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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800><colcolor=#000000> 로렌 공작 샤를 2세 드 로렌 Charles II de Lorraine | |||
이름 | 샤를 2세 드 로렌 (Charles II de Lorraine) | ||
출생 | 1364년 | ||
로렌 공국 | |||
사망 | 1431년 1월 25일 | ||
로렌 공국 낭시 | |||
재위기간 | 로렌 공국 공작 | ||
1390년 ~ 1431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d800><colcolor=#000000> 부모 | 아버지 장 1세 드 로렌 어머니 뷔르템부르크의 소피 | |
배우자 | 팔츠의 마르가레테 (1394년 결혼) | ||
자녀 | 이자벨, 카트린, 페리(사생아), 장(사생아), 페리(사생아), 카트린(사생아), 이자벨(사생아) | ||
형제 | 페리 1세, 이자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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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렌 공국의 공작.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에 가담하여 아르마냑파에 맞섰다.2. 생애
1364년경 로렌 공작 장 1세 드 로렌과 뷔르템베르크 백작 에버하르트 2세의 딸인 소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보데몽 백작 페리 1세, 이자벨[2]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매우 친했고, 전우로서 프랑스 왕국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또한 아버지가 뇌프 샤토 주민들과 갈등을 벌였을 때 뇌프 샤토 주민들을 지지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를 불신해, 부르고뉴 측이 오를레앙 가문에 맞서 권력 분쟁을 벌이는 걸 도왔다.1391년 제노바 공화국의 튀니스 무슬림 해적 토벌을 위한 십자군 원정에 여러 프랑스 귀족들과 함께 참여했으며, 1396년 용맹공 장과 함께 헝가리 십자군에 가담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국과 맞섰다. 1399년 튜튼 기사단에 가담한 뒤 리보니아에서 십자군 원정을 수행했다.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룩셈부르크 공국을 장악하고 이 지역에 자신의 공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바르 백작, 나무르 후작과 연합해 로렌을 침공했다. 이에 샤를은 1407년 봄 코르니쉬르모젤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고, 1407년 7월 샹파뉴 전투에서 연합군을 재차 격파했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용맹공 장의 사주를 받은 라울 당크통빌 등 암살자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부르고뉴 파의 편에 섰다. 1415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가 서로 힘을 합쳐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에 공동 대응했지만,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요청을 받았음에도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형제인 보데몽 백작 페리 1세가 프랑스군에 가담했지만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아르마냑파 지도자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을 때,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는 부르고뉴파도 프랑스 왕실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바로 사임했다.
1419년 용맹공 장이 몽뜨흐에서 아르마냑파 기사들에게 피살된 뒤, 샤를은 프랑스와 부르고뉴 사이에서 좀더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새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저지대 국가와 부르고뉴 본토를 연결하기 위해 로렌을 확보하려는 야욕을 내비치기 시작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샤를 7세를 받든 아르마냑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1420년 10월 24일에 그의 딸이자 후계자인 이자벨이 앙주의 르네와 결혼한 것은 아르마냑파의 지원을 받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결혼으로 인해 로렌 공국 후계자 지위에서 밀려난 조카 앙투안 드 보데몽이 이에 반발해 1425년부터 내전을 일으켰고, 샤를은 조카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29년 초, "어린 소녀가 프랑스를 구원할 것"이라는 오래된 예언에 심취했던 샤를은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호기심을 품어 그녀에게 안전통행증을 발급해 로렌에 직접 오게 했다. 잔 다르크는 생니콜라드포로에서 샤를과 만난 뒤 그의 방탕한 생활을 나무라면서, 정부 알리종 뒤 메이와 내보내라고 조언했다. 샤를은 잔 다르크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모험을 응원하며 말 한 필과 여비를 주었다. 1431년 1월 25일 낭시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팔츠의 마르가레테(1376 ~ 143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프레히트와 뉘른베르크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딸 엘리자베트의 딸.
- 이자벨(1400년에서 1410년 사이 ~ 1453): 로렌 여공작. 앙주의 르네의 부인으로서 앙주 공작 부인, 프로방스 백작 부인, 나폴리 왕국 왕비, 시칠리아 왕국, 아라곤 왕국의 명목상 왕비.
- 카트린(1407 ~ 1439): 바덴 변경백 자코브 1세의 부인.
- 알리종 뒤 메이(1383 ~ 1431): 생조르주 드 낭시의 신부 데멩주 콜린과 로렌 공작 궁전 근처의 마구간에서 과일과 야채를 파는 상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였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지만, 매우 아름답고 남다른 기백을 지녔다고 한다. 1419년 샤를 2세의 정부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샤를 2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리를 빌트슈타인의 페리를 로렌 공작으로 삼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1431년 1월 25일 샤를 2세가 사망할 무렵, 그녀는 메츠로 은퇴하여 생글로생 수녀원으로 은퇴해 여생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간주한 낭시 주민들이 샤를 2세가 사망하자마자 그녀를 체포한 뒤 비밀리에 살해했다.
- 페리: 빌트슈타인 영주.
- 장: 다르뉴엘 영주.
- 뤼네빌의 페리: 예루살렘의 생장 기사. 1459년 쉬그니 사령관 역임.
- 카트린: 1425년경 기록에 인용되었다.
- 이자벨: 기사 앙리 드 리오쿠르의 부인.
[1] 샤를 2세와 팔츠의 마르가레테(17세기 그림)[2] ? ~ 1410, 쿠시 영주 앙게랑 7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