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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자즈 왕국 초대 국왕 후세인 1세 | |
1910년대 사진을 컬러 복원한 이미지 | |
이름 | ٱلْحُسَيْن بِن عَلِي Hussein bin Ali al-Hashimi 후세인 빈 알리 알하시미 |
출생 | 1854년 5월 1일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931년 6월 4일 (향년 77세) |
트란스요르단 암만 | |
재위기간 | 1916년 6월 10일 ~ 1924년 10월 3일 |
자녀 | 장남 알리 빈 후세인 (1879 ~ 1935, 헤자즈)[1] 차남 압둘라 1세 (1882 ~ 1951, 요르단) 삼남 파이살 1세 (1885 ~ 1953, 이라크) 사남 자이드 빈 후세인 (1898 ~ 19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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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60대 메카 샤리프, 초대 헤자즈 왕국 국왕이자 최후의 칼리파[5]. 아랍 최고의 명문가인 하심 가문의 일원으로, 무함마드의 37대손이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근대식 교육을 받은 후 샤리프로 추대되었지만 세계 1차 대전 중인 1916년, 독립 아랍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영국측 제안 (후세인 맥마흔 서한)을 수용하여 아랍 반란 (Great Arab Revolt)을 주도하였다. 동시에 메카를 수도로 하는 히자즈 왕국을 세웠고,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 1세가 이끄는 아랍 봉기군은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지도로 히자즈를 넘어 요르단과 시리아까지 진격하였다. 후세인은 스스로 '전 아랍의 왕'을 칭하며 범아랍주의를 주장했으나,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이라크와 시리아를 분할한 상태라 그의 영토는 히자즈에 국한되었다.
이후로도 후세인은 베르사유 조약,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이주 등을 반대하며 영국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영국의 방관 하에 1924년 이븐 사우드가 이끄는 리야드 토후국의 침공을 받았고, 타이프가 함락되자 그는 장남 알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퇴위하였다. 전쟁은 지속되어 메카에 이어 1925년 12월에 마지막 거점 제다마저 함락당하며 헤자즈 왕국은 2대 만에 멸망하고, 히자즈-네지드 왕국을 거쳐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개편된다. 한편 부친과 달리 영국에 적극 협조한 차남 압둘라 1세와 삼남 파이살 1세는 1921년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군주가 되었고, 그중 전자에게로 망명한 후세인은 1931년 암만에서 눈을 감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현재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가 그의 현손자이다.
2. 생애
- 가문에 대한 자세한 배경은 메카 문서 참조
1813년, 디리야 토후국에게서 메카를 해방한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1827년, 자이디 계열 샤리프를 폐하고 아운 종파의 무함마드 이븐 압둘 무민을 샤리프로 옹립하였다. 1840년 오스만 제국이 히자즈를 수복한 후에도 아운 종파가 샤리프 직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한펴 1870년대, 근대화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히자즈 역시 빌라예트 (주)로 편성하고 총독을 제다가 아닌 메카에 두었으며 샤리프 위를 이을 자제들을 이스탄불에서 유학시켰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 무민에게는 압둘라, 후세인, 아운, 알리, 압딜라의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이 약 50년간 통치한 후, 이스탄불에서 유학하고 온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1908년 샤리프로 계승한 것이다.
2.1. 어린 시절
1854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샤리프 무함마드 이븐 압둘 무민의 차남 알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 베즘 이 지한은 체르케스계였다. 당시 일시적으로 폐위된 상태로 코스탄티니예에 머물던 샤리프 무함마드는, 1856년 복위가 허락되자 손자 후세인을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메카로 돌아갔다. 1858년 샤리프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장남 압둘라가 계승하였다. 그리고 1862년, 알리는2.2. 메카의 사리프
1916년의 샤리프 후세인
이스탄불에 있던 후세인과 알리 하이다르 중 후자가 청년 튀르크당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명망이 높던 후세인이 아미르로 임명되었다. (1908년 11월) 같은해 오스만 제국은 다마스쿠스와 메디나 간의 헤자즈 철도를 완공하여 순례의 편의성 및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다만 철도를 메카까지 연장하려는 계획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연기되었다. 중앙 정부의 방침대로 사우디 세력을 견제하는 등 그에 협조하던 샤리프 후세인은 점차 그들의 튀르크 민족주의 열풍에 경계심을 느꼈다. 오스만 의회의 일원이던 아들 압둘라의 조언대로 후세인은 튀르크 국가가 되어가는 오스만 조에서 탈피해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고, 제국의 관심이 유럽 전선에 쏠린 틈에 영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이집트와 이란 사이에 아랍인 국가 설립을 약속받은 샤리프 후세인은 스스로 히자즈의 왕이자 말리크 빌라드 알 아랍 (아랍 지역의 왕)임을 선포하며 공식적으로 오스만 조에 반기를 들었다.
2.3. 아랍 반란 (1916년)
아랍 봉기군
1916년 당시 대부분의 터키군은 히자즈 총독 갈립의 지휘 하에 고지대의 타이프에 있었고, 메카에는 오직 1천여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6월 10일 아랍 반란이 개시될 당시 대부분 수면 중이었다. 샤리프 후세인이 하심 궁전 창문에서 공중으로 총을 발사하는 것을 신호로 5천여 하심 당원들은 메카를 굽어보는 3개의 요새들과 제다 방면 교통로에 위치한 지르왈 병영의 터키군을 공격하였다. 오스만 측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봉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그 지휘관은 샤리프 후세인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후세인은 그에게 이유를 말해주고 항복을 종용했으나 거절당하였다. 6월 11일 하심 군대는 하람 사원 부근 사파 구역의 바쉬-카라콜을 장악하였다. 12일에는 총독 관저인 하미디아가 점령되었다. 사로잡힌 총독 대리는 잔여 터키 병력에게 항복을 지시했으나 거부되었고, 그 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2.3.1. 메카 장악
봉기가 시작된지 며칠 후 오스만 조정은 후세인의 경쟁자 알리 하이다르를 메카의 아미르로 선포하였다. 이에 후세인은 제다에 있는 알리 하이다르의 심복 아흐메드 엘 헤자지를 체포, 그의 집을 약탈하게 하였다. 알리 하이다르는 3백여 병력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거쳐 히자즈 철도를 따라 파크리 파샤가 지키던 메디나에 당도하였지만 1917년 봄 조정의 명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메카의 교착 상태는 수단의 영국 장군 레지날드 윈게이트 경이 제다를 통해 두 문의 대포를 이집트인 포병들과 함께 보내주며 전환점을 맞았다. 포격에 힘입어 요새의 성벽이 뚫렸고, 하심 군대가 총공격에 나섰다. 결국 7월 4일, 마지막 터키군 점유지인 지르왈 병영이 3주간의 강한 저항 끝에 항복함으로써 5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메카 지배는 종식되었다. 이로써 메카를 수도로 하는 헤자즈 왕국이 공식 수립되었고, 8월에는 타이프가 점령되었다. 1916년의 핫즈는 기존 터키인들의 수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2.4. 전후 불안
1921년, 암만에 당도한 후세인 국왕
1917년 아카바, 1918년 시리아, 마지막으로 강력히 저항하던 메디나가 종전 후인 1919년 1월 항복하며 국왕 후세인은 알레포에서 메카에 이르는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후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국가 문제를 놓고 후세인은 동맹 영국과 충돌하였고, '아랍 지역의 왕' 칭호를 두고도 네지드 토후국의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와 대립하고 있었다. 1918-19년 히자즈와 네지드 사이의 알 쿠르마 오아시스를 두고 벌어진 전쟁에서 하심 군대는 대패하였고, 와하비 군대의 히자즈 진격은 영국의 엄포로 겨우 중단되었다. 그후 1920-21년 하일의 자발 샴마르를 정복하고 1922년 메카 남쪽 아시르 지방을 정복한 압둘 아지즈는 1923년 초엽 히지즈 정복을 결심하였다. 그러던 1924년 3월 3일, 터키에서 칼리파제가 폐지되자 이틀 후 후세인은 요르단에서 칼리파를 칭하였다. 후세인과 대립하던 영국의 불간섭을 확인한 압둘 아지즈는 그해 9월 타이프 점령을 시작으로 히자즈 정복에 나섰다.
2.5. 히자즈 왕국의 멸망
1924년 9월 24일의 타이프 함락 이후 10월 6일 후세인은 유지들의 충고에 따라 메카를 떠나 제다로 피신, 아들 알리를 히자즈 국왕이자 샤리프로 선포하였다. 메카 진격을 망설이던 압둘 아지즈는 후세인의 양위 및 이후 마음을 굳혔다. 성지를 '해방'시키겠다는 종교적 열의로 무장된 이크완 부대를 앞세운 5천의 사우디 군대는 12월 5일 별 저항 없이 메카에 입성하였다. 당시 메카에는 1천의 병력과 5대의 무장 차량, 심지어 한대 뿐이긴 했지만 비행기까지 있었음에도 지도자가 없이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비대는 그대로 붕괴되었다. 사우디 군대는 키슐라 무기고를 접수하고 제다를 포위하였다. 1925년 12월, 10개월의 포위 끝에 영국의 중재로 제다마저 항복하였고 샤리프 알리는 이라크로 떠나며 헤자즈 왕국 (하심 칼리파국)은 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 압둘 아지즈는 히자즈의 왕을 칭하였고, 네지드 술탄국은 1926년 1월 히자즈-네지드 왕국으로 개편되었다.2.6. 사망
제다 함락 후 아카바에 머물던 후세인은 국경 바로 옆에 이전 군주가 있는 것을 꺼린 이븐 사우드의 요청을 받아들인 영국에 의해 키프로스로 옮겨졌다. 막내 아들 자이드 (1898년생)와 함께 몇년간 살던 후세인은 1930년에 뇌진탕으로 쓰러져 마비되었다. 영국 측의 배려로 차남 압둘라가 다스리는 요르단의 암만으로 옮겨진 후세인은 1년 후 사망하였고, 염원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산 (하람 앗 샤리프)에 매장될 수 있었다.3. 가계
자세한 내용은 하심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하심 가문의 실질적인 중시조이다.
- 1남 알리 빈 후세인 (1879 ~ 1935) 헤자즈 국왕
- 2남 압둘라 1세 (1882 ~ 1951) 요르단 국왕
- 3남 파이살 1세 (1885 ~ 1933) 이라크, 시리아 국왕
- 4남 자이드 빈 후세인 (1898 ~ 1970)
한때는 헤자즈 왕국(현 사우디아라비아 서해안 지역), 요르단 왕국, 이라크 왕국, 시리아 왕국을 모두 획득했으나 현재는 요르단 왕국만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이라크 왕조는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해도 왕실 복고론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공화 쿠데타 이후 사담 후세인의 폭정, 후세인 이후 미군정의 너무나도 한심한 통치로 공화정이 이라크 국민들의 민심을 잃었기 때문. 실제로 2003년 사담 후세인 축출 이후 복고론이 진지하게 제기된 바 있었다.
[1]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에 흡수되어 사라진 왕국이다.[2] 조카손자 파이살 2세가 총살로 사망하여 대가 끊기자 이라크 왕위 요구자를 자처했다.[3] 본명은 후세인 빈 알리이나, 그 유명한 이맘 후세인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샤리프 후세인으로 칭한다.[4] 후세인의 아랍 반란 선포 후, 오스만 조정은 그의 18촌 친척이자 경쟁자인 알리 하이다르를 메카 아미르로 추대함. 다만 개인적으로는 히자즈 국왕에서 하야하는 1924년까지 직위 지님[5] 현대에도 간혹 칼리파를 칭하는 이들도 있지만,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은 사례는 샤리프 후세인이 마지막이다. 히자즈 왕위를 계승한 장남 알리는 칼리파를 칭하지 않았다