 | 비고 |
1990 | 짐 아이젠라이크 | 캔자스시티 로열스 | 뚜렛 증후군 |
1991 | 디키 톤 | 필라델피아 필리스 | 빈볼 |
1992 | 짐 애보트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선천성 오른손(수지) 부존재 |
1993 | 보 잭슨 | 시카고 화이트삭스 | 고관절 수술 |
1994 | 마크 레이터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척수성 근위축증으로 생후 9개월 아들 사망 |
1995 | 스캇 래딘스키 | 시카고 화이트삭스 | 호지킨 림프종 진단 |
1996 | 커티스 프라이드 | 몬트리올 엑스포스 | 청각장애인 |
1997 | 에릭 데이비스 | 볼티모어 오리올스 | 직장암 |
1998 | 브렛 세이버하겐 | 보스턴 레드삭스 | 심각한 어깨부상 |
1999 | 마이크 로웰 | 플로리다 말린스 | 고환암 |
2000 | 켄트 머커 | 애너하임 에인절스 | 뇌내출혈 |
토니 손더스 |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 피칭 중 어깨 골절[4] | |
2001 | 그램 로이드 | 몬트리올 엑스포스 | 크론병으로 아내 사망 |
제이슨 존슨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형 당뇨병 | |
2002 | 호세 리호 | 신시내티 레즈 | 팔꿈치 부상으로 인한 5번의 수술 |
2003 | 짐 메시어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선천성 만곡족[5] |
2004 | 드원 브레이즐턴 |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 고등학생 때 무릎 수술과 토미 존 수술 |
2005 | 애런 쿡 | 콜로라도 로키스 | 양 폐에 혈전 |
2006 | 프레디 산체스 |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 선천성 만곡족과 극도의 내번족 |
2007 | 존 레스터 | 보스턴 레드삭스 | 비호지킨 림프종 |
2008 | 로코 발델리 | 탬파베이 레이스 | 미토콘드리아 장애로 만성 근육 피로 |
2009 | 크리스 카펜터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토미 존 수술과 팔 신경문제 |
2010 | 호아킨 벤와 | 탬파베이 레이스 | 돌림근띠 근육 증후군 |
2011 | 토니 캄파나 | 시카고 컵스 | 어렸을 때 호지킨 림프종 |
2012 | R.A. 디키 | 뉴욕 메츠 | 유년기 성적학대와 선천성 오른쪽 팔꿈치 인대 부존재 |
2013 | 존 래키 | 보스턴 레드삭스 | 토미 존 수술 |
2014 | 윌슨 라모스 | 워싱턴 내셔널스 | 2011년 납치, 전방십자인대부상, 유구골 골절, 햄스트링 염좌 |
2015 | 미치 해리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해군 복무로 커리어 5년 지연 |
2016 | 얀가르비스 솔라테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시즌 중 암으로 아내 사망 |
2017 | 채드 베티스 | 콜로라도 로키스 | 고환암 |
2018 | 스티븐 피스코티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으로 어머니 사망 |
2019 | 리치 힐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팔 부상과 생후 3개월된 둘째 아들 브룩스의 사망 |
2020 | 다니엘 바드 | 콜로라도 로키스 |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으로 은퇴 후 8년만에 복귀 |
2021 | 트레이 만시니 | 볼티모어 오리올스 | 대장암 |
2022 | 호세 쿠아스 | 캔자스시티 로열스 | 메이저 데뷔까지 많은 고난 극복 |
2023 | 리암 헨드릭스 | 시카고 화이트삭스 | 비호지킨 림프종 |
2024 | 캠 부저 | 보스턴 레드삭스 | 여러 곡절을 겪고 32세의 나이에 메이저 데뷔 |
[1] 그는 매우 끼가 넘쳐서 데뷔 시즌인 1964년 시즌 후에는 RCA와 25,000$에 계약해 음반도 냈었다고 한다. 또한 여자 꼬시는데도 타고났었다고.[2] 메이저리그 기록은 멜 오트[3] 여담으로 이 해에 자신의 어깨를 맞춘 투수와 난투극을 벌였었다. 그에게 몸쪽 공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4] 이 골절로 인한 재활 도중 팔이 다시 골절되는 바람에 2000년에 26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2005년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다시 재도전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에는 콜업되지 못하고 다시 은퇴.[5] 발이 골프 클럽처럼 구부러진 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